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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과학적 이론이란 무엇인가?

온울에 2008. 5. 6. 22:12

목 차

0. 머 리 말
1. 과학주의와 현상학: Edmund Husserl
2. 논리실증주의: 경험적 객관주의
3. 진리를 향한 반증: Karl Popper
4.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철학: 객관에서 주관으로
4.1. 자기의 세계관에 맞는 이론: Stephen Toulmin
4.2. 관찰과 사실의 이론의존성: Norwood Hanson
4.3. 혁명과 패러다임의 행렬: Thomas Kuhn
4.4. 신화에서 신화에로의 행렬: Paul Feyerabend
5. 역사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과학철학: 합리적 객관주의
5.1. 이상화, 추상화, 단순화, 일반화: Dudley Shapere
5.2. 보호띠 속에서 성장하는 핵심 가설: Imre Lakatos
6.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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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회 
학술지명 영어영문학연구 
ISSN  
권 14 
호 1 
출판일 1992.  

 

 

 

과학적 이론이란 무엇인가?


문경환
4-564-9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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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머 리 말
현대의 언어이론은 대부분 과학적 방법론을 표방한다. 19세기의 歷史·比較言語學이 그러했고 금세기 초의 미국 구조주의가 그러했으며, 오늘날의 이른바 分析哲學的 언어이론, 그리고 Chomsky의 生成文法論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언어학의 과학지향적 성향은 간혹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오기도 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언어이론이 과학적 방법론을 모토로 하면서 언어를 마치 기계조작하듯 다루어 결과적으로 이를 무미건조하고 비인간적인 사물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더 넓게 이른바 '과학주의'(scientism) 자체에 대한 비판에 관련된 사항이다. 특히 現象學은 과학주의 및 이에 연관된 '과학지향'의 학문들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 일부 인문학자나 사회학자들은 '과학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거의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이 단어에 대한 거부가 일종의 유행같이 느껴질 정도이다. 심지어 필자는 자연과학도를 '단세포 동물'에 비유하는 문학지망생들까지 있음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간간히 있다.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과학이 철학적 문제들을 배제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형이상학(metaphysics), 인식론(epistemology), 논리학(logic), 윤리학(ethic) 그리고 (정의하기에 따라서는) 미학(aesthetics)을 두루 포괄한다. 간단히 말해 형이상학은 우주의 본질과 삼라만상의 원인에 관한 사색이고, 인식론은 인간이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지식의 속성은 무엇인가에 관한 탐구요, 윤리학은 삶과 학문이론에 대한 가치판단의 체계이며, 논리학은 추론의 법칙 즉 사고 방식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다. 철학자들이 과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 이는 주로 윤리학의 성격을 띤다. 과학이 윤리(ethos)의 문제를 생각치 않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 내는 업적 바로 그로 인해 인간이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못지 않게, 과학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미학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과학-혹은 과학자들-은 사물의 기계적 속성을 탐구하는 데에만 골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과학자들은 에토스의 문제를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원자핵 구조의 연구에 몰두하는 핵물리학자가 동시에 핵무기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Einstein은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뿐이다. 13세기의 Roger Bacon은 그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많은 것들-예컨대 화약과 독가스의 제조법 둥-을 부도덕한 문외한들이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암호의 형태로 매장시키는 한편 그의 과학적 발견들이 건설적으로 이용되기 위해 "평화의 원리"를 정립하기도 했다. 인간을 하등동물의 후예로 낙인찍었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 온 Darwin의 適者生存의 개념도 실상은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의 정신과 윤리관의 결실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여전히 동물의 무리로 분류되지만, 인간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동물이므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1)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진화론과 (참조론을 절대시하는) 종교는 사랑이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인간사회의 동물적 폭력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最適者'가 뭇 형태의 동물적 투쟁과 거친 자연환경을 헤치고 살아남을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Darwin이 남북전쟁 20년 전에 이미 노예제도를 증오하는 그의 주장을 미국 내의 노예제도 폐지론자 이상으로 강력하게 표현한 데에는 이러한 윤리관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학에 관해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은 위대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과학의 예술성과 예술의 과학성을 구태여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Einstein은 항상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 속에서 이지적인 어떤 공상의 세계를 발견하곤 했다. 그의 '大統一理論'도 마치 음악가가 소나타의 형식을 분석하듯이 과학자의 눈으로 별들의 운행 양식을 분석하려는 시도였다. 어떻게 각 부분들이 상호연결되어 전체라는 통일체를 이루는가?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실재로 바이얼린의 명연주자였다. ) Galileo또한 음악과 문학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스스로도 루트의 연주자로서 시 낭송, 소야곡 등을 즐겼고, (비록 짜임새는 얼었다 하지만) 희곡을 직접 쓰기도 하고 출연한 적도 있다 한다. 그러한 그가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발견한 것이 고작 차가운 빛을 내는 몇몇의 물체들 만이었을 리는 없다. 거기서 그가 더 유심히 본 것은 우주의 신비로운 형이상학이요 자연의 수학과 기하학에 숨어 있는 미학이었을 것이다. Newton또 한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사색가요 (실제로 시를 쓰기도 한) 시인이었다. 그는 냉랭한 관찰자의 방법이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창작자의 방법으로 과학적 발견에 이르렀다. 19세기 초 불세출의 박물학자 Alexander von Humboldt가 문학계와 정치계를 위시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명망이 높았음도 우리는 알고 있거니와, 그가 오랜 동안 걸쳐 쓴 『우주』(Kosmos)는 한 편의 방대한 서사시였다. 마치 시력을 잃은 말년의 Milton이 口述로 쓴 『잃어버린 낙원』 (Paradise Lost)처럼2),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황혼기의 한 과학자가 시인의 감성과 기량으로 쓴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Goethe도 그가 집필하는 내용의 놀라운 다양성과 표현력에 더할 나위 없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Darwin은 少時적에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음악에 흥미를 잃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나,과학을 하는 가운데 이들의 전혀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쓸 때에는 "가능한 한 항상 짤막한 고대 앵글로색슨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나의 황금률이다"라고 말하면서 문체를 유려하고 쉽게 다듬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8년에 걸쳐 쓴 『비글호의 항해』(Voyage of the Beagle)는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탐험 이야기같이 로맨틱하게 읽을 수 있는 과학서적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미학을 어떤 정리되지 않은 (혹은 정리될 수 없는)막연하고도 애매한 관념에만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Euclid의 삼각형과 원이 "마치 바다의 요정과도 같은 달콤한 유혹의 손길로" Archimedes를 도취시켰듯이, "균질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꽃들의 색깔은 마치 定型時의 운율과도 같이 Mendel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막힌 과학은 기막힌 미학인 법이다. 세포분열의 오묘함이 '단세포 동물'적인 관찰에 의해 발견된 것은 아니다.

물론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과학 자체의 본질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실 '과학'이라는 용어 자체도 너무 포괄적이다. 현상학이 과학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입장에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사실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현상학도 그 나름의 과학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세기 현상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Edmund Husserl이 행한 비판의 표적은 원래 오히려 철학의 비과학성에 있었으며, 그가 주창한 "嚴密學"(strenge Wissenschaft)은 차라리 자연과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상 "Wissenschaft"란 우리말의 '과학'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 과학에도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윤리학적이고 미학적인 성격의 문제가 다양하게 개입될 수 있는 것이니만큼, 과학이라는 용어를 어떤 통일된 학문의 이름쫌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글의 목적이 과학의 본질을 깊이있게 논의하려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은 지면은 그러한 주제를 논하기에 턱없이 모자라며, 또 필자는 그럴 만큼의 능력도 없다. 다만, 과학적 이론에 대한 몇 가지 해석법을 개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살펴보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리고 이 글이 현대 언어이론-특히 Chomsky식 생성문법론-의 과학철학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소박한 바램이다. 필자의 다른 글3)에서 기술된 미국 구조주의언어학으로부터 Chomsky 언어학에로의 변혁은 이 글에서 논급될 논리실증주의로부터 세계관철학에로의 방향 전환과 그 시기와 내용에 있어서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 그리고 Chomsky언어학의 최근 이론체계는 역사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최근의 과학 철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언어이론이 과학을 표방하는 한 결국 당대의

과학철학 사조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즉,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방금의 현상이 기실 놀라운 일은 못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논급되는 기본 개념들은 Chomsky가 자신의 언어철학 내지 언어이론에 관한 立論에서 사용하는 용어들과 이들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1. 과학주의와 현상학: Edmund Husserl
과학적 인식의 본성에 관한 진지하고도 체계적인 연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서 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 자체의 역사를 이렇게 짧게 보아서는 물론 안될 것이다. 가깝게는 가령 16세기 초 천동설을 뒤엎은 Copernicus의 지동설도 과학주의의 전형적 예라 할 수 있다. 신비주의에 빠져 있던 당시의 Ptolemaios파 천문학자들은, 가령 어떤 별이나 행성이 그들이 상정한 천체의 정상 궤도로부터 벗어난 것같이 보이면 이를 "살아 있는 영혼의 한 부분이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의지"라 설명할 정도였다. 그들은 Aristoteles로부터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관념을 물려받아 이를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다"로 換言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이 우주를 인간 본위로 만들었다는 당시의 종교관과 맞물려 움직일 수 없는 믿음으로 굳어져 있었다. Copernicus도 그의 생 후반을 "신의 말씀"을 전파하고 "신의 작품"을 내보이는 일에 바칠 정도로 종교적 信心이 두터운 사람이었지만, "미친 성직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당시 천문학자들의 '움직이는 태양'을 멈추게 하고 '요지부동의 땅'을 움직이게 하고야 말았다. 철저한 과학주의에 의한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과학주의는 그릇된 통념이나 방만한 수사학 내지 모호한 형이상학의 껍질을 벗기고 사물의 한 가운데로 파고들려는 노력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성립된다는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 속에 Newton은 자연과학과 철학-특히 형이상학-의 내적 연관을 모색했고4), 이 노력은 Kant에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자연 과학이 혁혁한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에도 Newton이나 Kant가 시도한 과학과 철학의 만남에 대한 문제는 과학자들에게도 철학자들에게도 이렇다 할 흥미거리가 못되었다. 그러다가 막상 당 세기 말에 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되고부터는 이 문제가 Newton이나 Kant식의 개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이 대두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과학적 인식의 본성에 관한 심각한 반성이 과학자들의 내부에서 일게된 것이다. 그들은 "철학에의 침입"이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로 과학의 철학적-형이상학적 내지 인식론적-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쳐 나아갔다. 1920년대 말과 1930년 대 초에 결쳐서는 논리학에 대한 수학의 '침입'도 뚜렸해지기 시작했고, "과학의 철학", "과학적 철학", "과학의 형이상학", "물리학의 인식론" 등의 용어가 친숙한 개념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종래의 뛰어난 과학자들 중에는 철학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이 보여왔던 비과학성 때문이었다. 철학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에 치우치는 나머지 모든 事象을 단숨에 사변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했던 것이다. 위에 언급된 Husserl은 학문 이론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명 시화하고 정밀화하기 위한 순수논리학을 주창하였다. 事象에 대한 '記述'은 분석적인 성격을, 그리고 '설명'은 종합적인 성격을 띠는데, 철학은 후자로 단번에 뛰어들기 때문에 아직 분석의 방법마저 마련되지 않은 여러 종류의 불분명한 개념들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는 이 점에 관련하여 언어 의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 실행했다. 종전의-특히 Kant계통의-철학에 있어서는 모든 과학은 '인식'에 의해 서로 연관된다는 생각이었으나, Husserl식의 과학철학에 있어서는 '언어'가 과학의 통일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확립된 것이 記號學(semiotics)-혹은 기호논리학-이며, 기호학의 출현은 초기 과학철학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Husserl의 과학 철학은 후술할 Russell식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과도 맥을 같이 한다.

물론 Husserl의 과학철학이 Kant의 과학철학과 이렇듯 선명히 대조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중에 가서 그는 위에 말한 記述現象學으로부터 先驗現象學으로 진로를 바꾸어 Kant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Kant는 일찌기 경험적으로 관찰가능한 현상들과 선험적 본질 즉 "物自體"(Ding an sich)를 구별하였다 후자는 '現象될 성질의 것', 다시말해 자신은 現象되지 않으면서 뭇 현상과 現象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의 실체로, 이는 그의 또하나의 중심 개념인 純粹理性과 맥을 같이 하는 추상적 개념이다.5) 그리고 이 物自體를 탐구하는 경우 모든 과학은 서로 연관된다는 것이 Kant의 생각이었다. 그는 현상학을 物自體에 관한 연구가 아니고 경험적 현상에 관한 연구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는 바, 초기의 Husserl은 Kant의 이러한 견해에 반기를 들고 "事象 그 자체"를 모토로 하는 현상학을 주창한 셈이다. 즉 物自體라는 추상체보다는 언어에 기초한 순수논리학을 통해 과학의 통일성을 기하려 한 것이 초기 Husserl의 과학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기에는 순수논리학의 '선험성' 즉 순수의식의 본질을 규명하는 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을 강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Husserl은 또한 세계를 과학자들에 의해 그려 넣어지는-즉 피동적이기만 한-백지상태(tabula rasa)가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는 "생활세계"(Lebenswelt)로 보았다. 여기서 생활세계란 일상생활의 경험적 세계를 뜻하는 간단한 개념이지만, 이의 철학적 含意는 의미심장하다. 생활세계의 근본적 측면들은 과학에서도 근본적이며, 따라서 이들은 동등한 관계에 있다. 모든 지식 내지 인식은 상식적이고 자연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여러 단계의 환원(reduction)을 통해 엄밀하게 진행되는데, 이 환원의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종종 과학적 태도란 우리가 생활세계에서 취하고 있는 자연적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Husserl은 수학자나 과학자 흑은 철학자들에게,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현상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에서 보여지는 법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Lebenswelt"는 후술 할 "Weltanschauung"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유리한 입지를 스스로 의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물의 참된 본질로 향할 수 있으며 그 懷疑 방법은 결국 생활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의 이러한 회의론은 합리 주의 철학자 Descartes의 회의론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경험과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다. (또한 그의 "생활세계"는 후에 인간학적·존재론적 개념으로 해석되면서 Heidegger나 Sartre등의 存在哲學 속에 계승되기에 이른다. )

한마디로 Husserl은 "事象 그 자체"의 기술을 중시하는 기술현상학으로부터 경험적 관찰을 초월하는 선험현상학으로 전향한 것이다. 이제 그는 한 대상으로부터 모든 경험적 요소들을 제거한 다음, 그 대상을 그것의 가능성들-말하자면 Kant의 物自體에 해당하는 것-에 비추어 탐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탐구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추상체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사실'(facts)가 아니라 목하 대상의 근원을 이루는 '본질'인 것이다. 위에 '현상학은 과학주의를 거부한다'는 표현이 사용되었거니와, 현상학이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경험적으로 관찰가능한 현상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유형의 과학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Husserl의 초기 과학철학과 후기의 그것을 종합한 개념으로서의 현상학은 '철학의 비과학성'과 '과학의 비철학성'을 동시에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Husserl이 처음에는 심리주의를 배격하고 순수논리학에 입각한 엄밀학을 강조하다가 나중에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을 강조하게 된 것은,후일 과학 철학사에서 보게 되는 논리실증주의로부터 세계관철학에로의 轉流를 연상케 한다.6) 또 한편으로 볼 때 그는 Hegel식의 형이상학 위주의 철학과 논리 실증주의 식의 객관주의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려 한 셈이기도 하다.

2. 논리실증주의: 경험적 객관주의
논리실증주의-혹은 '논리경험주의'-는 反형이상학 운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소위 엔텔레키(Entelechy)라든가 절대자(the Absolute)같은 추상체에 의존하여 현실을 설명하려는 Hegel내지 新헤겔학파 철학자들에 대해 반기를 들며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反형이상학 철학의 태도는 좀 더 일반적인 성격의 몇몇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생겨난 파생적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논리실증주의는 1920년대 말경 Moritz Schlick의 비엔나학단(Vienna Circle)과 Reichenbach의 베를린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일계' 운동이다.7)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과학계는 대략 기계적유물론(mechanistic materialism), 新칸트 철학, Mach의 新실증주의 등, 세 가지의 주류 철학파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1905년에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그후 얼마 안있어 量子論이 활기를 띠고 있었으나, 당대의 독일 과학계는 일반적으로 이 두 파의 이론에 대해 공히 적대적이었다. 이에는 정치·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나치의 활동이 본격화된 당시의 독일에서 이 새로운 이론들은 反유태인 운동의 표적이 되어 "유태계 과학"의 化身으로 매도된 것이다.

그러나 물론 학문적 이유도 있었으니, 이 두 과학이론은 上記의 세 철학적 입장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 이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문제의 세 철학적 입장을 포기해야 하고, 반대로 후자를 견지하기에는 목하 두 과학이론의 학문적 저력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었다. 요컨대 철학의 앞에 놓인 딜레마요 철학이 직면한 위기였던 셈이다.

이 딜레마는 곧 과학철학상의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즉 '어떤 힘있고 의미있는 과학이론이 생겨나 이것이 기존의 철학과 충돌하는 경우를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바꿔말해 '과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크게 두 가지로 모색되었다. 그 하나는 목하 물리학이론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기계적유물론을 압도하고 있던) 新칸트 철학을 수정하는 것이요,또 하나는 (당시에 새로이 부상하기 시작하고 있던) Mach의 新실증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두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비엔나학단과 베를린학파의 과학자 및 철학자들-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Mach식 실증주의가 과학 이론의 記述에 數學의 개입을 거부한 점을 문제시하였다. 논리실증주의자들 중 많은 사람이 수학자들이었던 점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수학자와 몇몇 철학자들은 Frege, Cantor, Russell 등이 최근에 이루어 놓은 수학적 업적-특히 Whitehead와 Russell의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oa)-에 매료되어 있었다. 『수학원리』의 기본 개념은 수학의 기초가 논리학에 있다는 것으로, 이는 수학적으로 기술되는 과학법칙도 논리학적 어휘로 환언될 수 있고 따라서 과학 또한 결국 수리논리적으로 행해질 수 있으리라는 인식을 배태시켰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것이 논리 실증주의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이른바 "표준학설" (Received View)이며, 표준학설의 골자는 과학적 이론은 수리논리로 公理化(axiomatize)되어야 한다는 것이다.8)

논리적 공리화을 위한 어휘는 (i) 수리논리적 어휘, (ii) 이론적 어휘, (iii) 관찰적 어휘의 세 범주로 나뉜다. 이론적 어휘는 현상적 기술(phenomenal description)-즉 관찰적 어휘만으로 구성된 기술-을 축약한 것 이상이어서는 안되는 바, 이는 "일치의 규칙"(correspondence rule)이라 불리운다. 즉 과학적 이론의 공리화에 있어서 이론적 명제는 관찰적 명제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 관찰에 근거한 일차적 기술로부터 귀납적으로 도달된 일반법칙(generalization)이 곧 이론이라는-더 쉽게 말해 관찰된 결과를 총정리해 놓은 것이 이론이라는-논리실증주의식 귀납주의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좋은 예이다.

이렇듯 논리실증주의는 과학의 명제를 이른바 프로토콜(protocol) 명제--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관찰 내지 知覺의 결과를 수리논리적으로 定式化하여 경험적 확증(Verification)의 기본으로 삼은 명제9)-에 귀착시키려는 시도이며, 나아가 모든 과학이론을 프로토콜 명제로 환원시켜 과학의 통일을 도모하는 '통일과학'의 운동이었다. 위에 언급된 反형이상학의 태도는 이로부터 파생된 결과인 것이다. 실상 이러한 점에서 논리실증주의는 통일과학 운동일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 통일 운동'이기도 했다.

프로토콜 명제를 철학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데에는 (초기) Wittgenstein의 영향이 컸다. 그는 문장의 논리형태-위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프로토콜 명제'-를 표현함에 있어 일상언어가 보이는 결함을 지적하고10), 문장의 논리형태는 일련의 수리논리적 單素(simples)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 이제 모든 철학적 명제는 경험적으로 '확증'(verify)될 수 있는 프로토콜 언어, 즉 '현상적 언어 ' (phenomenal language)로 표현되어야 했으며, 직접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지식은 그 지식을 기술하는 이론적 언어가 확증가능(verifiable)할 때에만 인정될 수 있었다. 확증가능치 못한 일체의 이론적 어휘는 '형이상학적 넌센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확증 방법이 곧 의미이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교리를 요약하고 있거니와, 이 교리가 바로 확증의미론(verification theory of meaning)-혹은 줄여서 확증론(Verificationism)-인 것이다.12)

이와같이 논리실증주의의 기본 목표는 경험론적 토대 위에서 과학과 철학을 수리논리학적으로 재정의하려는 데에 있었다. 종래의 경험론은 경험론으로서의 일관성은 일단 갖추고 있었으나, 논리학이나 수학처럼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학문 성립에는 근거를 제공할 힘이 업었다. 이는 경험론이 그 성격상 (확실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는) 연역법보다는 (개연적이고 확률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는) 귀납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칸트 철학과 같은 悟性論의 입장에서 논리학이나 수학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론의 입장에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실증주의자들이 시도한 것은 결국 경험론의 입장을 버리지 않고서 논리학과 수학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던 셈이다. 일반적으로 '논리적 추론'이라 하면 연역적 추리을 뜻함을 생각해 볼 때13), 귀납주의 성향의 경험론과 연역체계로서의 기호논리학이 만나 생겨난 논리실증주의는 꽤나 묘한 복합체인 셈이다.

그런데 이 복합적 성격에 연결시켜 주목할 만한 몇가지 사항이 있다. 우선 논리실증주의의 경험론적 성향이 과학의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떠한 역사적 해석을 내리는가 하는 논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흔히 과학의 발전과정을 인간의 언어습득 과정에 견주어 추론하곤 한다. 어린이가 우선 직접 경험을 통해 관찰적 어휘를 습득한 후 성장과정에서 점차로 개념정의를 통해 非관찰적 어휘를 축적해 나아가듯이, 과학도 초기에는 관찰적 용어로 형식화된 경험적 일반론(generalization)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차후 발전과정에서 개념정의에 의한 이론적 용어가 도입되고 이들 이론적 용어에 의해 이론적 법칙-즉 이론적 일반론-이 형식화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개별적 사실들로부터 출발하여 이론적 일반론에 도달하는 Bacon식 上向(upward)과정이 과학의 발전과정이라는 뜻이다.14)

과학발전에 관한 이러한 귀납주의적 견해는 '환원(reduction)에 의한 이론발전' 테제-줄여서 '환원론'(reductionism)이라 부르자-로 정립되었는 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이론이 경험적 검증(test)에 놓여 d충분히 다양한 종류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면 그 이론의 타당성은 확인(confirm)된다. 그러나 실상 과학의 역사를 보면, 한때 타당성이 확인된 적이 있는 이론이 나중에 가서는 다른 이론에 의해 대치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발전이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i) 어떤 이론의 타당성이 널리 인정 받았다 하더라도, 기술이나 실험방법의 혁신에 의해 새로이 발견된 사항에 대해 그 이론이 올바른 예측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ii) 이런 경우 그 이론의 타당성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이론의 적용 영역이 확대될 수 있는 방안, 바꿔 말해 그 이론에 목하의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도입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된다. (iii) 나름대로 타당성은 확인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다른 여러 이론들이 점차 더 포괄적인 하나의 이론에 흡수-즉 '환원'-된다.

환원론에 의하면 한 이론의 타당성이 일단 확인된 후 나중에 가서 부정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주어진 문제영역 D에서 타당성이 확인된 하나의 이론 Ti를 확대된 영역 D′에서 검증하고 있다 하자. 이때 Ti가 잘못된 예측을 하더라도 타당성 자체에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D′은 이미 D와 다르므로 Ti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기술과 방법이 필요한데, 이 새로운 기술과 방법이 Ti에 도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위의 (i) 및 (ii)사항의 반복이다. ) 이는 Ti를 Ti'으로 대치함을 의미하므로, 후자에 대해 행해지는 검증에 의해 T칠 타당성이 부정될 수는 없다. 또한 Ti′은 이미 D′에서 올바른 예측을 할 수 있도록 조정된 확대이론이므로 정의상 타당성이 확인되어 있는 상태이다. Ti′가 또다른 확대 영역 D″에서의 검증을 거치는 경우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의 설명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잘못된 예측이 나오는 경우, Ti′가Ti″로 대치되는 작업이 계속 되는 것 이다.

일견 궤변같아 보이지만 이것이 환원론의 근본 개념이다.15) 일단 타당성이 확인된 이론은 차후에 버려짐이 얼이 더 포괄적인 이론의 부분을 이루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점증적(cumulative)' 발전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또한 도구론(instrumentalism)의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이론은 반드시 실재적 존재를 전제로 하여 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관찰가능한 현상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출하여 세계에 대한 예측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관찰불가능한 추상체를 일체 인정치 않는 데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헤겔식의 철학이 우주의 뭇 사물과 현상을 지배하면서도 과학의 방법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그 어떤 추상적 힘을 설정하는 데에 비해, 이 세계에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虛想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실증주의이다. 이처럼, 과학의 힘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치 않는다는 전제하에, 과학의 힘으로 '실증'될 수 있다는 긍정적(positive)주장-엄밀히 말하면 순환론적 주장-을 (논리학적 입지에서) 한다는 뜻에서 논리"실증"주의요 logical "positivism"이다.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적이고 주관적인 관념을 축출하고 과학의 객관성, 명시성, 엄밀성을 확립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로지 관찰가능한 것만을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과학의 시야를 스스로 좁혀 놓았다는 비판도 빼어놓을 수는 없다. Einstein이 Karl Popper에게 보낸 한 편지의 다음 대목은 이 점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6)

Altogether I really do not at all like the now fashionable "positivistic" tendency of clinging to what is observable. I regard it as trivial that one cannot in the range of atomic magnitude, make predictions with any desired degree of precision and I think (like you, by the way) that theory cannot be fabricated out of the results of observation, but that it can only be invented.

3. 진리를 향한 반증: Karl Popper
과학철학의 흐름을 논하면서 아마도 Popper를 때어 놓을 수는 업을 것이다. 그는 논리실증주의와 긴밀한 맥을 유지하는 면이 없지 않았고 또 혹자는 실제로 그를 논리실증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17) 그러나 사실 그는 비엔나 학단 시절부터 논리실증주의의 여러 학설에 대치되는 과학철학을 표명하였으며, 또한 이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일관한 편이다. 그가 처음부터 특히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확증론(verification theory)이었다. 과학적 이론이란 관찰가능한 증거의 累積에 의해 확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확증론에 대한 비판은 귀납주의에 대한 비판과 직결된다.18) 과학과 형이상학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에 관한 한 Popper도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있었으나, 그 구별의 기준이 귀납법에 의해 마련된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했다. 확실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는 연역법과는 달리, 귀납법은 단지 개연적이고 확률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납적 방법으로 도달된 결론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며, 그러한 방법에 입각한 확증론으로는 타당한 이론이 거부되거나 타당치 못한 이론이 그럴듯하게 보일 개연성을 배제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귀납법은 과학적 이론의 속성과 성장에 관한 논리로 성립될 수 없다는 요지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나 실험실에서 귀납법이 주는 利點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온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예측을 하는데, 그 예측은 귀납법에 의한 것이다 먹구름이 끼면 대개 소나기가 온다는 사실을 관찰한 우리이므로 아침에 먹구름이 긴 것을 보면 우산을 들고 출근하게 된다. 실험실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례들에 입각해 새로운 사실들이 도출된다. 따라서 자연현상에서 因果關係를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귀납법이 곧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Popper는 Hume에 의해 지적된 "논리적 문제"를 주지시킨다. 예컨대 存在限量化(existential quantification)가 全稱限量化(universal quantification)로 확대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쉽게 말해 '어떤'의 명제가 '모든'의 명제로 바길 때 진리치가 보존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가령 '동물은 새끼를 낳는다' 라는 명제와 '어떤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는다'라는 명제를 비교해 보자. 우리는 세상지식에 비추어-즉 관찰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후자가 참임을 알고 있다. (실상 여러번에 걸친 관찰에 의해 누적된 지식으로 '대개의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는다'라는 명제도 참임을 알고 있다. ) 그런데 전자의 명제도 진리인가? 그렇지 않다. 오리너구리는 포유동물이면서도 알을 낳기 때문이다. 요컨대 귀납법에 의한 '어떤'에서 '모든' 에로의 移行은 眞理保存的(truth-preserving)이 아닌 것이다.

혹자는 이 지식 또한 관찰에 의한 것이므로 결국 주어진 명제의 진리치는 관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논점과 관계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제의 진리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명제에 도달하는 전략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모든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는다'라는 귀납적 결론이 진리가 아닌 것은-즉 거기에 예외가 있는 것은-우연적인 것이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실상 그 예외로 오리너구리 하나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동물이 예외로 나타날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고 해야 옳다. 이와 같이 '몇가지'-흑은 다수의-확인된 사실에서 '모든' 경우를 外揷하는 위험이 도사리고있다. 오늘 아침에 먹구름이 심하게 떠 있으므로 소나기가 쏟아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유용한 추측이지만, 과학적 이론이 이러한 확률적 통계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 결국 귀납적 방법은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이론이 미래에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보증을 해주지는 못하며, 따라서 귀납주의에 입각한 확증론은 그 근본부터 방향이 잘못 잡혀 있다는 것이 Popper의 논지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귀납법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 실험적 결과에서 성공적이었음이 확증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셈이다.

Popper는 현대과학의 특징이 가설의 설정을 통한 연역적 방법론에 있다고 지적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연역법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Popper의 논지는 아니다. 과학적 방법은 연역적 추리를 위한 수학과 논리 뿐 아니라 통계와 확률의 수학도 필요로 할 것이다. 비판의 화살은 논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실증주의가 오로지 축적된 관찰적 증거를 과학적 이론의 확증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표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성격상 연역주의가 적합할 논리실증주의가 귀납주의를 택하고 있는 데에서 생겨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Popper는 또한 과학적 이론이 인위적으로 구성된 논리적 계산법에 의해 분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도 지적했다.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관한 연구가 인공언어(artificial language) 내지는 인공언어에 의해 형식화된 기호논리의 연구로 환원될 수는 없음을 설파한 것이다. 인공언어나 기호논리가 과학철학상의 몇몇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러한 방법에는 본질적으로 說明力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관건으로 되는 이론관에서라면 그 방법의 한계는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언어에 입각한 접근방법에 대한 비판은 도구론에 대한 비판과 직결된다. 이론은 단지 기존의 현상으로부터 앞으로의 현상을 도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론을 검증하는 것은 계산 규칙(computational rules)을 시험해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론의 성격 내지 적용 범위를 논의할 때 생기는 문제는 계산 규칙을 적용할 때에 생기는 문제와 동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계산 규칙이 그 자체 내에서의 일관성과 및 정확성만 갖추면 그것으로 족한 데에 비해, 과하지 인론은 그 계산 규칙의 존재이유를 밝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확증된 사례로부터 일반화를 도출해 내는 작업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론은 관찰에 의한 발견물이 아니라 발견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론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며, 세계를 직접 보기 위해 이론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우리는 Popper의 과학철학과 후술할 세계관적 과학철학 사이의 공통점을 볼 수 있다. )

Popper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참다운 이론이 발견되는 과정은 "推測"(conjectures)과 "論駁"(refutations)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Theories are our own inventions, our own ideas; they are not forced upon us, but are self-made instruments of thought.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17) They are serious attempts to discover the truth … even though we do not know, and may perhaps never know, whether it is true or not. (같은 책, 115) I think that we shall have to get accustomed to the idea that we must not look upon science as a 'body of knowledge', but rather as a system o( hypotheses; that is to say, as a system of guesses or anticipations which in principle cannot be justified, but with which we work as long as they stand up to tests, and of which we are never justified in saying that we blow that they are 'true' or 'more or less certain' or even 'probable'.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p.317)

이론은 철저한 검증에 처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는 그의 견해, 즉 반증가능(falsifiable)한 이론만이 과학적 이론이라는 견해가 바로 그의 유명한 '반증론' (falsificationism)이다. 과학은 예측의 확증이 아니라 예측의 반증을 추구하는 것이며, 주어진 예측이 반박될 수 있는 기준을 스스로 갖춘 이론만이 과학적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사는 확증된 일반화가 누적되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반증되지 않은 가설들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일견 Popper의 반증론은 도구론을 배격하고 실재론을 지향하는 그의 입장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론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든가, 하나의 이론체계에 대해 진실성 여부나 어느 정도의 확실성 여부를 운위해서도 안된다든가, 나아가 과학은 지식의 체계가 아니고 단순히 가설의 체계라고 하는 그의 견해는 실재론보다는 도구론에 가까와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사물의 본질(essence)이라든가 본질적 성질, 즉 표면적 현상 뒤에 있는 추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근본적 목적은 아니라고 말한다(§3:5). 그러한 존재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못될 딸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방식은 이론의존적(theory-dependent)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실재적 존재를 인정치 않고 '이론에 의해 예측되는 것이 곧 실재'라고 주장했던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사물의 존재방식이 이론의존적이라 함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찰방법이 이론의존적이라는 뜻으로, 이론이 관찰에 의해 도출된다는 논리실증주의식 이론관과는 정반대의 명제를 담고 있다. 물론 실재론을 표방하는 Popper가 "사물의 본질을 믿는 것이 이론 전개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표현상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론이 "진실을 발견하려는 진지한 시도"라고 할 때의 "진실"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문제의 표현이 주장하려는 핵심은, 첫째 섣불리 개념화된 "사물의 본질"을 전제로 하는 이론은 그 이론에 대해 제기되는 유익한 의문들을 막아버리는 성향이 있으며, 둘째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만) 설사 우리가 요행히 사물의 본질을 기술하는 이론에 도달했다 치더라도 그 이론이 정말로 그러한 이론인지 확신할 구체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반증가능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이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유일한 판단기준이라는 뜻이다. 그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But some of these theories of ours can clash with reality; and when they do, we know that there is a reality; that there is something to remind us of the fact that our ideas may be mistaken. And this is why the realist is right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17)

즉 비록 가설적 이고 추측적인 것이 이론이라 하더라도, 이론은 실재적인 그 무엇을 기술하려는 목적을 가져야 하며, 또한 그러한 이론이 반증될 수 있다 함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이론과 실재의 접촉이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형이상학과 구별되는 바, 전자만이 반증의 기준을 내포한 이론에 가치를 두고 그 기준이 시험될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틀릴 가능성이 많은 이론이 과학적 이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반증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바꿔말해 어떤 경우에 이론이 "반증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Popper의 技術的 정의를 소개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생략키로 하고, 몇 가지 사항만을 비공식적으로 언급키로 한다. 어떤 이론이 반증가능하다 함은 우선 그 이론이 명시적 어휘로 구성된 이론임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한 이론체계는 그 모호성 때문에 반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휘의 명시성은 유독 반증론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실증주의의 확증론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반증론에서의 명시성은 "연역적 법칙론"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논리적 절차에 근거해 정의된다. 고전적 삼단논법과 근본적으로 같은 성격을 띤 이 법칙론은 법칙에 관한 정의도 포함하며 (그 때문에 "법칙론"이지만), 그럼으로써 과학적 설명이 어떻게 논리적 설명으로 성립되는가를 규정한다. 과학에서 사용되는 技術的 언어가 이론의존적이라고 해서 과학의 용어가 각각의 해당 이론의 틀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용어가 여러 이론에서 사용될 수 있고-즉 '중립적 언어'가 있을 수 있고-또 동일한 개념의 용어들이 서로 다른 이론으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론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며 또 검증에 의해 반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증가능성의 기준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경험적 검증을 견뎌내기 위해 필요한, 즉 정확한 예측을 논리적으로 함축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 장치들-예를 들면 補助假說의 수, 형식화된 법칙의 표현력(expressive Bower), 등-이 최소화된 이론이 최선의 이론이라는 개념이다. 주어진 이론에 대한 반례(counterevidence)가 나타날 때 마다 보조가설의 수를 조정하거나 설정된 법칙에 임기응변적 조건(ad hoc stipulation)을 첨가할 수 있는 이론체계는 반증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만병통치약같은 것이어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설명치 못하는 이론이다. (Chomsky 언어학에서도 흔히 표현력과 설명력의 반비례적 관계가 운위되곤 하거니와, 이는 Popper의 반증론과 맥을 같이 하는 개념이다.)

결국 반증가능성은 과학을 형이상학 내지 유사과학(pseudoscience)으로부터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Popper의 견해이다. 이 기준에 근거하여 그는 (기호논리에 입각한) 分析哲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유사과학"으로 규정한다. 전자에 대한 비판은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분석철학은 환원론적 검증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의 지적이요, 언어는 사용되기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의 대상을 外延으로 취할 수 있는데도 분석 철학은 언어의 본질을 도구론적으로만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 또하나의 지적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예측과 반증가능성의 결여를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이론이 제공하는 것이란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일단의 체계화 범주, 즉 사회적 삶을 보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Popper의 견해이다. 史的唯物論이 '과학'이라는 주장에 대한 그의 공격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는 인간 개인의 역할을 과소 평가하는 역사관은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사회개혁의 구체적 현실적 방법으로서 社會工學(social engineering) 사상을 제창한 바 있다.

Popper의 이러한 반증론은 과학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고 호한 그런 만큼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19) '과학적 이론'에 관한 그의 정의가 너무 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반증론이 과학철학사에서 지니는 의미는 그것이 적어도 이론의 多元化를 자극하는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은 확증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반증되는 것이므로, 과학이 하나의 이론만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배제해 버릴 수는 없다는 중요한 추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는 이론이 "추측"(conjecture)에 불과한 이상 과학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이론을 포섭하여 이들을 경험적 검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추론과도 일관성을 지닌다.20) 바로 이러한 이론의 繁殖에 의해 과학적 지식은 성장하며 과학적 연구는 활기를 띠고 계속되는 것이다. Popper의 과학철학은 따라서 과학이 특정의 이론에 독선적으로 연결된 폐쇄된 사회가 되어서는 안되고 열려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셈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반증론은 몇 가지의 세부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4.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철학: 객관에서 주관으로
독일계 운동으로 태동한 논리실증주의는 점차 국제적 운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여 나아갔다. 1930년대에는 Alfred Tarski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형식의미론파와 제휴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대거 미국에 이주함으로써 미국식 실용주의와 접목하였으며, 나아가 옥스포드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對象言語(object language)학파 그리고 Russell이나 Camap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분석철학파를 두루 잇는 커다란 흐름의 低流를 이루게 되었다. 한마디로 192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30여 년간 과학철학사의 절대적 위치는 논리실증주의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논리실증적 과학철학에 대한 비판은 60년대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逆波를 형성하면서 이 과학이론관을 역사의 뒤안으로 밀어부쳤다. 이제 논리실증주의가 내세우던 개개의 주장 중 인정받을 만한 것은 거의 없어졌으니, Camap과 더불어 논리실증주의의 핵심을 이끌어 오며 "표준학설'의 최종 모델을 확립시켰던

Hempel까지도 자신의 접근방법에 대해 공공연하게 회의를 표명할 정도였다.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으로서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Quine을 때어놓을 수는 없다. 그는 특히 환원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이 "도그마"는 논리실증주의가 경험론으로부터 물려받은 또 하나의 도그마인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의 구분'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각주 15참조). 하지만 논리실증주의를 그 뿌리채 뒤업고 전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 것은 이른바 "世界觀"에 입각한 일련의 과학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세계관이란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으로서, 이 개념을 철학의 한 범주, 즉 "世界觀學"(Weltanschauungslehre)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Dilthey임은 잘 알려져 있다. 문자 1대로 세계(Welt)에 대한 觀照(Anschauung)를 의미하는 이 철학은, 과학철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실험적 탐구라든가 이론적 구성보다는 직관과 주체적 인식론에 가치를 둔 태도를 말한다. 개개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귀납적 결론을 얻으려는 종전의 방법론을 거부하고 삶의 세계를 어떻게 느끼며 보고 해석하는가에 비중을 둔 자세를 말한다. 과학은 어떤 문제가 연구의 가치가 있고 어떤 해답이 받아들여질 만한 것인가 결정짓는 세계관 내지 삶의 세계(Lebenswelt)로부터 출발하며, 과학철학의 과제는 과학적 세계관의 특징을 분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는 이론적인 로고스(logos)의 세계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는 파토스(pathos)의 세계를 통합시키고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한데 묶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철학 운동도 역동적이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녀온 까닭에 그 정의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를 위해 세계관학적 과학철학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Stephen Toulmin, Norwood Hanson, Thomas Kuhn, Paul Feyerabend 등의 극단적 경향이 그 하나요, 덜 극단적인 입장에서 합리적 과학발전 관을 제시하는 Imre Lakatos, Dudley Shapere 등의 역사적 사실주의 성향이 또 하나이다. 후자는 논리실증주리에 대한 반작용의 가도를 점차 극단적으로 달리던 전자에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후자는 별도의 절에서 거론키로 한다.

4.1. 자기의 세계관에 맞는 이론: Stephen Toulmin
논리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세계관 과학철학의 분위기를 성립시킨 첫번째 인물로 Toulmi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주어진 자료와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에 드는"(pleasing to the mind)것이라야 한다. 단지 정확한 예측을 하는 것만으로 유용하고 만족스러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측이나 예보는 과학의 핵심이 아니라 과학을 응용한 기술(craft)에 불과하다. 과학의 핵심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에 입각하여 주어진 문제 영역에서 인지되는 규칙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은 어떻게 제공되는가? Toulmin은 우선 설명이 필요한 대상은 예상되는 것(the expected)이 아니고 예상 밖의 것(the unexpected)임을 상기시킨다. 예상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론의 과제는 따라서 두 범주로 나누어 생각되어야 한다. 먼저 정상적인 현상 내지 행동양식--즉 예상되는 것-의 내역을 詳記(specify)하는 것이 그 하나요, 그 다음 정상적인 것으로부터의 逸脫 현상-즉 예상 밖의 것-을 설명(explain)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이를 바꿔 표현하면, 정상적인 것에 대한 기술이 전제되지 않고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정상적인 것"은 어떻게 설정되는가? Toulmin에 의하면 그것은 "자연질서의 이상"(ideal of natural order)이다. 예컨대 Newton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무게를 포함한 그 어떤 물리적 힘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물체의 慣性을 기술하는) 제 1의 자연법칙은 자연질서의 이상에 해당한다. 이 법칙은 모든 물리적 변수가 배제된 유일한 운동-설령 그 운동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언급이 필요치 알은 순수히 이상적 차원에서의 力學-을 기술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질서의 이상이 그대로 구현된 현상은 존재치 않는다. 현상은 어떤 식으로도 항상 그것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탈 현상을 설명키 위해 이론은 여러가지 법칙(law)을 설정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기하광학에서 '빛이 직진한다'는 원칙은 자연질서의 이상이고, 실제로 나타나는 빛의 굴절 현상은 이른바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설명된다.

Toulmin에 의하면 이론체계는 (i) 자연질서의 이상, (ii) 법칙 그리고 (iii) 가설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들은 계층적으로 구성된다. 가장 위에는 전반적 주제의 방향과 성격을 관장하는 자연질서의 이상이 "원칙"(principles)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 원칙은 부정되거나 포기될 수 없다. (가령 빛이 직진한다는 원칙을 부정하는 것은 기하광학을 하기를 그만두는 것에 해당한다. )그 원칙들 밑에는 법칙이 있다. 법칙은 실험을 통하여 그 유용성이 확립된 요소이다. 제일 밑의 충에는 뭇 종류의 가설이 위치해 있다. 가설은 문자 그대로 가설이며 따라서 그 유용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론이 올바른 예측을 하지 못하는 경우 우선 이 하위의 가설을 의심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Toulmin이 명시적으로 다루는 과학적 논제의 하나는 理想化(idealization)의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자연질서의 이상"은 일체의 현실적 변수를 배제한 관념적 실체인 바, 그는 이러한 추상적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전제로 하는 과학의 속성을 명시적으로 지적해 낸 것이다. 그의 과학철학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연질서의 이상이 자연 현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마련해 준다는 견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관점'이므로 '참'이나 '거짓'이 될 수 없다. 단지 '얼마나 유용한가'의 문제이다. 이론의 유용성은 과학자의 개인적 관심과 생각-즉 세계관-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되는 것이로되, 자기의 세계관에 맞는 이론은 "마음에 드는" 이론인 셈이다. 세계관은 역동적으로 진화하며, 세계관이 진화하면서 이론이 바뀔 수도 있고 이론이 발전함에 따라 세계관이 바뀔 수도 있다. 이렇듯 이론이 세계관에 따라 상대적이고 또 세계관과 동행하며 발전한다는 Toulmin의 이론관-즉 "개념의 상대성"을 기조로 하는 과학철학-은 이론 발전을 환원적 과정으로 보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이론관, 즉 환원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4.2. 관찰과 사실의 이론의존성: Norwood Hanson
Hanson에 의하면 논리실증주의적 이론관의 큰 결함 중 하나는 이론의 완성된 형태에만 눈을 돌리고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설정하는 가설,그 가설을 바탕으로 주어진 자료를 해석하기 위한 추론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데에 있다. 후자를 잘 살펴 보면, 설명력 있는 이론은 겉으로 보이는 자료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은 통계적 일반화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관념적으로(conceptually) 조직된 자료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절한 가설을 추론하는 작업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 이론의 이러한 측면을 설명키 위해 Hanson은 우선 이론적 어휘와 관찰적 어휘가 따로 있고 이론이 관찰에 의해 도출된다는 논리실증주의적 견해가 잘못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관찰이-나아가 '사실'이라는 것까지도-얼마나 이론의존적(theory-laden)인가를 보이는 데에 주력한다. 그런 다음 그는 자료로부터 일련의 법칙을 발견해내는 "진정한 논리"(true logic), 즉 그가 "逆歸納的" (retroductive reasoning)이라 명명하는 발견의 논리를 전개해 나아간다.

관찰이 이론의존적 속성을 지닌다는 것은 또한 중립적 관찰언어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논리실증주의는 이론의 차이에 관계없이 직접적 의미 해석이 내려질 수 있는 공통된 관찰 언어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다시말해 관찰은 '이론 중립적'이라는 가정이요, 소위 관찰적 어휘와 이론적 어휘의 구분은 바로 이러한 가정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관찰적 언어로 이루어진 명제가 직접적 관찰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려면, 같은 대상체를 바라보고(look) 있는 관찰자들은 모두 같은 사물을 인식(see)해야 한다. Hanson이 이에 대해 제기하는 의문은,하나의 대상체에 대해 현저히 다른 이론을 가진 두 관찰자가 정말로 같은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동틀녘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Johannas Kepler와 Tycho Brahe의 경우를 예시한다. 후자는 지구가 고정 되어 있고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보고 있는 데에 반해 전자는 지구가 고정된 태양의 주의를 공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경우 과연 두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공통된 시각적 경험을 하고 있는 이상-즉 두 사람 다 태양을 시각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이상-그들은 같은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러한 주장이 그들의 눈이 비슷한 시각적 자극 내지 綱膜적 인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이 같은 사물을 보고 있다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망막상의 印畵 작용은 물리적인 것이요, 무엇을 보는 것은 시각적 경험을 하는 것인 바, 그 둘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또다시 다음과 같은 이견이 제기될런지고 모른다. Tycho는 태양이 떠오른다고 생각하고 Kepler는 지구가 움직임으로써 태양이 보이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동일한 감각자료(sense datum)-즉 청록색의 바탕을 배경으로 하여 찬란하게 빛나는 녹백색의 圓形-이다. 따라서 그들이 각자가 보고 있는 사물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한다면 이는 그들이 동일한 감각자료에 대해 서로 다른 사후적(ex post facto) 해석을 내리기 때문이다.

Hanson이 주요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자료론 및 이에 유래하는 중립적 관찰 언어의 설정이다. 그가 자신의 입론을 위해 사용하는 몇 가지 예 중에서 다음의 (가)와 같은 넥커입방체((Necker cube)를 생각해 보자.


 


감각자료론에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같은 감각자료를 보면서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관찰자에게 가까운 면이 ABCD라 해석될 수도 있고 EFGH라 해석될 수도 있다. 즉 (나)와 같이 해석될 수도 있고 (다)와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설령 이러한 형태변환이 우리가 목하의 사물들을 보고 있는 바로 그 동안에 일어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역시 같은 사물이고 다만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변하는 것뿐이다. Hanson은 이

러한 설명법에 대해 일련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해석방법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 일단 인정되는 한, 목하의 물체를 각기 다른 해석방법 하에 보고 있는 것은 곧 다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감각자료론의 입장에서도 우리는 같은 물체를 바라보고(look) 있으면서 다른 형상을 보고(see)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공통적 언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둘째, 다른 형상이 보이는 것은 해석의 문제라는 견해도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보인다' 는 것은 경험적 '상태'(state)요, 무엇을 '해석'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행위'(act)이다. 가령 위의 그림에서 (나)가 보이거나 (다)가 보이는 것은 자연발생적 현상이지 우리의 思考 행위에 따른 형태변환이 아니다. 실로 우리는 어떤 물체가 특정의 형상으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아무리 그 형상을 생각하면서 그 물체를 들여다 보아도 종래 그 형상을 보지 못하고 마는 때가 종종 있다. 위의 (나)와 (다)가 번갈아 보이는 것이 사고 작용이 아니라 지각 작용인 이상, 해석방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석은 사고 행위이기 때문이다.

셋째, 형태변환이 해석의 차이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러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Hanson은 형태변환이 우리가 보는 사물 자체의 구조 흑은 우리의 망막에 기록되는 영상의 구조가 변하여 생기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의 '보는 눈'에 있어서의 구조 변환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관찰자의 관찰 상황이나 지식, 경험, 이론 등등에 따라 다른 사물이 보이게 되는 여러 경우를 예시한다. Tycho와 Kepler가 각 기 다른 사물을 보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들의 개념적 구조, 즉 이론이 서로 다르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관찰은 이론의존적이며, '사실' 또한 이론의존적이라는 것이다

넷째, 무엇을 '본다'는 것은 명제적 요소-즉 언어적(linguistic)요소--를 수반할 수 있다. (영어의 'see that-p' 흑은 우리말의 'p-라고 본다'와 같은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즉 무엇을 '보는' 행위에는 언어적인 명제가 개입될 수 있는 것이다. Hanson은 이 언어적 요소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의 지식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어서 그는 그림그리기와 언어 사용의 차이를 지적하면서,전자가 본래의 사물을 상징(represent)하거나 있는 그대로 배열(an3nge)하는 데에 비해 후자는 사물에 대해 언급(refer)하거나 사물의 특성을 기술(characterize)한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감각자료론 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해주는 또하나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감각자료론자에 의하면 Tycho와 Kepler가 본 것은 똑같은 물체, 즉 감각자료이다. 그러나 감각자료는 일종의 그림으로서 사물을 상징하는 것이지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따라서 '언어적'이지 않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이 언어적 요소를 수반함이 밝혀진 이상, 감각자료론적 설명 방법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기실 과학사에는 관찰과 사실이 이론에 의해 유도됨을 시사하는 일화가 얼마든지 발견된다. Galileo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이를 Ptolemaios학파 신부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망원경을 들여다 보게 하였다. 신부들은 망원경을 들여다 보고 난 후에도 목성의 위성이 존재함을 부정하였다. 그들도 Galileo와 마찬가지로 목성 주변에 있는 빛의 명상을 보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우주의 회전축은 하나밖에 없다는 Ptolemaios식 천문지식-때문에 그 빛의 영상이 우주에 있는 또하나의 회전축을 돌고 있는 '위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Galileo의 눈에는 보인 목성의 위성을 '관찰'치 못하였으며, 그들에게는 목성이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수가 업었던 것이다.

관찰과 사실이 이론의존적이라는 명제에 준거하여 Hanson은 Spinoza나 Laplace식의 결정론-어느 한 시점에서의 우주의 상태를 알면 세계의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우주관은 인과관계가 樹形的 계통 내지는 사슬고리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 Hanson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우리의 이론이고 둘을 연결시키기 때문이지 세계가 어떤 우주적 접착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 이는 결정론의 근본적 사상을 부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인과관계의 연결고리가 이론에 의해 도달되는 개념이어야 함을, 즉 '사실은 이론에 의해 유도됨'을 주장한 것으로 해석됨이 옳을 것이다. Hanson에게 있어서 이론은 개념적 형태(conceptual Gestalt)요, 결론으로부터 전제에 도달하는 逆歸納的(retroductive) 추론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문이 그의 이러한 이론관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리라 믿는다.

Physical theories provide patterns within which data appear intelligible. They constitute a 'conceptual Gestalt'. A theory is not pieced together from observed phenomena; it is rather what makes it possible to observe phenomena as being of a certain sort, and as related to other phenomena. Theories put phenomena into systems. They are built up in 'reverse'-retroductively. A theory is a cluster of conclusions in search of a premise. From the observed properties of phnomena the physicist reasons his way toward a keystone idea from which the properties are explicable as a matter of course.21)

4.3. 혁명과 패러다임의 행렬: Thomas Kuhn
Kuhn의 이론관은 여러 면에서 Toulmin의 이론관과 흡사하다. 후자와 마찬가지로 Kuhn도 과학의 발전은 환원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세계관의 내부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나아가 세계관은 역 동적으로 진화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진화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에 판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Toulmin은 세계관의 진화는 累增的이라고 주장한다. 즉 새로운 자연질서의 이상이 도입됨으로써 세계관이 변할 수는 있어도 버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Toulmin은 과학 발전을 累增的인 것으로 보는 셈이다. 반면에 Kuhn은 과학적 세계관의 진화를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것으로 보며 과학의 진보는 累增的인 것이 아니고 革命的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과학적 혁명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전혀 다른 성격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非累進的 발달의

에피소드"라 한다.

하나의 신임받던 이론이 뒷날 이질적 이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밀려나는 에피소드는 과학 역사에서 무수히 찾아 볼 수 있다. 지구 중심의 Ptolemaios천문학이 행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Copernicus의 관점으로 대체된 것이라든가, Lavoisier에 의한 산소의 발견으로 소위 플로지스톤設이 과학사011서 사라진 것, 그리고 Newton과 Mendel이 물리학 이론과 유전생물학 이론에서 각각 물고 온 일대 변혁, 등등 그 예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번거롭다. Kuhn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패러다임이 붕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일어서는 이야기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Kuhn에 의하면 패러다임이 없는 과학 속에서의 작업은 우연에 맡겨질 수 밖에 없다. 자료는 주로 무작위하게 수집되고, 수집된 자료들은 각자 나름의 가설에 따라 일관성 업이 채석된다. 서로 다른 성격의 학파들이 난무하며, 각 학파의 지지자들은 으례 다른 학파의 연구 성과를 무시한다. 말하자면 이론의 春秋戰國 시대인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유파가 성숙해 감에 따라 다른 학파를 제압하고 군림하게 된다. 자료를 다루는 그 유파 특유의 방법이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보다 효과적이고 예측의 정확도도 높음이 인식되기에 이른다. 결국 그 승자가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굳힌다. 이렇게 확립된 패러다임은 그 분야의 사고방식을 광범위하게 지배한다 새로운 학생들은 그것을 배워서 그것이 이끄는 분야에 입문한다. 그 이전까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그 분야의 저서와 논문 혹은 기사의 내용이 이때부터 그 패러다임의 정밀한 지식으로 바뀌고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되어 버린다. 물론 그 패러다임 속에서도 예측 밖의 실험 결과, 기대 밖의 당혹스런 경우가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에의 묵종과 순응이 권유 내지는 강요되는 가운데 그러한 당혹스런 사례들은 일반적으로 무시된다. 요컨대 Popper식의 "반증"이 통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한 "비정상 요소"들은 이론이 세련되고 분석방법이 개선될 때에 다시 다룰 문제로 간주되는 것이 통례이다. (사실 그러한 비정상적 요소야말로 가령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좋은 연구거리가 되는 셈이지만.) 그리고 실상 그들 중에 어떤 것은 점진적으로 해결되고 그 해결 방법이 새로운 이론의 방향을 지시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그 비정상적 요소들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가지를 치면서 불어나 패러다임 그 자체를 위협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위기와 불확실성의 조짐이 일게 된다. 그 패러다임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정서 상태에 불안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종류의 설명법이든 가리지 않고 시도해 보려는 성향, 불만의 명시적 표현, 철학에의 의존 내지 기본원칙에 관한 논쟁" 따위가 불안의 증세인 것이다. 혼란이 겹치고 비정상적 요소가 누적되어 결국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의 부적 절성을 확신하게 되면서 마침내 그것은 거꾸러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과학혁명이 다시 한번 일어난 것이다.

이렇듯 Kuhn은 과학의 발달과정을 패러다임의 발생과 몰락으로 점철되는 일련의 단절적 토막극으로 관망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젊은 층이나 특정 패러다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일종의 형태변환(Gestalt switch)이요 획기적 도약(quantum leap)이다. 옛 패러다임의 옹호자들은 최후의 투쟁을 하다가 퇴각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생을 마감하면서 사라져 버린다.

과학 발달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내지는 사회심리학적 요인을 중시한 견해이다. 한 패러다임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다른 패러다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이 Kuhn의 기본 입장이므로, "과학의 발전"이라는 표현도 語弊가 있는 표현이 되어 버린다 한 이론의 내용이 다른 이론의 내용과 중립적 언어를 통해 비교될 수 없는 한 어느 것이 "발전"된 형태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치이다. 과학의 역사는 오로지 "변화"의 역사일 뿐, 그 역사가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볼 이유는 없어지는 것이다.

과학의 진행이 근본적으로 혁명적이라는 것은 비혁명적인 기간도 있음을 전제로 한 주장이다. 이 비혁명적 기간이란 위에 언급된 것같이 특정 패러다임이 확고하게 정착되어 그 테두리 안에서 통합된 연구활동이 지속되는 기간인즉, Kuhn은 그러한 기간에 성립되는 과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부른다. 과학이 累進的으로 발전한다면 오직 이러한 정상과학의 내부에서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의미심장한 과학 변화는 하나의 정상과학에서 그 다음의 정상과학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생기며, 그러한 변화는 혁명적이고 非累進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 변화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패러다임의 변화는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다. 두 정상과학 사이의 기간, 즉 혁명적 단계에서는 미숙한 형태의 패러다임이 정쟁을 하는데, 그 사이에서의 선택은 "진리"에 준거하여 행해지는 젓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세계관이 변함에 따라 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선택되는가 하는 것은 시대적 요구,학문상의 권력분배, 경제적 여건, 사회심리적 구속력 등의 과학외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Kuhn의 시각으로 보면, 과학의 변화는 비합리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行路는 '진리의 발견' 쪽과 別無相關인 셈이다.

이상의 내용을 담은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가 1962년에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ted Science의 모노그래프로)출판되자 찬사와 비판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비판에 응하여 Kuhn은 이 책의 수정판을 1970년에 내놓았으며, 이에 또다시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정과 해명의 작업을 되풀이하였다. 비판의 내용은 대략 네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이다. 방금 언급된 책에서 패러다임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위업으로서 한 시기의 과학계에 전형적 문제와 해결을 제공해 주는 것"(universally recognized scientific achievements that for a time provide model problems and solutions a community of practitioners)으로 정의되고 있는 바, 이는 개념상 모호하다는 지적인 것이다. Kuhn은 결국 패러다임이라는 용어 대신에 "disciplinary matrix"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본래의 정의를 약화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본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은 Kuhn의 과학철학을 新실증주의 비슷한 것으로 후퇴시킴을 뜻한다는 견해도 있다.22)

둘째, "정상과학"과 "혁명적 과학"의 구분에 대한 사항이다. 그런 구분 자체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도 있고, 설사 그러한 구분이 가능하다 하더라 도 Kuhn이 주장하는 정도로 뚜렷하거나 광범위하지는 않다는 비판도 있다. 문제의 구분이 Kuhn의 이론상 필요로 되는 또 하나의 핵심적 개념인 이상, 이러한 비판 또한 그의 이론에 심각한 타격일 수 밖에 없다.

셋째, 과학에 있어서의 '객관성' 기준이 지나치게 무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패러다임의 행렬도 세계를 보는 주관적 관점에 의해 유도되며 이론 전개를 위한 자료도 각자의 세계관을 통해 수집되고 해석되는 것이라면, 객관적 근거가 위치할 여지는 없어지고 만다는 요지이다. 이는 사실 세계관 과학철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두되는 비판이지만, Kuhn의 경우 이 비판이 더욱 심각해 지는 것은,그가 과학 변천의 양상을 역사적 記述의 차원이 아니라 規範的 내지는 理想的 차원에서 운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자신이 묘사하는 그런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주장을 넘어서 그렇게 '진행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네번째의, 그리고 아마도 제일 중요한 비판은, Kuhn의 과학철학은 지나치게 사회학적 측면에 치우친 나머지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관련된 '합리성'의 역할이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이한 이론체계의 갈등이, 진리에 접근하려는 논리적 토론보다는 학문외적 설득 내지 適者生存식의 전혀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목격하고 있는 과학 할 전상은 설명되기 힘들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여러 이론체계가 반증에 처하는 가운데 과학의 道程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향해 있다는 Popper의 과학철학이 더 합리적인 셈이다.

이러한 세부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사가 혁명으로 점철된 패러다임의 행렬이라는 Kuhn의 견해는 "쿤 식의 혁명"(Kuhnian revolution)이라든가 "巨步의 跳躍"(quantum leap 혹은 gigantic step)이라는 용어를 창출하였고, 이 용어들은 Popper의 "반증"이라는 용어만큼이나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과학사가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지식 습득의 역사가 아니라면, 지난날의 이론이 오늘날의 이론에 비해 '덜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할 근거는 없어진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학적 이론과 실행의 표준은 시대마다 다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의 패러다임이 공시적(synchronic)으로는 '절대적'일 수 있으나 통시적(diachronic)으로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Kuhn의 논지이다. 한마디로 그는 과학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相對化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셈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과거 경시 사상에 대한 경고를 그의 과학철학에서 읽을 수 있다.

4.4. 신화에서 신화에로의 행렬: Paul Feyerabend
Feyerabend는 Popper의 과학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과학적 이론은 실재론적 이어야 하고 반증가능해야 하며 과학적 지식은 이론의 다양한 分岐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Toulmin, Hanson 그리고 Kuhn의 주요 관점도 병합하여 받아들인다. 즉 주체적 세계관에 맞는 이론이 좋은 이론이며, 관찰과 사실은 이론의존적치고, 또 이론은 혁명적·비합리적으로 성장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실상 동의한다기보다는 이들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간 이론관을 제시한다. 이 작업은 Popper의 견해에서 그가 발견하는 하나의 결함-즉 이론을 검증함에 있어서 중립적 언어가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마디로 그의 과학철학은 중립적 언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 Popper식의 이론관을 본격적 세계관 과학철학으로 전개해 가려는 시도인 것이다.

Feyerabend는 우선 논리실증주의의 옹호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던 경험론적 견해-"극단적 경험론"이라 정의하는 것-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여기서 극단적 경험론이란, 특정 영역에서 일단 확증된 하나의 이론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의해 그 이론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대로 간직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포함하는 교리를 말한다. 극단적 경험론은 따라서 과학이 상호 양립 불가능한 이론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요컨대 이론 二元論에 背馳되는 교리인 것이다. Feyerabend에게 있어서 논리실증주의 식의 환원론은 "극단적 경험론의 고도로 공식화된 형태에 불과"하다. 새로운 이론이 그 이전의 이론을 설명하고 포괄하는 반복적 과정을 과학 발전의 실제적 양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Galileo의 자유낙하법칙과 Kepler의 법칙이 Newton의 이론으로 병합된 것

이 전형적인 환원의 예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Newton의 이론이 Galileo 및 Kepler의 이론과 논리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Galileo의 법칙은 자유낙하에서의 가속도가 일정하다고 주장하는 데에 비해 Newton의 이론을 지구 표면에 적응시키면 가속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다. 따라서 하나의 이론이 또하나의 이론으로 환원되기 위해 만족되어야 하는 중요한 조건,즉 "일관성 조건"이 이 전형적 예에서마저 위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환원론의 또하나의 전형적 예로 고전적 力學이 상대성이론으로 환원되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면서, 이른바 '質量'이라는 용어가 이 두 이론에서 갖는 의미가 서로 다름을 지적한다. 즉 환원론의 또하나의 중요한 조건인 '의미불변의 조건'이 위배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용어의 의미는 이론적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나의 이론체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는 다른 이론체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는-즉 중립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뜻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Kuhn은 과학의 변천을 '정상과학'의 행렬로 보고 있다. 혁명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여러개의 패러다임이 경쟁을 하다가 드디어 거기서 승자가 나타나 다른 패러다임들을 제압하고 점차 정상과학으로 정착한다는 것, 하나의 정상과학 내에서는 이론의 同質化가 추구 내지 강요 된다는 것, 그리고 Kuhn은 과학사가 이렇게 전개되어 왔음을 記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전개의 當爲性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 등이 언급되었다. 정상과학의 행렬이 환원적 행렬이 아니라는 Kuhn의 견해에 관한 한 Feyerabend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Kuhn이 정상과학 내에서라면 이론 발전이 환원적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알고 있는 데에 비해, Feyerabend는 도대체 정상과학같은 것이 과학사에 과연 있었는가에 대해서 조차 회의적이다. 그리 고 설사 그러한 것 이 있었다손 치 더 라도, 그 속에서의 이론 발전이 환원적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Kuhn이 운위하는 정상과학의 개념은 결국 극단적 경험론의 遺産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Feyerabend는 또한 과학사의 전개가 정상과학의 행렬이어야 한다는 Kuhn의 當爲論에 대해서도 매우 신랄하게 비판적이다. 과학의 발전은 하나로 통제된 집단들이 일어섰다 넘어지는 과정이어서는 안되고, 양립 불가능한 이론들이 다양하게 존립하면서 경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저에는 그의 극단적 세계관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각각의 이론은 나름대로의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론은 세계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론을 택하는가에 따라 세계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 믿음과 기대, 나아가 우리의 경험과 현실에 대한 관념이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이른바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상은 우리 자신의 생산품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뭇 속성은 모두 우리의 이론을 통해 갖다 붙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여 기까지는 Feyerabend의 과학철학과 여타 세계관 과학철학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과학철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뭇 무정부적(anarchistic)이기까지도 하다. "방법에 대한 반론: 무정부적 지식론 개관"(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라는 題下의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re is not a single rule, however plausible, and however firmly grounded in epistemology, that is not violated at some time or other (p.22). [So] there is only one principle that can be defended under all circumstances, and in all stages of human development. It is the principle: anything goes. (p.26)

이론이란 어차피 세계관에 따라 다른 것인 즉, 하나의 세계관에 입각해 구축된 이론이 아무리 인식론적으로 타당해 보이더라도 다른 세계관의 시각으로 보면 가당치 않게 보이게 마련이므로, 결국 어느 세계관 하에서도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은 "아무 이론이라도 (자기의 세계관 내에서라면) 성립된다"라는 명제라는 뜻이다. (Feyerabend의 또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한 이론의 진술은 모두 분석적으로 참(analytically true)이라는 뜻이다. ) 나아가 그는 만일 관찰된 현상과 마찰을 일으키는 이론을 그대로 지탱하기 위해 편의적(ad hoc)가설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면, 그러한 접근방법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pp.63-69).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Feyerabend의 이러한 데카당적 태도를 개탄한다.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Kuhn의 정상과학론보다 그의 이론관이 더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Popper식의 중립적 언어를 부정하고 논리실증주의 식의 "극단적 경험론"을 단두대에 올려 놓은 후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이론의 多元的 發散이 還元的 收斂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앞에서 본대로, Popper에게 있어서 이론의 다원화가 지향하는 목적은 진리의 발견이다. 그러나 Feyerabend는 과학과 인식론으로부터 '진리'의 개념을 이미 축출해 놓은 상태이다. 진리의 발견을 위해 "아무 이론이라도 성립"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려는 바는 '각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이 과학이다'라는 것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Feyerabend의 비 판자들은 그의 이론관이 매우 기괴하고 불경스럽기까지 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사실 Feyerabend의 문체는 매우 冷笑的인 데가 있다 때로는 날카로우며 때로는 익살맞고 기지에 번뜩인다. 적어도 표면상, 과학철학자들의 일반적 특성인 엄숙함과 진지함보다는 이를테면 다다이스트들에게서 보는 의도적 비합리와 부정의 색채가 더 돋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문체의 뒷켠에서 그가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냉엄한 메시지도 읽어 두어야 할 터이다. 그가 말하는 "아무 이론이라도 성립된다"는 원칙은 과학의 세계가 "독단적 이성"에 의해 점철되어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修辭로 볼 수 있다. 과학이 자기평가를 위해 설정하는 합리적 기준이란 실상 자기정당화를 위한 독선적 가치기준에 불과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성장한 과학(adult science)은 일반적으로 추종 자들을 만들어 그들의 생각을 장악하는 기법을 나름대로 구비하고 있다. 이 기법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전문화하는 합리적 형태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그 교육을 받는 사람들에게 과학에 대한 특정 관념을 주입함으로써,그 관념을 넘어서 과학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펼치지 못하도록 체계적인 통제를 가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를테면 '훈련된 무능력'-내지는 (미국의 소설가 Saul Bellow가 말하는) "높은 지능의 저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교육 체제란 결국 기득권층이 자기 이익을 위해 확립해 놓은 제도에 불과하다고 꼬집는 Michel Foucault의 견해와도 매우 흡사하다. 기실 Feyerabend와 Foucault는 문체 상으로도 유사한 데가 많다.)

Feyerabend는 또한 과학이란 특정의 도덕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 위치한 사회적 제도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어진 이론에 대해 소위 '객관적 우월성'을 판단할 때에 사용하는 기준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사고 방식과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하여 그는 합리성 도그마에 대항하는 "실용주의적"(pragmatic) 기준을 제안한다. 주어진 이론의 우월성-즉 유용성-은 그 내용보다는 그 이론이 필요로 된 상황에 따라 판단되며, 이론적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가 사용된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예컨대 Newton의 이론이 Galileo나 Kepler의 이론보다 진보적이라 부른다면,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 보다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세계관, 즉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Galileo나 Kepler도 자신의 이론이 합리적임을 의심치 않고 있었을 터이다. 마찬가지로, Copernicus의 천문학이 Ptolemaios의 천문학보다 우월하게 판단된다면 이는 전자가 후자보다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Ptolemaios의 시대에는 천동설이 합리적일 수 밖에 없었다. 우주의 움직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정 가능한 두 가지의 해석법이 천동설과 지동설이라 하자.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높은 곳-寺院의 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물체는 斜角으로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예측은 빗나가 있다. 지동설은 물체가 직각으로 낙하한다는 사실과 상치 되므로 자연히 천동설만이 가능한 해석법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결론은 과학계 뿐 아니라 종교계에 있어서도 절대적 지식의 기준으로 내려오게 된다. Copernicus는 그 기준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기까지에는 거의 한 세기의 기간이 필요했다. Galileo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나아가 태양중심설에 입각한 새로운 낙하운동 이론으로 '탑 논증'에 종지부를 찍은 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Galileo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통용된 것은 아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지동설을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도 이를 제대로 이행치 않은 Galileo는 급기야 로마에 소환되어 종교재판을 받고 지동설을 철회한다는 서약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Descartes도 그의 『방법서설』에서 Galileo가 받는 사회적 억압을 인식하여 지동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표명하기를 삼갔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렇듯 합리성 기준은 당대의 신념과 지식 수준에 병치된 것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론이 생산적이고 어떤 이론이 그럴지 못한가를 미리 알 수는 없는 것이다. Ptolemaios의 『알마게스트』도 Galileo의 『新科學對話』만큼이나 당대에는 重寶적 업적이었다. 어떤 이론이 진보적이고 어떤 것이 반동적인가를 가늠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도덕적 기준같은 것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학이 합리적 비판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Feyerabend에 있어서 과학은 신화같은 것이다. 그리고 과학사는 logos에서 logos에로의 행진이 아니고 mythos에서 mythos에로의 행렬이다.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신화에로의 개종은 이성에의 호소, 합리적 방법론, 논리적 토론 따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심, 자기이익, 이데올로기, 사회제도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과학은 다른 지식형태에 대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의 이러한 과학관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수사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그리고 과학의 사회적의 존성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과학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 간과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에 지배를 받으면서도 시대를 이끄는 힘이 과학에는 분명히 있을 터이다. 따라서 Feyerabend의 주장에는 과장법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는 과학의 가장 본질적 속성의 하나라 볼 수 있는 懷疑의 태도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침내 '사실'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에 대한 올바른 설명법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설파하는 과학철학의 핵심은 과학에 관한 "거짓된 논의들"에 종말을 고하고자 함에 있으며, 과학도 결국은 하나의 '삶의 형태'임을 역설하고자 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5. 역사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과학철학: 합리적 객관주의
세계관 과학철학자들의 견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의 저변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대전제를 들라면 그것은 (j) 관찰은 이론의존적이라는 것과 (ii) 사실은 이론의존적이라는 두 가지 명제이다. 이론이 관찰에 의해 유도된다는 논리실증주의적 이론관에 비추어 볼 때, 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전환은 세계관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사실 그 근원은 Kant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일찍이 認識이 對象에 의존한다는 종래의 견해에 반대하여 대상이야말로 인식에 의존한다고 설파한 바 있다. 이는 다시말해 주관이 객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주관에 의존함을 뜻하는 것으로, Kant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천동설로부터 지동설에로의 전환에 비유하였다. (실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도 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관 과학철학이 오늘날의 과학관에 끼친 영향은 굳이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철학은 세계관 과학철학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며, 목하 진행중에 있는 변화의 방향도 세계관 과학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관 과학철학에 대해 여러 가지의 비판이 있어 왔음도 물론 사실이다. 이는 대략 두 가지로 크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세계관 과학철학은 주관적 이론관에 치우친 나머지 이론의 평가에 필요한 객관적 기준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치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론은 필연적으로 순환론적 모순을 범하게 된다. 가령 사실이 이론의존적이라는 것은 각각의 이론에 따라 각각 다른 사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론이 검증되는 과정에서 각개의 이론은 자기 고유의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즉 주어진 이론의 검증에 필요한 증거가 이미 그 이론에 맞추어 제공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세계관 과학철학은 (특히 Kuhn과 Feyerabend

의 경우)과학의 변천 내지 발전에 있어서의 합리적 측면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다만 학문외적 요인들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른바 '과학'이라는 학문분야에 독특한 이론과 방법론의 성격이 糊塗될 위험이 있다.

첫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그러나 객관적 기준만이 능사가 아님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문제가 과학적 논제로 다루어질 만한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이론을 평가할 때에는,주관적 기준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 주관론과 객관론 사이의 패러독스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다음 절에서 소개될 Shapere의 견해는 주로 이 문제에 연관되어 있다. 그 다음 절에서 거론되는 Lakatos의 이론은 과학 발전의 합리적 측면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5.1. 이상화, 추상화, 단순화, 일반화: Dudley Shapere
한편으로는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Kuhn 내지 Feyerabend 식의 극단적 세계관 과학철학에 가장 신랄하게 비판적인 사람은 아마도 Shapere일 것이다. 그의 과학철학은 다음의 세가지 가설, 혹은 公準을 전제로 한다.23)

i) 과학의 합리성 공준: 과학적 발전과 혁신은 근본적으로 합리적 추론의 결과이다.

ii) 과학적 추론의 일반화 가능성 공준: 특정 경우에 적용된 합리적 추론은 다른 많은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칙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iii) 과학적 추론 원칙의 체계화 가능성 공준: 합리적 추론의 일반적 원칙은 나아가 체계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과학사 연구의 중요한 한 가지 과제는 과학적 추론의 방법이 어떻게 일반화되며 또 일반화된 추론의 원칙에서 어떠한 체계가 발견되는가 하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 즉 과학철학은 일련의 "추론양식"(reasoning pattern)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Shapere가 논리실증주의나 세계관 과학철학의 견해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위의 공준을 거의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과학이라는 인식론적 활동에 대해 매우 왜곡되고 부정확한 묘사를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접근방법에 의거하여 과학적 지식에 대해 행해지는 설명, 그리고 실제로 과학에 의해 산출되는 지식, 이 둘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특정의 과학철학이 제시하는 설명은 그것이 얼마나 철학적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 뿐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 연구의 실제적 측면들에 충실하게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에 근거하여 평가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극단적 세계관 과학철학에서 운위되는 사회문화적 흑은 사회심리학적 요인은 과학의 실제적 측면을 특징짓는 추론양식을 추출해 내는 데에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적당하다고 Shapere는 지적한다.

극단적 세계관 과학철학자들에 대한 Shapere의 비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명제는 그들이 과학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관련된다. 과학적 지식을 특정 사회문화적 집단의 편견에 환원시켜 버리는 비합리적 과학관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찰과 이론을 별개의 것으로 전제하는 실증주의 식의 객관성 기준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객관성-내지 합리성-에 관한 전통적 개념은 다음의 두 가지의 조건에 준거하여 재정의 되어야 한다. 첫째, 연구대상, 즉 문제영역이 명시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 연구대상만을 근거로 하여 성립되는 명제라야 객관적인 명제이다. 연구자의 심리적 요인이나 사회적 여건은 과학 발전 내지 변천에 영향을 주는 상황 흑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지만 연구대상 자체의 부분을 이루지는 않으므로 객관적 요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로지 관찰에 의해 도출되는 이론만이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문제영역이 확실히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관찰은 오히려 왜곡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연구대상이 아닌 사항까지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개연성이 상존하는 까닭이다. 둘째, 연구대상 내지 문제영역의 설정이 객관성을 위한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관련된 설명법과 이미 확립된 다른 문제영역에서의 이론들 사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결국 이론체계의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조건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문제영역에서 필요한 설명법 내지 이론이 보다 포괄적인 영역에서의 이론과 상치하는 경우, 전자에는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을 개연성이 커진다는 요지이다.

이에 관련하여 Shapere는 관찰이 이론의존적이라는 세계관 철학자들의 명제를 객관성의 명제에 입각하여 재조명한다. 가령 두 종류의 경쟁적인, 그러나 아직은 확립되지 않은 이론이 특정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상이한, 즉 양립불가능한 해석을 내린다고 하자,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 이론들 사이에는 적어도 부분적인 합치점(overlapping)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동일한 사물이나 현상을 대상으로 한 이론들 사이에는 (세계관 과학철학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상이한 해석 부분을 잠시 제쳐놓고 이들 이론이 공통적으로 내리는 해석법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즉 동일한 연구영역에 관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해석법이 가능할 경우, 그 상이한 해석법의 근거가 되는 이론들 사이에 적어도 어느 수준에서는 존재할 공통적 어휘를 발견하기 위해 이론상의 차이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24) 이러한 개념을 Shapere는 "이론留保"(theory unloading)라 칭하는 바25), 이론유보를 통해 얻어진 해석법은 목하 경쟁중인 이론을 검증하거나 혹은 그러한 검증을 위해 어떠한 관찰이 추가로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론이란 본래 "초기의 다소 막연한 개념이 점차 더 상세하고도 정확한 내용으로 변하여 가는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므로, 이론유보는 이론 발전의 방향이 주관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막는 매우 합리적 지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이 확립되기 이전에도 주어진 연구 대상에 대한 일차적 近似接近(first approximation)-즉 단순화된 이론 형태, 이상화된 개념 둥-은 가능한 법인즉, 이론유보를 통한 관찰은 그 근사접근이 대체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론유보는 과학이론의 객관성, 나아가 과학이론 발전의 합리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방법론인 셈이다.

"이론이 확립되기전에도 주어진 연구대상에 대한 일차적 근사접근은 가능하다"는 표현이 방금 사용되었다.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연구대상-즉 문제영역(problem domain)-그 자체는 어떻게 설정되는가? 세계관 과학철학자들이라면 문제영역의 설정은 이론의존적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Shapere는 "이론이 확립되기 전"의 문제영역을 운위하고 있으므로 위의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 의문은 "일차적 근사접근"이라는 개념을 음미함으로써 풀릴 수 있다. 세계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Shapere도 관찰이 이론 확립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실증주의적 견해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관찰도 사실도 모두 이론의존적이라는 극단적 세계관 견해에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적어도 이론이 형성되어가는 초기단계에서는 이론과 관찰이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인 것이다. 위에 "단순화된 이론 형태", "이상화된 개념" 따위의 표현도 언급되었거니와, 여기서 단순화된 이론 형태란 다시말해 관찰된 자료들에 대한 일반화(generalization) 정도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일반화를 근거로 하여 모종의 개념이 이상화되고, 이상화된 개념에 근거하여 새로운 자료가 관찰 대상으로 정해지고, 그 새로운 자료로부터 새로운 일반화가 도출되고 하는, 이를테면 螺旋形 진행과정이 바로 '일차적 근사접근"인 것이다. 위에 인용된 또하나의 표현, 즉 "초기의 다소 막연한 개념이 점차 더 상세하고도 정확한 내용으로 변하여 가는 과정"이란 표현에서의 "초기의 다소 막연한 개념"은 일차적 근사접근 단계의 개념을 일컫는다. 이같이 관찰과 이론이 (적어도 어느 단계까지는) 상호 유기적 내지 상호 보족적 관계를 갖는다는 Shapere의 견해는 전통적으로 있어 온 실재론 대 도구론의 논쟁에 대해서도 파급효과를 가진다. 이 논쟁은 논리 실증주의 식의 '관찰/이론' 이분법에 관련된 것으로, 이미 언급되었듯이 대개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도구론을, 그리고 대개의 세계관 과학철학자들은 실재론을 표방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어떤 이론적 어휘도 실재적 존재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구론자들의 주장이요, 모든 이론적 어휘가 실재적 존재를 지시한다는 것이 실재론자들의 주장이다. 즉 이론적 어휘가 '전적으로' 실재적 존재에 관련된 것이냐 혹은 '전적으로' 그럴지 않은 것이냐가 논쟁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Shapere도 실재론자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관찰/이론의 이분법이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관찰과 이론이 상호 보족적으로 작용하는) 연구영역의 개념이다. 따라서 그의 실재론 또한 성격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정 연구영역에서 행해지는 과학적 추론에는 실재적 존재를 지시하는 어휘 뿐 아니라 이상화를 위한 어휘, 단순화를 위한 어휘 등도 사용된다.26) (편의상 앞으로는 "존재어휘" 내지 "존재개념",그리고 "이상화어휘" 내지 "이상화개념" 등의 용어를 사용키로 한다.)

구체적 예의 하나로 Shapere는 Lorentz의 電子理論을 거론한다. 전자는 無次元의-즉 크기가 전혀 없는-점(point)이 아니다. 실상 Lorentz 자신도 순수히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전자가 기하학적 점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 상황에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전자를 마치 기하학적 점인 양 취급한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기하학적 점으로서의 전자는 이상화개념이요 이상화어휘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화는 순수히 과학적인 근거를 지니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즉 존재개념-과 존재하지 않는 (혹은 사실과 다른) 어떤 것을 마치 존재하는 양 취급하는 것-즉 이상화개념-을 구별해야 할 '과학적'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한 방법으로서 이상화 어휘가 종종 사용되는 것이다.

이상화와 비슷한 개념으로-혹은 이상화에 속하는 하위 개념으로-다음의 세 가지 경우도 기억해 둘 만하다. 그 하나는 "단순화"(simplification)라 지칭될 수 있는 것으로, 예컨대 電子의 궤도를 타원형이 아닌 원형으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추상화"(abstraction)로서, 어떤 속성이나 부분을 전체적 관계로부터 분리하여 고찰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세번째로 "근사접근"(approximation)을 들 수 있는데, 완벽한 정밀성으로부터 어느 한계 내의 측량오차(measurement error) 내지 공차 (tolerance)를 허락한 계산법같은 것은 근사접근의 좋은 예이다. 이상화, 추상화, 단순화, 근사접근 등은 이론이나 가설 혹은 법칙을 전개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지만, 어떤 이론을 특정 상황에 '적용'시킬 때에도 사용된다. 위에 언급된 바 Lorentz가 전자를 마치 點粒子인 양 취급한 것도 그의 이론을 특정 상황에 적용하여 목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 이러한 개념적 장치를 통해 원래의 목적에 '충분히 가까운'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고,또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얻은 계산이 복잡한 상황을 모두 고려한 계산만큼이나 정확할 수도 있다. 예컨대 기체분자운동론(kinetic theory)에 있어서, 이 이론의 상당 부분은 분자충돌을 고려에 넣지 않고도 전개될 수 있다 한다. 분자충돌을 무시한다는 것은 물론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에 해당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계산의 數値-1초 당 1평방센티미터의 표면을 때리는 분자의 수-는 분자충돌을 고려한 계산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화개념의 논리는 존재개념의 논리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존재에 대한 주장은 크게 세 가지 범주를 대상으로 한다. (j)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런지도 모르지만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 (예컨대 전자), (ii) 상당한 이론적 근거에 의해 존재한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아직은 그 존재여부가 확인 불가능한 것 (예컨대 쿼크), (iii)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한때 주장된 적이 있는 것 (예컨대 에테르, 플로지스톤), 등이 그것이다. 결국 존재어휘들은 실배물, 모종의 추상적 속성 내지 변화작용, 어떤 실체의 행위 등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며, 따라서 종전의 이론/관찰 구분을 가로지르는 셈이다. 이 전통적 구분이 그릇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Shapere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is no wonder that both 'realistic" and "instrumentalistic" interpretations of science faltered with regard to their analyses of some theoretical term or other. For at least those areas of science where such terms as "existence" are appropriate, the problem may now be seen in a different way: to delineate the relationships of those terms (rather, uses) which do not have to do directly with entities as they actually exist, to those terms (or uses) which do; and to analyze the reasons for accepting existence claims.27)

Shapere는 이론적 어휘들-즉 과학적 추론에 사용되는 어휘들-이 과학의 내부적 필요에 의해 설정되고 사용되는 것이지 단순히 형이상학적 아니면 여타 과학외적 이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과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에 대해 새로운 각도의 실재론적 해석을 내리고 있다. 결국 그는 합리적 객관주의자일 뿐 아니라 합리적 실재론자인 것이다.

5.2. 보호띠 속에서 성장하는 핵심 가설: Imre Lakatos
과학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과학적 추론의 대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성공적인 것들은 경험론 내지 실증주의 식의 귀납적 방법론이 규범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행해져 왔음을 점점 더 뚜렷이 인식케 된다. Popper나 세계관 철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고찰 및 이에 따르는 인식론적 원칙에 입각하여 개선된, 脫귀납주의적 방법론을 개발하려고 시도해 왔다. Lakatos의 과학사 연구도 그 하나의 예이다. 그는 특히 Popper와 Kuhn의 과학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거기에 나타난 결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 나아간다.

Popper에 의하면, 자연 현상에 대한 추측과 가설로 이루어진 奔放한 이론들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이 중에서 반증을 견디어 내는 소수의 이론들이 살아남는 과정이 곧 과학의 발전과정이다. 여러 이론들의 적자생존식 경쟁을 통해 과학은 한걸음씩 진리에 접근하게 된다는 '진화론적 인식론'인 것이다. 이미 말한대로, 반증론에 대한 비판은 이미 Duhem의 가설 내지 Duhem-Quine 테제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론을 검증한다 함은 전체적 이론 체계를 검증함을 의미하므로, 하나의 이론만을 따로 떼어 이를 반증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Lakatos의 견해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즉, Popper의 반증론은 비슷한 수준의 이질적 이론들이 난립하여 이들이 채 세련되고 성숙한 이론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허위임이 판명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런 경우를 배제하지 않는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 해석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Lakatos는 과학의 발전이란 몇개의 통찰력 있는 핵심 가설들이 점차적으로 세련되고 성숙한 이론체계로 발전하는 과점이라고 주장하고, 이같은 과정 속에 있는 이론을 "연구프로그램"(research program)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목하의 핵심 가설들을 반증하는 듯한 실험적 증거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계속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일 수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키로 한다.

The main difference from Popper's ‥‥ is that in my conception criticism does not -and must not-kill as fast as Popper imagined. Purely negative, destructive criticism like 'refutation'… does not eliminate (research) programme. Criticism of a programme is a long and often frustrating process and one must treat budding programmes leniently. One may, of course, show up the degeneration of a research programme, but it is only constructive criticism which, with the help of rival research programmes, can achieve real success.28)

Lakatos가 말하는 연구프로그램은 Kuhn의 "정상과학"을 연상시킨다. 실상 그는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만 한다면 연구프로그램은 정상과학 내지는 "패러다임"과 흡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들 때문에 연구프로그램은 이들 두 용어와 개념상 현격하게 다르다. 우선, 연구프로그램을 "세계관"이라는 개념에 직결 시켜서는 안된다. 즉 과학을 과학외적 요인에 근거하여 정의해서는 안되고 과학 자체의 속성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과학적 진보의 내적 역사(internal history)가 마치 외적 역사(external history)에 의해 신비한 방법으로 封印 듯이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사는 서로 경쟁하는 연구프로그램의 역사이고 또 그래야만 하지만, 그것이 Kuhn 식 "정상과학"의 행렬이라거나 또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서도 안된다. Lakatos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Kuhn의 정상과학이란 "하나의 연구프로그램이 독점(monopoly)을 누리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과학은 바로 그러한 독점 상태를 함축하는 개념이므로 옳지 못하다. 이는 다시말해 이론적 一元化가 아닌 多元化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Lakaos는 Popper 내지 Feyerabend와 맥을 같이 한다. 다만, 이미 언급되었듯이 Popper의 반증론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Feyerabend와는 달리 연구프로그램의 상대적 장점이 객관적으로 비교되고 합리적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요컨대 Lakatos는 Kuhn이 제시하는 정상과학 내지 패러다임의 개념을 이른 다원론의 관점에 입각하여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위의 인용문에 "연구프로그램의 퇴보(degeneration)"라는 표현이 발견되거니와, Laka5는 연구프로그램을 진보적인 것과 퇴보적인 것으로 대별한다. 간략히 말해, 주어진 연구프로그램이 일련의 이론(T1, T2, T3,…)을 설정하는 경우, 만일 매번의 새로운 이론(Ti)이 그 이전의 이론(Ti-1)에서는 불가능하던 예측을 하고-즉 이론적으로 진보적(theoretically progressive)이고-또 그 예측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실제적으로 발견 되면-즉 경험적으로 진보적(empirically progressive)이면-그 연구프로그램은 진보적이며, 만일 이 조건이 모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연구프로그램은 퇴보적이다. 성공적인 연구프로그램은 적어도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이론을 끊임없이 생성해 내는-즉 새로운 예측을 계속하여 제공하는-연구프로그램을 말한다. 성숙한 과학은 이러한 연구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미성숙한 과학은 단순히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누더기식 이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Lakatos는 연구프로그램의 예로 Newton의 중력이론, Einstein의 상대성이론, Marx주의, Freud주의, 등을 열거 한다. 그런데 그는 Popper와 마찬가지로 Marx주의와 Freud주의를 疑似과학(pseudoscience)로 규정한다. 이들은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지 않으며-즉 이론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며-또 설사 예측같은 것을 한다 하더라도 그 예측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즉 경험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측이 실패할 때마다 이론은 고쳐져 왔다는 것이다. 결국 Lakatos의 기준에 따르면 Freud주의와 Marx주의는 "퇴보적"이고 성공적이지 못한 연구프로그램이고 따라서 "성숙한 과학"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없는 셈이다.

Popper의 구분법에 대해서도 언급되었지만, Lakatos의 이러한 구분법 또한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더구나, 일단 퇴보적 이라 판명된 연구프로그램은 중지되거나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이 Lakatos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과학'과 '疑似과학'의 구분에 있어서 그는 Popper보다도 더 엄격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Lakatos가 말하는 바의 핵심은, 주어진 연구프로그램을 중단하려면 우선 그것이 퇴보적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뜻이지, 퇴보적이라 판명된 연구프로그램은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퇴보성 판명은 연구프로그램의 취소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실상 Lakatos는 어떤 연구프로그램이 퇴보적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오로지 역사가 지난 후에야 평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므로, 과학자들이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 퇴보적인 연구프로그램을 계속하는 것은 합리 적 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러고 보면 그가 제시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불분명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Lakatos는 우리에게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식 내지 과학적 이론화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사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 다시말해 과학의 "내적 역사"는 과연 어떠한 것이지를 규명해 보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사를 살펴 볼 때 이른바 성숙한 과학 속에서의 연구프로그램은 진보적이며, 또 진보적 연구프로그램은 "스스로 方道를 발견하는 힘"(heuristic power)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연구프로그램이 성장함에 있어 필요한 두 개의 방법론적 원칙, 즉 "부정준칙"(negative heuristic)과 "긍정준칙"(positive heuristic)을 운위한다. 이 중 Lakatos의 과학철학을 Popper의 그것과 다르게 특징짓는 것이 바로 부정준칙이거니와, 이는 간단히 말해 목하의 연구프로그램이 설정하고 있는 이론에 설령 반증이 될 만한 것이 발견되더라도 그 이론의 "핵심"(hard core)을 현저하게 수정하거나 포기해 버리지 말라는 원칙이다. Toulmin의 말대로 현실은 항상 이상으로부터 일탈한다. 바꿔말해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반드시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괴리가 확인될 때마다 핵심적 가설을 버리거나 바꾸어 버리는 이론은 성장치 못할 것이다. (Lakatos가 Popper의 반증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론의 핵심 부분, 즉 理想을 잠재적 반증, 즉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인 바, 부정준칙은 그 격리를 합리화시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반증이 무시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론이 현실을 떠난 형이상학으로만 존재할 수 는 없는 까닭이다 Toulmin은 자연질서의 理想으로부터의 일탈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법칙"(law)이라 하였거니와, Lakatos는 이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보조가설(auxiliary hypothesis)을 운위한다. 사실 Lakatos의 "보조가설"은 Toulmin의 "법칙"보다 법은 의미를 지닌다. 전자에는 임시방편적(ad hoc) 장치도 포함되는 것이다. 반증에 부딪쳐 수정되는 대상은 바로 이 보조가설인즉, 보조가설들은 이론의 핵심을 반증들로부터 격리시키는 "보호띠"(protective belt)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보조가설, 즉 보호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정하고 정교하게 할 것인가에 관한 지침은 "긍정준칙"에 의해 마련된다. 그러나 긍정준칙은 보조가설에만 관련된 원칙이 아니다. 더 넘은 차원에서 '목하의 이론이 어떤 문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Lakatos는 긍정준칙을 "형이상학적원칙"(metaphysical principle)이라고도 부른다. 요컨대 우리가 연구프로그램을 진행시켜갈 때에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 말해주는 것이 긍정준칙이요, 어떤 길을 택하지 말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부정준칙인 것이다.

기억을 들기 위해, Lakatos가 그리고 있는 과학적 이론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도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이론이 "진보적"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연구프로그램은 성숙한 과학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되풀이해 둘 만한 사항은, 적어도 초기 단계-즉 성숙 이전의 단계-에서는 진보적이지 못한 연구프로그램이라도 계속 진행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로 과학사를 살펴보건대 처음에는 퇴보적으로 보이던-즉 속출하는 반증에 비추어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던-이론이 나중에는 매우 성공적인 과학이론으로 확립되는 사례가 얼마든지 발견된다는 것이 Lakatos의 논지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의 부정준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일견 Lakatos가 제시하는 과학관도 결국은 Kuhn의 그것만큼이나 독선적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주어진 이론의 핵심 가설이 보호띠 속에서 건재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은 결코 무너질 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미 언급된 대로, 목하 이론이 퇴보적임이 확인될 때에는 그 이론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Lakatos가 연구프로그램의 핵심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를 완전히 배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준칙 내지 보호띠의 근본 개념은 '미성숙 단계'의 이론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쟁관계에 있는 다수의 이론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인 것이다.

되풀이 하건대 Lakatos가 시도하는 것은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이다. 과학적 이론에서 사용되는 합리적 방법론과 과학의 실제적 변천사 사이의 관계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이 귀납적으로 확증된다는 논리실증주의식의 과학사관에 반대한다. 연구프로그램은 검증과정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연구프로그램이 맡을수록 과학은 발전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그의 이론 다원론은 바로 이러한 견해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하나의 연구프로그램이 또하나의 좀 더 합리적인 연구프로그램에 접목되기도 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Galileo의 연구프로그램과 Kepler의 연구프로그램이 Newton의 연구프로그램으로 접목된 것이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진보의 동기는 과학외적 요인, 즉 "외적 역사"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역사"에 의해 유발된다는 것이 그의 과학철학인 것이다.

6. 맺는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인간 지성사가 그렇듯이 과학철학사도 대략 변종법적 변천사임을 알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은 Hegel식의 형이상학에 반기를 들어 관찰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절대시했고, 세계관 과학철학은 이에 맞서 주관적 가치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며, 역사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과학철학은 '주관 속에서의 객관'을 지향하는 합리

적 객관성의 원칙을 정립시켰다. 논리실증주의나 세계관 철학이 각기의 결함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들의 업적이 송두리째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자는 과학 이론의 엄밀성, 정확성, 명시성을 확립시키는데에 결점적인 기여를 했고, 후자는 과학도 결국 삶의 한 형태라는 자각을 우리에게 마음에 심어주었다.

오늘날의 과학철학에 공통된 하나의 특징을 들라면,그것은 아마도 개연적·귀납적 방법론에 대한 거부일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관찰된 자료로부터 추출된 일반적 법칙을 검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귀납법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기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물론 확률적 통계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는 통계적 방법이 매우 유용하고 또 상당히 만족스럽게 평가되고 있으며, 심리학같은 분야에서도 귀납적 실험주의가 매우 깊이 침투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 지식의 합리적 재구성으로서 개연성 진술이 적합한 것이냐에 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Popper가 Hume의 '논리적 문제'에 근거하여 제기한 문제를 일별하였거니와, 오늘날 개연적 귀납법을 '과학적' 방법으로 간주하는 과학철학자는 거의 없다.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 관한 한, 귀납적 논리는 세련되지 못한 이론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T]he lessons we have teamed from studying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suggest that such probabilistic inductive evaluations are relatively inefficient and characteristic of relatively unsophisticated stages of science. As science evolves, it becomes more sophisticated and efficient in its evaluation of knowledge claims, thereby rendering the inductive logics ‥‥ increasingly less relevant to understanding the means whereby sophisticated science evaluates and passes on putative knowledge claims. The implications, then, of recent work on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are that probabilistic inductive logic is irrelevant to scientific knowledge ...29)

결국 과학적 이론체계는 근본적으로 연역적 체계이며, 귀납적 방법이 사용된다면 그것은 연역 적으로-흑은 (Hanson과 Feyerabend의 표현을 빌리자면) "逆귀납적"(retroductive) 내지 "反귀납적"(counterinductive) 방법으로-설정된 가설로부터 추론되는 결과를 경험적으로 검증키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이다.

여기서 또하나 유의해 둘 만한 것은, '과학적' 이론이란 반드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성장과정에 있는 과학 이론은 이상화 내지 추상화를 통해 단순화된 하나의 모형'이며, (Suppe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지어 "허구"(fiction)일 수도 있다.30) 이때의 "허구"라는 표현에 '이론은 진리의 추구와 무관하다'는 의미가 함축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론이란 우리에 의해 고안되고 고쳐지고 다듬어지는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이지 어떤 절대불변의 종교적인 교조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이론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즉 세계가 실제적으로 어떠한 모습인가를 올바로 설명하려는-시도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Lakatos는 "우리에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는 과학 게임은 인식론적으로 의 미가 없다"고 충고하거니와, 사실주의 내지 실재론이야말로 오늘날의 새로운 과학철학을 특징짓는 또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실주의'나 '실재론'이나 모두 영어의 realism의 역어로, 그 근본 의미는 같다. 다만 후자는 '도구론'에 대비되는 의미를 추가로 지닌다.)

필자의 다른 글(각주 3 참조)에서 묘사된 Bloomfield식 구조주의로부터 Chomsky식 생성문법론-'후기구조주의'-애로의 변화는 그 내용이나 시기에 있어서 논리실증주의로부터 세계관 철학애로의 변화와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 실상 미국 구조조의언어학의 방법론은 논리실증주의의 방법론 바로 그것이었으며, Chomsky가 이에 반기를 든 동기와 취지는 Toulmin 내지 Hanson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Chomsky 언어학의 최근 이론체계는 역사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Lakatos와 Shapere의 과학철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언어이론이 과학을 표방하는 한 결국 당대의 과학철학 사조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즉, 이러한 면에서 필자는 (Chomsky 스스로도 그러하듯이) "Chomsky 혁명"이라는 표현에 동조하지 않는다.31) 또한 필자는 Chomsky의 언어이론 자체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의 이론에 비판적인 편이다. 그리고, 어떤 언어이론이나 그랬듯이, 그의 언어이론도 언젠가는 붕괴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언어이론은 그의 언어철학이 실행(execute)된 하나의 '모형'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의 모형-즉 실행방법-이 완전히 잘못임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그의 언어철학 자체의 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모형의 이론으로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그의 언어철학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어느 정도의 모형변화를 계속해 왔다. 이 점에 관해 Chomsk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Generative grammar is sometimes referred to as a theory, advocated by this or that person. In fact, it is not a theory any more than chemistry is a theory. Generative grammar is a topic, which one may or may not choose to study. […] Within the study of generative grammar there have been many changes and differences of opinion, often reversion to ideas that had been abandoned and were later reconstructed in a different light Evidently, this is a healthy Phenomenon indicating that the discipline is alive, although it is sometimes, oddly, regarded as a serious deficiency, a sign that something is wrong with the basic appach.32)

이 말에 동의를 하느냐 않느냐는 별 문제로 하더라도, 생성문법론은 분명히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즉 생성문법론은 언어철학과 언어 이론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Chomsky는,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언어이론을 좀처럼 제시하려 하지 않는 이른바 '언어철학자'들과 다르다. 그는 자신의 언어철학을 어떤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용어들 속에 감추어 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경험적 테스트가 가능한 (즉 반증 가능한) '이론'의 형태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철학적 문제들을 좀처럼 생각하려 하지 않는 여타 부류의 언어학자들과도 다르다. 그의 생성문법론은 (Humboldt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가 에르곤(ergon)이 아니라 에네르기아(energia)이다"라는 철학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다. 즉 언어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언어를 객관적 대상으로서 기계적으로 다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창조적 힘을 규명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 철학이다. 이러한 면에서 Chomsky식 언어학은 이른바 '기호학'(semiotics)적 언어분석과도 성격을 전혀 달리 하거니와33), '언어학이 언어를 비인간화한다'는 비판은 적어도 Chomsky식 문법론에 관한 한 옳은 것이 못됨을 여기에서 지적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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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Darwin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는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는 그러한 이야기를 결코 한 적이 없다. 그의 학설은 인간과 원숭이가 (나중에는 멸종되어 없어진) 어떤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개별적으로 진화했으리라는 것이며, 따라서 원숭이는 인간과 촌수가 먼 친척일 빨 인간의 '조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령 영어가 독일어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고 이 두 언어가 개별적으로 (지금은 없어진) 공동 조상어-이를테면 '원시 인도·유럽어'-로부터 파생했다는 역사·비교언어학의 학설과 흡사하다. ) 이러한 Darwin의 핵심 개념은 간과한 채 그의 주장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당신 할아버지 옥이 원숭이였소 아니면 할머니 쪽이 원숭이였소?" 하는 식의 야유를 하거나 그의 몸을 원숭이로 풍자한 그림을 그려놓고 조소하기도 했다.
2 이상섭 교수는 언젠가 '失樂園'이란 번역이 일본어에서 맹목적으로 따온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이 대역은 의미상 매우 어색하다.
3 「언어연구의 역사적 발자취」 「人文科學」 제 67집. 1992
4 일례로 그의 대표적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alis Principle Mathematioa)는 형이상학적 사색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5 순수이성이란 일체의 경험적--즉 후천적--요인으로부터 독립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이성으로, 이런 점에서 實踐理性의 반대 개념이다. Kant의 순수이성 내지 物自體의 개
념은 Chomsky의 "언어지식" 내지 "언어기능"의 개념과 매우 흡사하며,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별은 언어지식과 언어사용의 구별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Chomsky 자신도 「규칙과 표상」(Rules ard Representations)을 위시한 많은 저서에서 이러한 관계를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6 다만 앞으로 보게되듯이, 세계관철학자들은 소위 환원주의 (reductionism)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Husserl과 의견을 달리한다.
7 그러나 이것은 발생지를 중심으로 한 말이다. 1930년대 말경에는 논리실증주의가 국제적인 운동으로서의 지위을 확보하게 된다.
8 "표준학설"은 이론의 내부 체계 및 이론의 발달과정에 대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일반적 동의하여 받아들이는 일련의 가설들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논리실증주의 자체는 '主義'내지 '운동'이지 '학석'은 아니다.) 지금 운위되고 있는 표준학설은 초기 단계의 표준학설로서, 이 초기 모형은 Carnap, Hampel 등을 통해 좀 더 세련된 형태의 최종 모형으로 정착된다.
9 이런 의미에서 프로토콜 명제는 "관찰적 명제"로도 지칭된다.
10 이는 그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로 대표되는 이른바 "초기 비트게슈타인"의 견해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의"후기 비트겐 슈타인"은 이 견해를 포기했다. 즉 논리형태의 명료성은 문장구조의 논리적 깊이를 파고들어 논리적 單素(Logical Simples)를 찾아내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자연언어의) 문장들이 주어진 실계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데에서 성립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흔히 사용의미론(use theory of meaning)으로 지칭되는 그의 이러한 언어철학은 (Moore와 Ryle의 언어철학과 더불어) '일상언어철학'(ordinary language philosophy)의 토대가 되었는 바, Austin과 Searle에 의해 대표되는 화행론(speech art theory)은 이러한 일상언어철학의 맥에 있다.
11 이것은 Russell의 논리적 원자론과 관계있는 관념이다. 논리적 원자론에 의하면, 세계는 인간의 직접 경험의 기초를 이루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사실들-즉 원자적 사실들--의 집합체이며 이 원자적 사실들은 서로 독립적 존재라 한다.
12 흑자는 verification theory를 "검증이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이 번역은 옳지 못하다. '검증'은 반드시 '입증'을 위한 것이 아닌즉, 나중에 언급될 Popper의 반증이론(falsification theory) 또한 검증이론으로 불리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3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논리학이나 현대의 기호논리학은 결국 연역적 추리의 형식을 체계화한 형식논리학이다.
14 이러한 Bacon식의 귀납적 상향 과정은 특히 Carnap의 이론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Foudations of Logic and Mathematic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29), pp. 66-69 참조.
15 Quine은 이 환원론을 논리실증주의가 경험론으로부터 물려 받은 "두 가지 도그마" 중 하나라고 비판하고 있다 (Frame a Logical Point of View.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 pp.23-41). 한 이론이 다른 (포괄적) 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함은 상이한 이론에서의 언어가 상호 번역될 수 있음을--즉 '중립적 언어'가 존재함을--전제로 하는 데, 그러한 중립적 언어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Quine의 "번역의 불확실성 테제"라 한다) 환원 테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환원론이 그가 말하는 또하나의 도그마, 즉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 사이에 구분선이 있다는 생각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관한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선 그는 분석적 문장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는데,그 하나는 논리형태상 참인 경우요 또 하나는 논리적 참은 아니더라도 의미상으로 참인 경우이다. 그런 다음 그는 두번째 범주의 문장은 동의어의 대치에 의해 첫번째 범주의 문장으로 변환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No bachelor is a married man은 두번째 범주에 속하는 문장이지만, 여기서 bachelor를 unmarried man으로 대치하여 그 결과 첫번째 범주에 속하는 No unmarried man is a married man으로 변환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소위 "동의"(synonymy)라는 개념 자체가 "분석적"이라는 개념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임을 지적한다. 즉 "동의"라는 개념이 명시되지 않는 한 위의 두번째와 같은 문장을 "분석적"이라 정의하는 것은 순환논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동의"를 정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안을 논의하면서 이들이 모두 타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한 '의미상 참인 문장은 분석적이다'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결국 두번째 범주의 분석적 전리치를 정의함에 있어 의미론적 규칙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분석적-종합적"의 구분은 경험론이 범하고 있는 또하나의 독선,즉 하나의 이론이 더 포괄적인 이론으로 흡수된다는 "환원 테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Quine의 비판은 "분석적-종합적"의 구분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든 인지적으로 의미있는(cognitively meaningful) 문장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 어야지 둘 다일 수는 없다는 (Carnap 식의) 주장에 대한 것인 듯하다.
16 Kad Popper의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음.
17 예컨대 Scruton의 A Dictionary of Political Thought (London: Pan Books, 1982) 참조.
18 확증론에 대한 또 한 종류의 비판은 일찌기 Kurt Godel에 의해서도 (적어도 간접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Godel은 형식주의(formalism)를 뒤엎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앞서 이미 본대로, 형식주의는 논리실증주의의 기본 입장 중 하나이다. 즉 수학은 논리로 환원될 수 있고 논리는 완벽히 형식화될 수 있다는 것이 형식주의인 것이다. 형식주의가 실행 불가능한 것임은 Poincar?도 어렴풋이 지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Godel은 형식주의가 성립될 수 없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엄청난 평판을 일으켰다. 기본공리와 유도법칙을 어떻게 선택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유도되지 않는 第2階의 恒眞述語式이 존재함을-즉 이른바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함을-증명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증명된 것만이 참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Jean Piaget(Structuralism. New York: Basic Books, 1970, 제2장 8절)의 말을 인용하자면, Godel은 Russell과 Whitehead의 「수학원리」에 대해 대략 두 가지의 반론을 폈다. 그 하나는 (i) 「수학원리」 식의 기본적 산술을 갖출 정도로 충분히 일관적인 형식 체계는 그 형식 체계의 思惟原理상 자신의 일판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요, 또하나는 (ii)그러한 형식 체계에서는 '형식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명제가 산출되는 모순이 불가피하며, 수학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그 어떤 논리적 체계에 대해서도 '그러한 논리적 체계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라고 말해야 하는 모순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형식주의 및 공리적(axiomatic) 방법이 가진 내재적 한계점은 Godel 이래로 잘 알려져 있으며, 확증가능성의 기본 조건이 公理化내지 公式化가능성인 이상 확증론은 Godel에 의해서도 이미 부정되고 있는 셈이다.
19 반증론에 대한 가장 대표적 반박은 아마도 앞서 말한 바 있는 Duhem의 가설 내지 Duhem-Quine 테제일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여, 이론이 검증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하 조사 중에 있는 이론 하나만이 아니고 이론체계 전체이므로, 어떤 이론이 반증된 것인지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론은 개별적으로 확증되거나 반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어떤 이론의 실험 결과 잘못된 여측이 나오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는 시험 과정에 잘못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목하의 이론 자체가 경험적으로 반증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20 사실 이것이 Popper가 말하는 "포섭법칙"으로서, 이 포섭법칙 방법이 위에 언급된 "연역적 법칙론"의 방법인 것이다.
21 "The Legic of Discovery," Science, Methods, and Goals, eds. B. Brody and N. Capaldi. New York: Benjamin, 1968).
22 이 점에 관해서는 Frederick Supper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Theories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77) p.647 참조.
23 각주 22에 언급된 책 pp. 524-5 참조.
24 여기서 "공통적 어휘"란 공통적 관찰 어휘, 즉 보편적 중립 언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5 "theory-unloading"이란 용어는 "theory-laden"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우리말로 직역하기가 힘들다.
26 그리고 Shapere가 "이론적 어휘"란 용어를 사용할 매에는 과학적 추론에 사용되는 어휘를 의미하며, 관찰적 어휘에 대비되는 종전 개념의 이론적 어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27 각주 22에 언급된 책p. 570에서 재인용함.
28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eds. I. Lakatos and A. Musgra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 179.
29 Suppe, 같은 책, p. 727. 각주 22 참조.
30 Suppe, 같은 책, p. 706-7
31 더 자세한 사항은 필자가 쓰고 있는 책에 논의되고 있다.
32 Noam Chomsky, Knowledge of Language: Its Nature, Origin, and Use. (New York: Praeger. 19860, pp. 4-5. 강조표시는 필자가 한 것임.
33 이에 관해서는 「人文科學」 제68집에 실릴 필자의 글에 논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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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문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