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울에..?/닮은홀론

[=] 일상성의 감옥

온울에 2008. 5. 19. 14:17

일상성의 감옥



기묘하고 불가능한 그림


에셔는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서 볼 때 독특한 화가의 대열에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면을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을 연출한 화가는 꽤 있는 편이지만 에셔는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화가들이 다분히 감성적, 비일상적인 측면에서의 현실 초월을 꿈꾸었다면, 그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작업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의 것들을 다루면서도 공간 조작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 설정을 한다.

에셔의 대표작에 해당하는 <상대성>(Relativity)을 보자. 역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계단이 화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의 두 계단은 위와 아래를 향해 있지만 맨 위의 계단은 횡으로 나있다. 아래쪽의 두 계단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앞면과 뒷면 모두 사람이 이동하고 있다. 위의 계단은 한 면이긴 하지만 두 인물이 서 있는 방향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이다. 계단을 따라서 계속 가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하는 순환의 고리처럼 짜여있다.

계단을 중심으로 배치된 인물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좌측 상단에는 남녀가 호젓하게 산책을 하고, 우측 하단에는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 옆 계단으로 한 사람이 쟁반과, 병, 컵을 들고 서빙을 하고 있다. 좌측 하단에는 한 사람이 바구니를 들고 있고 중앙에는 어깨에 짐을 진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옆으로 벽에 앉아서 편안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바닥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수직과 수평의 세계가 서로 다른 세 공간, 그곳에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삶을 한 화면에 묘사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에셔는 원래 풍경화를 주로 그리다가 스페인 남부에 있는 무어 왕들의 옛 궁전인 알함브라(Alhambra)를 본 뒤부터 불가사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슬람 궁전의 벽과 마루를 장식한 모자이크 문양에 완전히 심취했던 것이다. 이슬람교는 일체의 우상 숭배를 금지했는데, 심지어 하나님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도 우상으로 여겼다. 신이든 인간이든 형태가 드러나는 묘사를 금지한 결과 추상적인 장식과 무늬가 발달했다. 연속적인 무늬를 중심으로 한 에셔 작품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알함브라 궁전의 장식에서 얻은 감흥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동양적이었다. 내게 기이한 것은 우아한 장식과 위대한 품위와 전체적으로 단순한 미였다. 그들 아랍인들은 귀족이었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어 양식의 벽화와 마루의 장식들은 이상할 만큼 인간, 동물, 그리고 어떤 형태의 식물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에셔의 작품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그림 속의 상황이 현실과 무관한 설정이라는 것이 한 눈에 확인될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지만, 예셔의 작품은 순간적으로 우리들에게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연출되어 있다. <상대성>을 봐도 그렇지만 그 안에 치밀한 조작이 숨어 있어서 자세히 봐야 우리가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적인 초현실을 다루되 이성을 부정한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인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많은 작품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지고 있는, 반복과 순환이라는 고리이다. <상대성>에서도 계단을 따라서 이동하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이슬람 사원의 문양처럼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해서 묘사함으로써 순환의 고리를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슬람 사원의 문양과는 달리 추상적인 문양의 반복처럼 보이는 경우에서도 모순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걸 잊지 않는다.


반복과 순환의 일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

에셔의 작품 중에 반복과 순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뫼비우스의 띠 2>(Moebius Strip II)를 꼽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면 사각형으로 오려서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뫼비우스의 띠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방향을 매길 수 없어서 따라가다 보면 띠의 뒷면으로 갈 수 있다.

그림을 보면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도는 개미들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개미들은 한 면을 계속 기어가다 보면 어느덧 원점으로 회귀한 뒤 다시 왔던 길로 끝없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개미들에게는 이 띠가 가도 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는 악마의 고리다. 어쩔 수 없는, 숙명적 순환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이 뫼비우스의 띠를 한없이 도는 이 개미와 같은 게 아닐까? 현대인들은 매일, 매주, 매달 혹은 심지어 매년 해가 바뀌어도 거의 비슷한 일상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직접 지난 며칠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해보라. 아마 같은 일들이 같은 시각에 거의 동일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로 갔을 것이다. 같은 교실과 책상에서 저녁시간까지 고정된 자세로 있어야 한다. 점심시간에 약간의 자유가 주어지겠지만 그나마 매일 보는 몇몇 친한 친구들과 비슷한 대화를 나눴겠지. 저녁에는 자율학습을 하거나 학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늦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테고… 수업과 숙제, 시험이 끝없는 터널처럼 계속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대략 16년가량을 동일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직장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출근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기상을 했겠지. 혼잡한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맡기거나 나 홀로 운전자가 되어 졸린 눈을 부비고 있겠지. 저녁까지 사무실 책상을 지키고 있거나, 생산직이라면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추어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겠지. 퇴근 시간이라고 해봐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사를 뒤로 하고 나올 수 없는 노릇이어서 8~9시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고. 어쩌다가 회식이나 술자리가 있겠지만 1~2차로 술을 마시다가 노래방에서 끝나는 뻔한 스토리… 20대 중후반부터 무려 30여 년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 생활이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면 무엇이랴.

당신이 전업적인 가정주부라면? 아침식사 준비해서 남편과 자식 해먹이고 나서는 설거지와 집안 청소, 조금 쉴만하면 초등학생인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점심 해주고 학원 보낸 후 빨래를 하거나 저녁 준비, 혹은 약간의 낮잠 정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없거나 꽤 자라서 자기들이 알아서 할 나이라면 기껏해야 백화점으로 쇼핑 출근이나 문화센터로 향하겠지. 여성들의 어깨 위로 내리누르는 일상의 무게, 그녀들 역시 일상이라는 무거운 반죽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온 가족이 자기의 일을 마치고 모인 밤이나 휴일의 여가시간조차 마찬가지다. 밤 시간은 TV가 주인 행세를 한다. 대부분의 남성이 집에서 손가락 까닥거리는 일이 TV 리모컨 사용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바보상자가 지배한다. 요즘에는 공중파 방송만이 아니라 오락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전문 채널이 생기면서 TV 중독이 더욱 극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간혹 축제나 파티, 외식이나 공연 관람 등을 통해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결국 다시 끝없는 일상성의 늪에 발을 담그게 된다.


일상성을 통한 지배

일상을 되돌아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잡다한 것들의 집합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잡다한 것들이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리고 일상성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분주함과 권태로움, 기쁨과 슬픔 등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들이 뒤섞여있게 마련이다. 평생을 일상적인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반복적인 생활, 이렇게 하루·일주일·한 달을 허덕이며 보내는 삶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 반복되는 일상의 산술적 합이 한 사람의 인생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일상이 소리 없는 지배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전통사회에서 지배는 가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주로 신분이나 폭력에 직접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누가 지배자인지,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확인할 수 있었다. 폭력이 도덕과 연결될 때 지배의 힘은 몇 배로 커진다. 도덕은 어느 정도 자발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 마법의 힘은 더 오래 지속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특히 도덕이 기초하고 있던 절대론적 사고방식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와서는 도덕적 강제도 점차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나 자본과 같은 권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무기가 바로 일상의 지배이다. 사람들을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사회나 정치의 문제, 인간의 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망각케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장치는 없다. 특히 일상의 지배가 개인의 욕구와 연결된 것처럼 여겨지게 될 때 효과와 지속성은 더욱 강력해진다. 일상과 욕구의 연결은 소비사회 속에서 아주 손쉽게 이루어진다.

일성성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이 사회의 목표, 목적, 공식적 정당화는 만족이다. 만족은 어디에 있는가? 최대한 신속한 포식에 있다. 욕구는 하나의 허공과 비교될 수 있는데, 다만 그 허공은 충분히 정의되고 한정된 공동(空洞)이다. 사람들은 이 허공을 메우고 공동을 가득 채운다. 그것이 포식이다. 충족이 되면 곧 만족은 포식을 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장치에 의해 다시 자극 받는다. 욕구를 다시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다시 자극한다. 욕구는 같은 방법의 조작에 의해 자극되면서 만족과 불만족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므로 조직된 소비는 사물만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의해 야기된 만족도 분할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정주부의 덧없는 일상의 반복이 색다른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마치 날로 새로움을 누리는 것 같은 착각과 만족을 불러일으킨다. 여가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세탁기, 식기 건조기, 진공청소기 등을 소비하고, 그렇게 늘어난 여가 시간을 다시 쇼핑을 통한 소비가 차지한다. 직장인과 학생은 소비를 통한 순간의 충족을 위해 생의 대부분을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내면서도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여긴다. 소비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를 대신해버렸다.

정말 인간의 삶은 원래 반복과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란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에셔의 계단에서,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자. 그 꿈의 실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박홍순 (유레카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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