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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uritz C. Escher(1898-1972)의 작품세계

온울에 2008. 5. 19. 16:24

Mauritz C. Escher(1898-1972)의 작품세계

 

 

네덜란드 출신 판화가인 에셔는 동물, 새, 물고기들을 반복적으로 대칭 배열하여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패턴 구도를 사용함으로서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평면적인 패턴과 명확한 3차원적 질감 사이의 모호한 시각적 환영을 통해 현실은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며 객관화되는 동시에 상대화됨을 그의 작품들은 확연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1944년 경부터 그의 작품은 시각적 비현실성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띄게 된다.

 

초기의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그의 작품세계가 차가운 분위기와 팽팽하게 긴장된 생소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의 작픔들에서는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그리고 낮과 밤이 공존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져 물고기는 하늘을 나는 새로 변화해 가지만   배경과 형상의 구분은 여전히 모호하다. 수평의 벽은 어느 순간 수직의 천장이나 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처음에 물이 떨어지는 곳에 도달하는 식이다.

 

이렇게 평면과 3차원이 서로 부딪히는 이율 배반적인 공간으로 자주 형상화되는 가상과 현실 결합의 기묘한 세계는 보는 이에게 혼란을 주어 50년대까지는 예술적 정감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 지극히 정적인 차가움만 감도는 수학적 세계와 같다는 시큰둥한 평가 일색이었다. 하지만 50년대 중반을 고비로  에셔의 '유희적'인 작품 의도에 공감하는 관객층이 늘어났다. 

그 유희는 확실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에 대해 딴지를 걸고,
 불가능하다 여겼던 고정관념들을 비틀어보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놀이였다. 무한히 반복되며 작은 극한으로 수렴하는 형상들로 평면을 분해하거나, 평면과 공간을 혼합하고 심지어는 중력까지 무시하는 그의 놀이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보이며 찬탄하는 매니어 관객들이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었다.

 

이제 에셔의 놀이와 즐거움에 공감하고 열광하는 매니어들은 전세계적으로 수 백만에 달하며, 여기에는 미술가는 물론이고 수학자, 심리학자 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현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그의 작품 컨셉들은 끊임없이 응용되며 업그레이드되는 영감의 원천 역할을 수행해 오는 중이다. 

 

3개의 세계(1955)

 

거울이나 물방울, 유리구슬에 비친 반영상은 에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3개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나뭇잎이 떠있는 수면이 나무가 서있는 물 바깥과 물고기가 헤엄치는 물 속을 동시에 비춤으로서 2개의 공간이 하나로 통하게 된다.

 

무한원형: 천국과 지옥(1960)

 

1926년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을 방문하여 벽과 마루를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아랍풍의 타일 모자이크 조형에 커다란 감흥을 받은 에셔는 이 문양을 자신의 무한공간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는 천사와 악마의 형상들을 4중 및 3중 회전축에 의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무한히 축소 복제하며 무한세계를 보여준다.

에셔는 선과 악으로 대립되는 관계를 'Tessellation' 이라는 대칭적 기법을 통해  "대립의 짝들은 파괴적이 아닌 서로 공존하는 관계"라는 자연의 이원성적 우주관을 자주 드러내었다.

   

원형 극한 3(1959)

 

한쪽 방향으로 향한 물고기들의 끝없는 행렬은 중심으로 접근할수록 커지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작아진다. 에셔는 여기에서도 6중 및 3중 회전축을 사용하며 자기복제적인 'Fractal'을 생성하여 또 다시 무한에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물고기와  새(1938)

 

에셔는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어느 새 하늘을 나는 새로 변형되는 것을 보여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라는 자신의 사상관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펼친다. 

 

낮과 밤(1938)

 

초기 목판화 중 가장 걸출하다 평가받는  작품에서 에셔는 모자이크 양식과 형태심리학의 모티브를 적절히 구현하고 있다. 네델란드풍 마을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 밭은 점차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거위의 실루엣으로 교묘하게 바뀌고, 검은 거위는 왼쪽으로 하얀 거위는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형상을 이룬다.

또 왼쪽에서는 흰 실루엣이 융합하며 낮의 하늘을, 오른쪽에서는 검은 실루엣이 용해되며 밤의 배경을 형성해 '거울 이미지'를 보이며 서로에게 흘러든다. 한편 하얀 거위 무리가 지각될 때 검은 거위 무리들은 배경 역할을 하게 되어 인지되지 않는다. 명도와 명암 대비를 절묘하게 구사하여 형태심리학적 효과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망루(1958)

 

그림 하단에 앉아있는 소년은 입방형의 퍼즐을 손에 들고 있고, 이것은 앞에 펼쳐진 그림 속 입방체 윤곽의 2가지 가능성이 혼합되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입방체의 윗면과 아랫면은 서로 모순되는 '불가능한 대상'이다. 뒤쪽의 망루 역시 동일한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망루 건물 중심에 있는 사다리는 원근법에 따라 올바르게 그려진 듯 하지만 아랫 부분은 망루 내부에, 윗부분은 외부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사다리 위 두 사람의 관계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관계가 된다.   

   

낙수폭포(1961)

 

이 작품 역시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제시한, 부분적 오류는 발견할 수 없으나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펜로즈 삼각형'의 개념을 빌려와 불가능한 패러독스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걸작으로 꼽힌다.

폭포의 물결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처음 출발 장소로 되돌아오게 된다. 고리 각 부분에서는 한 곳도 잘못된 점이 발견되지 않지만 전체적 시각에서 보면 고리 전체가 존재할 수 없는 자가당착성을 내포하기에 패러독스를 느낀다. 우리의 시선이 물체의 선을 따라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체와 관찰자의 거리 관념이 변화한 것을 뒤늦게야 깨닫기 때문이다.    

 

높고 낮음(1947)

 

이 작품의 상단에서 우리는 야자수가 서있는 마을 광장을 3층 높이에서 내려다 보고, 하단에서는 동일 광경을 1층의 시각에서 보게 된다. 지상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바닥에 있는 것과 동일한 타일이 천장에도 붙어있음을 감지한다.

중앙부분을 좀 더 확대적으로 보면 오른쪽 집이 보여주는 시각적 모순을 알게 된다. 소년이 앉아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상의 바닥에 닿지만, 창문을 보면 다시 집의 맨꼭대기 층에 있게 되는 역설을..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에셔는 중세 수도원을 그린 이 그림 속의 '끝없이 순환되는 계단'을 통해 펜로즈 삼각형의 역설을 또 다시 보여준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경건한 신앙심을 보여주듯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두 수도사는 계단 의식 첨여를 거부하는 듯이 따로 앉아있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이 패러독스적 트릭에 빠져 신심도 뭐도 아닌 어리석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믿기 때문이다. 

 

상대성(1953)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바닥과 계단에서 서로 교차하며 걷고 있는데 이는 3개의 중력이 서로 교차작용함을 나타낸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하기에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 한쪽의 사람에게 바닥인 것이 다른쪽에서는 벽으로 변모되는 상대성의 개념을 통해 에셔는 중력까지도 무시되는 새로운 유희를 보여준다.

 

볼록형과 오목형(1955)

 

그림 우측 상단에 깃발 하나가 다리 아래 걸려 있다. 깃발 속 3개의 다이어몬드는 정육면체의 형태를 보이는데 보는 방식에 따라 왼쪽 또는 오른쪽이 그늘진 3개의 정육면체로 지각된다. 이러한 오목과 볼록의 역전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그림 전체를 왼쪽에서부터 3등분하면 왼쪽과 오른쪽 부분은 서로 반대쪽 면을 보여주는 실제처럼 여겨진다. 반면 중앙 부분은 전체적으로 불확실한데, 바닥은 천장으로 내부는 외부로 볼록면은 오목면으로 보여지는 동시적 시각성 때문이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3개의 집 또는 예배당에서 왼쪽은 바깥, 오른쪽은 안쪽에서 본 시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중간 부분 플룻을 부는 두명의 소년을 쳐다보면 헷갈리게 된다.

예배당의 십자지붕을 내려다보며 플룻을 부는 왼쪽 소년은 창문을 내려가 지붕을 건너 집앞 어두운 땅바닥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른쪽 소년의 경우 왼쪽 소년에게서 지붕이었던 것이 머리 위 천장으로 되었고, 그의 아래는 바닥이 아니라 발을 내딛으면 바로 추락하는 심연인 것이다.         

Castrovalva(1930)

 

1920년대 남부 이탈리아 거주 시절 제작한  현지 건축물과 풍경에 대한 작품 중 하나이다. 좁은 시골 길 가장자리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아브루치의 풍경 전망을 에셔답지 않게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려 한 초기 목판화이다. 그럼에도 뭔가 기괴한 분위기를 에셔 특유의 조망도 속에 은은히 풍기고 있다. 

 

Print Gallery(1956)

 

평면과 입체공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 에셔는 왼쪽에 있는 한 젊은 관람객이 실재이자 판화의 일부가 되는 이미지의 중첩성을 보여준다. 즉 화면의 평면성을 깨는 중심부 확대 기법을 사용하여 환영(幻影)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중간의 비어있는 중앙에서 시계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가게 하다보면 저 젊은 관람객 역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의 일부라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끔.. 

   

또 다른 세상(1947)

 

이 작품은 수평면과 수직면이 모종의 상대적 관계를 보여주는 '평면 기능의 상대성'이라는 주제 시리즈의 첫번째이다. 벽에 있는 아치형 창문으로 세가지 다른 풍경이 보이고, 위쪽 창문을 통해서는 가파른 땅바닥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앙 창문으로는 눈높이의 지평선을 보고, 아래쪽 창문으로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시점에서는 바닥이, 다른 시점에서는 천장이 되는 각면의 상대적 기능을 이용하여 심연과 지평선, 하늘을 결합하는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에셔는 절묘하게 통합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유대의 끈(1956)

 

3차원성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소재로서 사용한 나선형 띠로 에셔는 인간관계의 따뜻한 유대감을 표현했다. 이 그림속의 두 남녀는 에셔 부인과 그 자신이다. 둥둥 떠다니는 공들은 무한한 시공간을 상징하며 액체는 생명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변치않게 영원히 보존하는 불멸의 묘약 같아 보인다.

명성을 얻기 전 30년간 궁핍한 시절을 함께 한 반려자에 대한 에셔 나름의 고마움과 애정의 표출이 잔잔하게 배여있는 훈훈한 작품이다.   

 

그림 그리는 손(1948)

 

이 그림은 미국의 더글라스 홉스테더가 자신의 베스터셀러 '괴델, 에셔, 바하'(1979)에서 3인의 천재가 추구한 '영원한 황금실'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에셔적 순환고리를 설명하는 데 인용한 작품이다. 홉스태더는 여기에 나타난 두 손을 그리는 에셔의 실제 손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자신을 언급하는 주체와 객체가 뒤섞여 나타나는 '무한역행'의 순환 패러독스를 보인다고 했다.

이 점에서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은 이 그림의 원형은 이상한 순환고리의 일종인 '뫼비우스의 띠'라고 단언한다.  

 

도마뱀(1943)

 

여기에서 대칭 형상속에 움직이는 도마뱀은 상상력을 표현하는 동물적 매체를 상징하는 듯 하다. 그리하여 현실속에 살면서도 상상력을 통해 사고의 힘을 키우는 지적 유희가, 꼬리가 끊임없이 자라는 도마뱀이 그림속에서 연차적으로 옮겨가는 이동놀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Stars(1948)

 

온갖 종류의 정다면체들이 별처럼 공중에 떠다니고 중심에 3개의 정팔면체가 결합한 구성물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2마리의 카멜레온이 들어앉아 죽은 세계에 생명의 기운이 깃들게 한다. 카멜레온이 선택된 이유를 에셔는 이 짐승의 발과 꼬리가 공간 속을 선회하는 정팔면체의 뼈대를 잡고 있기에 가장 최선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뫼비우스의 띠 1(1961)

 

가도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는 악마의고리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에셔는 인간만사의 그 어떤 벗어날 길 없는 숙명을 나타내는 모티브로 즐겨 다룬다. 결과가 뻔한 쓸데없는 일을 하는데 대한 허망함이 아닌, 숙명적 순환고리를 돌면서 우리 인간의 지성은 더욱 풍성해진다는 희망적 메시지 전달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뫼비우스의 띠 2(1963)

 

뫼비우스의 띠를 좀 더 실감나게 그린 이 그림에서 개미들이 한 면을 계속 기어가다 보면 어느 듯 원점으로 회귀한 뒤  다시 왔던 길로 끝없는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무한역행의 패러독스가 재삼 확인된다. 어허.. 우리 인생도 어쩌면 저럴지도...

 

Snakes(1969)

 

우주를 뱀으로 상징하는 것은 여러 문명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우주의 무한성을 양립할 수있는 해답을 찾는 것은 헤겔을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이 그림에서 원의 중심쪽과 가장자리쪽으로 고리들은 무한히 작아진다. 에셔는 이런 식으로 유한한 평면에 뱀의 또아리를 통해 우주의 무한한 과정을 담으려 했다. 진중권의 물음대로 '원시적이면서도 영원한' 그 무언가에 접근하는데 어찌 좀 성공한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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