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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와 유토피아적 상상력

온울에 2008. 5. 26. 03:58

발행자명 현대영미어문학회 
학술지명 현대영미어문학 
권 17 
호 2 
출판일 2000. 2. 29.  

 

 

 

모리스와 유토피아적 상상력


장남수
울산대
1-187-0001-04

영문요약
William Morris and the Utopian Imagination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quality of William Morris’s utopian imagination, as shown in his New from Nowhere and some articles. ‘Nowhere’ is an ideal England where all sorts of squalor and ugliness from the capitalist competition and exploitation are purged. It is the classless society, blessed with freedom and equality, without any tinge of dichotomy between mental labour and manual labour Art in this society is coterminous with the “expression by man of his pleasure in labour.”

The chapter named “How the Chance Came” describes the actual courses of revolutionary change: strikes, lock-outs, and armed fighting between the Combined Workers and the Friends of Order. This is proved to be the process of not only building new social system and organizations but also developing alternative values and adequate administrative abilities. Here is the point of Morris’s imagination. That is, Morris is urging us to interrogate ourselves and our opinions, so that our habitual way of life might be dismantled. Due to Morris’s utopian imagination we, the readers are able to enter into utopia’s proper sphere, ‘education of desire,’ which is, according to E. P Thompson, “to open a way to aspiration, to teach desire to desire, to desire better, to desire more, and above all to desire in a different way.” In short, ‘Nowhere’ is the product of Morris’s imaginative commitment with reality,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idle fantasy.

Traditionally Marxism distinguishes the scientific socialism from the utopian socialism, and criticizes the latter for its day-dreaming and escapism. But Morris’s utopian imagination makes him an original socialist thinker whose work might supplement the ‘weakness’ of Marx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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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가 빠져 있는 세계지도는 쳐다볼 가치 조차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도는 인류가 언제나 발 디디고 서 있는 하나의 나라를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 지난 몇 년간 영문학계에서 진행된 ‘영문학 위기론’이나 ‘정전 논쟁’에 대해 필자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1). 문학이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는 태도의 문제점이나, 여타의 의미화 실천 행위에 비해 문학이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처음부터 간주하고 그것을 신비화하는 충동을 견제하는 까닭에 대해 동의하지 못해서는 아니다. 또한 기존의 문학정전이나 고전이 유럽중심주의나 인종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같은 다양한 억압구조의 산물이면서, 그와 동시에 이러한 억압구조를 은밀한 형태로 재생산하는데 기여해왔다는 이들의 지적에서 경청할 바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러나 가치판단이나 문학적 성취의 질에 대한 물음을 적대시하는 이들의 기본 생각이, 만물을 동일한 척도로써 평가한 후 전환의 대상으로 삼는 자본의 운동방식에 대한 ‘대응’으로는 처음부터 태부족이 아니냐는 의문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담론행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의미나 힘이 문학에만 유별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도 자신들은 문학 논의에 각별한 노력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필자로선 요령부득인데, 이러한 생각은 이들이 문학의 힘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은 그러한 ‘부정’의 전략을 통해 새로운 ‘힘’을 구축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전을 둘러싼 논의가 제기하는 이런저런 문제와는 별도로, 그간 주류영문학계에서 소홀히 처리되어온 작가나 작품 자체를 새롭게 주목하고 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다루려는 이유도 모리스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소박한 생각 때문인데2), 우선 국내외 대학의 영문학 개관이나 영문학사 시간에 즐겨 이용되는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가 모리스에게 할애하는 분량이나 수록하고 있는 내용부터가 문제라는 생각이다. 모리스의 본령은 1880년대 초에 사회주의3)로 개종한 이후에 발표했던 산문들과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 1890. 이하 『소식)으로 약함)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작 대신에 황당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는 『기너비어의 옹호』 (The Defence of Guenevere, 1859) 같은 운문만을 싣거나, 더 나아가 모리스에 대한 소개를 아예 생략하는 것은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가 대표하는 미국학계의 지나친 자기검열과 정전의 폐쇄성, 보수성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현실사회주의가 내외의 모순 때문에 붕괴한 오늘날 ‘사회주의’는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셈인데, 사람살이의 이상적인 방식에 대한 모색을 봉쇄하는 행위는 결국 현재에 안주하여 미래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는 행위와 마찬가지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모리스는 빅토리아조의 사회상과 사상사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낭만시인이나 빅토리아조의 작가들이 맞대했던 제일 큰 관심사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대두되는 제반 현안들에 대한 창조적 대응의 문제이었다. 19세기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체계적이고 일관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고 계급적으로도 소시민의 테두리에 갇혀 있었던 반면, 모리스는 그 자신이 사회주의운동4)에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운동을 통해 성립하는 유토피아 사회를 제시하여 대중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자 노력한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일차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리비스(Leavis 81)가 당대 사회에 대한 창조적 대응이라는 각도에서 빅토리아조의 산문작가들을 비교하면서 모리스가 아놀드(Matthew Arnold)보다는 못하지만 칼라일(Thomas Carlyle)이나 러스킨(John Ruskin)보다는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 것도 모리스가 보여주는 창조적 사유와 인간적 진지성의 깊이에 대한 그 나름의 판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주로 다루려는 작품은 『소식』인데, “유토피아적 로맨스의 몇몇 장들로 이루어진 휴식의 시기”(an epoch of rest being some chapters from a utopian romance)라는 그 부제가 알려주듯 이 작품은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다5). 알려진 대로 유토피아는 살기 좋은 이상사회라는 뜻과 함께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찬길 교수는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에서 비롯된 유토피아라는 낱말의 이중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어는 이 작품에서 …이상적인 사회제도를 가진 섬나라륵 묘사했는데, 그 이름을 그리스어의 U(없음)와 Topia(장소)를 결합하여 유토피아라 했고, 이것은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 즉 현실에는 결코 없는 불가능한 사회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또다른 복합어 Eutopia(Eu좋은 + Topia장소)와 동음 이의어를 이루면서, 결국 유토피아는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이상사회”라는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9)

본고에서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현실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그것이 도피적인 성격을 지닌 것인지, 아니면 당장에는 실현 불가능하더라도 새로운 꿈을 희망하고 욕망하도록 자극해서 결국엔 현실과 고차원의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인지의 문제와, 모리스의 상상력을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맑시즘에 비추어서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컨대, 모리스의 사회주의 정치사상만을 평가하는 윌리엄즈(Williams 159)는 모리스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 산문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How We Live, and How We Might Live), 「예술의 목표」(The Aims of Art), 「유용한 노동과 쓸데없는 노역」(Useful Work versus Useless Toil) 같은 정치적 글을 꼽으면서, 『소식』이나 『존 볼의 꿈』 (The Dreamm of John Ball 1886) 같은 작품은 몽환적인 초기시의 약점이 여전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모리스가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하기 위해선 극복했어야만 할 대상인지, 아니면 모리스를 다른 사회주의자와 구별시키고 그의 사상에 독창성을 부여하는 요소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2) 모리스가 1890년에 『소식』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벨라미(Edward Bellamy 1850-98)의 『뒤를 돌아보며』(Looking Backward, 2000-1887)라는 작품이 1889년에 출간된 사건이었다. 모리스는 2000년의 보스톤(Boston)시를 미래의 이상사회로 제시한 벨라미의 작품에 대해 “나는 그가 상상하는 식의 런던풍 천국(a cockney paradise)에서는 결코 살고 싶지 않다”(Thompson 542)고 비판하였는데 실제, 『뒤를 돌아보며』는 인간 삶의 모든 면면이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평가되고 통제되는 사회로서 “기계장치가 세상을 지배하는 악몽 같은 광경”(Faulkner 339)에 불과하며, 이 사회의 사람들은 “강제되고 병영화되고 관료주의화된 톱니바퀴”(Coleman 88)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모리스는 벨라미가 제시한 2000년 보스톤 같은 사회는, 변화를 추구하는 기본 정신과 방향에는 관심이 없으면서--그가 다른 자리에서 사용했던 용어를 빌리자면--“사회주의라는 기계장치”(“Communism” c 660. 강조는 원저자)를 보여주는데 몰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모리스의 ‘노웨어’(Nowhere)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복지 사이에 통합된 전체”(Mineo 9)를 구현할 수 있는 핵심적 이유는 이 사회에서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기 때문이다. 좋은 노동은 휴식과 생산품에 대한 희망 이외에도 일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Useful Work versus Useless Toil” d 118)이 모리스의 생각인바, ‘노웨어’의 일은 그것이 제공하는 즐거움 때문에 예술과 하나가 된 경지로 제시된다. ‘노웨어’에서의 생산이나 일은 최소량의 노동을 투여해서 가능한 많은 제품을 생산한 후 그것을 세계시장에 내다 파는 무한생산이 아니다. 실수요자를 위한 생산이고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활용하는 생산방식인 것이다. 이행기의 역사에 대해 소상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해몬드(Hammond) 노인이 혁명 이후에 생겨난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대해 『소식』의 화자인 게스트(William Guest)에게 설명해주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예술 또는 일의 즐거움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본능과 같은 요소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 같소.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고 끔찍한 과다한 일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리지 않게 되자, 당장 하고 있는 일을 최대한 잘하려는, 즉 탁월한 것으로 만들려는 본능이 발휘된 거지요. 그리고 일정 기간 이런 일이 지속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겨난 듯합니다. 그들은 조야하고 어색한 방식으로라도 자신들이 만드는 자기를 장식하기 시작했으며 일단 장식을 시작하자 장식하는 경우가 곧바로 증가했지요. …그래서 더디지만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즐거움을 갖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을 알게 되자 우리는 그것을 개발했고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도록 주의를 기울였던 거지요. 그러자 모든 일이 해결되었고 우리는 행복한 겁니다. 이런 날이 영원, 영원하길!”(114-15)

노동이 고통이나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상황, 노동이 주는 즐거움을 상실할까 두려워할 정도로 사람들이 변화한 것, 이것은 자본주의의 노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노동을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발현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이 부재한 경우, 미래사회의 기구와 제도를 아무리 이상적으로 그리더라도 그 사회에서의 노동 자체가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과 자기충족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일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엔 가능한 적게 일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이나 여가시간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벨라미가 상상하는 미래사회는 삶과 일의 분리라는 현대문명의 난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사회로 제시되고 있다. 아니 더 나아가, 2000년의 보스톤을 찾아온 웨스트(Julian West)에게 이 사회의 여러 운영원리를 설명해주는 역을 하는 리트 박사(Doctor Leete)가 자랑스레 전달하는 얘기를 듣노라면 반성적 사유의 결핍과 상상력의 빈곤을 절감하게 된다.

“국민들에게 안락한 물질적 삶을 확보해주기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만 하는 노동은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는 가장 중요하거나 재미있거나 고상한 일로 더 이상 간주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은 수행해야 하는 필요적 의무로 생각하지요. 그 이후에나 우리들은 우리의 재능을 최고로 발휘하는 일에, 즉 진짜 삶을 의미하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향유와 작업에 매달릴 수 있는 겁니다.”(148)

벨라미의 2000년 보스톤에서 “우리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는 일을 회피하는 거였습니다”(Morris a 154)라는 딕(Dick)의 발언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표현”(“The Art of the People” c 530)이 곧 예술이라는 모리스의 생각은 14세기 중세 고딕예술을 이상적인 예술로 파악하는 예술관 내지 사회관과 연결된다. 모리스가 봉건사회의 질곡과 빈곤에 무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최상의 예술가도 장인에 불과했지만 가장 비천한 장인도 예술가”(“Art under Plutocracy” b 59)이었던 중세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모리스에게는 중요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회의 질과 예술의 질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모리스의 독창적인 사상이라기보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러스킨의 핵심사상이었다. 그러나 러스킨이 예술은 그 시대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개진하는 데 그쳤다면, 모리스는 예술의 타락을 가져온 사회의 타락과 자본의 착취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생각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술의 재생이 예술적인 문제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는 자각이 깊어지고 동방문제(Easters Question)나 고건축물보수 반대운동(Anti-Serape) 같은 현실문제와 씨름하던 중, 모리스는 1883년에 맑스(Marx)의 『자본론』(Capital)을 읽게 되고, 그 이후 사회주의자가 되는 ‘불의 강’을 건넌다고 한다(Thompson 271). 따라서 모리스의 사회주의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예술가의 눈으로 본 사회주의”(“A Rather Long-Winded Sketch of My Very Uneventful Life” d 32)인 것이다.

『소식』이 보여주는 ‘노웨어’의 모습을 조금 살펴보자. ‘노웨어’에는 사유재산이 없고 계급차이나 노동의 강제가 없을 뿐 아니라 교환가치의 상징인 화폐도 없으며 도시와 농촌의 구분도 없다.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나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가 없는 전원적인 이곳에서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하며 자연과 조화한 채, 자신의 개성을 최대로 계발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소식』을 훌륭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만드는 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매력적인 묘사, 그 자체가 아니다. 19세기에서 온 화자인 게스트는 ‘노웨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알맞게 탄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 등 건강한 육체를 보고 자기 시대 사람들의 뒤틀린 육체를 되돌아보게 되는데, 이처럼 게스트가 ‘노웨어’를 여행하면서 수행하는 떠나온 ‘현재’와 목격하고 있는 '미래'의 비교ㆍ대조, 또는 게스트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독자가 수행하는 자의식적인 반성이야말로 『소식』을 공허한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현실에 밀착한 유토피아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일조한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소식』과 『뒤를 돌아보며』의 결정적 차이인 만큼 빅토리아조 사람인 화자가 이상사회를 돌아보며 겪는 경험이 화자나 독자에게 떠올리는 생각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게스트가 ‘노웨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템즈강에서 배를 태워준 딕이라는 인물이다. 자신이 떠나온 사회의 관습대로 배삯을 지불하려하자 금전관계를 모르는 딕은 이상한 눈으로 동전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왜 이러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께 봉사를 했으니 뭔가를 줘야만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이런 얘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내겐 골치 아프고 번거로운 관습으로 여겨질 뿐이라고 말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까요. 선생님이 보시다시피 사람들을 배로 건네주거나 강 중간에서 태워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하는 내 일입니다. 그러니 내 일을 하면서 답례를 받는 것이 아주 이상하게 여겨질 밖에요.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내게 뭔가를 주면 그 다음 사람도 줄 것이고 또 그 다음 사람도, 끝이 없지요. 그러니 내가 수많은 우정의 기념품들은 어디다 처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라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일에 대한 답례로 뭔가를 받는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이 큰 소리로 쾌활하게 웃었다. (7-8.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딕의 반응을 보고 게스트는 상대가 미친 인물이 아닌가 걱정하며 자신이 수영을 잘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모리스가 실제로 행하는 것은 금전지불관계로 얽힌 빅토리아조의 관습과 금전관계에서 자유로운 ‘노웨어’의 인간상을 대조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가치관을 비판하는 일이다. 블룸즈베리(Bloomsbury)에 사는 딕의 증조부에게 가는 도중에 장날인데도 촌티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놀라는 게스트의 반응, 19세기의 의회건물을 “거름창고”(26)로 쓰는 현실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묘한 느낌 등은 모두다 공소한 이상의 제시에 그치는 게 아니다. 빅토리아시대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할 때 113년에 걸친 "혼수상태"(52)를 겪고 2000년 보스톤에 오게 된 웨스트의 경험은 현실과의 긴장이라는 측면에서 그 밀도가 훨씬 덜하다. 국가가 생산ㆍ분배ㆍ유통의 전과정을 장악하고 있는 이 사회의 체계는, “아무리 못돼먹은 관리라도 자기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이익을 안겨줄 방도가 전혀 없"(68)을 정도로 완벽하며 사회적으로도 완전 고용과 물질적 풍요가 실현된 이상향이다. 그러나 이것이 빅토리아조 문명을 비판하는 준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인데, 그 일차적인 이유는 주인공이 떠나온 19세기 현실과 지금 겪는 21세기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의 보스톤을 가끔씩 회상한 때에도 타락한 사회에 대한 도전의식이나 개혁의지를 읽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웨스트가 최종적으로 2000년에 그냥 머무르는 플롯도 현실에의 도전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주인공이 중간에 19세기로 잠깐 돌아왔던 것은 문자 그대로의 ‘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소식』의 경우, 꿈의 한복판에서도 비참한 현실이 화자를 통해 부단히 상기되기 때문에, 그리고 화자 자신이 떠나온 시대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휩싸여 있기 때문에 독자는 불안하게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사회와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자인 게스트는 이상과 현실, 독자의 경험과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Thompson 694).

두 작품의 또다른 결정적 차이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 대한 설명이다.『뒤를 돌아보며』에서는 이 과정이 평화로운 “산업적 진화과정의 결과”(61)로 제시되는 데 반해,『소식』에서는 각성한 대중의 투쟁의 결과로 제시된다. 대중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89)이 평화롭게 실현된 것은 아닌데, 노동자들의 ‘노동자연합’과 사용주들의 ‘질서의 동지회’ 사이의 길고도 험난한 싸움 과정에 대한 묘사는 자본주의의 정제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모리스의 냉엄한 인식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모리스의 서술이 특히 주목에 값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이 사회의 기존 조직을 바꾸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적절한 행정능력”(110)을 학습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꾸어가는 건설의 과정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사회의 기존질서가 붕괴한 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해몬드 노인이 게스트에게 해주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 체계가 붕괴하고 사용주가 행사하던 압력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벗겨지자 단순히 동물적인 필요와 인간의 정념만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 같았고 그에 따라 전반적인 붕괴가 생겨날 것 같았습니다. 대중이 처음에는 사회주의적인 이념에 의해, 그 다음에는 앞서 말한 노동자조직(‘공공안전위원회’를 지칭--인용자)의 성원이 많은 수를, 실제로는 다수를 차지하는 공공연한 사회주의자들과의 실제 접촉을 통해 고무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런 붕괴는 틀림없이 일어났을 겁니다.”(106)

‘노웨어’의 평화와 행복은 기나긴 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관--사회주의적 가치관--을 체득하고 노동에 기초한 행복의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리스에게 있어 사회주의란 단지 사회주의적인 생각이나 이념을 갖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 활동에 대중이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새로운 가치관과 깨우침, 그로 인한 변모가 중요한 것이다(Crump 65-66). 이제 ‘욕망의 교육6)’ 이라는 각도에서 모리스가 『소식』을 집필한 까닭에 대해 살펴볼 때가 되었다.

『소식』의 첫 장인 「토론과 취침」(Discussion and Bed)은 사회주의자연맹에서 “혁명의 아침”(1)에 벌어질 사태에 대한 분분한 토의에 지친 어떤 사회주의자가 “그 날을 하루라도 보았으면”(2)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꿈에서 보게 된 “놀라운 사건들”(3)을 이 이야기의 화자에게 전해주었는데, 화자가 이야기 전달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일인칭 형식으로 독자에게 전하겠노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자가 꿈에서 본 환상이 『소식』의 전체 내용을 이루는 셈이며, 마지막 장인 「축제의 시작, 그리고 종결」 (The Feast’s Beginning--The End)은 일인칭 화자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꿈에서 깨어나 처음 잠들었던 침대에 일어나 앉은 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해머스미스에 있는 누추한 내 집 침대에서 이 모든 일을 생각하며, 내가 꿈을 꾸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절망에 휩싸이지 않았는지를 곰곰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내가 그다지 절망하고 있진 않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182)

화자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노웨어'에서 화자를 사로잡았던 엘렌(Ellen)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엘렌의 슬픈 마지막 표정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했다. …“돌아가세요, 우리를 보았고 당신의 투쟁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더하게 된 만큼 좀더 행복하게 생각하세요. 어떠한 고통과 수고를 반드시 겪는다 해도, 친교와 휴식과 행복의 새 날을 조금씩 조금씩 건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살아서 계속 노력하세요.”

그렇다, 물론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볼 수 있다면, 그때 그것은 꿈이라기보다 비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182)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이 보여주듯 모리스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 열렬한 욕망”(“Communism” c 662)을 심어주어서 혁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를 보여주어서 독자들을 ‘교육’ 시키겠다는 의도야 벨라미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벨라미의 기획이 실패하는 주된 까닭이 현실과 이상의 긴장관계를 통해 독자의 시선을 현실에 붙잡아두지 못한 때문임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벨라미의 경우, 주인공인 웨스트가 잠깐 되돌아갔던 1887년 보스톤의 지인들이--약혼녀와 장인을 포함하여--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웨스트의 말에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기획’의 실패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모리스는 조직과 체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대안적 가치관을 지니도록 교육하는 것 즉,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살이의 방식을 상상하고 새로운 욕망을 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모리스 스스로가 “우리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자라온 상태와 전혀 다른 상태에서 이루어질 삶의 세부 사실들을 그려낸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A Factory as It Might Be” c 646)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톰슨(Thompson)에 의하면 모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해결책’이나 미래사회의 모습에 대한 독자들의 동의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대안적 가치를 모색하는 일에 독자가 함께 참가하는 모험인 것이다. 톰슨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모험을 하면 두 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하나는 우리의 인습적인 가치관, 즉 부르주아사회의 ‘상식’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유토피아의 고유하고 새로 발굴한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의 교육이라는 영역이다. 이것은 정해진 목적을 향한 ‘도덕교육’과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열망의 길을 여는 것이고 “욕망을 하되, 더 낫고 더 많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이한 방식으로 욕망하도록 욕망을 가르치는” 일이다. 모리스의 유토피아주의는, 성공하는 경우, 욕망을 해방시켜서 우리의 가치관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도록 만들고, 욕망 자체에 대해서도 질문하도록 만든다. (790-91. 강조는 원저자)

거듭 말하지만, 모리스의 유토피아주의는 역사나 현실에서 도피하여 독자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부재하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과 더불어 실현 가능한 것에 대한 희망의 산물이기에, “소박한 낙관론의 반대이자 그 속에 위험의 범주를 항상 포함하고 있는”(Bloch 16) 진정한 유토피아주의인 것이다. ‘노웨어’ 사람들의 생활상이 자기 시대의 불행을 생각나게 만들기 때문에 괴로워하던 화자이었지만 그 꿈을 자신이 현실과 싸워나가는데 필요한 전망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 꿈에서 본 비전이 낯선 세계를 몽상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을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모리스가 『소식』에서 발휘하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골자인 것이다.

(3) 그러나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어떻게 평가한 것인가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닌 듯하다. 사회주의 이론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면서 미래사회에 대한 상상을 죄악시하고 혁명의 전략과 진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가르치는 전통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엥겔스(Engels)는 공상적 사회주의는 “시간, 공간 및 인류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409)에 공허한 것이며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워야만 한다”(410)고 강조한바 있다.

우선, 칼라일, 러스킨 등 영국낭만주의의 산업주의 비판 전통에서 성장하여 ‘불의 강’을 건넌 후 사회주의자가 된 모리스의 생각이 맑스주의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차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모리스가 작성하여 1885년 7월 5일의 사회주의자연맹 총회에서 통과된 “사회주의자연맹 선언서”(The Manifesto of the Socialist League)는 계급과 민족의 구분을 철폐하는 혁명적 국제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적대적 계급투쟁, 모든 생산수단 및 분배수단의 공동소유를 주장한다(Thompson 732-40). 『소식』에 나타나는 이 행기에 대한 실명과 국가나 계급차이의 소멸, 도농의 격차 해소, 행정적 강제 대신에 공동의 도덕성에 기초한 자율적 규제, 해방과 평등의 비전 등은 맑스주의와 공통되는 사항이다. 물론, 수공업의 전반적 부흥이라는 문제나 자본주의의 ‘진보성’에 대한 부정 등, 모리스의 비전이 맑스주의와 상치되는 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Anderson 165-66). 그러나 맑스주의와 모리스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따지는 일에 몰두하는 방식은 모리스의 본령에 제대로 주목하는 길이라고 할 수 없겠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모리스의 강점은 미래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개별묘사의 적합성보다는 대안적 가치관과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며 독자들이 익숙해 있는 기존 제도나 현실을 반성하고 그 도덕성에 의문을 던지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맑스ㆍ엥겔스의 지적을 좇아, 미래사회에 대한 일체의 사유를 공상적이고 공허한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맑스주의를 “최종판결을 내릴 유일한 자격이 있는 일종의 대법정”(789)으로 생각하는 꼴이라는 톰슨의 지적에는 경청할 점이 분명히 많다. 『소식』에 드러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공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화자의 자의식적 반성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긴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인바, 이것이야말로 엥겔스가 시간, 공간, 인류의 역사 발견 같은 “현실의 토대”에 주목하도록 강조했던 진짜 이유라고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사유하되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사유하기, 이것이 요체인 것이다.

모리스를 이처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이분법을 문제삼는 행위이기도 하다. 톰슨은 맑스주의가 모리스식의 유토피아적 상상력마저 무시하는 경우, “도덕적 자의식이나 심하게 말해 욕망이라는 낱말의 결여, 미래에 대한 상을 투사할 수 없는 무능력,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들 대신에 공리주의자의 세속적 천국에 의지하려는 경향”(792)을 강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새로운 인간상과 새로운 가치관을 탐색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야말로 모리스를 독창적인 사회주의 사상가로 만드는 핵심이며 그만큼 모리스의 작업은 맑스주의에 보완적인 요소라는 것인데, 톰슨은 “모리스를 맑스주의에 순응한 맑스주의자로보다 전화된 낭만주의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786)고 강조한다. “모리스는 전화된 낭만주의 전통이 지닌 최대한의 힘을 등에 업고 있는 공산주의 유토피안이다”(792)라는 것이 톰슨의 최종적 결론인바, 낭만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전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다.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작업이 요구되는 사항이므로 여기서는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영국에는 서로 대척적인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지적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벤삼(Jeremy Bentham)이 대표하는 공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고 다른 하나는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칼라일 등이 대표하는 낭만적이고 인본적인 전통이다. 전자가 영국의 산업화를 주도한 정신이었다면, 후자는 산업주의의 비인간성과 무자비한 이윤추구, 기계적 행동양식 및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월리엄즈의 『문화와 사회 1780-1950』(Culture and Society 1780-1950)라는 저서는 산업주의를 비판하는 영국 지식인의 사상적 전통이 최초의 산업화에 반응했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생각과 용어를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서술한다. 산업화의 충격을 일차적으로 겪은 이후, 낭만시인들이 점차 개인의 내면이나 예술의 세계로 ‘침몰’하였다면 낭만주의의 비판적 전통을 일차적으로 계승한 인물은 칼라일과 러스킨 같은 빅토리아조의 산문작가이다. 모리스는 예술의 질이 사회 전반의 삶을 반영한다는 러스킨의 생각을 이어받되 사회 전반의 조건을 예술에 우호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사회주의 실천활동에 참가함으로써, 러스킨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톰슨이 말하는 ‘전화’는 ‘연속’과 ‘단절’을 함께 아우르는 낱말인 것이다.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낭만주의적 일탈에 불과하다는 피어슨(Stanley Pierson)의 견해를 반박하는 톰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모리스의 낭만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한 설득력있는 해명이다.

첫째, 피어슨과 달리 나는 몇몇 결정적이면서도 지배적인 사회주의 개념들이 모리스의 낭만적 비판에 ‘덧씌워져’ 있는게 아니라 정말로 통합되어 있는데, 그것도 옛 전통과 균열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전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정도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피어슨과 달리 나는 낭만주의 전통이 오로지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퇴영적’이고 ‘도피적’이며 ‘공상적’인 특징을 갖는 것으로, 즉 모리스를 ‘주관주의’와 ‘관념주의’로 언제든 끌어당기려고 하는 항상적인 저류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체 안에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맑스와 엥겔스 글이라는 침전물과 무관하게 이런 전화를 수행할 수 있는 자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779)

『소식』에서 드러나는 모리스의 비전은 일상적 노동에서 삶의 즐거움과 예술을 앗아간 19세기 빅토리아조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멘끌라뚜라라는 전문관료층이 대중을 지배하는 가운데 대중은 기계적인 노역에 시달리곤 했던 현실사회주의의 불모성과 반창조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현실사회주의를 아우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필자가 『소식』이 최고수준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화자의 가부장적 음성에서 엿보이는 여성문제에 대한 모리스의 이해 부족을 비판할 수도 있고, 작가의 상상력이 중세취향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인터내셔널이 결성돼 있던 시대상황에서 영국내의 일국혁명을 얘기하는 그의 국제정치적 인식 수준을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성을 이해하는 모리스의 방식이 지나치게 단선적 이어서 ‘노웨어’ 주민들의 생활이 다소 정태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노웨어’를 구성하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지닌 강점과 미덕이 무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데, 그것은 게으름을 혐오하고 노동을 중시하는 ‘노웨어’ 주민들의 생활태도나 가치관이 자본주의의 착취와 비참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결부되면서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대안적 가치관을 모색하도록 독자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자연과 조화한 ‘노웨어’의 삶이 보여주는 모리스의 생태주의적 관점을 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별도로 다루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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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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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길. 「낭만주의 시대와 유토피아」 「안과밖」 6(1999):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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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영문학 위기론’, ‘정전 논쟁’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국내의 논의로는 김영희, 「영문학 위기론의 재검토」, 『안과밖』 1(1996): 78-109 및 유명숙, 「정전 논쟁: 그 허와 실」, 『안과밖』 1(1996): 110-34 참조.
2) 모리스에 대한 최근의 국내 연구로는 그의 예술관을 다룬 계원봉, “William Morris’s Socialist Ideal of Art” 『근대영미소설』 5-1(1998): 5-24 및 모리스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서라 할 수 있는 박흥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서울: 개마고원, 1998) 정도가 눈에 띈다.
3) 모리스에 있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맑스주의는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4) 1883년에 사회민주주의 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에 가입한 모리스는 1884년 12월에 SDF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의회사회주의보다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에 헌신하는 조직체인 사회주의자연맹(Socialist League)을 결성하여 동 ‘연맹’의 재정적 후원자로, 그리고 동 ‘연맹’의 기관지인 『공화국』(The Commonweal)의 편집자로 활동한다.
5) 홀쯔만(Michael Holzman 589-603)은 『소식』을 유토피아 문학의 예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연맹 내에서 모리스가 무정부주의자와 벌였던 정치투쟁의 산물로 읽는데 이는 본고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6) 톰슨의 모리스 이해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욕망의 교육’이라는 용어는, 아방수르(Miguel Abensour)가 그의 학위논문인 Les Formes de L’utopie Socialiste-Communiste라는 글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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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장남수
울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