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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과 예술적 창의성

온울에 2008. 5. 26. 04:02

목 차

1. 들어가면서: 상상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 우리는 창의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인간 교육과 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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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지명 논문집 
ISSN  
권 4 
호  
출판일 2001.  

 

 

 

상상력과 예술적 창의성


진형준
8-515-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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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상상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력과 창의성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자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창의성이라는 단어 앞에 예술적이라는 수식어라도 붙게 되면 우리의 그러한 편견은 더욱 공고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과감하게 편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듯이 상상력을 그 말의 아주 광범위한 의미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힘과 기능’으로 이해할 때 상상력은 예술가 등 천부적 자질을 부여받은 일부 사람에게서만 풍요롭게 발휘되는 기능이 아니라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해있는 기본적인 기능이다. 사실 상상력에 천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기에 예술가들의 자부심도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의 인식론적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른바 합리주의 혹은 로고스 중심주의의 이름으로 상상력이 서구에서 어느 정도 평가절하되어 왔으며 ‘유치한 인식 단계’ 혹은 ‘오류와 거짓의 원흉’으로 얼마나 배척받아 왔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서구에서 상상력이 그렇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상상력의 기능이 원초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역으로 증명해 준다고 나는 본다.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을 제대로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에 의뢰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합리주의는, 인간의 그러한 합리주의적인 노력이 결여되어 있는 자리에서 왕성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보고 그러한 자연스러운 활동을 이성의 이름으로 억압한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감하게 말한다면 서구에서 일고 있는 온갖 분야에서의(자연과학에서의 신 과학정신을 포함해서) 새로운 인식론적 혁신과 방향전환의 움직임은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인식활동으로서의 상상력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서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던 상상력이 어떠한 흐름과 과정을 거쳐 그 기능과 의미를 복권시키게 되었는가를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단지 몇몇 상상력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자들 덕분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생산적인 결론들을 몇 가지 요약하는 것으로 상상력에 대한 의미 규정을 대신하기로 하자.

첫째, 프로이트, 융 등의 정신분석가, 카시러 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자, 폴 리쾨르 같은 해석학자, 그리고 그 외에 미르세아 엘리아드, 앙리 코르벵, 가스통 바슐라르 등의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대로 상상력은 인식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인간인식 활동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원초적이며 인간의 개념적 사유의 바탕에는 상상력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바슐라르를 통해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와의 은밀한 합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며 인간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둘째, 바슐라르가 상상력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을 통해 흘깃 예감한 것이며 상상력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화를 통해 상상력에 입각한 새로운 인류학을 정립하겠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질베르 뒤랑이 밝혀낸 대로 상상력의 활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무한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상상력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화의 작업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계의 구조는 인간의 포유동물로서의 무의식적 충동의 층위와 그러한 생물학적인 본능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사회적 환경 중 그 어느 것도 우선시하지 않는,말 그대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을 필요로 하는 구조로서 그 구조는 역동적이고 상형적이며 다원적이다.

셋째, 뒤랑의 업적이 밝혀낸 가장 중요한 사실들 중의 하나로 합리성과 상상력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다원적인 인간의 상상계는 각각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합리성 자체도 복수화(複數化)되며 이른바 서구의 합리주의는 이러한 다양한 합리성 중의 한 부분으로 포섭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의 활동이라는 것도 보다 폭 넓고 일반적인 상상계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활동이된다.

넷째, 위의 셋째 결론에 당연히 뒤따르게 되는 것으로서 인간 상상력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는 결국 인간학 자체를 이미지 중심주의, 상상력 중심주의로 이끌게 되고 상상력에 입각한 인류학은 다원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에서 차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보고 또한 그 차이 너머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공통 토대를 보는 인류학, 또한 그 차이의 역동적 관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인류학, 새로운 인식론을 낳는다.

2. 우리는 창의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상상력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인식 활동에 대해 그렇게 새로운 관점을 채택하게 되면 자연스레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행해질 수밖에 없다. 반복하거니와 창의성을 천부적인 자질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그리고 그 통념은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 말이 왜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깐 낭만주의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예술가의 창의성이 일반인들은 지니고 있지 않은 천부적인 자질로 이해되고 예술가가 신비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 바탕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운동 이전의 예술가·문학가는 일반인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자신만의 생각을 지니고 그것을 표현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기보다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각, 그러나 아무도 그럴 듯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사람이었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이었다. 따라서 훌륭한 예술가는 보편적인 진실을 일반인과 고유하고 있는 홀륭한 교양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다고 보아도 된다.

그런데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현실을 수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 너머를 보고 실재 세상에서 부재해 있는 것을 추구한다. 현실 너머를 보고 현실 속에 부재해 있는 것을 보겠다는 태도는 그 자체로 낭만주의자에게 신비스러운 면모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일을 중심으로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유럽의 일반적인 정신 풍토는 어떠했는가? 주지하다시피 독일에서의 낭만주의 운동은 당대에 풍미하고 있던 계몽주의 정신(우리는 계몽주의를 고전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할 수 있다)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계몽주의의 합리적 이성에 대항하여 낭만주의자들은 무엇보다 환상의 기능을 중시한다. 그들에게 환상은 이성적 사고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 또는 의식의 통일성을 형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이성은 세계의 불충분한 표면에만 머물 뿐 세계의 깊은 통일성에 대한 인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서구의 전통적 인식에서 그에 비견할만한 것을 찾는다면 아마 그노스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서구 인식론의 기본 교리로 채택되면서 인간 내부에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능력이 있으며 초월적 현상과 가치에 대한 인식 및 표현이 가능하다는 신비주의적 그노시스 사상은 철저히 외면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탄압을 받기까지 한다. 그리고 서구의 계몽주의 사상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해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독일의 낭만주의운동은 그러한 신비주의적 전통과 맥이 닿아있다고 우리는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가지고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 신비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인식자체가 전통적 신비주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또한 그들의 생각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인식, 그러니까 인간이 지각하고 볼 수 있는 현상들을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진리를 찾아내는 데 인간의 본령이 있다고 본 그 당시의 인식 자체에 대해 신비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의 예술 세계는 일반인들이 인식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인식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은 신비로 포장되고 그들의 예술을 가능케 한 것은 그 무슨 알지 못할 천부적능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성을 천부적인 자질로 간주하는 것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태도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러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찬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을 움직여 가는 거대한 원리 같은 것이거나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지각 불가능한 존재나 개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경우 탄생하는 것이 그노스 인식이고 종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통시적인 위상, 그러니까 언제고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구체적 삶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조금은 달라진다. 우리 존재가 항상 가변적이고 또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사회가 언제나 그러하다는 것은 우리가 쉽사리 빠져들기 쉬운 진보의 신화에서 벗어나서 고찰해 본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충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우리의 구체적인 인식과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온갖 가능성의 한 편린이며 언제나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가능한 삶과 인식의 한 부분이 주도적인 것이 되어 다른 가능성을 억압하는 현상이 우리의 삶에서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당한 인식·욕망들은 프로이트의 말대로 우리의 무의식이 되어 깊은 자아 속에서 꿈틀거린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소 거친 듯한 생각이 들지만 그러한 억압되어 깊은 자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근원적 욕망을 어떻게 하던 표현하려고 애쓰는 자, 그리고 그것의 표현을 얻은 자를 천재적 예술가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 인간의 사회는 일면적으로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일면적으로는 안정된 상태의 지속을 못 견뎌하는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회가 단일한 가치관, 단일한 인식으로 어느 정도 통합된 채 그 기간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우리는 거꾸로 하나의 가치관의 전제화(專制化), 검열과 억압의 강화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 그 억압된 의미, 욕망을 추구하고 표현하는 자를 우리는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천재성을 그렇게 인식한다면 천재적 예술가라는 단어 앞에 이제 더 이상 천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이유가 상당 부분 감소된다. 차라리 천재는 한 사회의 규범적 인식의 검열에 넘어가지 않고 그것을 견딘 자가 된다. 그 검열을 견딘 자는 이미 사회적 규범에 의하여 규정된 의미, 기호에 의하여 굳어 버린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규정, 약속에 의해서는 드러낼 수 없는 의미,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꿈틀거리는 불온한 의미를 표현해내려 애를 쓴다. 말을 달리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기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생산해낸다.

그렇다면 상징과 기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잠깐 시간을 내어 상징과 기호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는 일종의 약속된 코드이다. 하나의 기호는 그 기호를 통하여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편리하게 타인과 소통시키기 위해 우리가 만든 인위적 산물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한정된 의미에서의 기호란 하나의 기표(記標, signfiant)에 하나의 기의(記意, signifi?)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그때 하나의 기호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기표 자체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하에서이다. 즉 소쉬르가 말한 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에 있어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恣意的)이며 의미를 낳는 것은 언어 체계 자체가 된다. 즉 체계가 의미를 낳는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호에 의하여 드러나는 의미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이 세계에 대한 일정한 인식과 세계관을 전제로 한 것임을 그 사실은 보여주지 않는가? 의미를 낳게 하는 체계는 그 자체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체계를 만들고 사용하는 문화의 인식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가시적 인식 체계는 언제나 불충분하며 언제나 또 다른 인식(타자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결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그 자체 다원적인 욕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으며 비가시적개념과 비가시적인 현실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애쓰는 인간에게 기호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 현실, 구체적 사물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용기, 두려움, 사랑, 고통, 공포 등 단번에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없는 내용도 표현하면서 살고 있고 심지어는 죽음 이후의 세계, 꿈의 세계, 초월 세계 등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내용, 도저히 구체적으로 지각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내용까지 표현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중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의 영역은 그러함 다른 표현의 영역에 비해 오히려 협소하다고 까지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의미를 표현하게 되는 경우 기호의 특성으로 여겨졌던 기표와 기호 사이의 자의적 성격은 현저히 약해진다. 구체적인 예는 생략하겠지만 기호라는 약속된 체계에 의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의미를 표현해야 하는 경우, 그 의미를 적절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의미에 어느 정도 합당한 기표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의 극단적인 경우, 예컨대 꿈의 세계, 죽음 이후의 세계, 환각의 세계, 초월 세계 등 기호의 논리성을 완전히 벗어난 세계를 하나의 기호로 표현하고자 하는 경우,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부재해 있는 세계를 표현해야 하는 경우, 기호의 자의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기표가 의미하고자 하는 기의는 그 명확성을 상실하고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가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상징적 표현의 경우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기호적 표현과 상징적 표현의 차이를 요약해 설명하자면 기호적 표현은 일의적이고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러한 기호에 의한 소통은 약속된 코드에 의해 가능한 반면, 상징은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상징적 표현은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주체의 세계 이해의 표현으로서 약속된 코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길게 인간의 표현 중에서 상징적 표현이 기호적 표현보다 원초적이며 기호적 표현이라는 것은 상징적 표현이 그 다의성을 상실하고 역사적·문화적으로 그 의미가 축소된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긴 설명을 하고 싶지 않다. 단지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창의력을 지닌 천재를, 사회적 규범-프로이트의 용어를 빌어 온다면 사회적 초자아라고 해도 될 것이다-에 의하여 규정된 의미, 굳어 버린 의미를 만들어 내어 하나의 사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인식구조(epist?m?)를 강화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규정, 약속밖에 있는 의미,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꿈틀거리고 있는 의미를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자, 그리하여 한 사회의 역동성을 발동시키는 자라고 생각할 때, 그러한 천재의 표현은 필경 상징적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하기로 하자. 창의성은 표현 자체의 기발함이나 참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의 자체의 새로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천재의 교육은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3. 인간 교육과 창의성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교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더욱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 교육에 의하여서만 그러한 창의성 교육이 가능하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한 명의 진정한 과학자를 키워내려면 지식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때로는 오히려 그러한 교육이 해롭기까지 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근간으로 부정의 정신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과학자를 키우기 위해 바슐라르가 권한 방법을 바로 우리의 것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인간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생각, 인간이 만든 인간의 사회는 언제나 불충분하며 필경 변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것, 그래서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이름으로 언제고 결여되어 있는 것을 꿈꾸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창의력 교육이며 상상력 계발 교육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싶다. 그때 부정되는 것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익숙한 인식, 익숙한 의미가 될 것이며 그러한 부정의 정신은 그러한 인식과 의미에 의하여 억압되고 있는 인식, 의미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할 수 있는 열린 그리고 균형 잡힌 생각을 바탕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그 의미를 물을 시간조차 빼앗을 양 바쁘게 변화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점차 다양화되고 다원화되고 있다. 우리들은 그 현란함과 속도에 취한 채 그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에도 벅차서 그러한 현실을 부정의 정신으로 바라보고 창의적인 발상을 하기가 정말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현란함 자체를 바로 다양성으로 착각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 앞에 참으로 다양한 선택이 놓여 있고 그 다양함에 그 무언가 한 가지를 덧붙이는 것이 바로 창의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상상력에 입각한 인류학적 정신은 그 다양성을 표면적 현상-기호를 빌어서 이야기한다면 기표의 다양성-에서 찾지 않는다. 현상의 변화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의 변화를 의미할 뿐 그 변화에 의해서 인간 주체가 덩달아 다원화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다원성은 이미 인간 내면의 욕구·마음·정신에 존재한다. 예컨대 세상은 현란하고 바쁘고 빠르게 변화하면서 그 빠름 자체로 획일화되려는 경향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림을 지향하는 욕구와 정신은 빠름을 지향하는 욕구와 길항하면서 인간 내부에 여전히 존재한다. 바로 그 욕구와 만나 그 욕구를(그것을 우리는 하나의 의미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적절하게 표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은 엉뚱하게도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과 만나게 된다. 결여된 것을 느끼고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정신이란 하나의 가치·인식의 과도화를 경계하는 균형 잡힌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계를 쉽사리 뛰어 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을 꿈꾸는 자유로운 상상력이란 실상 말 그대로 마냥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 근간에 그러한 균형감각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예술뿐만이 아니라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찾아낼 수 있는 천재들이란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그러한 균형 감각을 바탕으로 다르게 생각해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며 ‘상상력에 입각한 인간학’의 교육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보여줄 수 있고 그러한 균형 감각의 획득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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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진형준
홍익대 불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