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구조와 기능.

[ㅍ] 주체성의 구성을 사유하기

온울에 2008. 5. 6. 03:15

목 차

Ⅰ.들어가며
Ⅱ.라캉적 주체구성
1.라캉 이론의 언어학적 측면
2.주체구성과 주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3.제기되는 문제들
Ⅲ.푸코의 구체구성 이론
1.권력과 주체
2.윤리학의 문제
3.권력놀이의 최소화 전략
Ⅳ.결론에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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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연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학술지명 원우론집WON WOO RON JIB 
권 22 
호 1 
출판일 1995. 2. 24.  




주체의 구성을 사유하기
(라캉과 푸코)


송영정
연세대학교 석사과정
4-222-9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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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들어가며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국내에서의 노동자 운동을 아우르는 진보적 운동 진영의 쇠퇴라는 정세적 조건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모던/포스트모던을 둘러싼 논쟁들은 사회과학 내부의 관심들을 촉발시켜 왔으며 한국사회의 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그것의 개념을 둘러싼 쟁점들-예를 들어 시대사적 구분이냐, 양식사조의 개념이냐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1)- 및 모던/포스트모던이라는 구분의 질적 특성과 관련된 연속성/불연속성이라는 쟁점들, 정치일반 및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그것의 정치적 실천과 가능성에 대한 쟁점들을 포괄하고 있다.2) 또한 이러한 논쟁은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및 포스트맑스주의와의 이론적 동맹 내지 대결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이러한 논쟁들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쟁점들을 염두해두면서 이것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근대적 사유방식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라는 측면과 보다 좁은 의미로서 새로운 정세 하에서의 좌파적 대안의 모색- 단지 형태론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의 이론적 작업들을 가능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이라는 방향에서 고찰할 때 제기될 수 있는 ‘주체’ 혹은 ‘주체이론’ 내지 ‘주체화양식’ 이라는 문제설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3).

전자의 측면과 관계되어서 우리는 근대적 사유의 전형을 계몽주의, 로고스중심주의, 진화주의, 목적론, 본질주의, 서구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 등등의 담론에서 본다. 또한 이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티 비판에서 가장 보편적인(?)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담론들이 문제시된다는 것은 이른바 ‘근대성’ 내지 ‘합리성’의 위기라는 theme의 등장이, 데카르트 이래 당연시되어온 ‘의식적 주체의 자기증명성’ 이라는 theme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후자의 측면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겠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적이고 구성적인 사유-이는 알튀세르가 표현하던 바의 맑스주의의 이론적 공백과 난점, 모순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면서도 맑스주의의 현재성을 그것의 전화라는 관점과 함께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를 전제하면서 오늘날의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 모색을 추구하는 입장과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입장을 표방하는 것이며, 다른 방향에서 예컨대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맑스 주의적 기획이나, 하버마스를 축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제의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맑스주의와 관련성 하에서 포스트모던적 정치를 사고한다는 것은 과연 ‘정치적 주체’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와 그런 주체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함께 사고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두 가지의 측면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주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근대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하나의 준거점을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도 긍정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방식으로 포스트모던적 정치에 대한 사고를 가능케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과연 주체란 무엇인가? 왜 주체가 문제가 되는가? 왜 주체의 문제를 거론하는가? 어떻게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가? 어떠한 배경 하에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가? 주체구성의 문제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은 주체라는 범주를 제기하는 일련의 틀이 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는 이것에 대한 확정적인 해답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앞서의 전반적인 상황들 속에서 이러한 질문이 갖는 함의를 주체를 ‘구성의 문제’로서 사유하고자 했던 라캉과 푸코의 논의를 빌어서 개괄적으로 검토해보려고 한다.

Ⅱ.라캉적 주체구성
라캉의 작업은 실로 방대하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의 이론은 비평이론, 시각예술이론, 페미니즘이론 등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관심이 닿아있는 주체구성의 문제설정에도 일정한 함의를 주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이론적 틀 중에서 언어학적 측면을 개괄적으로 검토하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삼원적인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지는 ‘주체’에 관한 이론을 또한 개괄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1.라캉 이론의 언어학적 측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구조주의적 방법에 따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에 언어학을 도입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초기 프로이트 이론에 충실하면서 프로이트에게서는 발전되지 않았던 무의식의 언어적 차원을 강조하였다.4) 그런데 라캉에게서 이러한 측면은 소쉬르적인 언어학의 일정한 변형과 야콘슨의 언어학의 도움을 통하여 구성되어진 것이다5).

라캉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수용하면서도 일정하게 변형하고 있는데 그것은 라캉이 소쉬르적인 기호의 개념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결합의체계로 보았고 이러한 결속이 생기게 되면 그 기호는 고정되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소쉬르에게 있어서 기호의 요소들은 대칭적이며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대칭성과 안전성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의와 기표사이의 ‘틈’을 강조한다. 즉 기의는 기표 아래서 미끌어지면서 이것을 위치시키고 경계를 정하는 우리의 노력에 저항한다. 소쉬르에게서 말은 기호이며, 이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기표는 기호와 대비되는 것이며 기호가 부재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기표는 대상이 아닌 언어의 사슬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하게 되면 ‘의미’라는 것은 개별 기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간의 관련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 사이의 ‘틈’ 그리고 의미화의 연쇄구조로서의 기표를 사고한다는 것은 주체가 자신의 말 속에서 주체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이러할 때 의미작용은 주체의 의도나 진리에 의존하기는커녕 오히려 언어체계 내에서 주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라캉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언어적 의존성과 언어에의 종속성 그리고 ‘의미작용’의 분할적이면서도 불가능적인 성격이다6).

라캉의 언어학적 작업은 또한 야콥슨의 환유/은유라는 구조와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꿈의 작업에 있어서의 압축(응축)과 대체라는 구조와 연결지어진다. 즉 라캉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두 과정인 응축과 대체를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 축과 일치시키고 있다. 먼저 프로이트에게서 응축이라는 것은 꿈의 매듭지점으로서, 언제나 다양한 해석을 허락해 준다. 대체는 왜곡의 한 형식으로서, 여기에서 검열은 꿈의 중심부를 보다 중요치 않은 대상이나 말로 대체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은유와 환유의 개념을 살펴보자. 은유는 문자적 주체와 그 은유적 보완물 사이에서 제안된 유사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환유는 문자적 주체와 그 인접 대체물 사이에서 제안된 근접하는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구조들-은유/환유 그리고 응축/대체-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라캉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의식의 구조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의 구조는 언어의 구조와 동일한 것이고 이러한 구조에 의해서 주체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7).

이제는 이러한 무의식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을 통과하면서 라캉의 후기 작업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체를 차지하고 있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한 고찰로 넘어가자.

2.주체구성과 주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주체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끔 하는 언급들은 그의 1936년 글인 「자아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거울단계라고 하는 것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파편화된 자신의 신체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초의 경험을 하는 시기를 말한다. 여기서의 자아는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주체의 상상적인 관계를 토대로 해서 형성된다. 라캉은 말한다. “에고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상계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8) 이 말은 이러한 경험은 상상적(가상적)인 양식을 구축하는 경험이고, 이것은 오인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즉 자아의 기능은 상상적인 것이며 이 기능을 통해서 주체는 소외되게 된다. 상상계의 기능에 대해 라캉은 또한 말한다. “동사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드라마는 존재의 결여라는 시험에 그가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가 욕망의 모든 가치를 나타내는 위치로 옮겨가는 것은 이미지가 결여의 순간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사 혹은 상상계의 기능이라 불린다.”9) 상상계는 환상과 이미지의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타자에 의해 매개된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적 관계와 자아의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주체의 타자에 대한 상상적인 관계의 상호접합으로 이루어진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구성의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관련되는 ‘계’는 ‘상징계’라고 볼 수 있다. 이 상징계는 주체와 언어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드러내 주는 영역일 뿐만 아니라 이 상징적 질서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역이다. 오인 및 주체의 소외로서의 거울단계로부터 연속적이고 직접적이며 발생학적인 차원으로서의 상징계로의 이행을 설정하지 않더라고, 거울단계 이후 주체가 외디푸스적인 경험을 통해 상징계적 질서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라캉은 보여준다. 이것에 대해 아니카 르메르의 논지를 빌어 살펴보도록 하겠다10).

우선 외디푸스 단계의 첫번째 시기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이중적 관계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욕망의 대상인 남근과 동일시한다. 이 시기에서 수동적으로 복종하여 종속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욕망의 대상과 자신의 동일시 하는 어린아이는 ‘주체’가 아니라 결여이며 무이다. 또한 이 시기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어머니와 동일시 하는 상상계적 소유와 자기애가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한다. 그런데 두번째 시기에서는 외디푸스를 통해 상징계로의 진입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아이에게는 어머니와 동침하지 말 것을, 어머니에게는 네 아이의 아이를 낳지 말라는 법을 선포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법’- 이것은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 이라는 은유와 관계 깊다- 은 이후의 주체에게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언어와 문화로 형성된 보편적 질서 즉 상징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아이는 이러한 아버지와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다시금 자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동일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기표가 바로 ‘남근’인데 어린아이는 법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동일시를 통해 남근을 갖게 됨으로써 외디푸스를 통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상징적 거세이다. 즉 아버지는 아이를 어머니와 분리시킴으로써 그를 거세하게 되고, 이것은 주체가 상징, 문화, 문명의 체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완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로 나타난다.

외디푸스 현상과 언어 현상에 의해 아이는 주체로서,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자율성을 완전하게 인식하게 된다. 한편, 상징적 기능에 통합된 이후 주체는 상징적 질서의 매개를 통해서만 사물의 세계에 가닿게 된다. 이때 사물의 세계란 상징적 질서에 의해 재조직, 재창조된 세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통합됨으로써 인간은 사물의 세계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며 실재 세계로부터도 소외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언어적인 차원과 연결시켜 보면, 상징적 질서란 기표들 간의 변별적 체계로 구성된 것이고 따라서 상징적 질서가 인간의 세계를 재조직한다는 것은 인간들 간의 관계가 단지 상호간에 변별적인 기표들 간의 관계로서 대체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 서로를 차별적인 기표로서 인식하게 된다11).

그렇다면 ‘실재계’는 무엇인가? 라캉은 실재계가 상징화에 저항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하며, 실재계는 ‘상징화가 불가능한 것’ 이라고 한다.12) 즉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배제된 것, 담지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라캉은 “상징화되지 못한 것은 실재적인 것 속에서 나타난다. 주체의 현실 밖으로 축출된 것이 실재계를 구성한다.”고 한다.13) 상징화의 기능성으로부터 배제된 실재계는 언어를 통하여 주체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언어외적 방법으로 주체를 항상 구조화하고 있다. 라캉은 실재계를 결여된 만남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14)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 트라우마(외상,tauma)이다. 이것은 주체의 일생에 있어서 엄청난 강도를 가진 사건이었음에 반해서 주체가 그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고 소화하는 데에 있어서 완전한 무능력을 드러내었던 그러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외상은 상징적 질서에 동화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적 과정인 일차적 과정에서 지속되는 것이며, 일차적 과정이 전의식적인 이차적 과정의 매개에 의하여 변형되어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이러한 실재계는 이차적 과정에 의해 검열당한 채 그 흔적만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실재계는 억압된 무의식이라 볼 수도 있겠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실재계를 상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각각의 ‘계’들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주체의 구성에 있어서 갖는 함의들-언어와 주체의 관계 즉 언어를 통해서만 구성가능한 주체, 그리고 주체형성에 있어서 특권적인 역할을 부여받는 상징적 질서의 의미-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라캉에게 제기되는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몇 사람의 논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3.제기되는 문제들
라캉은 무의식을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것으로 보면서 언어와 제반의 문화체계로 규정되는 상징적 질서의 수용을 통한 주체구성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상징적 질서의 구성 이후에 나타나는 기표의 연쇄들로 결핍으로서의 주체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라캉의 이론에 대해서 몇 가지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무의식을 언어적 차원으로 상승시킨 그의 노력에 대해서 알튀세르가 한 비판을 들 수 있겠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가 했던 것- 가장 중요하게는 프로이트가 인간 주체들에게 있어서의 무의식의 효과들의 발현, 통제, 전화의 새로운 조건을 발견했다는 사실-과 하지 않았던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후자의 예로서 라캉의 작업을 들고 있다. 즉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결코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을 구성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가설 속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가 결코 의존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상징적인 것, 언어와 그 법칙과 같은 것을 제기함으로써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 대신에 정신분석학의 어떤 철학을 구성하려고 했던 무모한 시도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라캉의 이러한 시도를 하나의 변종일 뿐인 구조주의보다는 오히려 논리 형식주의에 가까운 것이라 하면서, 라캉의 철학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과학의 대상을 사고하기 위한 철학으로 구성됨으로써 나타나는 동요를 지적한다15).

이것은 후기 알튀세르의 프로이트 맑스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이러한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마슈레/발리바르는 주체성과 상징성 이론이라는 쟁점속에서 라캉과 철학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그들은 라캉의 주체에 대한 이론이 본질적으로 칸트주의적이라 본다. 왜냐하면 라캉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주체의 이론, 주체의 ‘존재’, ‘실존’, ‘생성’의 이론인데 이것은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라캉에게서도 ‘주체’는 ‘실체’의 절대적 타자이며,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라캉에게서도 상징적 질서라는 것은 칸트의 실천적 순수이성이라는 것과 비슷한, 주체의 구성 및 주체의 구성적 분할의 작동과 동일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6) 이러한 사고가 의미하는 바는 결국 라캉적 의미의 주체이론이 근대적인 형태의 주체의 소외론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맞추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것과 다른 측면에서 페리 앤더슨은 라캉적 언어학에서 제기하는 끊임없는 기표의 연쇄라는 것이 가지게 되는 정치적인 해악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기표와 기의가 갖는 차이 내의 ‘통일’ 이라는 기호 개념의 해체가 결국은 진리의 어떤 사능성도 배제해 버리는 논리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라캉이 기표의 절대적 우위를 상정함으로써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안정한 평형관계가 깨지게 되고 최소한의 인과성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17).

위에서 라캉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지점들은 사실 라캉 이론에 있어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연구들을 통해 더욱 해명되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한다. 라캉적 주체구성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의 지점들을 남겨두고 이제 푸코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다.

Ⅲ.푸코의 구체구성 이론
푸코에게서 주체구성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성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후 기의 저작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의 1권(『앎의 의지』)이 권력이 계보학의 측면에서 성담론과 권력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2권(『쾌락의 활용』)과 3권(『자기에의 배려』)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윤리학의 문제와 주체구성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푸코의 지적편력을 다 다루지는 않고 후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주체구성’에 관한 논의들을 다루려고 한다.

1.권력과 주체
푸코는 『성의 역사』1권에서 담론의 생산을 근간으로 하여, 앎과 권력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성적욕망과 관계맺는 방식과 그 정교한 장치들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우선 고전주의 시대 이래로 성이 억압되어 왔다고 하는 억압가설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러한 억압가설에 대해 세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성의 억압은 자명한가? 권력의 역학은 본질적으로 억압적 차원의 것인가? 억압의 시대와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직면하여 그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담론을 뒷받침하는 권력-지식-쾌락 체제의 기능과 존재이유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하기 위해서 성 담론의 조건들과 권력의 통로들, 그러한 담론의 산물인 앎의 의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18).

그는 우선 고전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성립의 시기와 동일시하면서 성의 억압이 행해져왔다는 주장은 오히려 17세기 이래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성 담론의 증가와 성에 대한 가치부여의 증대, 또한 그러한 담론으로부터 욕망에 대한 대상 전환, 강화, 새 방향설정, 변형의 다양한 효과가 기대되어져 왔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로써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 담론의 증가는 그것이 일반적인 억압가설에 대한 반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서도 기능해 왔음을 보여주고, 이것의 양상은 발원지들의 흩어짐, 다양화, 조직망의 복잡한 전개를 띠어 왔다는 것이다.19) 또한 이러한 과정은 권력의 다양한 기제들, 기술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진행되어 왔다.

여기서 푸코는 권력이 주체를 구성케하는 주요한 방식으로서 고백의 형식을 들고 있다. 고백은 고전주의 시대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통해 진리가 산출된다고 믿어왔던 방식의 전형이다. 푸코는 이것이 말하는 주체와 언표의 주어가 합치하는 담론의 의식이고, 권력 관계안에서 전개되는 의식이고, 진실이 자체의 명확한 표명을 위해 제거해야 했던 장애와 저항에 의해 진실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의식이며, 언표행위 자체가 그것의 외적 결과와는 관계없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 내재적 변화를 초래하는 의식이라고 한다.20) 고백이라는 형식은 고해성사, 18세기의 교육학, 그리고 19세기의 의학적 담론이라는 변모를 거치면서 권력관계와 그것들의 기술들 속에서 주체가 구성되는 주요한 형식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백의 형식은 주어진 권력 관계에 주체가 예속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인가?

이 물음에 직면하여 우리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에서 보여주고 있는 권력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푸코는 성의 억압을 이야기하든, 욕망과 욕망의 결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든 이러한 것들에는 권력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데 성과 권력을 거부, 배제, 거절, 방해, 은폐, 가면 등의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 그리고 성의 권력에 의해 주어진 이원적 체계, 즉 합법/비합법, 허용/금지 아래 놓는 것, 성을 다루기 위해 권력은 다만 금지의 법만을 작용하게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성에 대한 권력의 논리는 비존재, 비출현, 침묵의 명령이 된다는 것 등이다.21)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표상은 권력의 생산적 효율, 전략의 풍부함, 그리고 그것의 적극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며, 단지 권력을 법적인 형태 아래 도식화하고, 권력의 효과를 복종으로만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 푸코의 논지이다. 즉 그러한 규정 속에서 단지 주체는 예속된 자, 복종하는 자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푸코는 성의 영역에서 ‘금지’의 유일한 효과보다는 복잡하고 특히 훨씬 더 적극적인 진정한 기술체계가 현존하며 그것을 역사분석을 통해 드러낼 것을 제안한다. 그는 말한다. “법 없는 성과 왕 없는 권력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22)

따라서 푸코는 권력을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고 일부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는 특정한 권세로서도 규정하지 않고 주어진 한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으로 본다. 이러할 때 권력관계는 폭력과 합의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고유명사도 실체도 아니면서 단지 행위하거나 행위할 수 있음으로써 작용하는 주체, 또는 주체들에 대해 언제나 행위의 양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된다.23) 이런 관점에 섰을 때 『성의 역사』1권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가장 많은 술책에 이용될 수 있고 가장 다양한 전략들을 위해 거점 또는 연결점의 구실 할 수 있는 성에 대한 이러저러한 담론 속에서 작용하는 가장 국지적이고 직접적인 권력과계들이 어떤 것이며, 역으로 어떻게 그 담론들이 그것들에 대해 디딤돌의 역할을 수행하는가, 어떻게 그 권력관계들의 상호작용이 관계들의 약화, 강화, 저항의 효과들을 산출하는가를 주체의 대상화라는 관점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앎의 의지』에서는 그것이 예속화는 아닐지라도 성을 둘러싼 지식들과 권력의 기술들을 통해 주체가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권력-주체라는 문제 설정을 유지하면서 주체화의 양식이 개인의 윤리적 측면과 자유의 문제와의 관련 하에서 제기되는 것은 『성의 역사』제1권이 나온 지 8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쾌락의 활용』과 『자기에의 배려』에서이다.

2.윤리학의 문제
지식-권력-쾌락의 삼원론적 관점에서 성담론을 둘러싼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검토하고 이로부터 권력이 주체를 형성시키는 기제들을 탐구하던 푸코는 『성의 역사』2권과 3권을 통해 그 방향을 약간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제는 ‘주체’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앎의 의지』와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사이에서 감지되는 명백한 단절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푸코 해석자들 사이에서의 의견의 불일치를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들뢰즈는 『성의 역사』2권이 1권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고 하는데 우선 그는 앞선 저작들이 비교적 단시간을 다루는데 비해『쾌락의 활용』의 경우에는 그리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우 긴 시간을 기독교성(Christianity)의 방식을 따라 연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음으로 그는 푸코가 권력관계와 지식형태들 사이의 관계들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서 자아의 관계를 발견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의 역사』1권과의 단절을 강조하는데 이것의 난점은 자아와의 관계에서 권력-지식의 이중적 관점이 배태되어 있지만 성(sexuality)과의 관계는 불확정적인 것으로 남는 것에 있다고 한다.24) 그러나 드레퓌스와 라비노우는 그 저작들 사이의 연속성을 더 중요하게 보고 있다25).

그렇다면 푸코 자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그는 1983년 버클리에서의 강연에서 자신의 관심이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자아와 사물들의 서술같은 문제에 닿아있다고 한다26).

그런데 1984년 R.Fornet-Betancourt등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주체성과 진리의 문제설정이 초기부터 일관되게 그가 지는 관심이었다는 발언을 한다27).

여기서 문제는 그 저작들 사이의 연속이냐 단절이냐는 구분을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저작들 간의 차별성이 존재하는지 혹은 푸코 자신의 문제의식의 변화과정이 있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무엇인지를 검토해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실제로 푸코에게서는 『성의 역사』2권과 3권을 통해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주체화’ 혹은 ‘주체구성’ 의 방식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이 철학 혹은 정치적인 전략들 속에서 갖는 함의가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서 푸코는 자신이 경험으로서의 성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한 세 개의 축으로 성과 관련된 지식, 성의 실천을 조절하는 권력체계, 개인의 주체형태를 제기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담화 활동의 분석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딜레머에서 벗어나 지식의 형성을 추적할 수 있게 했으며, 권력관계와 그 기술의 분석은 권력을 지배로서 인식하거나 아니면 환상이라고 폭로하거나 해야 하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개방된 전략으로 간주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는 평가를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나 욕망하는 주체라는 개념은 ‘계보학’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28).

그는 현대의 개인이 어떻게 해서 성의 주체로서 자신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서구인이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방식을 도출해 내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지식을 표현하는 담화 행위의 형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권력의 표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는 권력의 행사를 분절시키는 다양한 관계, 개방된 전략들, 합리적 기술들에 대한 질문을 가능케 하는 ‘주체’라는 것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고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 자기와의 관계의 형태들이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존재의 기술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29).

따라서 서문에서 나타난 푸코의 기획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이제 ‘주체’의 문제를 개인의 구체적인 윤리의 문제와 연관시켜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을 현대로부터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구체적인 경험적 역사의 영역 속에서 밝혀내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쾌락의 활용』에서 주체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데 있어 푸코는 네 가지의 주체화 양식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푸코가 윤리적 실체라고 부른 것으로 무엇이 도덕적 행위에 관계된바 나 자신의 부분, 혹은 나의 행위를 부분의 면모인가라는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들어 그리스인에게서 윤리적 실체는 아프로디지아인데 이것은 행위, 쾌락, 욕망의 역동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30).

다음으로는 예속의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도덕적 속박을 인정하도록 요구하거나 또는 스스로 동기부여하는 방식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어 푸코는 스토아 학파에게서 그것은 이성적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났다면 소크라테스 시대에 있어서 그것은 미학적인 차원으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한다.31) 세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 주체로 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이것을 푸코는 금욕주의라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텔로스(telos)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은 도덕적 목적론이라 해석할 수 있겠는 바 즉 우리가 도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열망하는 것이 어떤 종류인가와 관련되는 것이다32).

그런데 푸코는 이러한 네 가지의 윤리학의 문제설정 속에서 세 가지의 주된 금지 내지 규정이 존재해왔다고 보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의 활용』과 『자기에의 배려』에서 각각 양생술-육체, 가정관리술-아내, 연애술-소년들이라는 주제들로 각각 연결되어지는 것들이다. 첫번째 측면과 관련되어서는 주된 것이 육체를 장으로 하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의 문제이고, 두번째의 것은 혼외관계의 배제, 부부 간의 상호 정절들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가정 내에서의 결혼한 남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며, 마지막의 측면은 예를 들어 소년에 대해서는 신체접속을 하지 말라는 금기와 같은 것들과 관계되는 것이다. 『쾌락의 활용』과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자기에의 배려』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존재의 기술이라는 윤리학적 측면이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는 엄격한 원칙에 의해 지배되어 왔음이며, 이 원칙은 쾌락의 윤리에 대한 변화에 수반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즉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활동들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얼마만의 거리를 두고 있건 간에 그 활동들과의 관련 하에서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도록 해주는 윤리학을 완성하는 일이라는 것이다33).

고대 그리스 시대의 주체구성의 계보학으로부터 푸코의 주체화 양식에 대한 함의들은 온전히 추출해 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우리는 후기 푸코의 작업을 평가하려는 조심스러운 시도를 감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34).

3.권력놀이의 최소화 전략
푸코는 왜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 연구해야만 했을까? 푸코는 그에게 주어졌던 비난의 화살-예컨대 푸코적 권력 개념은 해방의 관심 하에서 저항과 변혁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게 하는가?35)-을 모면하기 위해서 주체를 사유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후기구조주의의 반인간주의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체를 사고해야만 했는가36)?

이것에 대해서 일정한 답을 주는 것이 그의 비교적 최근의 인터뷰이다.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권련, 자아, 윤리,」라는 논문에서는 이런 문제와 관련되는 푸코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후기 작업들이 주체와 진리놀이들 간의 관계라는 문제설정의 연장선 속에서 진행된 것이면서, 그것이 억압적 실천들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주체의 자기형성적 실천과 관련된 것-즉 금욕적 실천이라 명할 수 있는 바 자기 스스로의 활동으로 자아를 변형시키고 어떤 특정한 존재양식에 도달하려는 자아의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관점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라고 한다37).

이어서 그는 이러한 자아에 대한 자아의 활동이 해방의 한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식민지 민중의 해방과 같은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들 속에서 만약 어떤 함의를 갖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해방 이후에 이러한 자유의 실천(윤리의 문제)이 민중, 사회, 개인들이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존재 형식, 또는 정치 사회를 결정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라고 한다38).

그러한 역할로서의 주체화 양식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측면 이외에 이 글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윤리적 주체를 제기함으로써 이것이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니게 되는 의미일 것이다.

즉 푸코는 이 글에서 권력을 도처에 편재하는 관계의 그물망이라 개념 규정하면서 이러한 권력관계가 변화가능한 즉 그들 스스로가 수정할 수 있는 관계이며 한번 주어지면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가 아님을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권력관계란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 주체를 전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러한 자유의 형식을 갖춘 쌍방이 존재할 때 권력관계 속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주체의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리고 주체가 저항을 한다면 그것이 요구하는 전략은 다름이 아니라 권력놀이의 최소화라는 전략이 된다는 것이다. 즉 저항을 하거나 이러저러한 지배의 효과들에서 벗어나는 문제는 법규칙, 관계적인 통치와 에토스(품행과 처신의 방법)의 테크닉, 자아의 실천과 자유의 맥락에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에의 배려가 단지 자기 자신을 구성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도 고려해 넣는 윤리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적극적이면서 얼마간은 이상화된(?) 주체- 푸코와의 대담자는 여기서 정치적/철학적으로 세련된 매우 적극적인 주체라는 표현을 쓴다.-를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권력놀이의 최소화 전략 속에서 우리는 왜 푸코에게서 주체의 윤리적인 문제, 특히 자기에의 배려라고 표현되는 그러한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푸코의 주체이론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푸코는 명백히 자신은 주체에 대한 선험적 이론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즉 그는 주체가 명백히 실체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형식일 분 그 형식이 항상 주체 자신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관심은 주체의 구성 또는 주체의 상이한 형식들과 진리놀이들, 권력의 실천 등의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40).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권력, 자유, 진리, 전략, 윤리 등등의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제기되는 주체의 문제는 그것이 선험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초기 및 중기 저작들에서보다는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주체구성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Ⅳ.결론에 대신하여
우리는 앞에서 포스트 모던적 상황 하에서 주체 구성을 사유케 하는 라캉과 푸코의 이론 작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들의 작업은 근대적 사유체계의 해체라는 명백한 목표 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작업들 속에는 그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캉의 경우, 무의식에 언어학을 도입함으로써 프로이트가 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과학을 성립시키려 했으며 이로부터 대상없는 철학에 정신분석학의 철학을 성립시키려 했다는 일단의 비판을 차지하고서라도, 그의 언어학이 소쉬르적인 기호론에서 제시되었던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해체함으로써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무의식과 언어적 차원의 결합을 통해서 주체에게 주어지는 상징적 질서의 의미가 주체구성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푸코의 경우는 권력에 대한 기존의 표상들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그것이 진리문제와 관계할 때 갖게 되는, 말하는 단어의 투명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진리와 권력의 관계가 투명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앞에서의 논의들 속에서 이미 살펴본 것이지만 라캉과 푸코는 그들의 작업의 대상, 목적의 측면에서 상이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닿아 있는 지점은 그것을 비판의 측면에서 바라보건, 수용의 측면에서 바라보건 간에 포스트모던적인 상황들 속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질문들-차이와 적대의 모순성, 다양성, 진리의 복수성이라는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를 대면케하는 이론가들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라캉의 경우 상(가)상적인 것-실재적인 것- 현실적인 것이라는 구도 하에 상징성의 우위 하에서 제기되는 주체구성의 문제설정이 프로이트 맑스주의와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체화 양식에 대한 문제 설정과 맺고 있는 관계들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푸코의 경우 권력에 대한 새로운 표상을 근거로 한 그의 미시적 권력의 역학을 드러내기 위한 주요한 측면으로서의 자기에의 배려라는 윤리학의 문제설정은 정치전략에 대한 평가라는 관점 하에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질문과 문제제기를 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그리 간단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맑스주의의 전화의 관점에서 이러한 것들을 사고한다는 문제설정에 놓여졌을 때 우리가 보다 깊게 탐구해야 할 주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독해와 그에 근거한 모순과 공백, 한계의 인식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하여 생산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접합을 사고하는 것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수반되는 작업들은 또한 몇 가지가 있을 것인 바 그것에는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근대적 정치지형 속에서 맑스주의를 사고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주체화 양식의 관계, 주체화 양식의 상이한 형태들을 사고하는 것-이것에는 라캉과 푸코와도 대면될 수 있겠지만 이른바 성적 차이의 문제를 매개로 제기되는 페미니즘 이론과 그것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측면이 포함될 수 있겠다-등이 내포된다.

이러한 문제설정 속에서 라캉과 푸코와의 대면은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그들과 충실히 만나야만 하는 보다 깊이 있는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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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이것의 하나의 예로 벨머는 이러한 개념의 다양성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니엘 벨의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논의와 만델의 후기자본주의 그리고 주로 문화의 측면에서 후기자본주의를 고찰하고 있는 제임슨의 논지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알프레히트 벨머, 이주동 옮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 녹진, 1993.pp. 11-20을 보라.
2) 페리 앤더슨/테리이글턴 외, 오길영/윤병우 외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실천, 1993, pp.190-215.
3) 이것은 모던/포스트모던 논쟁 속에서 필자의 관심이 닿아 있는 것을 두 가지의 측면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4) 아니카 르메르, 이미선 옮김, 『자크 라캉』, 문예출판사, 1994,pp.31-34.
5) 마단 사럽, 김혜수 옮김, 『알기쉬운 자끄라깡』, 백의,1994,pp.77-88. 이 책의 원본은 Madan Sarup, Jacques Lacan, Harvest Wheatsheaf: London, 1992이다.
6) 이러한 내용은 라캉의 1957년 글인 「무의식에 있어서 문자가 갖는 권위: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는 다음의 저작을 차고하였다. 마단 사럽, 김해수 옮김, 『알기쉬운 자끄라깡』. 백의,1994, pp.139-141 그리고 권택영 엮음,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pp.50-70.
7) 이것에 대해서는 아니카 르메르, 앞의 책, pp.74-91을 참조하라.
8) 아니카 르메르, 앞의 책, p.123에서 재인용.
9) 앞의 책,pp.122에서 재인용
10) 이하의 논의는 아니카 르메르의 책 『자끄 라깡』의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할 때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하는 역할」이라는 논문에 준거한다.(아니카 르메르, 이미선 옮김, 『자끄 라깡), 문예출판사, 1994,pp. 130-150.)
11) 이종영, 『지배양식과 주체형식』, 백의, 1994,pp.182-190.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론가들은 라캉의 상징적 질서와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체계 속에서의 ‘혼인’의 규칙 및 여자의 교환과 관계된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규칙이 지니고 있는 연관을 지적하기도 한다.
12) 마단 사럽, 앞의 책, p.157.
13) 이종영, 앞의 책,p.196에서 재인용.
14) 이종영, 앞의 책,p.198.
15) 루이 알튀세르, 윤소영 옮김,「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pp.245-249. 이것과 비교하여서 읽을 수 있는 글들로는 윤소영 엮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카트린 클레망, 「앙드레 그린과의 대담: 알튀세르의 고통받은 삶에 대한 정신분석」,『이론』, 1993년 가을 그리고 올리비에 크르페 외, 「알튀세르와 정신분석학」, 『이론』, 1994년 봄 등이 있다.
16) 마슈레/발리바르, 윤소영 옮김, 「라캉과 철학: 주체성과 상징성의 이론이라는 쟁점」,『이론』, 1994년 가을, pp.198-199. 또한 이 글에서 마슈레와 발리바르는 라캉과 칸트의 대결 속에서 문제시되는 세 가지의 질문을 아프타노모바의 발제문을 근거로 하여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간의 관계의 문제이며, 둘째로는 결여의 시니피앙이 남근중심주의 내지 로고스중심주의와 맺고 있는 모종의 관계, 마지막으로 무의식에 대한 개념규정과 관계 되는 문제들이다.(pp.204-208)
17) 페리 앤더슨, 오길영 옮김, 「구조와 주체」,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실천, 1993, pp.44-52.
18) 미셀푸코, 이규현 역, 『성의 역사1』, 1990, 나남, pp.31-32
19) 앞의 책, p.52.
20) 앞의 책, p.79.
21) 앞의 책, pp.98-99.
22) 앞의 책, pp.100-105.
23) 드레퓌스/라비노우, 서우석 옮김, 『미셀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나남. 1990, p.312.
24) ) Gilles Deleuze, “Foldings, or Inside of Thought”, Foucault,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p.101-102.
25) 드레퓌스/라비노우, 앞의 책,pp.355-371.
26) 앞의 책, p.322.
27) 앞의 책, p.322.
28) 미셀 푸코, 문경자/신은영 공역,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나남, 1991, p.18-20.
29) 앞의 책, pp. 20-25.
30) 앞의 책, p.56.
31) 드레퓌스/라비노우, 앞의 책,p.335-336.
32) 앞의 책,p.336.
33) 미셀 푸코, 이혜숙/이용목 공역,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나남, 1991, pp.114-116.
34) 라이슈만은 푸코의 윤리적 주체의 문제설정에 대해, 이것을 비판철학에 있어서의 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것으로 보면서 사유의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즉, 의식의 자기명증성이라는 사유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John Rajchman, “Foucault the Philosopher: Ethics and Work”, Philosophical Event,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를 참조하라.
35) 다이안 맥도넬은 권력이 주로 억압적이라는 것은 정통적인 주장인데 푸코는 이런 주장을 권력은 주로 생산적이며, 금지보다는 훨씬 더 통제의 형태로 행사된다는 제시로 대체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은 예컨대 규율과 같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개인을 생산/통제하는 수단을 고려할 때는 일견 타당하지만, 군대, 경찰과 같은 억압적인 힘 안에서도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검토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권력은 억압적인 동시에 생산적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에 덧붙여서 그는 푸코의 후기 저작들이 모든 반항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해로운 정치적 효과들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다이안 맥도넬, 임상훈 옮김, 『담론이란 무엇인가), 한울, 1992.)
36) 페리 앤더슨 외, 오길영 옮김, 「구조와 주체」,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실천, 1993,p.55.
37) 미셀 푸코, 정일준 편역,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권력, 자아, 윤리」,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 pp. 100-101.
38) 같은 글, pp.101-102.
39) 같은 글, p.114, 122-123.
40) 같은 글,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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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송영정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