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체계와 의미.

[ㅍ] 대상 범주 영역 존재론

온울에 2008. 5. 7. 10:09

목 차

1.게슈탈트(Gestalt) 논쟁과 높은 수준의 대상: 마이농의 경우
2.존재(Sein)와 타당성(Getung)의 문제 : 라스크와 후설의 경우
3.본질 직관(Wesensanschauung)과 기초지음(Fundierung)
4.맺음말 : 학문 이론과 의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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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 
ISSN 1226-9379 
권 24 
호 1 
출판일 2001. 4. 30.  




대상론, 범주론 그리고 영역 존재론


박승억
성균관대
1-066-0102-04

국문요약
이 글은 마이농(A. Meinong)의 대상론(Gegenstandslehre)과 라스크(E. Lask)의 범주론(Kategorienlehre) 그리고 후설(E. Husserl)의 영역 존재론(Regionale Ontologie)을 학문이론적 관점에서 다룬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이론이 학으로서의 정신과학(인문학, Geisteswissenschaft)의 가능성에 대한 논구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엽에 제기된 '철학의 자기 정체성 위기'는 단순히 자연과학의 성과에 밀린, 철학 혹은 여타의 정신과학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학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이러한 학문성(Wissen-shaftlichkeit) 자체에 대한 반성은 당연히 학적 대상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마이농의 대상론과 라스크의 범주론 그리고 후설의 영역 존재론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문제 의식의 공유로부터 출발한 이들 세 이론의 공통점은, 마이농의 표현을 따르자면, 소위높은 수준의 대상들의 대상성, 혹은 이념과 대상(ideale Gegenstand)의 대상성(Ggenst?ndlichkeit)을 존재론적 영역의 구분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 존재론적 영역의 구분은 곧바로 학문의 영역 구분에 상응한다. 이러한 구분은 본질적으로 '학문' 자체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들 세 이론이 추구한 작업은 인문학의 위기가 회자되는 오늘날에도 의미있는 시사점을 주리라고 믿는다.

영문요약
Gegestandslehre, Kategorienlehre und Regionale Ontologie
Das Thema dieser Abhandlung ist Gegenstandslehre(A. Meinong), Kategorienlehre(E. Lask) umd Regionale Ontologie(E. Husserl). Ich berachtete sie als Wiseen-schaftslehre, die die M?g1ichkeit der Geisteswissenschaften als Wissen- schaft begr?nden will. Aber die sogennante "Identit?tskriese der Philosophie" in der zweiten H?lfte des 19. Jahrhundert gilt nicht nur f?r die Geisteswissenschaften, sondern sie ist ein symbolischer Ausdruck f?r die Forderung der urspr?nglichen Besinnung der "Wissenschaftlichkeit" selbst. Die oben genannte Theorien versuchen nach eigenen Weisen die Antwort daf?r.

Bei der inhaltlichen Verschiedenheit ist die Gemeinsamkeit der Fragestellung dieser Theorien, dass sie alle die Gegenst?ndlichkeit des idealen Gegenstandes durch die Sonderung(od. besser, Kategorisierung) der wissenschaftlichen Gebiete zu begr?nden versuchen. Diese Arbeit verliert nicht noch, finde ich, bis zum heutigen Tage, wenn wir noch von der Kriese der Geisteswissenschaften sprechen wollen.


한글키워드
대상론, 범주론, 영억 존재론, 이념적 대상
영문키워드
Gegenstandslehre, Kategorienlehre, Regionale Ontolo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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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에 독일 관념론이 자신의 권좌에서 철학사의 한 장으로 물러나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반작용 중 하나는 '철학이 과연 하나의 학문일 수 있는가?' 혹은 '도대체 철학 안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한가?'라는 되물음이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이러한 독일 철학의 상황을 슈네델바하(Schn?delbach)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고찰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학문적 문화라고 볼 수 있는 하나의 문화와 관계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부터 헤겔(Hegel)에 이르기까지 전승되었던 생각, 즉 철학과 학문을 동일시하는 생각은 포기되었다. 즉 당시의 철학은 더 이상 학문성(Wissenschaftlichkeit) 일반의 모델이 아니었다1).

이러한 문제 상황은 곧바로 철학 자신의 정체성(Identit?t)에 대한 되물음과 자기 비판으로 이어진다. 소위 철학의 정체성 위기(Identit?tkrise)라고 말해지는 이 시기에 철학의 목표와 벙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들이 제기되었던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상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초반을 휩쓸었던 '심리학주의(Psychologismus)논쟁'이나 아베나리우스(Avenarius)와 마하(Mach)의 경험비판주의(Empiriokritizismus) 그리고 빈(Wien) 학파의 이론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2). 즉 비록 그러한 입장의 철학들이 전통 철학을 강력히 비판하고 자연과학과 철학을 어떤 방식으로든 연계시키려고 했던 것은 이제 거의 무력해 보이는 전통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단지 철학에만, 혹은 좀더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소위 정신과학(인문학, Geisteswissenschaft)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록 근데 이후의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정신과학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이 안전한 토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령 근대 물리학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수학의 발전은 동시에 그 새로운 발견들의 이론적인 근거들을 마련하는데 부심했기 때문이다3).

그러나 당시의 이러한 '위기 상황'이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은 근대로부터 현대로 이행해가는 학문 발전사의 가장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후설(Husserl) 현상학(Ph?nomenologie)을 특징짓는 표현인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chaft)은 이러한 당시의 지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후설이 의도했던 과제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별 과학들을 근거짓는 제일철학(Erste Philosophie)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역동적인 상황에서 비판적으로 되물어지는 '학문성(Wissenschaftlichkeit)'에 관한 문제는 단지 철학 자체에만 해당되는 물음이 아니라 학문 일반의 기초에 관련된 물음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세 철학적 입장들, 즉 마이농(Meinong)의 대상론(Gegestandstheorie), 라스크(Lask)의 범주론(Kategorienlehre) 그리고 후설(Husserl)의 영역 존재론(regionale Ontologie) 역시 이러한 맥락에 고찰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입장들이 철학사에서 주목받았던 이론들은 아니다. 예컨대 마이농의 대상론은 러셀(Russell)과 콰인(Quine) 이후의 현대 분석 철학에서 과잉 존재론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비판받았을 뿐, 그의 대상론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심지어 오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이 학문 일반의 기초를 문제시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이론들을 한갓 지나간 것으로 간주해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학문 일반의 이론적 기초에 관한 물음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기 있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들의 입장은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 상황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점을 그들의 이론들에서 엿볼 수 있는 동일한 문제 의식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아 드러내 보일 것이다.

1.게슈탈트(Gestalt) 논쟁과 높은 수준의 대상: 마이농의 경우
마이농의 대상론과 라스크의 범주론 그리고 후설의 영역 존재론이 겨냥하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문제 의식은 학문(혹은 각각의 분과라는 뜻을 가진 '과학' 이라는 표현이 이 경우에는 더 적절할 것이다)의 대상 영역(Gebiet)들을 구분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제일철학'(erste Philosophie)이라는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이래로 품어온 꿈, 즉 모든 학문을 이론적으로 기초짓는 작업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이러한 문제 의식은 제일철학적이다. 왜냐하면, 대상 영역의 구분의 문제는 개별 과학들의 탐구 주제가 아니라, 그것들 일반을 고찰하는 시선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대상 영역의 구분의 문제는 결국 각각의 대상 영역들에서 주어지는 대상들 일반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전제로 한다. 마이농은 바로 그러한 탐구를 자신의 대상론의 과제로 삼는다. 즉, 마이농에게 있어 대상론은 '인식의 대상에 관한 학문'이며 '대상 그 자체'(Gegenstand als solches)를 혹은 대상을 그 전체성에 따라 탐구하는 작업을 자신의 대상론의 과제로 규정한다4). 따라서 그의 대상론은 개별 과학(Sonder ? wissenschaft)가 아니라 일반적 학문(allgemeine Wissenschaft)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대상론이 바로 그러한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한데서, (제일철학적) 형이상학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은 존재론(Ontologie)으로 이해되어 왔다. 마이농이 그러한 '형이상학적 과제'를 탐구하는 자신의 이론을 존재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대상론'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했는지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하는 것(was existiert)의 전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전체는 [ㆍㆍㆍ] 인식 대상의 전체와 비교할 때, 대단히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GA Ⅱ, 486쪽).

이인용문에서 암시되고 있는 대상의 영역이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대상, 혹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대상(예컨대 둥근 사각형)까지도 존재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과잉 존재론을 허용하고 말았다고 여겨진 것이다.

마이농이 대상의 영역을 이렇게 확장한 것은 우선 그가 대상 개념을 존재론적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인식론적, 혹은 의미론적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즉, 의미 있는 판단의 주어로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대상이 된다. 즉, 마이농은 대상 개념에서 '현존'(Dasein)을 떼어낸 것이다5). 가령 '황금산은 모두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하다.'라는 문장들은 분명 우리에게 의미 있는 문장으로 여겨지며, 그런 한에서 '황금산'이나 '둥근 사각형'조차도 어떤 종류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마이농에게 있어 그러한 괴이한 대상들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유사성'(?hnlichkeit), 혹은 '집합' 같은 소위 높은 수준(h?her Ordnung)의 의미론적 대상들이 문제였다. 스위트(Sweet)의 상세한 보고에 의하면 그가 그러한 높은 수준의 대상들을 받아들이게 된 또다른 계기는 그의 제자였던 에렌펠스(Ch. von Ehrenfels)로부터 불붙은 게슈탈트(Gestalt) 논쟁을 통해서이다6). 에렌펠스는 멜로디의 예를 통해 감각적인 특수자(particular)로는 환원되지 않는 지각 대상의 성질, 소위 형태적 성질(Gestaltqualt?t)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을 스위트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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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멜로디는 특정한 음들의 단순한 모임이거나 혹은 단순한 모임 이상의 어떤 것이다.

ⅱ) 만약 멜로디들이 단순한 모임이라면, C장조에서 연주된 탄호이저 서곡은 F#장조에서 연주된 탄호이저 서곡과는 다른 멜로디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각각의 대응하는 음들이 두 연주에서 서로 다른 음이기 때문이다.

ⅲ) 하지만, 경험은 우리가 그 두 멜로디를 하나의 동일한 멜로디가 서로 다르게 연주되었다라고 인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다. 사실 상 두 연주는, 즉 각각의 연주에서 대응하는 음들이 유사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ⅳ) 결국 두 연주 사이의 유사성은 모임을 이루는 개별적인 음들의 유사성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ⅴ) 그러므로, 멜로디는 음들의 단순한 모임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

말하자면, 에렌펠스는 '부분들'로 환원되지 않는 '전체'의 속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셈이다. 이 경우 제시된 '전체'는 하나의 새로운 대상으로 간주된다. 스위트에 따르면, 마이농은 이 문제에 봉착해서 흄(Hume)으로 부터 이어받아 자기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믿음, 즉 '존재하는 것은 모두 특수자(particular)들 뿐이며, 이 특수자들의 존재 방식은 모두 같다'라는 믿음을 수정하게 된다. 즉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종류의 대상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8). 이러한 변화는 마이농이 견지하고 있는 방법론적 원리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비록 문제가 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범주(Kategorie)를 택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일관성만을 유지하기 위해 좀더 적절한 범주를 도입하지 않고 기존의 범주만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현상학적 방법론의 이념이 그로 하여금 경험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충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범주의 대상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마이농은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존재(Sein)를 다음의 세 가지의 범주로 구분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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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본래적인 의미의 '있음'(Sein)-이것은 다시 경험적 세계의 물리적 사물들에 해당되는 '실제로 있음'(Existenz)과 수학적 대상들처럼 시공적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해당되는 '존립'(Bestand) 그리고 '둥근 사각형'과 같이 비록 불가능하지만, 어떤 문장들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대상들에 해당되는 '있음과는 무관함'(Außersein)으로 나뉘어진다.

ⅱ) '이러저러하게 있음'(Sosein)- 예컨대 기하학적 대상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속성들을 갖는다. 이 때 그 속성들이 바로 그 대상의 '이러저러하게 있음'이다.

ⅲ) '함께 있음'(Mitsein)-이는 조건절이나 판단 형식으로서의 인과관계절이 그렇듯이, 한 사태가 다른 사태와 연결되어 하나의 사태를 이루는 경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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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분석에 기초해서 마이농은 한 대상이 없는 경우에도 그 대상의 '없음'(Nichtsein)이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0). 마이농에 따르면, 그 대상의 '없음' 역시 '존립'(Bestand)을 갖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이는 마이농의 대상론은 그러나 실제로는 시각화되지 않거나 우리의 상식에 잘 맞지 않는 탐구 대상들의 존립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론일 수 있다. 가령 슈나이더(Schneider)는 다음과 같이 마이농의 대상론을 평가한다.

마이농이 이러한 상식적으로는 부조리하게 보여지는 허구적 대상들에게까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줌으로써, 그는 다치 논리학 내지는 수학적인 다양체론(Mannig-faltigkeitslehre) 그리고 칸토르가 발전시킨 초한 집합론(transfiniten Mengenlehre)의 발판에 접근했던 것이다11).

예컨대, 다양체론에서 말하는 n차원의 공간이나 혹은 그 공간에서 성립하는 도형의 성질에 관한 탐구는 결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탐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 탐구가 허구적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므로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이농이 이러한 대상 개념을 받아들인데는 대상 개념에 달라붙어 있는 '존재'라는 전통적인 파트너로부터 자유로운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 우리가 '존재'라는 개념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라스크의 범주 이론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2.존재(Sein)와 타당성(Getung)의 문제 : 라스크와 후설의 경우
라스크는 자신의 책의 서두에서 자신의 작업이 하고자 하는 것은 범주를 비감각적 영역(unsinnliche Sph?re)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라고 밝힌다12). 이는 다른 신칸트 학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칸트(Kant)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있다. 즉 라스크에 따르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그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비간감적인 것, 즉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것을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즉, 인식 이론은 오직 존재자 인식(Seinserkennen)의 이론이 되었고 그의 범주론은 따라서 단지 존재 범주(Seinskategorie)에 관한 이론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13). 이렇게 해서, 가치(Wert)나 규범(Norm)등과 같은 이념적 대상(ideale Gegenstand)들은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된 것이다. 라스크는 이러한 소위 두 세계 이론(Zweiweltentheorie)이 가지고 있는 학문 이론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범주의 확장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책의 서두에서 자신의 작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제까지 거의 작업된 적이 없는 논리학의 영역에 대한 새로운 건축으로부터, 인식 개념과 범주 개념의 확장으로부터 그리고 이론적인 것 전체 범위에 대한 분명한 성찰로부터 범주 이론을 위해 어떤 귀결들이 생기게 되는지가 이 글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결국 타당한 무엇(geltende Etwas)을 없는 것(Nichts)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무엇(Etwas), 더욱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정하는 논리학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며,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정당화시키는 논리학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범주론』, 22~23쪽).

즉 범주의 확장을 통해 라스크는 "대상이나 혹은 사태 자체"를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대상적인 것(Gegenst?ndlichen) 전체로 확장14)"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라스크가 겨냥했던 것은 분명하다. 라스크는 타당성(Geltung)의 영역에 들어오는 대상들, 예컨대 가치, 규범, 의미 등의 대상들에 관한 학문들의 이론적 기초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15).

라스크의 이러한 생각은 그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로체(Lotze)에 의지하고 있다. 즉 감각적인 것의 영역의 술어(Pr?dikat)는 존재(sein)이고 비감각적인 것들의 영역의 술어는 타당(gelten)이다. "두 영역의 술어들은 분명 [ㆍㆍㆍ] 두 영역범주들(Gebietskategorie)이다!16)."

확실히 '이념적 대상들(ideale Geegenstand)'은 있으며(es gibt), 비감각적인 것에 대한 진리 또한 확실히 있다. 이에 대한 확인을 통해 진리 개념이 감각적인 것을 넘어 확장되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범주 이론』, 109쪽).

로체와 마찬가지로 라스크 역시 이념적 대상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했던 것은 그러한 작업이 이념적 대상들을 탐구하는 분과들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의 작업은 불가분 당시의 지배적인 사조였던 심리학주의와 대결하게 된다. 즉 로체 만이 아니라 베르크만(Bergmann)이나 슈툼프(Stumpf) 같은 이들이 '사태'(Sachverhalt)에 객관성(Objektivit?t)와 타당성(Geltung)을 부여한 이유는 논리학을 인식 주관의 심리적 활동의 산물로 보려는 심리학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 했기 때문이다18).

실재적 대상(감각적인 대상)의 영역과 이념적 대상(비감각적 영역)을 이렇게 구분하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그러한 이념적 대상의 존재론적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사실 상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마이농이 '존립'(Bestand)이라는 제3의 길을 택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답변을 우리는 볼차노(Bolzano)의 학문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볼차노는 자신의 『학문이론』(Wissenschaftslehre)에서 "진리가 있다(es gibt)는 말은 [ㆍㆍㆍ] 어떤 명제가 진리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다름아니다19)."라고 말한다. 인용문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볼차노는 '진리'와 같은 이념적인 대상들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으로서의 '있다'(es gibt)의 문제를 경험적인 대상들의 존재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에서 이해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높은 수준의 대상을 '존립'(Bestand)이라는 존재론적 표현 방식을 사용한 마이농이나 이념적 대상들의 범주는 '존재'(Sein)이 아니라 '타당성'(Geltung)이라고 말한 라스크 역시 이러한 요구를 제기 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영역 존재론(regionale Ontologie)을 학문이론적 탐구로 간주하는 후설(Husserl)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후설에 따르면, 경험적 대상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는 술어인 '실재(real)한다'는 표현은 '수'(Zahl)와 같은 이념적 대상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술어이며, 또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라스크의 표현을 빌자면) 적용될 수 없는 범주(Kategorie)다. '실재한다'는 술어는 오직 시ㆍ공적 규정성을 가진 개체(Individuum)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술어이다20).

후설에 따르면, 각각의 개별 학문들은 그 학문들에 고유한 탐구 영역을 갖는다. 그리고 그 탐구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영역적 본질'(regionale Wesen) 혹은 '범주'(Kategorie)다21). 따라서 영역 존재론의 과제는 개개의 영역들을 규정하는 영역적 본질들 혹은 범주들을 찾아내고 그것들 상호 간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해명함을 통해 개개의 영역들에 해당하는 개별 학문들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후설에 따르면,

모든 사실과학(경험과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는 형상적(eidetische) 존재론 들이다. 왜냐 하면, [(ㆍㆍㆍ)] 해당 영역에 속하는 모든 가능한 대상들에 대해 순수하고,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인식들이 풍부하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 [ㆍㆍㆍ] 경험적 사실들에 대한 탐구를 위해 의미 없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후설 전집Ⅲ.1 23-24쪽).

이 경우의 형상적 존재론들은 물론 영역적 존재론이다. 왜냐 하면, 그 경우의 '형상'(Eidos)이나 혹은 '본질'(Wesen)이 바로 탐구의 대상 영역을 규정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역적 존재론이 그와 같이 개개의 학문들의 본질적인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러한 영역적 본질이 주어지는가가 해명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 문제가 앞서 마이농이나 라스크의 경우와 후설의 영역적 존재론이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예컨대 '높은 수준의 대상'(마이농의 경우)이나 '타당성의 범주에 속하는 대상들'(라스크의 경우)들이 어떻게 해서 인식하는 주관에게 주어지는지가 해명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념적 대상'들이란 그저 존재론적인 오해에 기인한, 혹은 기껏해야 신비스러운 대상들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본질 직관(Wesensanschauung)과 기초지음(Fundierung)
이념적 대상들, 특히 영역의 구분과 관련하여 영역적 본질로서의 범주(Kategorie)22)들의 주어짐의 문제는 사실 상 이념적 대상성들의 성립에 관한 가장 중요한 논거일 수 있다. 이는 그 '주어짐'을 해명하는 것이 이념적 대상들이 인식 주관의 단순한 날조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 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범주는 따라서 다만 발견되고, 찾아질 수 있어야 하며, 더욱이 학문의 실제적인 성립 상태에 준해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는 키나스트(Kynast)의 주장은 옳다23). 후설의 본질 직관(Wesensanschauung)은 이런 점에서 이념적 대상들의 대상성을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론적 장치로 간주될 수 있다. 후설에 따르면: "본질이나 형상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대상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혹은 경험하는 직관에 주어진 것이 개별적인 대상이듯이 본질 직관에 주어지는 것은 순수한 본질이다"(후설 전집 III.1, 14쪽).

이제 이념적 대상들의 대상성에 관련된 전체 논의는 실제로 그러한 이념적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해명하는 일에 의존하게 된다. 후설은 자신의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을 우리가 본질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 경우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작업이 단지 '본질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식 현상에 대한 어떤 가설을 이미 받아들이고 출발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후설이 인식 현상에 관한 기술적 분석(deskriptive Analyse)을 주요한 방법으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24).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설령 본질 직관이나 형상적 환원이 우리에게 이념적 대상들이 주어짐을 해명하는 납득할만한 대답이라고 해도 생길 수 있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러한 이념적 대상들과 실재적 대상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는 문제이다. 마이농의 대상론과 라스크의 범주 이론은 이 부분에 관한 논의를 진행시키지는 못했다. 이 문제에 관한 하나의 답변을 우리는 후설의 '기초지음'(Fundierung)의 입론에서 찾을 수 있다.

후설은 기초지음(Fundierung)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만약 어떤 α그 자체가 본질 법칙적으로 오직 그 α와 어떤 μ을 결합시키는 어던 포괄적인 통일성 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α그 자체는 μ을 통한 기초지음을 필요로 한다.' 혹은 'α그 자체는 μ을 통한 보충을 필요로 한다'(후설 전집 XIV/1, 267쪽).

여기서 '어떤 것(α)이 다른 것(μ)에 기초지어졌다'는 것 혹은 '보충'(Erg?nzung)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것(α)이 '비자립적(unselbsts?dig)'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기초지어 주는 것 (μ)은 상대적으로 '자립적(selbstst?ndig),이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것은 보다 구체적(konkret)이며, 상대적으로 비자립적인 것은 보다 추상적(abstrakt)이다.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것, 혹은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것이 바로 개체(das Individuum)이다. 이 '자립적인 대상'과 '비자립적인 대상'의 구분에 의해 우리는 보다 추상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것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25).

후설은 이러한 규정들에 의지해서 다음의 6가지 정리를 논리적으로 도출해 낸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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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하나의 α그 자체가 μ을 통한 기초지음을 필요로 한다면, 하나의 α를 포함하지만, 어떤한 μ도 포함하지 않는 개개의 전체는 마찬가지의 기초지음을 필요로 한다.

2) 요구되어지는 보충없이 하나의 비자립적인 계기를 부분으로 포함하는 하나의 전체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립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비자립적인 계기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 보다 상위의 자립적 전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자립적이다.

3) 만약 G가 (그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Γ의 자립적인 부분이라면, G의 모든 자립적 부분 g 역시 Γ의 자립적 부분이다.

4) 만약 r가 전체 G의 비자립적인 부분이라면, 그것은 역시 G를 부분으로 하는 모든 다른 전체에의 비자립적인 부분이다.

5) 하나의 상대적으로 비자립적인 대상은 절대적으로 비자립적이지만,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대상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비자립적일 수 있다.

6) 만약 α와 β가 그 어떤 저체 G의 자립적인 부분이라면, 그것도 역시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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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리 3)과 4)로부터 기초지음의 관계는 전이적(transitiv)이다. 따라서 만약 A라는 대상 영역이 B영역에 기초지어져 있고, 다시 B가 C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면, A는 C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지음의 논리적 곤계에 의존해서 후설은 "가령 '물리적 사물'과 '영혼(마음, Seele)'이 서로 상이한 존재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후자가 전자에 기초지어져 있고 그로부터 영혼(마음)에 관한 이론이 신체에 관한 이론에 기초지어져 있는 것이다."27)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후설은 각 영역들의 구분만이 아니라 각 영역 상호 간의 의존관계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아직 순수히 형식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각 영역의 본질들에 대한 탐구가 진행된다면, 영역 간의 내용적 연관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기초지음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존립 가능성의 관계이다. 즉, 한 대상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면, 그 보다 구체적인 것은 보다 추상적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한 발생적 기초이다. 따라서 이념적 대상을 직관하는 일도 논리적으로는 개체를 직관하는 지각에 기초지어져 있으며, 그런 한에서 모든 이념적 대상들과 대상들은 서로 무관한 영역이 아니라, 상호 간에 의존적인 관계를 갖는다. 주의 해야 할 것은 이러한 기초지음의 관계가 자연 관학에서 말해지는 '환원적 관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고 해서 그 기초지어진 영역이 기초짓는 영역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는 비록 이념적 대상들이 구체적인 대상들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양자는 그 종류에 있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러한 논리적 논의로부터 우리는 후설이 왜 후기에 '생활세계'(Le benswelt)를 모든 학문의 발생적 기초로 삼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생활세계는 글자 그대로 가장 구체적인 세계이며, 따라서 기초지음의 관계에서 보면 가장 자립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4.맺음말 : 학문 이론과 의미의 문제
마이농이나 라스크 그리고 후설이 겨냥했던 하나의 목표는 우리의 체험 영역에 주어지는 대상들에 관한 학문의 가능 근거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각각의 입장들이 가지고 있는 접근 방식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점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들은 그들의 이론들이 당시의 시대적인 요구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답을 모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단지 물리적인 대상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도 학문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정신과학(인문학)의 학적 위상이 문제가 된던 시기에 제기된 이러한 모색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의 탐구 방향은 일차적으로 인식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출발점을 갖는다. 비록 의미론이 '지칭'(denoting)의 문제로 인해 불가분 존재론적 논의를 끌어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이론들이 존재론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논의를 단순히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론으로 분류해 버릴 수는 없다. 이 세 이론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근본적인 대상은 바로 "의미"(Bedeutung, Sinn) 자체이다. 학문은 인식하는 주관과 무관하게 단순히 있는 대상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학적탐구가 시작되는 순간 그 '단순하게 있는 대상들'은 의미 있는 대상들로 주어진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후설의 영역 존재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동일한 대상이 인식하는 주관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주어질 수 있으며, 그에 따라서 한 대상이 서로 다른 학문 영역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의미들의 차이가 존재론의 경제성이라는 이유에서 대상의 차이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학문은 결코 자신의 고유한 지반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 삶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의 물리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라, 그 대상이 인간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후설이 자신의 마지막 저서 『위기(후설전집 VI)』에서 근대 이후를 '의미의 위기'로 진단한 것은 학문이 본래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에 의한 활동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문화적 대상들, 예술적 대상들 나아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기능을 하는 대상(uirtual reality)'들에 대한 논의를 단지 체계 없는 에피소드들로 간주하려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대상들이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 갖는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과 그에 따라 대상들의 영역을 구분하는 작업은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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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H. Schn?delbach, Philosophie in Deutschland. 1831-1933., Suhrkamp, 1983. 88쪽.
2) 이에 관해서는 N.Schneider, Erkenntnistheorie im 20. Jahrhundert, Reclam, 1998. 34쪽 참조.
3) 예컨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 ?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기하학의 발전은 결국 근대를 지배했던 뉴튼Newton의 자연관을 송두리 채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이나 연속체와 극한에 관련된 철학적인 문제, 허수의 도입에 관한 문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실무한을 수학 안으로 도입한 칸토르Cantor의 집합론과 관련된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은 세기의 전환기에 소위 '수학의 토대 위기(Grundlagekriese)'라고 불리는 상황을 연출해 냈던 것이다.
4) Meinong, Gesamt Ausgabe(이하 GA) Ⅱ, 485-486쪽 참조.
5) Schneider의 책, 56쪽 참조.
6) 게슈탈트 논쟁에 관한 상세한 보고는 D. Sweet의 "The Gestalt Controversy: The De-velopment of Objekts of Higher Order in Meinong's Ontology", in Philos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LII, No.3, 1993을 참조.
7) 스위트의 논문, 557쪽
8) 스위트의 논문, 554-555쪽 참조.
9) 마이농의 앞의 책, 489쪽 이하 참조.
10) 마이농의 책, 491쪽 참조. 다음의 문장은 그러한 마이농의 주장을 역설적으로 보이게 해준다. "Nichtsein des A' selbst ist ein Sein."
11) 슈나이더의 앞의 책, 58-59쪽.
12) E. Lask, Gesammelte Schriften Bd. II, (이하『범주이론)), hrsg. E.Herigel, T?bingen, 1923. 7쪽.
13) 라스크의 책, 22쪽. 물론 라스크가 칸트의 범주론을 '존재범주에 관한 이론'으로 해석한 것은 통상의 해석과는 부딪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는 달리 칸트의 범주론은 인식범주라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라스크의 주장은『순수 이성 비판』 그러한 인식의 대상이 오직 감각적 경험의 대상들에로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그 인식 범주의 적용 영역이 '존재'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14) 라스크의 책, 109쪽
15) 라스크의 책, 100쪽
16) H. Schn?delbach, Philosophie in Deutschland. 1831-1933., Suhrkamp, 1983. 88쪽.
18) 이에 대해서는 B.Smith의 "Logic and Sachverhalt" in Monist, 72/1, 1989 참조, 잘 알려진 것처럼 심리학주의를 거부한 후설 역시 이러한 반심리학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들의 입장으로부터 다소 간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가령 자신의 주저,『논리연구I(Logische Untersuchungen I)』에서 베르크만을 자신에 앞서 순수 논리학을 위해 심리학주의와 싸웠던 사람으로 간주한다(Husserliana, 이하『후설전집), XVⅢ, 49쪽).
19) B. Bolzano, Wissenschaftslehre §§1-45, Reihe I, Bd.II hrsg. J. Berg, Stuttgart-Badcannstatt, 1985, §30, 168쪽.
20) 후설 전집 XIX/2, 126쪽 참조.
21) 후설 전집 IⅡ.1, §9-§10 참조.
22) 이 경우의 범주 개념은 전적으로 후설적인 것이다. 즉, 같은 범주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후설과 라스크에서 범주는 서로 다르다. 후설의 경우, 범주는 무수히 많을 수 있다. 라스크의 경우는 대상의 영역을 크게 두 범주로서, 즉 '존재'의 영역과 '타당성'의 영역으로 나누지만, 후설의 경우 범주는 '사물'(Ding), '영혼'(Seele) 등과 같이 특정한 개별 영역을 규정하는 본질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라스크의 '타당성' 범주에 속하는 대상들 중 가장 일반적인 대상들이 후설에게는 곧 '범주'이다. 물론 이러한 용어의 차이가 두 입장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23) 키나스트의 책, 53쪽.
24) 이러한 맥락에서 후설은 인식론이 법칙과 연역 규칙에 따라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서, 그리고 본질 직관의 방법적 절차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박승억,『후설의 학문이론에 대한 연구』('98 성균관 대학교 학위 논문), Ⅱ장 참조.
25) 후설 전집 Ⅲ.1 34쪽 이하 참조
26) 후설 전집 ⅩⅨ/1, 268-269쪽.
27) 후설 전집 Ⅲ.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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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박승억
성균관대
관심분야 : 학문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