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논리와 문화.

[ㅍ] 재현문제-마그리트

온울에 2008. 5. 8. 11:06

목 차

Ⅰ. 머릿말
Ⅱ. 재현문제에 대한 마그리트의 철학
Ⅲ. 대상과 재현의 분리
1. 기호이론
2. 이미지와 대상(실체)의 분리
3. 언어와 대상의 분리
Ⅳ. 마그리트의 '재현탐구'의 성격과 의의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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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학술지명 硏究論集 
ISSN  
권 24 
호  
출판일 1993.  




문자와 이미지로 제기되는 마그리트의 '재현문제' 연구


태현선
윤난지
8-598-9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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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릿말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는 앙드레 브르통(Andr? Breton)을 위시한 소란스러운 초현실주의 운동과 달리 知的이고 철학적인 사색을 통한 그림작업을 하였다. 그는 현상세계가 우리의 관습에 너무나도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비(mist?re)가 우리의 눈에 익숙해 보이는 것들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관습적 상식의 세계를 의심하고 그림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감추어진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마그리트 예술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그 일환으로 마그리트는, 우리가 무심하게 습관적으로 보면서 지나치는 현실에서 신비를 도출하기 위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탐구를 하였는데, 세계를 관습적으로 재현하는 재현 체계가 바로 그 하나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마그리트가 이 관습적 재현체계를 의심하여 실제의 대상과 재현의 관습적 관계의 와해를 통해 당혹감과 신비를 유발하려는 그의 反因習的인 시도를 설명하는 데 있다. 특히 필자는 마그리트의 이러한 사색과 논리적으로 유사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記號 이론에 의하여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햄마허(A. M Hammacher)는 소쉬르의 기호이론이 마그리트 그림의 언어적 思考와 상당히 유사하다고1) 밝히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인 상관관계를 함께 언급하지 않고 있어 본 연구에서 바로 그 관련성을 찾아봄으로써 마그리트의 思考를 이해하고자 한다. 기호학이란 소쉬르에 의해 시작된 이래 그의 기호이론을 따르거나 또 이에 대한 異論이 제기되면서 사실상 여러갈래로 확대,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마그리트의 작업과의 유사성에 중점을 두어 소쉬르의 기호이론만을 채택한다. 마그리트가 형상이미지와 언어를 동일한 가치의 재현체계로 인식하였으므로, 이미지와 실제 대상의 분리, 언어와 대상의 분리라는 두 측면에서 그의 재현 탐구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재현문제에 대한 마그리트의 철학
마그리트는 초기의 입체주의적이고 미래주의적인 작업에서 형식적인 회화에의 전개를 멈추고 이후 내용 위주의 詩적인 탐구로 돌연 전환하게 된다. 그 극적인 계기는 1923-4년경 키리코(Giorgio de Chirico) 의 <연가, Le chant d'amour>의 복제이었다. 마그리트에게 이 그림은 상투적인 관습에서 순식간에 벗어나는 회화의 새로운 비젼으로 보였다.2) 그리하여 그는 1926년을 전후하여 다분히 키리코 풍인 낯선 사물들의 우연한 만남을 그린다. 그러나 점차 知的인 철학자적 탐구정신이 나타나면서 그의 그림은 단순히 새로운 초현실주의적 아름다움을 위한 회화적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구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평범한 사실적 묘사로 차츰 전환하면서 그의 그림은 思考를 시각화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당대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에 비하여 시각적인 외관에 대한 주의깊은 세밀한 묘사를 보여준다.3) 즉 에른스트나 달리의 그림에서 보이는 기이한 존재나 편집광적 환상이 전혀 없이 즉각적인 인지가 가능한 요소들의 결합을 보여줄 뿐이다. 에른스트나 달리가 그림의 요소를 선택하고 변형시키는 근거는 비이성적, 무의식적, 자동적인 충동에 부합하는것으로, 정신분석만이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듯한4) 반면 마그리트 그림의 요소들은 숙고에 의해 선택된 것들로서 철저하게 思考의 산물들이다.

이렇게 선택된 요소들에 의한 그의 그림은 현상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현실 너머의 세계 meta-reality'를 환기하는 수단이 되며 바로 그것을 마그리트는 '신비'라고 불렀다.5) 그러므로 마그리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식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심해 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일반적 사물들의 확실성을 붕괴시키는 것만이 사고를 자유롭게 해주고 신비를 느끼게 하여 진정한 Revelation6)으로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마그리트의 탐구대상은 우리가 가진 습관적 지식으로서, 구체적으로 재현과 세계와의 관계의 문제이다.7)

마그리트는 하나의 대상을 일정한 이미지나 이름과 습관적으로 결부시키는 재현체계를 의심해보는데 이는 바로 그가 대상과 그 이미지 사이의, 또 대상과 이름사이의 '간극(gap)'을 깨닫고 있음이다.8) 그는 이 '간극'을 자신의 그림에 끌어들이고 이용하였다. 부누르(Vincent Bounoure)는 모든 마그리트의 방법들 뒤에는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지성적인 작용(operation)'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모순(contradiction)'이라 하였다.9) 즉 마그리트는 말-이미지와 대상과의 '간극'을 인식하고 그림에 끌어들여 그 '간극', 즉 재현과 세계 간의 관계를 기존의 상식적 관념이 아닌 모순에 의해 새로이 맺어줌으로써 그 간격을 더욱 넓힌다. 그리하여 당혹감과 신비감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바로 재현의 문제를 제기한 그 '모순'이다.10)

다음은 이러한 사고를 구현한 그림에서 그가 문자로써 대상과 대상의 재현과의 분리를 성취하는 방법을 밝혀보겠다.

Ⅲ. 대상과 재현의 분리
1. 기호이론
마그리트에게 중요한 과제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지식에 의해 만들어져서 무의식적이고 역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재현체계를 의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재현의 가장 시각적이고 즉각적인 수단인 회화와 가장 관습적인 언어를 재고하게 되었다. 마그리트는 언어를 회화와 같은 재현체계로 인식한 최초의 화가이며 그의 이러한 숙고는 대상에 대해 언어를 그림의 이미지와 等價인 재현의 도구로 여긴다는 점에서 기호학적인 성격을 보인다.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성이 언어에 대한 마그리트의 성찰의 중심이었으며 이는 바로 기호학의 출발점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기호학에서 '기호'란 일반적인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요소를 나타내는 다른 요소로서, 그 대용물이 되는 것을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즉 기호는 어떤 요소의 대용물이 되어 그것을 재현(represent)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11) 그런데 '기호'는 어떤 요소를 재현하는 그 기능이 임의적이어서는 안되고 대용물로서의 표현이 '기호'가 되기위해서는 그 사회나 집단에서 통용되는 규약(Convention) 을 바탕으로 그 대용물로서 인정될 필요가 있다.12) 이때 비로서 그것은 기호인 것이다. 기호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는 언어를 구강음성(口腔音聲)으로 된 '기호'로 파악하고 그러한 '언어기호'(signe linguistique)를 여러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게 조탁된 중요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그리트가 언어를 그림과 같은 재현체계로 파악한 타당한 근거를 소쉬르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2. 이미지와 대상(실체)의 분리
마그리트는 그림의 이미지를 현실의 사물과 동일하게 여기는 우리의 무의식적 관습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미지와 대상을 분리시켰으며 바로 여기에 그의 독특한 언어사용이 나타난다. 언어에 대한 마그리트의 고찰이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1929년 '초현실주의 혁명'지에 실린 <말과 이미지들> (별주1)이다. 제시된 문자들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각 문장들이 기호학의 이론에는 모두 부합되지는 않지만 몇개의 문장들은 재현의 문제를 시사하고 있으며, 대상과 재현의 분리라는점에 있어 소쉬르의 언어개념과의 정확한 일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이 문장들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언어실험적인 그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가 있다.

먼저 마그리트가 언어를 이미지와 동등한 재현의 도구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하는 작품으로 <빈 가면> (도1), <나는 숲 속에 감추어진 여인을 보지 못한다> (도2),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 (도3)을 생각할 수 있다. < 빈가면>은 '말과 이미지들'의 다섯번째의 '때로 대상의 이름은 이미지를 대신한다'는 문장을 뒷받침해준다. 이는 이전의 작품인 <여섯 요소> (도4)와 비교하여 보면 그림에서 이미지가 그 이름, 즉 말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숲 속에 감추어진 (여인)을 보지 못한다.>는 작품 중앙의 문장에 목적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단어 대신 한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있어 일곱번째 문장처럼 '이미지는 문장에서 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은 바로 '그림에서 말이 이미지와 같은 실체를 갖고 있다'는 열한번째 문장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한 그림이다.

이렇게 우리는 마그리트가 언어를 이미지와 대체가능한 재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그가 재현을 문제시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제 기호학의 시작과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에서 문자로써 재현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도5)이다.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려놓은 파이프를 두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문구는 부노르가 지적하였듯이 모순으로 들리지만 소쉬르의 언어정의에 의하면 참이 되는 명제이다. 기호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우리가 대화에서 /나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물질적인 현실세계의 실제 나무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 속에 음성에 의해 심정적으로 그려지는 나무의 이미지, 즉 '청각이미지(image acoustique)'이다. 그리고 언어기호(signe linguistique)란, 대상에 대한 '개념'(concept)'이 그 청각이미지에 결합된 것이다.13) 즉 언어는 대상의 개념을 실제 대상에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소쉬르는 대상을 실제와 그 대상의 이미지로 분리하여 언어기호의 정의를 내린 것이다.14) 우리는 파이프 그림을 보고 파이프의 개념을 얻을 수 있지만 그 개념은, 실제의 대상인 파이프에서가 아니라 그 이미지와의 연결에서 얻고있다. 즉 실제의 물체를 통하여 안 것이 아니므로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이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파이프가 아니라는 부정문구는 그림 안에서 모순적인 진술이지만 기호학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타당한 것이다. 우리가 대화에서 발설하는 /나무/란 실제의 나무가 우리의 머리 속에 관습적으로 재현된 청각이미지이지 실제의 대상은 아니라는 소쉬르의 논리는 바로 우리가 보는 파이프가 시각적 이미지일 뿐 파이프의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마그리트의 주장과 일치한다. (기호학자 미셀 푸코도 역시 이 점을 긍정하고 있다)15) 즉 이때 소쉬르의 청각이미지(image acoustique)를 보다 직접적인 시각이미지(image visuelle)로 대체하면 그 논리가 바로 연결된다. <말과 이미지들>에서 '이미지는 그것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와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대상과 이미지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도 않는다는 열 네 번째 문장의 의미가 바로 대상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대한 마그리트의 정리이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에서 재현에 의해 이미지가 대상을 표상할 수는 있지만 이미지와 대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것임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이미지가 잘못된 말의 사용과 결합되면 이미지가 대상 자체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즉 '이것은 파이프입니다'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그에게는 잘못된 말의 사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의 원제인 <말의 사용 Ⅰ>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를 읽을 수 있다. 만일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의 한 이미지입니다'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그에게도 소쉬르에게도 모두 과오가 없는 정확한 문구이며 '올바른 말의 사용'이겠지만 그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재현의 부정, 이미지와 대상의 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당혹감과 신비감의 惹起이다. 그러므로 파이프를 꼭 닮은 그림에 대하여 파이프가 아니라는 부정을 제기하는 것이 이에 더 효과적이며, 그 관계를 관습적 상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기호의 지시관계를 이용하여, 재현된 이미지를 대상에서 분리시키는 마그리트의 작업은 이미지와 대상의 관계 뿐 아니라 언어와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드러내어주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의 자의적arbitraire인 속성이다.

3. 언어와 대상의 분리
언어에 의해 재현되는 것은 이미지이지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점은 이미이미지와 언어를 동일한 위치에 놓고 대상은 그 외곽에 위치시키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재현체계에서 대상과 관습적으로 동일하게 여겨지던 이미지가 대상과는 독립적이면서 언어와 같은 위치의 재현으로 분리된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와 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겠다.

먼저 소쉬르의 이론을 다시 인용하면, 그의 언어기호는 청각이미지와 대상의 개념의 결합이다. 이때 그 결합은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다 'immotiv?'는뜻이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언어란, 개념이 이미 불가분하게 결합된 존재라는 학문적 인식을 하지 못하고 청각이미지 즉 소리의 말 자체를 언어기호로 인식한다.16) 한편 대상의 개념은 그 대상과 바로 일치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地上部의 줄기가 木質化되어 있는 다년생의 식물'17) 이라는 개념은 바로 실제의 나무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즉 실제의 나무와 일치한다. (일치란,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motiv?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국 언어는, 개념과 일치하는 대상과는 자의적 성격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의 '자의성'은 언어개인의 임의적인 언어사용을 용납치 않고 있다. 일단 언어집단 내에서 자의적으로 성립된 기호는 하나의 관습화·규약화 되어 개인의 힘으로는 어떠한 변화도 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강제성을 지니게 되고 마그리트는 바로 언어의 중요한 특성인이 불가역성을 강조하여 자의성에 대립시키고 있다.18) 반면에 마그리트는 오히려 이 자의성을 부각시켜 우리의 사고의 습관적인 指示활동인 말과 대상의 결합을 차단하고 思考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자의성의 강조로 대상을 그 어떤 말로도 기록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고 있다. 말과 대상의 관계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확실성을 잃고 분리된다. 이 분리 작업의 매개는 이제 시각이미지이다. 그의 작업은 그림을 통해 실현되므로 대상을 그림 속에 이미지로 옮겨 놓음으로써 대상과 말과의 '틈(gap)'을 벌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한편으론 그것을 습관처럼 'pipe'라고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파이프'라고 불리울 수도 있고 '담뱃대'로 이름붙을 수도 있으며 그 어느 이름과도 연결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대상과 이미지의 분리의 성격이 보다 강하고, 말과 대상의 자의적 관계성은 이차적으로 드러나는데 비해 <꿈의 열쇠> (도6)는 격자들 속에 제시된 대상의 이미지와 그 아래에 마치 이름처럼 적힌 단어들이 상식적인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의 이론적 배경도 역시 <말과 이미지들>(별주1)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첫번째 문장의 의미가 바로 모든 대상은 어떠한 대체의 여지도 없이 그 이름에 귀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이는 <꿈의 열쇠>의 註釋이 될 수 있을만큼 대상과의 자의적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소쉬르가 뒷받침하듯, 언어가 대상과는 아무런 내적 연관이 없으므로 말(馬)이 '문'으로, 시계가 '바람'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특이하게 가방이 그대로 '가방'인 것은, 이것만이 필연적 연관성을 가진 관계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자의성의 의미는 실체와의 無然性을 의미하는 것이지 현재의 결합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가방은 그대로 '가방'으로 불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그리트의 언어와 대상의 분리가 기호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마그리트의 목표는 역시 신비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사실은 전혀 신비를 깨닫게 해주지 못하므로19) 언어와 대상의 자의적 성격을 강조하여 하나의 대상을 일상적인 재현인 정해진 말과 관습적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우리의 평범한 사고와 감각을 전복시키고 나아가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신비를 느끼게하고자 함이다.

Ⅳ. 마그리트의 '재현탐구'의 성격과 의의
회화에 있어서 마그리트가 탐구하였던 실제 대상과 그 재현, 다시 말해 reality와 illusion간의 긴장 관계는 사실상 새로운 문제점은 아니었다.

회화는 곧 '현실의 재현'이라는 원칙이 확립된 역사를 살펴보면, 실질적인 표면과 환영적인 깊이, 즉 착시적 깊이 간의 상호적인 관계 확립을 위한 일루젼의 역사이다. 원근과 명암이라는 일루젼 장치들에 의한 전통적인 그림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되어 그림은 곧 '현실에의 창'이라는 개념을 굳히면서 이후 400여 년간 19세기까지 일루젼에 의한 항셩체계(figuration system)을 유지하여 왔다. 19세기 중반 능란한 기술로 자연을 본뜨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미술이 아니라는 헤겔의 미학의 대두와 함께, 또 미술자체 내에서도 조금씩 내용 미학에서 형식 미학으로 바뀌어가면서 이러한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회화개념은 차츰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에는 전통적인 재현적 상형체계가 무너졌고 바로 입체주의 미술이 여기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던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입체주의자들, 특히 브라크(George Braque)나 피카소(Pablo Picasso)는 마그리트처럼 의도적으로 재현을 파기하고자하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상의 본질적 모습을 더욱 면밀히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각도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화된 시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점의 복수화로 해체된 대상의 결집에서 시각적인 대상의 본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즉, 결과적인 재현파괴였다. 한편 마그리트는 그의 그림을 재현의 場으로 그대로 남겨두면서 단지 재현과 실재의 세계를 동일시하는 인간의 관습적 사고를 일깨우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재현 자체를 미술에서 배제헤버리려는 형식주의적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착시적 재현의 허위를 고발하고 재현된 대상과 재현과의 관계에 비전통적 해석을 내린 것 뿐이다. (그가 초기의 입체주의를 포기하고 키리코 풍의 초현실 세계로 들어선 사실도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비구상적 추상으로 향하는 모더니즘 미술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1950년대 말 새로운 구상 미술이 등장하면서 미술에 있어서의 재현의 문제가 재조명 되는데, 바로 재스퍼 죤스(Jasper Johns)의 <깃발> (도7)을 그 구체적인 작품으로 들 수 있다. 죤스는 재현된 이미지를 실제의 대상같이 보이게 하는 일루젼을 막기 위해 2차원의 화면 위에 아예 실제 평면인 깃발을 그대로 겹쳐 그려 놓았다. 죤스의 깃발은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어떠한 상황의 존재로서의 깃발이 아니라 2차원의 평면으로서의 이미지만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관람자는 죤스의 <깃발>을 보고 실재하는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깃발의 이미지만을 보는데 그치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착시적으로 재현된 파이프의 이미지가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을 우려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부정문구를 상식에 모순되게 적어 놓아야 했지만, 그러한 부차적인 노력이 필요없이 죤스는 것발의 평면성을 이용하여 언어의 도움이 없이도 확언적으로 이미지를 대상에서 분리시켜 그림에 이미지만을 남겨 둘 수가 있었다.

모더니즘이 형식 미학을 위해 재현문제를 재고하며 미술이 상형체계를 떠나 순수미술로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그리트와 재스퍼 죤스는 이와는 다른 궤도에서 미술과 세계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재현문제를 탐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작품자체의 형상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비록재현의 탐구가 재스퍼 죤스에게는 그의 작업의 목표이지만 마그리트에게는 어떤 철학적 목표에 이르는 방편이었던 점과, 이로 인해 재스퍼 죤스의 작품에는 내용적 의도가 전혀 없는데 비하여 마그리트의 작품에서는 당혹스러움, 신비스러움이 느껴지는 점 등의 차이가 보이지만 두 작가의 연계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죤스의 <깃발>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일루져니즘을 구체적인 해결이 발견된 것이며 그 구체적 해결은 바로 마그리트의 그림작업에서 하나의 착상의 제시로서 예견되어 있는 것이다.20)

Ⅴ. 맺음말
마그리트는 다른 동시대의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그림의 형식적 발명에는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미술 全般의 핵심을 형상화한 것으로, 그것은 착시적 재현의 전통적 장치들의 붕괴이다. 즉 그림은 그의 思考의 구현으로, 그의 사고란 그가 '현실너머의 세계 meta-reality'와 그 신비를 보여주기 위해 현상세계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모습들과 그 관계들을 의문시하고 재구성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이를 통하여 일반의 관습적인 상식을 전복시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詩적인 기이함을 위하여 자연의 직접적인 재현을 버린 키리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마그리트에게 회화란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우리가 세계와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지식은 세계에 완연한 신비로움조차 깨닫지 못하게 하고 간과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에서 마그리트는 관습적 상식에 도전하였고 자연히 가장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재현체계인 언어와,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재현인 이미지를 재고하였다.

결국 마그리트는 궁극적으로 초현실적 신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재현체계의 와해를 시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戰後 현대미술에서 재현과 실재대상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죤스의 작업에서 '재현에 대한 문제시'라는 측면에서 마그리트의 재현탐구의 선구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마그리트는 새로운 정보나 양식의 제공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들을 재정렬함으로써 그림을 통해 실험하면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 선구적 사고의 연장선 상에 죤스나, 이후 일루젼을 실제의 물체로 대체한 작가들의 작업정신이 있다고 본다.


  ▲(도 1)


  ◀ (도 2)나는 숲속에 감추어진 여인을 보지 못한다.


  ▲(도 3)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


  ▲(도 4) 여섯 요소


  ▲(도 5)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도 6)꿈의 열쇠


  ▲(도 7)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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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별주 1>

말과 이미지들

1. 하나의 대상은 그것에 더 잘 어울리는 다른 이름을 찾아낼 수 없을만큼 그렇게 하나의

이름에 귀속되어 있지는 않다.

2. 이름이 없이도 지내는 대상이 있다.

3. 하나의 이름은 때로 자신만을 지시하기 위해 쓰인다.

4. 하나의 대상은 자기 이미지와 만난다. 하나의 대상은 자기의 이름과 만난다. 이미지와

그 대상의 이름이 만나는 일이 일어난다.

5. 때로 하나의 대상의 이름은 이미지를 대신한다.

6. 이름은 현실에서 대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7.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의 문장에서 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8. 하나의 대상은 그 뒤에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게 한다.

9. 하나의 대상과 그것을 재현하는 것 사이에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모든 것이 하게 한다.

10. 다른 두개의 대상을 지시하는데 쓰이는 말들은 그 대상들을 각각 구분해 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11. 그림에서 말들은 이미지와 같은 실체를 갖고 있다.

12. 그림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말들을 다르게 본다.

13. 그 어떤 형태도 하나의 대상의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다.

14. 하나의 대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이미지와 같은 역할을 맡지 못한다.

15. 현실에서 대상들의 눈에 보이는 윤곽선은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루는 듯 맞닿아 있다.

16. 모호한 모습도 정확한 모습과 마찬가지로 필요하고 완전한 의미작용을 한다.

17. 때로 그림에 씌어진 말들은 분명한 것들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미지들은 모호한 것들을 지시한다.

18. 혹은 그 반대이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혁명' 192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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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소두영(1991), 기호학, 서울 : 인간사랑.
2. Bretonm Andr?(1978), 초현실주의 선언, 서울 : 성문각.
3. Saussure, Ferdinand de(1985), 일반언어학강의, 오원교 역, 서울 : 형설출판사.
4. Chipp(1968), Theories of Modern Art, L.A : Univ. of California Press
5. Foucault, Michel(1968), This is not a pipe, L.A : Univ of California Press.
6. Gablik, Suzi(1985), Magritte, New York : Thames & Hudson.
7. Germain & Le Blanc(1984), Introduction ? la linguistique g?n?rale Vol.5, Montreal : Les Press de l' Universit? del Montreal.
8. Hammacher, A.M(1985), Magritte, New York : Harry & Abrams.
9. No?l, Bernard(1977), Magritte, New York : Grown Publishers INC.
10. Passeron, Ren?e(1968), Histoire del la peinture Surr?aliste, Paris : le Liver de Poche.
11. Picon, Ga?ton(1983), Surrealists and Surrealism, 1919-1939. New York : Rizzoli.
12. Rubin, William (1968), Dada, Surrealism and heir Heritage New York : The Museum of Modern Art.
13. 동아대백과사전. Vol.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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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Hammacher, A. M. (1985), Magritte, New York : Harry and Abrams, pp.34-35.
2 Gablik, Suzi(1985), Magritte, p.23.
3 Picon, Gaetan(1983), Surrealists and Surrealism, p. 143.
4 Rubin, William. S(1968), Dada, Surrealism & Their Heritage, p.91.
5 Gablik, p. 12.
6 Chipp(1968) , Theories of Modern Art, p.398.
Revelation이란 바로 키리코의 용어로, 키리코는 '어떤 관점에서는, 꿈 속에서의 어느 누군가의 모습은 그의 형이상학적 실재의 증거라고 믿는다. 고로, 같은 관점에서, 한 예술가의 Revelation은, 무언가가 우리에게 나타나 예술작품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때로 경험하는 어떤 우연한 사건(Occurrences)들의 형이상학적 실재인 것이다. 이때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놀라움을 일깨우며 때로는 명상을 그리고 창조의 기쁨을 일깨운다.
7 Picon, p. 144.
8 Noel, Bernard(1977), Magritte, p.88-89.
9 Bounoure, Vincent, The Theme of Contradiction in Magritte, L'Oeil, N206-7. Noel의 Magritte에서 재인용. p.88
10 'Ceci n'est pas une pipe'를 부누르는 모순으로 보는 반면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진리로 보고 있다. '그림에 기이함을 주는 것은 이미지와 문구 사이의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순이란 단지 두개의 진술사이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으며, 아니면 하나의 같은 문장 안에서만 존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분명 하나의 진술 밖에 없으나 문장의 주어가 단순한 지시대명사이기 때문에 모순이 될 수는 없다.‥‥‥ 이 진술은 완벽하게 진리이다. 왜냐하면 파이프를 재현하는 이 드로잉은 분명 파이프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Foucault, Michel, This is not a pipe, p. 19.
11 소두영(1991). 기호학, p. 136.
12 앞 글, p. 136.
13 Saussure, Ferdinand de(1985), 일반 언어학 강의, 오원교 譯, pp.89-91.
14 언어기호의 개념에 지시의 대상이 개입되는 것은 소쉬르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23년
영국의 논리학자 오그덴(Charles K. Ogden)과 리샤르(Ivor A. Richards)는 「The Meaning of Meaning」에서 지시대상(r?f?rent)을 개입시킨 기호의 '기본 삼각형' 개념을 제시하였다. Claude Germain & Raymond Le Blanc(1984), Introduction ? la linguistique g?n?rale, Vol.5, p.19.

15 Foucault, p. 19.; "‥‥‥The statement is perfectly true, since it is quite apparent that the drawing representing the pipe is not the pipe itself‥‥‥"
16 Saussure, p.91.
17 동아대백과사전 Vol.6, p.496.
18 Saussure, p.98.
19 Gablik, p.14.
20 Gablik,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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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태현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윤난지
추천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