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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인간의 생명과 정신

온울에 2008. 5. 6. 03:21

목 차

1.서론
2.현대 사회와 인간성의 문제
3.심적 생명과 인간
4.정신과 세계 개방성
5.이념화의 작용과 승화
7.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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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나사렛대학교출판사 
학술지명 지성과 창조 
권 2000 
호 3 
출판일 2000.  

 

 

 

인간의 생명과 정신


김준연
2-405-0001-10
pp.247-270

국문요약
요 약
현대인들이 갖는 고통과 불안, 긴장을 분열, 해체, 진보라는 현대의 과학적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전제로 할 때, 현대인을 구원할 수 있는 해답은 과학이 아닌 철학에 있음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과학과 달리 인간과 그 사회를 전체와 종합, 나아가서 화해와 조화의 가치에서 보려고 한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물리적인 법칙보다는 자율적인 법칙을, 진보을 위한 경쟁보다는 사랑을 통한 공동체를 소중히 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살게 된다. 쉘러는 인간만의 특수지위를 인정하고 그 특징을 정신에서 찾고, 사랑과 승화를 식물, 동물과 구별된 인간의 정신능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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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일본인들은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의 한자로 맨 먼저 '末'을, 그 다음으로 '亂', '核' '崩'을 선정했다고 한다. '세기 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빈발했기 때문에 이처럼 부정적인 한자들이 선정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고 '분열'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현대인의 의식과 현대적 사상들과 관련지어 볼 때 전세계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분열이라는 말은 원초적인 하나가 둘로 갈라짐을 의미한다. 갈라짐은 고정, 정착이 아닌 요동, 분리, 이월을 나타내는 바 에너지를 상징하고 발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통한 발전과 강력한 힘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현대인은 분열을 당연히 변증법적인 생산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분열은 고통과 불안, 긴장을 초래한다. 따라서 고착을 퇴보라 생각하고 분열과 해체를 선도하는 과학에 파묻혀 사는 현대인들은 당연히 긴장과 불안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창조자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그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정신이 다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간다. 원자들이 서로 분열되고, 분열이 재분열되듯이 가족이 분열되고 개인과 개인이 분열되고 전체의 질서와 조화가 깨지고, 분열되어 나온 것이 역동적으로 전체에 폭행을 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분열은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립자가 핵에서 분열될 때 핵자체를 붕괴시키고 폭발하는 것처럼 파괴라는 위험을 내포한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과 인간은 모두 노출되고 해부되어 신비감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세상은 점점 더 작아지고, 인간들은 벌레처럼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본래 숭고한 빛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제 인간은 본성 중에서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원자와 같은 미세한 조각에까지 깊이 빠져들며 살아가고 있다. 앞선 세대의 세계는 모조리 전복되고 전통적 가치는 해체되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의 위기가 이러한 분열과 해체에서 초래된 것이라면 이제 화해, 통합의 개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전체와 종합, 통일을 주제로 한다. 따라서 인간 개념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인간 개념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직도 과학의 분야 중에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분야가 없다. 전문분야의 과학마다 인간의 한 측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줄 수는 있으나 종합적인 인간 이해를 위한 종합과학은 없다. 본 논문은 인간에 대한 부분적 고찰만으로 인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것처럼 언급하는 과학적인 인간 고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존재 가운데서 그의 지위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는 쉘러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인 인간 연구의 한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2.현대 사회와 인간성의 문제
오늘날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생물학자, 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들까지도 인간의 본질 구조에 관한 새로운 상의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문제성은 우리에게 알려진 전역사 중에서 현대에서 그 최고도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인간학자인 쉘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을 연구하는 특수과학의 종류가 점점 늘어나고, 이러한 많은 종류의 과학이 모두 그들 나름대로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것이 인간의 본질을 천명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 유사이래 현대만큼 인간 자신이 문제시된 때는 없었다."1)

이처럼 역사상 그 어느 시기에서도 현대에 있어서처럼 인간이 온전히 그리고 여지없이 문제 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의 급변과 그에 따른 인간이해의 혼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인간 이해의 혼란에 대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은 결코 인간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인간은 인격이 상실된 하나의 상품으로 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평가한 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간의 소외는 극단화되고, 인격적인 관계보다는 비인격적인 관계가 널리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들은 대중 속에서 고독을 체험하게 된다.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과 부와 권력의 편재에서 생겨나는 극도의 불의와 부조리는 현대인을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먹을 것이 남아 돌아가 경제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기아상태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 어느 한 구석에서도 인간이 더 이상 아사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수단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살인 무기를 제조하는 등 인간생명의 파괴에 사용되고 있다. 인간의 과학적 재능은 내면적 삶의 충만이나 인간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기보다는, 영혼을 고갈하고 시의 윈천을 막고 있으며 사람의 몸을 혹사, 휴식 평정의 기회 박탈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삶과 창조적 작업에 연결된 도덕적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현대과학이 유물론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데 기인한다. 현대과학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 유물론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는 심신동일설인데 이는 사람의 마음과 몸은 하나라는 이론이다. 마음은 두뇌의 특수한 기능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유물론적 사상은 인과론과 진화론에 연결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물질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엇이든 원인이 있다는 인과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또한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진화론 역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물체이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게 되고 자연법칙은 모든 자연현상을 결정론적인 인과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게 한다. 인간도 이러한 기계적인 변화만 가능하다. 기계적인 변화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변화를 일정한 궤도에 따라서 예정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게 한다. 한편 진화론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과 다른 생물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만이 합리적 동물이라고 하였지만 컴퓨터 역시 합리적 생각을 하며 침팬지, 돌고래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인간만이 목적의식을 갖는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유일한 존재하고 하였지만 동물들 역시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거나 주어진 조건들에 기계적인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처럼 현대과학은 동물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작은 생명체도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목적의식을 가지는데 박테리아의 의약품에 대한 면역성, 주인의 사랑을 받으려는 개의 행동, 야생동물과 길들여진 동물이 다른 점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의 주장이 인간 이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쉘러는 이러한 과학의 인간 해석을 일부 수용하여 두 가지 인간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인간 개념인데 인간은 형태학적으로 척추동물, 포유동물의 하위군으로서 갖고 있는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적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 인간 개념으로서 인간에게 생명을 지닌 종(種)의 어떠한 다른 특수 지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특수 지위를 부여하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다.2)

3.심적 생명과 인간
쉘러는 인간의 특수 지위를 밝히기 위하여 인간과 식물 그리고 동물의 본질적인 차이를 묻고 있다. 우선 그는 생명적 심적 세계의 전체적 구조의 본질적 단계와 그 형상을 심리학적 생물학적 생리학적 자료에 의해 기술 설명하고 있는데, 그 결과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명한 침팬지와 기술자로 생각된 에디슨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이기는 하나 그저 정도적 차이만이 있는 것이다."3)

심적인 것은 생명적인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심적인 것, 생명적인 것의 최하단계는 감정충박(感情衝迫, Gef?hlsdrang)이다.4) 식물적 생명의 본질은 여기에서 성립한다. 감정충박은 감정과 충동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서 아직 의식도 없고 감각도 표상도 없는 원시적 생명을 의미한다. 주위의 환경 일반에 대해서 단순히 나아감(Hinzu), 또는 단순히 멀어짐(Vonweg)의 막연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또는 대상 없는 快, 대상 없는 苦를 느낄 따름이다. 생명체와 환경은 아직은 서로 분리되지 못하고 얽혀 있다고 생각된다. 식물에 내면 상태 즉 심적인 것이 없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식물의 생명적 활동이 느린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지 결코 생명적 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식물에서 위와 아래로 즉 빛과 땅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식물적 생명이 방향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식물은 동물처럼 감각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최하단계의 심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감정충박은 감정과 충동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가진 식물의 생명에는 기관과 기관간의 상호의존이 동물보다 선천적으로 긴밀하다고 할 수 있다. 5) 이러한 생명의 내적 측면의 첫째 단계인 감정충박은 식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생명계를 관통하여 인간에까지 이른다. 인간의 감각, 지각, 표상, 사고의 깊숙한 곳에는 이 어두운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원초적 저항을 체험하게 하는 주체다. 이 주체는 실재, 즉 현실을 모두 가지게 하는 근본이요, 특히 현실을 통일하는 근본이며, 또 모든 표상 기능에 선행하는 현실에 대한 인상의 근본이다."6)

심적 생명의 둘째 단계는 본능현상이다. 그것은 "심적인 생명의 객관적인 단계 서열에 있어서 미분화의 망아적(忘我的) 감정충박에 뒤따르는 제2의 심적인 본질형태라도 볼 수 있다."7) 본능은 "경험이나 학습, 습관을 통하여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런 것들에 의해서는 다만 특수화되어질 뿐이며, 유기체 자체의 기관형성 과정 속에 뿌리박고 있는 생득적이고 유전적인 능력이다."8) 그러므로 본능은 종에 따라 구별되고 개체적으로 차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하게 율동화되어서 행동방식의 한 계열을 통하여 변함없이 홀러간다. 이 말은 본능은 고정적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이 행위함에 즈음해서 그의 목적을 예상하고 있듯이, 동물이 이미 그 행동이 종국적 결과를 마치 예상이나 하는 것처럼 대처해 나가는 능력이 바로 본능이다. 그러나 동물이 사실상 결과를 예상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본능 속에서는 노력과 지식이 아직 일체가 되어 있다"9)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쉘러는 이러한 본능의 특징으로 선천적으로 합목적적임, 어떤 확고하고 불변적인 리듬에 따라 진행됨, 생득적이고 유전적임을 들고 있다.10)

본능은 훈련을 받음이 없이 선천적으로 적합하는 것이고 유형적으로 반복하는 상황에만 호소한다. 유형적으로 반복하는 상황이란 자신의 생명에는 유의미하되 개별 동물의 특수경험에는 무의미한 것을 말한다. 자기 훈련과 학습, 오성 사용은 기본적으로 개체에 유용한 것이지 종에 유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능은 늘 종에 봉사한다. 그러므로 "본능적 행동은 결코 개체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환경의 특수적 내용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다만 가능한 환경적 부분들에 있어서의 하나의 전혀 특수한 구조에 대한 즉 그것들의 種전형적인 배열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다."11) 이러한 본능은 굳어져 있는 것, 즉 경직성이라고 칭하여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길들이기와 지능에 의거하는 가소적인 행동방식과는 구별된다. 이런 본능의 근본 특징은 생득적이요 유전적이라는 데 있다. 본능의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생활에 대처하기 위하여 동물이 하는 시도의 횟수로부터 본능의 동작은 독립해 있다는 점이다. 즉 본능적 동작은 성공적인 부분적 운동들의 집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본능이 특수화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본능은 이미 생명체 자체의 기관형성 속에 짜여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본능은 습관과 자기 훈련에 기인한 동작방식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연상적합법칙성과 조건반사로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본능은 의심할 바 없이 연상에 의해서 규정지어진 심적인 복합적 형성보다 더 원초적인 존재요 생기현상이다. "본능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지식과 행동의 불가분리적 통일을 나타내기 때문에 행동의 다음조처로 동시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의 지식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12) 인간에게도 본능적 태도는 나타난다. 이것은 특수한 감각적 자극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본능은 잔재문제일 뿐이다. 이 의미는 본능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구조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와는 반대로 동물은 본능을 통하여 목적달성에 적합하게 구조되어 있다.

심적 생명의 셋째 단계는 습관적 행동 내지 연상적 기억이다. 본능적 동작의 근원에서 생기는 습관적 동작과 지능적 동작 중에서 습관적 동작에 해당하는 연상, 재생, 조건반사 등이 연상적 기억의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관찰하였듯이 연상적 기억의 능력을 식물은 갖고 있지 않다."13) 연상적 기억을 갖고 있는 생명체는, 그 동작이 같은 종류의 이전 동작을 토대로 해서, 그 생명에 유용하게 변화시키는 생명체이다. 따라서 동물만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은 이전의 동작을 되풀이해서 자신의 동작을 유의미하게 변화시킨다. 동물은 자발적인 실험운동을 하며 또 이런 실험운동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식물에는 그러한 실험운동이 없다. 동물의 자발적인 실험운동과 그 반복은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재생의 전제이며, 그 자체 하나의 생득적인 충동이다. 연상적 기억의 기초적인 것은 조건반사이다.14) 이러한 조건반사와 심적으로 유사한 것이 연상법칙성이다. 이것에 의해 이미 체험된 표상들이 재생되고 결핍된 부분이 보충되기도 한다. 표상의 재생을 위한 연상법칙은 인접법칙과 유사법칙에서 유래하나 충동, 욕구 등이 규정하는 힘의 지배하에 있다.

특히 연상적 기억의 특징은 분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분리는 쉘러에 따르면 모든 독창적 행위의 결정적인 전제이다. 그런 독창적인 행위의 첫 단계는 앞에서 언급한 동물의 실험운동이다. 실험운동을 통하여 동물은 어떤 새것을 경험하고 자신을 습득시킨다. 우연히 성취된 거동은 쾌락의 높임이라는 의미에서 되풀이된다. 그 경우에 그 동물의 거동은 고정되는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길들임이나 자신을 길들이는 현상도 이러한 연상 기억에 의한 습득과 고정된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상원리는 모방과 복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인습을 형성한다."15) 그리하여 연상기억은 자동적으로 규정능력으로 된다. 동물에게 있어서는 이 연상적 기억은 충동 충족에 분명히 종속해 있으며, 또한 그것은 기계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연상 및 재생의 원리가 최대한으로 확대되어 있어, 앞으로 살펴보게 될 "실제적 지능과의 관계에서 볼 때는 아직도 비교적 고정성과 습관성의 원리 즉 보수적 원리이지만 반면 본능과의 관계에서는 이미 강력한 해방의 도구가 된다."16) 쉘러도 인간에게 있어서 연상적 기억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는 "진정한 인간의 발전은 인습의 해체를 증가하는 데서 비롯된다"17)고 말하고, 그 인습의 힘은 인습을 객관화하는 이성에 의해서 인간 역사에서 무너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성은 그때 그때의 새 발견과 발명에 대한 지반을 자유로이 마련한다."18)

심적 생명의 넷째 단계는 실제적 지능이다. 지능은 연상적 기억의 모험을 교정하는 수단이나 아직도 기관에 매어 있다. 쉘러에 의하면, 한 생명체가 종적(種的) 유형에도 또 개인적 유형에도 맞지 않는 새 상황에 직면해 동작할 때에, 그러면서도 이전에 했던 실험의 횟수에서 갑작스레 독립해서 충동이 규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작할 때에 생명체의 이러한 동작이 지능적인 것이다. 즉 지능은 동물의 행동이 직접적인 결정을 산출하는 가시적 근거 없이, 환경 내의 사태 연관 및 가치 연관에 대한, 갑자기 나타나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의 선택행위 역시 지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물은 결코 단순한 충동의 기계가 아니다. 이러한 "지능의 궁극적인 의미가 유기체의 충동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혹은 실패하게 하는 그러한 행위일 때에 이런 지능을 실제적이라고 한다."19) 쉘러는 실제적 지능도 동물과 인간에게 관계된다고 보고, 실제적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4.정신과 세계 개방성
동물에게도 지능을 부여하는 쉘러의 심적 세계 4단계에서는 인간만이 갖는 특수 지위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과 특수 지위란 무엇인가라는 결정적인 물음에 직면해서 쉘러는 명확하게 설명하고있다. "인간 본질과 인간의 특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능과 선택능력보다는 휠씬 높은 데 있다."20) 그것은 인간이 이 지능과 선택능력을 양적으로 제아무리, 무한히 증대시켜 보아도 결코 미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심적 존재의 4단계 위에 인간이 고유하는 다른 단계, 즉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로운 힘, 새로운 원리는 바로 정신이다. 넓은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 편에 놓여 있는 이 정신만이 인간을 동물과 엄격히 대립시키는 것이다. 쉘러가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규정한 것은 전통적인 인간 규정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간론의 기초로서 확립한 쉘러의 정신의 원리는 희랍인들이 이성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이성의 개념과 이념의 사고, 그리고 직관도 포함한다. 정신은 또한 본질적 내실에 대한 직관 외에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작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정신이 인간론의 내용에 드러나게 될 때 그 작용중심을 인격이라고 한다.21) 인격으로서의 정신 존재는 유기적인 것에서 실존적으로 해방되었다는 것을 그 근본 규정으로서 갖고있다. 특히 이 정신적 원리에서 사물의 순수한 존재성을 파악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객체적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이념화적 행위도 수행할 수 있다. 쉘러는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지위』에서 정신 자체를 그의 본질성에서 물음을 제기하기 전에 인간에게 정신을 귀속시키느냐 않느냐에 관해서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그는 4단계의 생물 심리학적 세계를 건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정신의 본질 규정을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고 있다. 쉘러의 인간학에 있어서 정신적 존재의 근본 규정은 세계 개방성이다.

세계 개방성은 정신이 생명체의 조직기관으로부터 존재 상 풀려나 있다는 것, 그것이 강제로부터, 압력으로부터, 생명과 생명에 속하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또한 그 자신의 충동적 지능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개방성은 모든 체험되는 정신을 통하여 모든 존재에 대하여 무관심적으로 대상화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동물은 환경을 가지나 인간은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만이 세계 개방성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정신적 존재는 이제 충동과 환경에 속박되어 있지 않고 환경으로부터 자유롭다. 동물은 환경 속에 망아적으로 몰입해서 살기 때문에 그 환경을 대상화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는 자기에 주어진 환경을 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고, 이런 대상을 원칙상 자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사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어떤 것 자체를 그의 참된 존재에 있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동물의 동작은 언제나 생리적-심적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동물이 그 환경계에 관해 알고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환경 구조의 확실한 울타리의 한계 내에 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자기 의식을 갖지 못한다. 그 때문에 환경을 대상화할 수 없고, 또 대상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심적 상태성과 충동에서 독립되고 환경의 감각적 외면에서도 독립되어 있다. 충동활동은 인격중심에 의해 억제되고 해방된다. 또한 인간은 사물의 대상성을 유가치한 것, 궁극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체험한다. 이런 행동의 형식이 바로 세계 개방성의 형식이요, 환경의 구속에서 초탈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무제한하게 세계개방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신에 의해 세계 개방성에로까지 향상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동물은 환경에 몰입하여 살고, 그 환경을 걸머지고 있기 때문에 정욕과 충동에 둘러싸여 있는 저항 중심체를 대상화할 수 없다. 환경 아닌 세계로 나가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상-존재란 정신의 논리적 측면이 가지는 가장 형식적인 범주이다."22) 대상-존재란 것은 사물을 대상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주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은 환경을 대상화할 수 없는 비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식이 없다. 결국 자기를 소유함도 없고 자기를 지배하지도 않으므로 동물은 자기라는 것을 의식함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은 자기소유와 세계소유가 없다. 이러한 내성(반성작용), 자기 의식, 충동저항물의 대상화 능력은 인간의 정신만이 고유하는 본질적 특징이다.

정신이 자기 의식화를 가능하게 하고 내성과 집중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환경을 세계라는 존재의 차원으로 확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리적 ·심적 성질을 다시 대상화할 수 있고, 개별의 모든 심적 체험, 그 생명적 기능자체 등을 다시 대상화할 수 있다."23) 이런 까닭에 인간은 자살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변천하는 충동을 넘어서서 지속하는 의지를 갖는다. 이것은 인간중심이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대립을 초월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 구조는 그 자신 주어져 있는데, 그 본질적인 특수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24)

첫째, 인간만이 구체적인 사물범주와 실체범주를 가진다. 동물은 이런 범주를 갖지 않고 순간 순간적인 망아 상태들의 연속이라 하겠다. 또한 "보이는 사물, 들리는 사물, 맛보는 사물, 냄새나는 사물, 만져지는 사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구체적인 대상-사물에 즉 동일한 실재-핵심에 관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중추가 없다."25) 인간만이 자기의식을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으므로 비로소 대상적 환경 세계와 자아 체험이 구별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 사물을 상이한 감관의 지각내용을 통하여 동일한 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도 보편성의 의식은 갖고 있겠으나 그러나 개별적 대상들로부터 보편적 내용을 구별해 낼 수가 없고 보편적 내용 상호간의 관계를 그 가능적 적용의 구체적 상황과 분리시켜서 파악하고 그것을 독립적으로 조작할 능력이 없다. 즉 실체-범주가 의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인간은 공허한 형식으로서 공간,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공간, 시간의 공허한 형식을 의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과 사건을 그 안에 집어넣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허한 형식은 그 충동의 불만이 충동의 충족보다도 항상 과잉인 그런 정신적 존재에서만 가능하다."26) 동물은 매번 직면하는 구체적인 현실에 몰입해서 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공허한 형식을 환경 사물들의 일정한 내용성에서 분리할 수 없다. 특히 인간의 공간·시간의 형식을 공허하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충동의 기대가 언제까지나 근원적으로 구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공허는 우리 심정의 공허이다. 이러한 심정의 공허를 쉘러는 지각과 전(全) 사물 세계와의 모든 가능한 내용에 선행하는 즉 아무런 사물이 없어도 마치 존립하는 것이라 하여 '무한한 공허' 라고 말하고 있다. 27)

셋째로 인격으로서의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만물을 인식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에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넘어 있는 존재가 된다. 사람은 인격이라는 중심에서 여러 작용을 수행하고, 그 작용을 통해서 자기의 육체와 마음(심리)을 대상화한다. 인격이라는 중심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푸짐한 세계를 대상화하거니와, 인격-중심 자신은 세계의 일부일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의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최상의 존재 근거자신 중에만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그 자신을 대상화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서 "정신은 순수하고 순결한 활동성이요, 자신의 존재를 오직 그 작용의 자유 수행 중에서만 가진다."28) 따라서 이러한 정신의 중심인 인격은 대상적 존재도, 물적인 존재도 아니다. 부단히 실현하는 작용들의 질서 있는 결합체이다. "인격은 그것이 작용하는 중에서만 있는 것이요, 작용을 통해서 있는 것이다."29)

이상과 같은 정신의 본질적 특징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세계 개방성과 자기 의식으로 나타난다. 게엘렌(Anold Gehlen)도 인간을 비전문화된 결핍존재(M?ngelwesen)라고 불렀다. 모든 상황에 따라 동물은 거기에 알맞는 행동을 전문화된 본능에 따라 대처하지만 인간은 그런 전문화된 본능이 없다. 이러한 신체적, 정신적 취약성과 불안전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극하려는 영원한 생의 탈출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무력함과 자기 결핍성에 기인한 환경의 초탈 또는 세계에 대한개방성을 강요당하는 존재이다. 정신의 세계 개방성과 자기 의식의 특징은 세계내적 자기 정위(Weltorientierung)를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부담 해소작용으로서 불가피한 요소라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전문화는 인식능력이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세계 개방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의 인식은 좁게 특수한 환경 안에서만 작용하지만, 인간은 무한히 높게 올라가는 세계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본능이 결핍되어 있으나 세계를 가능한 한 자기에게 적합한 현실로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플레스너(Plessner)에 의하면, 동물은 그의 중심으로 생을 펼쳐나갈 뿐 결코 자발적인 중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며, 그의 환경에 대한 관계는 가지나 이 관계에 대한 관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배후를 찾는자(hinter sich gekommen)이다. 인간은 동시에 중심을 떠나서 살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자기에게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세계로 향하게 한다. 세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이면서 육체의 도구를 넘어서는 일을 하며 어떤 상태에 있으면서 그 상태를 지배한다. 플레스너의 탈중심성으로서의 인간 규정은 정신을 자기 의식으로 규정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식이 가능하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세계 개방성을 가진다.

5.이념화의 작용과 승화
인간의 정신이 세계 개방성과 자기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이념화의 작용이 있다는 것에 귀결된다.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념과 근원적 현상을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각한다는 것도 역시 이념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을 지각하는 작용 다시 말해서 본질직관의 작용은 이념화의 작용인 것이다. "이념화는 우리가 하는 관찰의 도수(度數)에서 또 지능이 하는 귀납적인 추측에서 독립하여 세계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구조 형식을 그것들이 해당하는 본질 영역의 각 한 실례에서 동시에 파악함을 의미한다."30) 이리하여 우리가 얻은 지식은 그것이 비록 한 실례에서 얻어졌더라도 귀속하는 모든 가능한 사물에 대해 무한히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쉘러는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별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에게 순수한 본질지(Wesenwissen)를 인식하는 능력, 즉 본질직관을 승인한다. 본질지에 대한 물음은 모든 현실성의 관계가 괄호 안에 넣어질 때 비로소 일어난다. 이렇게 본질직관에 대한 쉘러의 사상은 후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본질직관은 형이상학적 인식에 고유한 존재에 대한 근본적 태도이고, 이러한 본질직관은 무엇보다도 필연적으로 하나의 수동적인, 인내하는 생명적 중심과 그 활동성을 잠시 중지하는 태도에 결부되어있다."31) 본질직관은 다시 말해서 형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화의 작용은 기술적인 지능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능의 귀납적 추측에서 독립하여 본질성질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특징을 가진 인간만이 사물을 Dasein으로부터가 아니라 Sosein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본질과 Dasein을 분리하는 능력이 인간 정신의 근본 특징이요, 그 근본 특징이 그 외의 모든 특징의 기초가 된다."32) 인간 정신이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이 선천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화의 작용에 있어서 인간은 사물 즉 세계의 현실 성격을 지양해보는 기술을 수행하게 된다. 본질 파악의 이란 시도와 이런 기술에 있어서 눈에 띄는 구체적 사물계의 껍질이 벗겨져서 본질성의 이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이런 시도와 기술의 수행 없이 구체적인 것과 현실재 중에서만 살고 또한 '지금의 여기'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그림으로 그린 주사위와 진짜 주사위를 구별하자 못한다."33)

이렇게 동물은 우연적인 현실 존재에 밀착해 있으나 인간은 이념화 작용을 통해 자기 자신의 비현실화와 현실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 인간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요, 생명의 금욕자다. 이러한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부정은 인간의 충동력을 정신적 활동에다 순화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순수 의지의 형태에 있어서의 정신만이 억제작용에 의하여 감정충박의 중심을 작용 못하게 할 수 있다.34) 정신의 이념화 작용은 부정의 작용이요, 생명충동의 무력화 작용이며 금욕적인 비현실화 작용이다.

이처럼 인간은 정신의 힘으로 그를 격렬하게 휩싸고 있는 그의 생명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금욕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 결과 생명의 충동적 자극을 억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 동물은 현실에 대해서 긍정만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부정할 수 있는 자', 모든 단순한 현실에 대하여 '영원한 반항자'일 수 있다.35) 인간은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이제·여기·이렇게 있음'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하며,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또한 자기 자신의 그때그때의 자기적 현실조차도, 초월할려고 노력하는 영원한 파우스트다.36) 이러한 정신의 부정의 작용은 감각충동의 작용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충동 억압자가 된다. 정신이 충동을 억압하기 의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충동적 에너지를 정신적 활동에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

"정신 자신은 그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원래 전혀 아무런 <노력>도 <힘>도 <활동성>도 없다. 조금이라도 힘과 활동성을 얻고자 한다면, 저 금욕, 저 충동억제,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화가 부가되어야 한다."37) "정신은 비록 고유의 본질과 법칙을 갖고 있지만 결코 그 어떤 근원적인 자체의 에너지가 없으며, 비록 충동 억제적(이것이 이미 정신적이지만) 의지의 저 부정작용에 의해서 원래 무력한 그리고 다만 일군의 순수 <지향>에 있어서만 존립하는 정신의 활성화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비로소 <생겨 나오는 것>은 아니다."38) 인간에게는 생명과 정신의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조화되어 있다. 정신은 순수이념과 가치를 표상하는 반면 그 자체 아무런 힘도, 에너지도 없다.

쉘러의 "낮은 것이 원래 강력하고 가장 높은 것이 원래 무력하다"39)는 말처럼, 모든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형식은 보다 저차원적인 것에 비할 때 비교적 무력하며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차원적인 것의 힘에 의해서 실현된다. 그런데 정신은 최고의 원리이므로 전혀 무력하다. 그와 반대로 생명은 매우 강력한 힘과 세력을 갖고 있으나 일체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서는 맹목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생명의 두 대립된 원리가 서로 보완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정신은 생명을 이념화하지만 그러나 정신을 활동시키고 실현시키는 것은 오로지 생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승화과정은 정신에 의한 충동의 조종과 지도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종은 정신적 의지에 의한 충동의 억제와 억제의 해제를 뜻하는 것이며, 지도는 이념과 가치 자체를 충동의 눈 앞에 제시함으로 충동의 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으로 인해 충동이 이념과 가치를 얻게 되고 정신이 힘과 세력을 얻게 되는 승화과정은 사실은 정신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다. "정신이야말로 그러한 충동 억제를 일으키는 자이다. 즉 이념과 가치에 의해 지도되는 정신적 의지가 이념과 가치에 어긋나는 충동생화의 동기에게 충동행위에 필요한 표상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편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충동에게 이념과 가치에 대한 표상을, 말하자면 유혹 물처럼 눈 앞에 아른거리게 함으로써, 정신에 의해 조종된 의지의 기획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일을 하게끔 충동들을 질서잡고 조직화하는 것이다."40) 승화과정을 통해 정신은 힘을 얻고, 생명충동은 정신의 법칙 속으로 즉 이념과 의미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승화는 충동 에너지를 정신적 활동에로 전화시키는 작용이다.

이처럼 승화는 결국 '충동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명화'를 의미한다.41) 생명과 정신의 두 대립 원리의 조화와 균형화가 인간화요 인간 형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최고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 인간은 그의 모든 최고로 발전된 정신적 및 충동적 성질들과 활동들 간의 최대의 긴장을 최대한으로 조화시킨 인간이다. 즉 자연적 인간과 정신적 인간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조화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7.결론
근대 자연과학를 근거로 한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의 주체성을 침탈해가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성, 주체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쉘러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신의 존재이다. 정신은 승화과정을 통해 충동을 억제하고 조화와 균형의 인간으로 되어 간다. '충동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명화'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승화과정, 즉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해답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주제와 마주칠 때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세계 내 존재이며 결핍의 존재이다. 인간은 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채우며 창조한다. 정신의 존재이기에 인간은 충동의 힘을 순화하고 승화하며 헌신할 수 있다. 인간은 '사랑이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회복할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는 "무한히 상승하는 하나의 과정"이다.42) 이는 "자아가 아니라 타자가 첫 번째 인간이다"43)라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세계 구성의 원천인 자아가 첫 번째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부각될 때 사랑의 공동체는 가능하다.

후설은 사랑은 타자 속에서 자신을 느끼고 타자 속에서 자신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고양된 방식으로 사랑받는 사람 안에서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지 곁에 이웃하여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에 살고 있다."44) 주체가 자신을 타자 속에 이전시켜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사랑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상대방의 고통과 기쁨 등을 자신의 아픔이나 기쁨과 같이 느끼는 것이다. 상호주관적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공동체이며 사랑은 서로간의 주체성 이전을 통하여 타자 안에 자신으로 살 수 있을 때 실현된다. 사랑이 주체성의 회복이며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준다. 인간은 식물처럼 생명체이며 동물처럼 본능도 있지만 정신이라는 본질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물과 다르며 동물과도 구별된다. 그 구별되는 특징은 생명과 정신의 조화, 분열이 아닌 화해, 충동의 부정과 승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고양되며 윤리적인 인격체로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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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Husserl, E. , Husserliana XIV , Haag: Martinus Nijhoff , 1973.
Husserl, E. , Husserliana XV . Haag: Martinus Nijhoff , 1973.
Scheler, M. , 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 in Spate Schriften , Bern, 1976.
Scheler, M. , Philosophische Weltanschauung , in Spate Schriften , Bern, 1976.
미카엘 란트만 , 철학적 인간학 , 진교훈 역, 경문사 , 서울.
한국철학연구회 , 철학연구 , 제30, 31집.
한국철학회 , 현대의 윤리적 상황과 철학적 대응(제5회 한국 철학자 연합대회보,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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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M. Scheler, Stellung, S.11.
2)Ibid., S.12.
3)Ibid., S.31.
4)Ibid., S.13.
5)Ibid., S.15.
6)Ibid., S.16.
7) Ibid., S.17.
8)M. Scheler, Philosophische Weltanschauung, S.98.
9) Ibid., S.98.
10)M. Scheler, Philosophische Weltanschauung, S.98.
11)Ibid., S.18.
12)Ibid., S.21.
13)Ibid., S.22.
14)Ibid., S.23.
15)Ibid., S.25.
16)Ibid., S.26.
17)Ibid., S.25.
18)Ibid., S.26.
19)Ibid., S.28.
20)Ibid., S.31.
21)Ibid., S.32.
22)Ibid., S.34.
23)Ibid., S.34.
24)Ibid., S.36.
25)Ibid., S.36.
26)Ibid., S.37.
27)Ibid., S.38.
28)Ibid., S.39.
29)Ibid., S.39.
30)Ibid., S.41.
31)M. Scheler, Philosophische Weltanschauung, S.162.
32)M. Scheler, Stellung, S.42.
33)Landmann, 『철학적 인간학』, 진교훈 역(경문사), p.139.
34)M. Scheler, Stellung, S.44.
35)Ibid., S.44.
36)Ibid., S.45.
37)Ibid., S.45.
38)Ibid., S.46.
39)Ibid., S.52.
40) Ibid., S.49.
41) Ibid., S.49.
42)E. Husserl, Husserliana. XV, S.610.
43) E. Husserl, Husserliana. XIV, S.418.
44)Ibid., S.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