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인지와 언어.

[=] 시 · 언어 · 시간 · 진실

온울에 2008. 5. 26. 03:57

목 차

1. 머리말-세계관과 역사의식
2. 언어 · 역사 · 사회
3. 이야기 · 역사 · 시간
4. 맺음말-시와 역사 혹은 진실과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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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崇實語文學會 
학술지명 崇實語文 
ISSN  
권 19 
호  
출판일 2003.  

 

 

 

시 · 언어 · 시간 · 진실
(시와 역사에 대하여)


Poetry, Language, Time, Reality


이은봉
(Lee, Eun-Bong)
1-108-0301-12

국문요약
사람들이 선택하는 이런저런 가치는 본래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안으로 쌓이기도 하는 법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각각의 주체들이 어떠한 의식을 지니고 역사적 현재로서의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운명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언어에는 한 시대의 정서와 가치가 반영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모든 언어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의 역사적 변화는 기의의 측면에서보다는 기표의 측면에서 좀더 민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조나 음상, 리듬 등 소리 자질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의미의 측면에서보다 선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모든 언어가 어조나 음상, 리듬 등 기표와 함께 하는 정서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서적 측면은 개념의 언어보다는 형상의 언어와 좀더 깊은 친연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의 언어와 접점을 이룬다.

형상의 구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이라는 것은 이제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형상의 세계 바탕으로 하는 시책 언어가 저 고유의 특징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정서적 자질적 자질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정서적 자질은 상대적으로 변화에 민감하고, 좀더 역사적이다. 이러한 점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자신의 인지영역안에 유전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고, 각 시대의 시가 이처럼 유전하는 주체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가 유전한다는 것은 시의 언어가 유전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각 시대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시어가 태어나는 당연하다. 물론 이러한 예는 한국의 현대시사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어들이 역사적 현재로서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그에 따른 뜨거운 의식 및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리는 시어가 집적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문체 역시 역사·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체 역시 당대적 가치의식 혹은 문제의식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얘기이다. 이러한 점은 시의 문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특히 밝고 화사한 이미지를 짧고 간명하게 투사하는 문체의 시들이 좀더 호응을 얻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만연체의 복문보다 는 좀더 구조가 분명한, 곧 대등절이 마주 보는 형식의 중문이 훨씬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체의 특성이 이처럼 바뀌는 것은 한국사의 발전 단계가 이미 충분히 자본주의적 근대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지니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가 '빠른 속도'에 있다는 것은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시와 역사는 일단 '이야기'를 핵심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이 때의 이야기는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체험은 과거의 것인 이런저런 사건들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와 역사는 이러한 과거의 체험을, 다시 말해 체험에 기초해 있는 사건을, 즉 '이야기'를 오늘의 현실과 관련하여 되살려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상호 접점을 갖는다.

역사와 관련하여 흔히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故創新)을 말하고 있다. 옛것을 도탑게 해서 새것을 아는 일과,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역사가 시 (서정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더 과거에 집착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시가 좀더 지금 이곳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축적된 시간들의 꼭지점 위에서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때의 시간이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타자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과학과 기술로서의 객체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시인의 상상적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적 시간은 당연히 경험적 시간을 뜻한다. 경험적 시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체의 상상력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는 미적 시간을 가리킨다. 미적 시간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초월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시간의 밖의 세계를 꿈꾸는 것도 실제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다. 시간의 밖이라는 말은 시대의 밖이라는 말로 바뀌어 표현되더라도 무방하다. 일정한기간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시간의 밖이라는 말은 결국 시대의 밖이라는 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의 입장을 떠나 공동체의 입장에 서게 되면 시간의 문제가 시대의 문제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오늘의 시인들이 꿈꾸는 시간의 밖은 자연스럽게 시대의 밖, 즉 자본주의적 근대의 밖이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이러한 추상적인 일들보다 좀더 먼저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의 한 시기로서 자본주의적 근대 자체를 바르게 아는 일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 자체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보기에는 이처럼 참된 예술적 창조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어 가는 것이 부르주아 중심의 자본주의적 근대이다. 근대 초기의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중기 이후 새롭게 부상해온 부르주아들에게 서정시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시비와 딴지를 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들이 보기에는 이들 부르주아들이 자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한갓 속물들일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는 허구이고, 역사는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가 창작문학 전체를 가리킬 때 이는 좀더 분명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창작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가리켜 아예 허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허구가 하나의 심미적 장치라고 하면 그것의 적용범위가 소설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서정시)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창작의 과정을 살펴보면 시 역시 항용허구로서의 장치를 응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시를 가리켜 허구라고 해온 정의가 수정되어야 하듯이 역사를 가리켜 진실이라고 해온 정의도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겉으로는 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허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역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본래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재해석의 과정에 의미를 두기 마련이다. 학문으로서의 역사이든 교양으로서의 역사이든 역사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지속적인 가공과정에, 즉 허구화 과정에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의 세계관에 의해 덧붙여지고 꾸며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덧붙여지고 꾸며진 역사를 진실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허구라는 장치를 거치기는 하지만 시야말로 오히려 진실을 담는 언어형식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심미적 언어를 매개로 하기는 하지만 시 역시 역사적 현재, 나날의 삶의 현실에 대한 해석의 한 형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도 시는 역사와 공통되는 영역을 갖는다.

산업화의 부산물인 생태환경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자연의 역사에 대한 시인들의 관심이 점차 증폭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시인들로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이 상호부조하며 공동체를 이루던 세계를 미래의 사회, 죽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의 사회로 옮겨오고 싶은 것이다. 좀더 성숙한 미래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깨어 있는 의지가 아마도 시인으로 하여금 역사 일반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리라.


한글키워드
시, 언어, 의식, 역사, 시간, 근대, 정서, 이야기, 허구,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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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세계관과 역사의식
새로운 천년이 개막되고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거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객쩍은 느낌이 없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 중심의 참여정부까지 이미 출발을 한 형편인 만큼 그러한 느낌은 더욱 크다. 좀처럼 역사와 관련된 것은 역사에게 돌려주거나 적어도 정치권에게 맡겨 두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한편으로는 시와 역사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내포가 크고 복잡한 만큼 지금쯤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간 필요할 만 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와 역사가 지니고 있는 내포를 좀더 확대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더욱 그렇다. 역사라는 것의 내포가 단지 과거의 사실과 사건들만을 단선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의식(인식)이라는 개념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역사는 오히려 과거의 사실이나 사건과 자체와는 다소간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른바 역사의식미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글에서 추구하는 논의의 초점은 불가불 오늘의 현실, 즉 우리 시대의 지금의 현실과 관련된 것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을 역사적 안목으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하여 역사의식을 논의하는 일이라면 본고에서도 몇 가지 할 말이 있으리라는 뜻이다.

대부분 논자들은 '역사의식'을 주체에 의해 능동적으로 획득되는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을 "인간과 사회의 진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본능적 믿음"과 관련시켜 이해하기 때문이다.1)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반드시 그러한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의식'이라는 것의 속성 자체가 본래 그렇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주체적이든 비주체적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의 자기 시대에 대한 저 나름의 입장과 견해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좀더 진보적으로 자기 시대를 해석하는 가운데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더 보수적으로 자기 시대를 해석하는 가운데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식 자체의 관점만으로 보면 이처럼 진보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현재로서 자신의 시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처지와 관련하여 순간순간 일련의 가치를 선택하는 가운데 나날의 생존을 영위해가는 것이 사람살이의 일반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어떤 가치를 선택하는 일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종의 운명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누구라도 사람 일반에 대해 자기 나름의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평균적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2. 언어 · 역사 · 사회
사람들이 선택하는 이런저런 가치는 본래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안으로 쌓이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각각의 주체들이 어떠한 의식을 지니고 역사적 현재로서의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본래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을 암시하는 하나의 기호이고 상징이다. 이는 기의에 대해 기표가 갖는 관계가 상징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언어라는 상징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쉽게 포착되지 않기 마련이다. 하나의 상징으로서 언어는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적 현재에 대한 태도 일반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루 관심을 끈다.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현재로서의 오늘의 삶을 제대로 해석할 수도, 변혁할 수도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가 지니고 있는 내포를 구태여 이러한 측면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현재에 대한 주체의 능동적 의식이 전제될 경우에만 언어에 당대적 가치와 정신이 함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역사의식, 즉 깨어 있는 역사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당대의 시대정신을 함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가 갖고 있는 일반적 특징이다. 그렇다. 한편으로는 공시적으로도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운명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언제나 한 시대의 정서와 가치를 반영하기 마련인 것이 그 시대의 언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각 나라의 표준어 규정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표준어는 각 나라의 공통어에 일정한 규제를 가한 이상적인 언어를 가리킨다.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표준어는 인위적으로 제정되고 있다. 표준어가 수도나 물화 중심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연유한다. 영국의 런던어, 프랑스의 파리어, 일본의 도쿄어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좀더 상세히 따져 보면 런던어, 파리어, 도쿄어 등도 일종의 방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지역의 방언 중에서 하나를 골라 교육·정치·문화 등의 편리를 위해 공용어로 정해 대표적인 국어로 삼은 것이 표준어라는 것이다.

1988년 1월 19일에 재고시된 우리나라의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표준어 규정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기본조건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적(역사적) 조건으로서의 '현대', 사회적(계급적) 조건으로서의 '교양 있는 사람들', 지역적(공간적) 조건으로서의 ‘서울'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표준말 규정에 이러한 조건이 반영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역사·사회적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역사·사회적 조건과 요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 언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실재라는 뜻이다.2)

언어의 변화는 기의의 측면에서보다는 기표의 측면에서 좀더 민감한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조나 음상, 리듬 등 소리 자질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의미의 측면에서보다 선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언어 자체가 기표의 체계, 즉 소리 기호의 체계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좀더 자명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면 모든 언어가 어조나 음상, 리듬 등 기표와 함께 하는 정서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서적 측면은 개념의 언어보다는 형상의 언어와 좀더 깊은 친연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의 언어와 접점을 이룬다. 형상의 구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이라는 것은 이제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형상의 세계, 곧 상상력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시의 언어가 저 고유의 특징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정서적 자질인 것이다. 강조하자면 이 정서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변화에 민감하고, 좀더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시의 정서가 1930년 시의 정서에 비해 차별성을 갖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의 시의 정서가 1930년대의 시에 비해 차별성을 갖게 되는 것은 그동안 사람들의 정서 자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 시대의 진전에 따라 언어를 이루고 있는 기표들, 즉 어조나 음상, 리듬 등이 끊임없이 유전(流轉)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이러한점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자신의 인지영역 안에 유전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고, 각 시대의 시가 이처럼 유전하는 주체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가 시인들의 의식을 이루는 내포의 하나라면 의식이 유전하는 만큼 정서 또한 유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정서가 유전한다는 것은 시의 언어가 유전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유전하는 시의 언어가 유전하는 정서를 반영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정작의 시의 역사는 시를 이루는 언어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언어 또한 유전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역사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시대의 시인들이 유전하는 의식의 역사적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어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각 시대의 공통적인 의식, 특히 공통적인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들 독특한 어휘를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의 어휘, 즉 일종의 유행어가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다. 자기 시대를 상정하는 이들 시어를 통해 당대의 보편적 의식과 정서, 나아가 쟁점을 담아내게 되는 것은 시인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각 시대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시어가 태어나는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예는 한국의 현대시사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1920년대를 풍미했던 가장 보편적인 시어가 ‘님'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죽음·영원·밤 등의 시어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상실된 ‘님'을 노래함으로써 상실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시인들이 지니고 있던 보편적인 욕구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의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어는 '고향’이었거니와, 이 또한 상실된 고향, 나아가 상실된 조국을 노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1980년대 초 한때에는 '빈대'라는 말과 '적(敵)'이라는 시어가 크게 풍미한 적이 있다. 이러한 시어와 관련하여 일단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즈음 우후죽순 격으로 문단에 나온 시인들의 경우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쉽게 직장을 얻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두루 잘아는 사실이다. 이른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들 시인의 처지였던 것이다. 이들 시인의 경우 말 그대로 여기저기에 '빈대'를 붙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의 시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어휘인 '빈대'는 다름 아닌 이들 시인이 지니고 있는 처지와 삶을 희화적(纖畵的)므로 상징화하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들 시인이 당시의 전두환 군사정권을 '적(敵)'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구성될 무렵(1994. 11.)에는 그와 함께 했다던 젊은 시인들 치고 자신의 작품에 ‘적'이라는 시어를 등장시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들 시인으로서는 전두환 군사정권, 곧 적이 타도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미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의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시인들이 적기 개념을 이처럼 오직 자신의 밖에서만 찾았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이끌지 못하도록 하는 내면의 무사와 안일, 나태와 권태 등의 심리에 대해서도 타도되어야 할'적'으로 간주하고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은 바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1980년대 전반기라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바르게 진전시키기 위한 시인들의 올곧은 의지가 ‘적'이라는 시어를 유행시켰던 셈이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이러한 시어들이 역사적 현재로서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그에 따른 뜨거운 의식 및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당대를 대표하는 시어는 그 시대의 가치의식 혹은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언어가 역사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표준말 규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기표의 경우이든 기의의 경우이든 언어라고 하는 것은 역사·사회적 조건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의 이러한 역사 사회적 실재와 좀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언어가 함유하고 있는 정서적 측면이다. 이는 특히 시의 언어의 경우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적 정서의 경우에 훨씬 적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시적 정서가 상대적으로 좀더 언어의 역사·사회적 실재와 능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시어가 집적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문체 역시 역사·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체 역시 당대적 가치의식 혹은 문제의식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얘기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당대의 문체에는 당대의 정서가 묻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본래 문체는 주어진 제재에 대해 최량(最良)의 언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 구체화되는 법이다. 물론 인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는 역사적 현재로서 당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심성이 깊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언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는 유동하는 역사와 더불어 형성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나 의식이 폭넓게 틈입되는

것이 당연하다.

민족이든 국가이든 한 시대의 공동체에게는 언제나 그 시대를 풍미하는 보편적인 심리나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심리나 의식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유전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2003년에 이르러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반적인 심리 혹은 의식 가운데에서 한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민들에게 실패나 좌절의 체험보다는 성공이나 희망의 체험이 많아지면서 국가 공동체의 정서 자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시의 정서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최근의 시에서는 그동안 민족적 정서의 하나로 흔히 얘기되어 오던 한이나 슬픔 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개인적인 삶의 각 방면에는 여전히 적잖은 고통과, 그에 따른 설움이 상당하겠지만 그것이 국민 전체의 보편적인 심리나 의식이 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특징은 시의 문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특히 밝고 화사한 이미지를 짧고 간명하게 투사하는 문체의 시들이 좀더 호응을 얻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만연체의 복문보다는 좀더 구조가 분명한, 곧 대등절이 마주 보는 형식의 중문이 훨씬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국민 전체의 심성이 지금 능동적 자아 일반이 지니고 있는 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국민들의 유전하는 심리나 의식이 문체의 변이를 이끌어 내고 있는 셈이다.

문체의 특성이 이처럼 바뀌는 것은 한국사의 발전 단계가 이미 충분히 자본주의적 근대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지니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가 '빠른 속도'에 있다는 것은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빠른 속도에 대한 자각이 시책 언어에도 곧바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면은 특히 김수영의 시를 통해 확인이 된다. 정현종도 일찍이 지적한 바 있듯이 시의 리듬에 빠른 속도를 실어 자본주의적 근대를 통과하려 했던 것이 김수영이기 때문이다.4)

자본주의적 근대의 진행에 따른 문체의 변이가 오직 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생활언어에서도 이러한 변이는 충분히 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이는 복문보다는 중문, 중문보다는 단문이 선호되는 것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러한 특징이 오늘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실재라는 것은 인터넷에서 오가는 말들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아예 문장의 성립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인터넷의 언어라는 것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단어문은 일종의 '어휘 투사'이다. 단어문의 한 형태인 '어휘 투사'는 서구 표현주의 시인들의 주요한 기법이기도 하다. 그렇다. 표현주의 시인들은 자신들의 시에서 문장 이전의 언어, 즉 단어로서의 언어를 추구하려고 한 바 있다. 자신의 시에서 문장을 이루는 기존의 질서, 즉 문법 자체를 파괴해 무질서의 표본으로 비추어지는 근대성을 현현하려고 했던 것이 이들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5)

어휘의 집적물(集積物)인 문장은 본래 조사나 어미 등 문법소의 도움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 적응해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기존의 언어 질서에 의지하여 성립될 수밖에 없는 문장 자체를 거부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어실험을 통해 당시의 자본주의적 근대가 지니고 있는 질서 일반에 대해서까지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 이들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파괴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에 의해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언어 질서, 즉 문법에 대한 배반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휘 투사를 통해 근대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이미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김기림 · 오장환의 시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도 김경린 · 조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수영 · 김춘수 시에서도 적잖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언어실험이다. 아예 김춘수는 「처용단장」 3부에서 "ㅜ ㅉ ㅣ ㅅ ㅏ ㄲ 바보야/이 ㅂ ㅏ ㅂ ㅗ ㅑ"와 같은 형태로 음절의 성립 자체를 거부하며 기존의 연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 바 있다. 김춘수로서는 기존의 언어의 질서에 대한 거부를 통해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자 했던 것이다.6)

예의 언어실험이 자본주의적 근대의 징후, 즉 모더니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언어파괴나 언어해체를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체이든 파괴이든 언어를 매개로 하여 모더니티를 현현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은 단지 자본주의적 근대에의 적응이나 반영의 차원에서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노력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전과 관련하여 과거의 것들 중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것이 지니고 있는 이월가치는 도외시하고 오직 새로운 것만을 탐구하기에 급급하기 쉬운 것이 이들 노력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야 할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라고 하더라도 서정적 가치의 원형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3. 이야기 · 역사 · 시간
시와 역사는 일단 '이야기'를 핵심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이 때의 이야기는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체험은 과거의 것인 이런저런 사건들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와 역사는 이러한 과거의 체험을, 다시 말해 체험에 기초해 있는 사건을, 즉 '이야기'를 오늘의 현실과 관련하여 되살려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상호 접점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오늘의 현실은 당연히 역사적 현재를 뜻한다. 따라서 역사적 현재로서의 오늘의 삶을 위해, 나아가 내일의 삶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꾸며지고 가공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의 경우이든 역사의 경우이든 마찬가지이다.

역사와 관련하여 흔히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故創新)을 말하고 있다. 옮은 얘기이다. 옛것을 도탑게 해서 새것을 아는 일과,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역사가 시(서정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더 과거에 집착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를 역사가 과거와의 만남이고 대화라는 E.H 카아의 논리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 비해 시가 훨씬 더 지금 이곳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서정시)의 기본 시제가 현재일 수밖에 없는 점을 염두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시가 좀더 지금 이곳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축적된 시간들의 꼭지점 위에서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시가 역사의 전위로서 세상을 향해 자신의 현존을 내던져 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가리켜 항용 시대의 안테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시인들이 예언자적 지성의 존재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항상 시(서정시)는 유전(流轉)하는 시간의 첨단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해야 옳다.

물론 이 때의 시간이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타자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과학과 기술로서의 객체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시인의 상상적 시간, 즉 내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적 시간, 즉 내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은 당연히 경험적 시간을 뜻한다. 경험적 시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체의 상상력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는 예술적 시간을 가리킨다. 객체로 존재하는 과학적 시간이 아니라 주체로 존재하는 미적 시간인 것이다.7)

따라서 이 때의 두 시간, 즉 기술의 시간과 예술의 시간은 상호 대립할 수밖에 없다. 미적 시간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초월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할 따름이기 매문이다. 시인들이 자신 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시간의 밖의 세계를 꿈꾸는 것도 실제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다.8)

시간의 밖이라는 말은 시대의 밖이라는 말로 바뀌어 표현되더라도 무방하다. 일정한 기간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시간의 밖이라는 말은 결국 시대의 밖이라는 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의 입장을 떠나 공동체의 입장에 서게 되면 시간의 문제가 시대의 문제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오늘의 시인들이 꿈꾸는 시간의 밖은 자연스럽게 시대의 밖, 즉 자본주의적 근대의 밖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 왔듯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 자본주의적 근대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 아니, 자본주의적 근대의 후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근대의 밖은 이 시대에 이르기 전의 세계이거나 이 시대를 지난 다음의 세계를 뜻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유추해 보면 자본주의적 근대의 밖을 꿈꾸는 일이 내포하는 세계는 자못 분명해진다. 중세로는 돌아갈 수는 없는 만큼 그것이 내포하는 세계는 이른바 근대 극복(근대 초극)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에 근대 극복에의 꿈을 표현해내려면 근대에 제대로 적응해 가는 한편, 근대를 바르게 완성해 가는 일 역시 동시에 담아내지 않으면 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백낙청도 여러 차례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이러한 추상적인 일들보다 좀더 먼저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의 한 시기로서 자본주의적 군대 자체를 바르게 아는 일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 자체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필자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삶의 특성, 즉 근대성 일반에 대해 나름대로 착실하게 검토를 한 글을 쓴 적이 있다.9)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적 근대 자체만이 아니다.

물질의 생산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이거니와, 정작의 시인이라면 이처럼 극대화되고 있는 물질의 생산과 예술의 생산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또한 꼼꼼히 자각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올곧은 시각을 지니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라면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역사적 한 시기와 관련하여 보여줄 수 있는 태도는 뻔하다. 흔히 자본주의적 근대를 과학적 근대(기술의 근대)와 미적 근대(해방의 근대)로 나누어 논의하거니와, 정작의 시인일 경우 미적 근대(해방의 근대)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전위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0) 그동안의 시인이 추구해왔던 미적 근대(해방의 근대)가 실제로는 산업의 근대(기술의 근대)에 대한 시비걸기이거나 딴지걸기의 하나로 기능해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산업의 근대가 지향하는 가치와 시(서정시)의 근대가 지향하는 가치는 상호 적잖은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산업의 근대, 곧 문명의 근대는 시인들이 보기에 인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사물들의 관계로 전락시키는 퇴패와 타락의 세계일 따름이다. A.S. 바즈케즈도 말하고 있듯이 시인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적 근대는 예술적으로 창조될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비인간적 세계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다.11) 근대로서의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돈을 우상화하는, 다시 말해 시장을 우상화하는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들이 보기에는 이처럼 참된 예술적 창조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어 가는 것이 부르주아 중심의 자본주의적 근대이다. 근대 초기의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중기 이후 새롭게 부상해온 부르주아들에게 서정시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시비와 딴지를 걸 수밖에 없는 것은, 요컨대 짜증스러운 부랑아들의 군말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들로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유토피아와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역사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들 부르주아들을 우습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과 예술가들이 보기에는 이들 부르주아들이 자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한갓 속물들일 따름이다. 물리적 시간으로서 자본주의적 근대, 즉 문명의 근대가 시인에게 극복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지 않을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뜻에서의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의지는 역사를 좀더 앞서 살아가고자 하는 초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제나 몽상적 자아를 지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중간을 일탈하고자 하는 꿈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시인들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몽상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시인들이 오늘의 물리적 시간, 곧 자본주의적 근대의 제반 가치와 거듭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몽상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시인의 인지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과거 및 미래가 현재와 결부되어 펼쳐내는 상상의 공간이 이른바 창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의 창조의 세계는 역사적 현재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어떤 영원의 세계, 즉 시원(始原)의 세계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무시간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시간의 밖의 세계로 뛰쳐나가고자 하는 것이 시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대와 관련해서 생각하면 그것이 근대 극복(초극)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인이 꾸는 꿈은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항상 지금 이곳의 현실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의 현실과 결부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태어나는 시는 자연스럽게 현대성을 갖는다. 물론 이 때의 현대성은 미래를 앞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의 의식 지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닦여진 시인의 의식지향이 지금 이곳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서정 양식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수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미의식 자체가 유전(流轉)하기도 하지만 시인에게 주어 지고 있는 서정 양식 자체가 본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논의로 미루어 보면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서정양식인 자유시가 고정불변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된다. 자유시 또한 사회적 제도의 하나인만큼 항상 가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십분 고려 해야 할 것이다. 자유시라는 서정양식의 운명 역시 기본적으로 역사 속에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서정양식 자체야 소멸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자유시라는 언어예술의 형식이 항구보편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전통적 서정 양식인 한시나 시조, 민요 등이 형식적 동일성을 상실해 버린 점을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요컨대 자유시라는 형식 자체가 역사의 산물이라는 얘기이다.

4. 맺음말-시와 역사 혹은 진실과 허구
많은 사람들이 시는 허구이고, 역사는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가 창작문학 전체를 가리킬 때 이는 좀더 분명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창작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가리켜 아예 허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허구가 하나의 심미적 장치라고 하면 그것의 적용범위가 소설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서정시)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창작의 과정을 살펴보면 시 역시 항용 허구로서의 장치를 응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12)

이와 관련하여 정작 증요하게 따져봐야 할 것은 허구라는 것이 창작문학 일반을 구성하는 하나의 심미적 장치라는 점 자체이다. 이 때의 심미적 장치로서의 허구는 이론의 여지없이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을 가리킨다. 진실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택되고 있는 것이 시를 포함한 창작문학 일반이 지니고 있는 허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포함한 소설 등 창작문학 전체를 가리켜 허구라고 해온 그동안의 정의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일찍이 하이데거도 지적한 바 있듯이 시의 언어야말로 오히려 진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허구라는 심미적 장치를 응용하는 것이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특징이라는 뜻이다.

시를 가리켜 허구라고 해온 정의가 수정되어야 하듯이 역사를 가리켜 진실이라고 해온 정의도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겉으로는 진실을 추구하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허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역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본래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재해석의 과정에 의미를 두기 마련이다. 학문으로서의 역사이든 교양으로서의 역사이든 역사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지속적인 가공과정에, 즉 허구화 과정에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때의 가공과정에 과거의 사실로서 역사가 끊임없이 첨삭되고 교정되고 있다는 것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자명하다.

해석의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이처럼 주체의 세계관에 의해 덧붙여지고 꾸며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덧붙여지고 꾸며진 역사를 진실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하다. 덧붙여지고 꾸며졌다는 것 자체로 이 때의 역사는 이미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주체의 세계관이 지니고 있는 진실 여부에서 역사의 진실 여부를 찾는 것이 차라리 현명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주체의 내면이 진실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새롭게 해석된 역사로부터 진실을 찾기는 극히 어려울 추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 해석된 역사라는 것이 실제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나 권력자들의 자기 합리화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허구라는 장치를 거치기는 하지만 시야말로 오히려 진실을 담는 언어형식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심미적 언어를 매개로 하기는 하지만 시(서정시) 역시 역사적 현재, 나날의 삶의 현실에 대한 해석의 한 형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도 시는 역사와 공통되는 영역을 갖는다. 하지만 역사의 주체와는 달리 언제나 지공무사(至公無私)하고 사무사(思無邪)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시(서정시)의 주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무구한 자아가 지니고 있는 시적 주체의 심리적 내포가 진실이 아닌 다른 무엇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역사보다는 시가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의 논의처럼 과거의 사실이 재해석되는 과정에 끊임없이 허구가 끼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이다. 언제나 허구와 손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가 지니고 있는 실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마냥 도외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역사가이든 보통 사람이든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단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과거의 사실 자체보다는 지금 이곳의 현실과 관련하여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얻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실제로는 오늘의 현실이 지니고 있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그리하여 미래의 행복을 건설해 가는 과정의 교훈을 얻기 위한 일종의 방법적 산물로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무엇보다 "사람은 어떤 어려운 역사적 현실에서도 단지 생존을 위한 나날의 염려를 넘어서서 자기와 이웃의 행복을 꿈"13)꾸는 존재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른바 '역사 발전에 대한 관심을 뜻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역사 발전’에 대한 관심이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리 가혹한 시대일지라도 그 시대를 통해서나마 인간과 사회의 진화가 끊임없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본능적 믿음"14)을 갖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대한 본능적 믿음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으로 곧바로 대입하여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진전하는 현실의 역사가 사람들의 관계를 좀더 인격적 차원으로 상승시켜 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15)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르크스 등의 단선적 발전 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차라리 나선형으로 순환하며 진전하는 것이 역사의 실재라는 관점이 훨씬 설득력 있는 발전 사관으로 선택되고 있는 듯싶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후기에 이르러 단선적 발전 사관이 미래 사회, 즉 포스트모던 사회를 위한 긍정적인 대안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에는 산업사회의 부산물로 대두된 수많은 환경문제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 즉 단선적 발전사관은 시(서정시)와 본원적인 세계관과도 다소간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시는 고통스러운 나날의 현실 속에서 개별 주체들이 꿈꾸는 상상의 생명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16) 시(서정시)의 본래적 특징이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이상, 즉 개인의 꿈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진실이 상상력을 통해 획득되는 진실, 즉 시인의 서정적 진실과 적대적인 모순 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것을 가리켜 참다운 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인은 주체적 자아의 진실을 통해 집단적 진실에 기여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때의 진실이 집단적 진실과 매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단이 비인간적이고 반역사적인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진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시인들이 오직 사람의 역사에만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정작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오히려 자연의 역사일 수도 있다. 너무도 많은 한계와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람살이이다. 따라서 사람살이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시인들이 반대급부로 상상의 자연과의 공동체를 꿈꾸게 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질료는 사람이기보다 자연인 경우가 적잖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연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의 부산물인 생태환경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자연의 역사에 대한 시인들의 관심이 점차 증폭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시인들로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이 상호부조하며 공동체를 이루인 세계를 미래의 사회, 즉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의 사회로 옮겨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인들의 이러한 이상은 사람의 역사와 함께 할 때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이다. 자연 혹은 신과의 친화를 통해 아무리 행복한 세계를 꿈꾼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사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좀더 성숙한 미래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깨어 있는 의지가 아마도 시인으로 하여금 역사 일반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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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종철, 『씨와 역사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78.
김준오, 『시론』 제4판, 삼지원, 1998.
이승훈, 『모더니즘 시론』, 문예출판사, 1995.
이승훈,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세계사, 1999.
이영석,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 푸른역사, 2003.
이은봉, 『시와 생태적 상상력』, 소명, 2000.
정현종, 『숨과 꿈』, 문학과지성사, 1982.
최유찬, 『문예사조의 이해』, 실천문학사, 1995.
M 칼리니스, 이영욱외 역,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언어, 1993.
자크 아탈리, 편혜원 · 정혜원 역, 『21세기 사전』, 중앙M&B, 1999.
한스 메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과 시간의 만남』, 자유사상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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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 『시와 역사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78, 125쪽.
2 자크 아탈리, 편혜원·정혜원 역, 『21세기 사전』, 중앙 M&B, 1999, 12쪽 참조.
3 김준오, 『시론』 제4판, 삼지원, 1998, 107쪽 참조.
4 정현종, 「시와 행동, 추억과 역사」, 『숨과 꿈』, 문학과지성사, 1982, 99쪽.
5 최유찬, 『문예사조의 이해』, 345~366쪽 참조
6 이승훈, 「모더니즘의 시적 기법」, 『모더니즘 시론』, 문예출판사, 1995, 325쪽 참조
7 한스 메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과 시간의 만남』, 자유사상사, 1994, 20~27쪽 참조.
8 M. 칼리니스쿠, 이영욱 외 지음,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3, 13쪽 참조
9 이은봉, 「자본주의적 근대와 서정시의 역할」, 『시와 생태적 상상력』, 소명, 2000, 111 ~l30쪽.
10 M, 칼리니스쿠, 앞책, 51~80쪽 참조
11 A.S. 바즈케즈, 「자본주의와 예술의 운명」, 이승훈, 앞책, 335~362쪽 참조
12 시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상상력은 현실의 체험을 재구성하는, 다시 말해 허구화하는 정신기제의 하나이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시 역시 허구적 정신기제의 하나라는 점은 좀더 분명해진다.
13 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 앞 책, 125쪽 참조
14 김종철, 위 논문, 125쪽.
15 이은봉, 「자본주의 근대와 서정시의 역할」, 앞 책, 120쪽 참조.
16 이은봉, 「시와 생태적 상상력」, 위 책, 5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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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이은봉
(Lee, Eun-Bong)
광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