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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속적 상상력과 초논리성 연구

온울에 2008. 5. 26. 04:03

목 차

1.머리말
2.무속제의와 서사무가의 차용
1)은산별신굿
2)서사무가 바리공주
3.무속적 상상력과 창조적 해석
1)일상성과 제의성의 공존
2)광기와 초논리성
4.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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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학술지명 한국학연구 
ISSN 1225-195X 
권 14 
호 1 
출판일 2001. 7. 31.  

 

 

 

무속적 상상력과 초논리성 연구
(-오태석의 〈백마강 달밤에〉를 중심으로-)


김현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2-464-0101-08

영문요약
A Study on Shaman imagination and Super ? logicality of 〈In a Moonlight Night of Baekma River〉
In this study, I tried examining how Shaman imagination was dramatized in Oh Tae-Suk’s work, 〈In a Moonlight Night of Baekma River〉. Modernizing traditional plays has become a contemporary dramatists’ topic of importance, Most dramatists devote themselves to the work of modernizing a Shaman ritual of Gut to seek out a Korean archetype. Since Gut can always make past and present, reality and illusion, and this world and the other world harmonized spontaneously in the same space and time, it has been thought of very attractive. Especially, in that its mechanism is a course that leads conflict and opposition to reconciliation, Gut has a greater correlation to a play.

This element characteristics is introduced very actively in 〈In a Moonlight Night of Beakma River〉. first, on the aspect of the plot, “Eunsan Byulsin ? Gut”and “Bari Princess”offer the frame for its composition. Especially, ‘Sunan’,a dramatic character, has a similarity to Bari Princess.

Next, on the aspect of content, I looked into “Coexistence of ordinary feature and ritual one”and “Madness and Super-logicality”In “Coexistence of ordinary feature and ritual one”, Oh describes that the dramatic principle of 〈In a Moonlight Night of Baekma River〉is based on a Shaman imagination, that is, a harmony of space and time. Particulary, in “Scene on going on the stone bridge”in the latter half, it is shown that a real figure and a mythic figure are joined together without any difference. This ritual is also connected to consciousness that the dead are closely related to the living.

“Madness and Super-logicality”gives and account of 〈In a Moonlight Night of Beakma River〉’s ending part, where the mechanism of Gut is made use of. Gut has a structure that conflict and opposition end in an amicable settlement. The Motif of King Eu-je who was reincarnated as a school captain at the in the conclusion, is a part which presents a little logical jump. Farther prudential link should have been made so that the work could have been formed as one preserved super-logicality, escaping illogicality.

In this way, Gut is a treasury from which you can extract rich imagnation and new devices on a stage. It, however, can result in another problem, an excess of subjectivity, if the source itself depends on just imgaination. That is, you ought to bear logical linkage based on free imagination in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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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현대는 이미 절대성이 사라진 시대이다. 절대적 진리나 존재의 전체성이 사라지고, 그 대신 다양성과 모호성의 원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패려다임으로 통용되고 있다. 물론 작가들도 이러한 시대적 패려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의 작가들은 이렇게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질서나 규준을 설정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의 확립이다.

작가들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문학적 탐구를 수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전통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전통에 대한 관심은 곧 본질적인 근원성 혹은 원형성에 대한 탐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연극분야에서도 이러한 전통에 대한 재구와 계승, 현대적 창조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중에서도 무속제의, 가면극, 판소리, 꼭두가시놀음, 광대놀이 등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특징에 착안하여 전통연호의 현대적 계승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무속제의(巫俗祭儀) 즉 굿이라는 전통연회가 어떻게 형상화되었고, 또 창조적으로 해석 되었는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분석의 대상은 오태석의 〈백마강 달밤에〉(1993)이다. 오태석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웨딩 드레스〉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극작 활동을 시작하여, 2001년 현재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이다. 그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있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 속에 전통연희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오태석의 〈백마강 달밤에〉를 중심으로 굿이라는 전통연희가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창조적으로 해석되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의 연구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우선‘무속제의와 서사무가의 차용’에서는 형식적 소재적 차원에서 어떻게 무속제의를 차용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다음의 ‘무속적 상상력과 창조적 해석’이라는 부분에서는 내용적 구조적 차원에서 어떻게 무속제의를 수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는 이러한 작업의 결과가 가지고 있는 의의와 한계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무속제의와 서사무가의 차용
1)은산별신굿
〈백마강 달밤에〉는 「은산별신굿」이라는 특정한 제의 형식을 전면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우선 굿을 거행하는 동기가 은산별신굿의 설화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거행되고 있는 「은산별신굿」은 다음과 같은 기원 설화를 가지고 있다.

옛날 은산 지방에 토질(土疾)이 있어, 어느 해인가 병이 널리 전염되어 날마다 마을 젊은이가 하나 둘씩 죽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큰 화를 만나 불안했고, 악질에 시달려 병고에 신음했다.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이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꿈에 신선(神仙, 또는 흰말을 탄 장군)이 나타나 “나는 백제의 장군었는데 패전해서 수많은 부하들과 함께 백골로 산재한 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잘 장사지내 달라. 그러면 이 마을의 전염병은 없어질 거이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촌로(村老)는 꿈이 너무도 이상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꿈에서 가리켜 준 곳에 찾아가 보니 과연 수많은 백골이 흩어져 있었다.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고 위령제(尉靈祭)를 지냈더니 극성을 부리던 병마(病魔)는 사라지고 마을 사람들은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는 후로 별신제를 지내게 되었다1).

이상은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은산별신굿」의 기원 설화이다. 무속제의 무신제(巫神祭), 가제(家祭), 동제(洞祭)로 나눌 때2), 은산별신굿은 마을 굿인 동제(洞祭)에 해당한다. 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해가 바뀔 때마다 주기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시당에 제를 올리고, 질병ㆍ재앙의 예방과 풍요를 비는 제의이다. 동제를 지역적으로 크게 나누면 내륙지방의 제액풍농제의(除厄豊農祭儀)와 해안지방의 제액풍어제의(除厄豊漁祭儀)가 있다3). 결국 은산별신굿은 마을굿이며, 내륙지방의 제액풍농제의인 것이다. 위의 설화는 굿의 기원과 관련된 내력담으로서 굿의 대상이 되는 신체(神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당산의 산신당(山神堂)에 모셔져 있는 영정에서도 설화의 신빙성을 짐작할 수 있다. 영정은 귀실복신(鬼室福信)과 토진대사(土進大師)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서 토진대사란 귀실복신과 함께 백제 재건에 힘써 온 고승 도침대사(道琛大師)의 와전으로 보인다4). 이렇듯 「은산별신굿」은 백제의 재건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의의 동인(動因)이 〈백마강 달밤에〉에 그대로 차용되어 나타난다. 극에서 굿의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여 꿈 이야기를 하며 마을에서 일어날 불길한 사태를 미리 예견하는 「당집」장면이 있다. 이러한 불길한 징조는 「은산별신굿」의 기원설화와 직접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징조는 ‘솔매 성백 아래서 백제 병사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시작 된다.

지환 : 마을 사람들이 죄 강으로 몰려들 갑니다. 그래 뭔 일이냔게 큰 괴기가 떠올랐다는 게요. 그래 내처 가본게 괴기는 잉어 모양 생겼더구만 기장이 세 길이나 돼.

덕상 : 언제.

지환 : 어젯밤 꿈에. 그걸 쇠고기 모양 조박지내서 가져들 가더만 그거 끓여먹은 집 사람들 다 몰살합니다. 멀쩡한 동네 줄초사나더란게.

덕중 ; 감나무집이 꿈을 꾼게요 윗뜸 잽배기로 귀신이 여럿 길거리에 서서는 그러구 섧게 울어쌓더래.

근희 : 시뻘건 천구 한 마리가 저 동루 남쪽에 떨어졌어. 머리가 영낙 간장독 모양 생겼고 꼬리가 석자나 되는디 짖어대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랴.

이장 : 너더리 재득이 집에 오동나무 실한 거 있지 않은가. 거그 머구리가 새까맣게 붙어갖고 죙일 울더랴5).

마을 사람들인 ‘지환’‘덕상’‘덕중’‘이장’의 이야기는 백제 병사들의 유해발굴과 중첩되면서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상한 꿈들과 불길한 징조들이 중첩되면서 불안감은 서서히 증폭된다. 더욱이 ‘한산댁’의 아이가 경기를 일으켜 사경을 헤매기 시작하면서 불안감은 이제 공포로 바뀌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불안감이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중첩 제시 방식은 오태석이 자주 사용하는 전략적 방법이다. 오태석은 장면을 중첩시키거나 사건을 반복하여, 문제적 상황을 부각 시키는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불안한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꿈과 현실을 중복 교차시키면서 상황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마을 사람들이 경험한 불길한 징조도 「은산별신굿」의 배경설화와 연속성을 가진 것이다. 오태석은 내용상의 풍성함을 위해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사건들을 패러디하여 사용하고 있다6). 〈백마강 달밤에〉에서는 「은산별신굿」의 배경설화 중‘백제’모티프를 창조적으로 변형시킨다. 은산별신굿의 설화에는 원래 없었던 인물들까지 새로운 등장인물로 나타나는 것이다7). 즉 〈백마강 달밤에〉에서는 별신굿과 직접 관련이 없는 역사적 인물들인 성충, 계백장군, 의자왕과 삼태자들이 등장인물로 나타난다. 이것은 작가 오태석이 은산별신굿의 배경설화에서 ‘백제’라는 모티프를 구체적으로 새롭게 형상화한 것이다.

“진대베기”의 장면8)은 〈백마강 달밤에〉가 은산별신굿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근거이다. 극에서 별신굿의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진대베기라는 절차를 미리 상정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불길한 꿈과 이상한 징조를 경험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임시방편으로 진대(陳大, 神大)를 베어 오는 장면이 있다. 실제 「은산별신굿」에서도 굿이 시작되기 전에 거행하는 진대베기의 제차(祭次)가 있다. 즉 ‘진대베기’는 본격적인 별신굿의 시작을 알리는 제차(祭次)인 것이다. 은산별신굿은 10여일 이상 계속 이어지는데, 그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존회 회의 → 은산천 물봉하기와 조라술 담그기→집굿→진대베기→꽃받기→상당행렬(上當行列)과 제물진설(祭物陳設)→본제(本祭)→상당굿(간신굿)→하당굿→독산제→장승제”9)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진대는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참나무 4그루이다. 진대를 베러 갈 때는 임원들은 말을 타고 가고, 농악대ㆍ삼현육각ㆍ기ㆍ무당ㆍ마을 유지 등은 행군하여 산으로 간다. 산에서 베어 온 진대는 별신제가 끝난 후 장승과 함께 동네 사방에 세워진다10).

“동네사람들이 입에 백지 물고 제물”을 나르는 장면11)도 은산별신굿의 제차를 그대로 장면화한 것이다. 「은산별신굿」에서 화주의 집에 모셔 놓았던 꽃과 준비한 음식들을 상당으로 옮길 때 하는 행동과 동일하다. 별신굿에서 한지 조각을 입에 무는 것은 부정한 것, 불결한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12). 물론 〈백마강 달밤에〉도 이러한 기능과 효과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또한 “은산천 씻기”의 장면13)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백마강 달밤에〉에서 제대로 제차가 진행되지 않자, 덕상이 영덕에게 개천에 가서 몸을 씻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은산천에 금줄을 치고, 씻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은산별신굿」의 진행 과정 중에 ‘은산천 물봉하기’라는 절차가 있다. 이 절차는 굿이 시작되기 전에 은산천에 미리 금줄을 쳐 놓는 것으로 물을 정결히 하고, 그 정결한 물로 제주(祭酒)를 담그고 제물(祭物)을 만들기 위함이다. 또한 ‘상당굿’ 때에 정성이 부족하거나 누군가의 부정으로 인해 신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녀는 은산천에 가서 목욕재개를 하고 다시 굿을 거행한다. 현지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정화된 물로 깨끗하게 씻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던 신대가 움직인다고 한다14). 이 밖에도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꽃받기”15)라는 제차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와 같이 〈백마강 달밤에〉는 「은산별신굿」에서 거행되는 다양한 제차들이 여러 곳에 차용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부분적인 유사성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오태석은 「은산별신굿」의 구조적 틀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은산별신굿을 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상적 삶→문제의 상황→굿→화해ㆍ해결의 상황→다시 일상적 삶’이라는 회복, 순환의 원리 작용하고 있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는 단순히 은산별신굿을 형식적ㆍ소재적 측면으로만 차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ㆍ구조적 측면에서도 내재적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다음의 ‘광기와 초논리성’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2)서사무가 바리공주
〈백마강 달밤에〉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순단’이다. 순단은 첫 장면부터 문제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할멈의 꿈 장면으로 이루어지는 첫 장면에서, 순단의 전생이 밝혀진다. 바로 백제를 멸망시킨 장본인 ‘금화’인 것이다. 강열한 시각적 효과를 위해 “금화가 의자왕 등판에 칼을 꽂는”16)장면이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극적 사실로 인하여, 순단은 굿판에서 완전히 배척 받는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왜냐하면 별신굿 자체가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백제의 병사들과 의자왕, 계백장군을 위한 굿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멈이 지병으로 쓰러지자, 순단은 할멈의 대리자로서 박수무당 영덕과 함께 굿을 진행한다. 순단은 명부를 여행하면서 성충, 계백장군, 의자왕을 차례로 만나고, 진정한 무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서사구조에서 특히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사무가 바리공주」와 유사성이다. 가장 표면적으로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차용한 부분은 바리공주의 고난 장면이다.

순단 : 갑시다, 나하고 갑시다.

천신 : 같이 가. 그럼 여기서 물 삼 년 길어주고 데려가.

성충 : 나 데려가, 나도 간다.

순단 : 물지게 주시오17).

영덕 : 우리가 갈 길이 천린데 두 사람 살려주시오.

산신 : 여게 나무 삼 년 해주면 두 사람 살아나네.

성충 : 도끼 주시오18).

순단 : ……(전략)……나 저기서 쇳물 끓입니다. 대장간 해요. 백제 입니다. 쇳물로 쇠스랑, 낫 도끼, 호미, 지구 벼릅니다. 그래요. 이 칼 가져다 끓입니다 저기 저것도 ? 전하 쇠스랑 별러 보셨소. 나하고 가요. 가서 별러 보세요. 아주 재밌어요. 저하는 벼르고 나는 풀무질하고……19).

「서사무가 바리공주」에서 바리공주는 무장승을 만나, 약수(藥水)를 얻기 위해 고행을 자청한다. 그녀의 고행은 ‘물 삼 년 길어 주고, 불삼 년 때주고, 나무 삼 년을 해주고, 다시 무장승과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서울 本 바리공주 무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서사구조이다20). 결국 바리공주는 “약수와 뼈살이 살살이 숨살이 나무”21)를 가지고 무장승과 일곱 아들을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와, 이미 죽어버린 부모를 다시 살린다. 이와 같이 바리공주의 고난은 “회생의 힘(the power of regeneration)”22)을 이러한 고난의 모티프가 직접 ‘물 삼 년 길어주기, 나무 삼 년 해주기, 쇳물 끓이기’로 차용되어 있다. 그러나〈백마강 달밤에〉는 이와 같은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유사성뿐만 아니라 좀더 심층적인 유사성이 많이 나타난다.

우선 바리공주는 사제(司祭)계층인 무당들에 의해 구비전승되는 무조신(巫祖神)의 이야기이다. 무당이 바리공주를 구송함으로써 규범화된 행위를 반복하는 동시에, 그 규범이 전제하는 모든 신념체계를 행위자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23). 즉 무당이 서사무기가 바리공주를 구송함으로써 바로 자신이 바리공주와 같이 영험한 존재임을 설명하고 보여준다. 〈백마강 달밤에〉에 등장하는 ‘순단’도 바리공주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며, 극이 끝맺을 때 진정한 무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오태석은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구조적 틀을 빌려와서 순단이 진정한 사제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유사성은 바리공주와 순단이 여성주인공으로서 비슷한 인생역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칭하는 ‘여성(女性)’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 측면의 여성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약한 인간성이라는 상징적 의미까지 동시에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다. 바리공주는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의지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 무조신(巫祖神)이라는 신위(神位)까지 부여 받는다. 이것은 나약한 여성성을 뛰어 넘어 강인한 신성성(神聖性)을 획득한 것이며, 평범한 인물에서 영웅적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이것은 순단의 인물형과 그대로 연결된다. 〈백마강 달밤에〉에서 순단의 전생이 금화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굿당에서 배척 당하지만 박수무당 영덕의도움으로 굿을 함께 진행한다. 그러나 굿의 연행상황에서 순단은 계속 외적ㆍ내적 갈들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영덕과 순단의 대립이다. 순단은 명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미화된 영덕의 말만 믿으려고 할 뿐이다. 순단은 아직까지 사제자로서의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단은 종결부에 이르러서 영덕과 마을 사람들을 포용하며 모든 대립과 갈등관계를 해결하면서 무당으로서의 완전한 지위를 획득한다. 명부의 여행이 끝나고 굿도 마감될 무렵, 순단은 더 이상 “89년 공주사범 나오고 부여 유치원 보모 정순단”24)이 아니다. 이제 선암리(仙岩里)의 새로운 무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순단은 이전의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신과 이난의 중재자이며,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자(司祭者)로서 변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말까지 바리공주와 순단은 일치하고 있다.

한편 바리공주와 순단은 비슷한 고난의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바리공주의 특징은 이름에서 잘 나타난다. 바리공주의 “바리”는“버리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그 말을 취해서 ‘바리公主神話’라고 불리워진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 신화를 “베리데기”라고도 한다. 즉 ‘버려진 아이’라는 뜻이다25). 바리공주는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지만 병든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의 고행을 수행하고 결국 부모를 다시 살리고, 무조신으로 승격된다. 조동일은 이러한 바리공주의 서사적 특징을 영웅의 일생담으로 보았다. ⑴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물이 ⑵ 비정상적인 출생을 겪고 ⑶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나 ⑷ 어려서 버려져(棄兒) 죽을 고비를 당하고 ⑸ 구출자ㆍ양육자를 만나 고비를 극복하고 ⑹ 자라서 다시 위기를 맞으나 ⑺ 투쟁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된다는 일곱 단계26)를 만족한다는 것이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버려진다’는 모티프를 중요한 과정으로 차용하고 있다. 순단의 전생이 금화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순단은 완전히 할?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순단은 굴복하지 않고 다시 굿판으로 뛰어든다. 기존의 바리공주가 저승행을 선택할 때 수동적 측면이 강했다면, 오히려 순단은 좀더 능동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이다. 순단은 죽은 할멈을 다시 한산댁의 아이로 환생하게 한다. 결국 명부여행을 통하여 순단도 바리공주가 한 것처럼 모든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고, 진정한 무당, 사제자로 승격되는 것이다.

3.무속적 상상력과 창조적 해석
1)일상성과 제의성의 공존
〈백마강 달밤에〉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일상적 시공간과 제의적 시공간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첫 장면부터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당집」의 장면은 ‘할멈’이‘천신’과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대목이다. 이때 무대 위의 시공간은 현재와 과거, 이승과 저승의 구별 없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설정은 굿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굿은 보통 일상적인 공간인 대청ㆍ안방ㆍ마당을 그대로 활용한다. 그러나 굿이 시작되면 일상적인 공간은 속(俗)의 장소에서 곧바로 정화된 공간, 즉 성(聖)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또한 굿거리의 내용에 따라, 장면의 변화에 따라, 제장은 다양하게 다중적으로 활용된다. ?로는 이승으로, 때로는 저승으로, 때로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다리로도 활용된다. 이러한 “창조적 공간”27)은 연극의 공간개념과 일치되는 지점이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이러한 ‘창조적 공간’개념은 그대로 사용된다.

할멈 : 야가 영낙 우리 순단이 아니라고,

천신 : 왜 아녀. 순단이 전생이여.

산신 : 황등이 무너졌소.

의자왕 : 계백이 어찌 됐느냐.

산신 : 전사해소28).

위의 장면은 천신과 산신이 할멈을 꿈꾸게 하여, 순단의 전생인 금화와 만나게 하는 부분이다. 동일한 무대 위에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대제시는 무속적 상상력에서는 매우 일반화된 관습이다. 무당은 이미 속성상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巫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의 입장에서 둘의 교통을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신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을 좀더 효율적으로 중재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존재가 바로 巫인 것이다.

巫는 『朱子語類』에 “춤으로써 天界인 영혼계와 下界인 인간계를 연결시키는 중개의 능력 소유자”라고 규정되어 있다29). 또한 김태곤은 무당(무당)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으로 규정30)하였다. 첫째 神의 초월적인 힘을 체득하는 신병체험을 거쳐 神權化한 者이어야 하며, 둘째 신병을 통해 획득한 영통력을 가지고 신과 만나는 종교적 祭義로 굿을 주관할 수 있는 者이고, 셋째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서 종교적 지지를 받아 종교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넷째 신을 체험하여 신앙하는 對象神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샤먼(shaman)으로 보고 있다31). 왜냐하면 접신체험은 특정한 역사적ㆍ사회적 산물이 아닌 인간조건의 “근원적 현상”32)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巫는 신과 인간의 교통을 담당하는 초월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巫의 특징을 그대로 무대로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백마강 달밤에〉이다. 무당은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을 마음대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대 위의 인물은 자유롭게 시공을 초월하여 이동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속적 상상력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무대적 기법과도 그대로 연결된다33). 무대 위의 배경은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기보다 오히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빈무대로 남겨놓는 방법을 사용하고있다. 단순히 인물을 무대의 앞이나 뒤에 위치시켜 이승과 저승을 구분할 뿐, 특별한 시공간의 나눔은 불필요한 것이다.

특히 〈백마강 달밤에〉에서는 ‘별신제’, ‘돌다리 가는 길’의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시공간의 융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당집’장면에 등장한 할멈은 전혀 천신과 산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여진다. 단지 관객들만 보는 무대 위에는 차원이 다른 여러 시공간이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수무당 영덕이 등장하는 ‘별신제’의 장면으로 이어지자, 극중 등장 인물들의 인식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처음 별신굿이 시작하는 장면은 현실적인 공간이며, 일상적인 질서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과 인간은 분리되어 차원이 다른 곳에 서로 존재하고 있으며, 교통할 수 없는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는 듯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서서히 산신과 천신이 영덕의 행동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영덕 : 이십팔수 용왕신

산신 : 팔수팔수 신용왕

덕상 : 거그 팔수팔 수는 왜 붙어. 이십팔수 이십사방

영덕 : 그려 이십팔수, 이십팔수라고 내 안 했냐.

연순 : 팔수팔수 신용왕이라고,

영덕 : 두 사람 왜 이런데 오늘, 나 잡어먹을라고 그려34).

위의 장면은 산신이 굿을 진행하고 있는 영덕 옆에서 이들의 제의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들은 전혀 산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영덕의 잘못을 책망할 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까지 일상적 시공간과 제의적 시공간이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굿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이러한 단절 의식은 사라진다.

별신굿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명부의 여행이 이어지는 ‘돌다리 가는 길’장면에서는 이러한 구분은 완전히 사라지고, 꿈과 현실, 저승과 이승은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인물과 신화적 인물이 특별히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전환점이나 계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덕과 순단은 굿을 연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들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마치 옷감에 물감이 서서히 베어들 듯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다. 현실과 명부를 왔다갔다 하면서 순단은 더욱 익숙하게 천신과 산신에게 말을 건넨다. 즉 완전히 巫로서의 능력을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관객들에게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황자체가 이미 굿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굿을 진행하는 제의공간은 현실과 다른 특수한 차원의 공간이며, 이곳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항상 전제 조건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오태석은 이러한 공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세계 자체를 완전히 일치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자쓰기”35)에서 잘 나타난다. 김용수는 이것을 놀이성의 일종으로 보았다36). 물론 그러한 측면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원래 모자는 무당의 신적 능력을 의미하는 오브제이다. 시베리아 샤만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유라크 ? 사모예드족은 구경꾼들을 즐겁게 해주는 의식을 할 때는 모자를 벗고 하지만, 실제 굿을 진행할 때나 진정한 무력(巫力)을 발휘해야 할 때는 반드시 모자를 쓴다37). 오태석 ‘모자’라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공존하지만 동시에 이분화되어 잇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모자를 쓰고 벗는 행위를 통하여 저승과 이승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식을 좀더 심화된 의식으로 발전한다. 무속의 독특한 사고 중의 하나가 죽은 자와 산 자가 매우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관념이다. 죽은 자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승과 저승은 서로 교통이 가능하다는 관념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무속적 사고에서는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의 원한은 곧바로 산 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후손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을 위해서 반드시 굿이라는 제의를 통해서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굿을 통하여 원혼이라는 부정적인 존재는 이제 우리를 돕는 조상신이라는 긍정적인 존재로 변화하며38),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백마강 달밤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영덕과 순단은 명부를 여행하며, 원혼으로 등장하고 있는 성충, 계백장군, 의자왕을 만난다. 이들은 이승에서의 일로 인하여 저승에서도 지속적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원혼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원혼들의 한을 풀어 마을의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조상신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순단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순단은 굿이라는 제의를 통하여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이렇게 명부에서 계속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오태석 특유의 시각이 나타난다. 순단의 목소리를 빌려서 오태석은 자신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순단이 바라보고 있는 성충과 계백장군은 기존의 평가와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충과 계백은 충신(忠臣)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태석은 새로운 관점으로 상상력을 펼친다. 다음은 성충과 영덕ㆍ순단이 만나는 장면이다.

순단 : 대감을 옥에 가둔 까닭을 아시오. 백성들 목에 유교라는 올가미 씌워 목을 죈 장본인이 대감이요. 유교…… 지아비 성을 내면 웃음 웃어라. 걱정하면 황송해 해라. 더러운 꼴 뵈지 말어라. 어른 말씀 깃달지 말아라. 어른 앞에서 웃지 마라. ……하지마라. 안된다. 황송해라. 공경해라. 극진해라.……그저 뭐든 되도록 하지 말고 되도록 죽어 지내라.……이래가지고 백성을 모두 빈충이로 만들어벼렸어. 인정 많고 패기 등등 하던 이 백성들을 죄 비열하고 소심하고 남 눈치나 보는 대도 업소 소견도 없는 하인배, 종의 자식들로 만들어버렸어.……(중략)……

성충 : 금화, 너의 말이 옳다. 내 절을 받아라39).

순단은 금화의 입을 빌어‘유겨의 폐단’을 역설한다. 백성을 위해서 성충이 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 되묻고 있다. 지배자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유교적 덕목이 피지배층인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순단의 어조는 매우 냉소적이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현실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지배층의 음험한 권력욕과 백성들의 무참한 희생을 통해 창출된 권력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시각이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덕목은 지배층의 관점일 뿐이고, 그것은 절대적인 규율이라기보다 상대적인 규율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평범한 백성들은 이러한 권력투쟁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즉 지배층의 권력변화는 백성들의 삶과 완전히 무관할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성충이 금화의 말을 인정하는 “너의 말이 옳다”라는 대사는 작가의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는 장치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를 민중적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인 것이다. 무속적 상상력에서 오태석은 민중적 관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지금까지 오태석이 자주 제시했던 부권에 대한 회의와 절대 권력에 대한 부정이라는 관점과 연속성을 가진다40).

계백장군과 만나는 장면에서도 극단적 충성(忠誠)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반문하고 있다. 계백은 흉측한 거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명을 해치면 버러지가 된다는 무속적 상상력 즉, 민중적 원죄의식의 발로이다. 순단은 계백이 가족을 몰살시킨 비정한 인간임을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의자왕을 베지 못한 계백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까지 한다. 순단의 이러한 비판 속에는 忠에 대한 강력한 거부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오태석의 작가의식과 맞물려 있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집단적 힘의 논리를 부정하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식이기도 하다.

2)광기와 초논리성
굿이라는 제의에서도 특별히 엄격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신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굿이라는 연행도 결국 종교적 제의이기 때문에 엄격성이 강조될 때는 매우 강한 종교적 규범성이 적용된다. 특히, 하나의 제차라도 소홀히 하면, 다음 제차로 넘어갈 수 없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정성이 부족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은산별신굿」에서 ‘강신굿’을 진행할 때, 아무리 굿을 해도 동기(洞旗)가 움직이지 않거나 방울이 울리지 않으면, 부정(不淨)한 일 때문에 신이 내리지 않는다고 하여 임원일동이 찬물로 목욕제계를 하기도 한다. 은산별신굿이 거행되는 시기가 음력 이월이기 때문에 이때의 밤 날씨는 매우 차갑고 가끔은 얼음이 그대로 있는 때도 있다41).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42).

만족스러운 제의를 위해서는 그 절차 하나하나를 매우 완벽하게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단순히 해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특별히 그리고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정이 있는 것이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갈등과 문제적 상황은 굿이라는 제의 과정을 통하여 해소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과정은 단순히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제의의 원리에 따라 엄격한 순서와 종교적 규범성을 전제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야만 가능하다. 결국 이러한 엄격성에 의해 만족스러운 굿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을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백마강 달밤에〉도 굿의 메커니즘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말 자체가 해원(解寃)으로 끝맺고 있다. 은산별신굿이라는 제의를 큰 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대립ㆍ갈등의 관계를 해결하는가’이다. 〈백마강 달밤에〉의 갈등 해결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순단’이다. 순단의 행동을 통하여 갈등은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순단은 이승에서의 과오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의자왕에게 칼을 내리 꽂으며, 강렬한 화해를 시도한다.

순단 : 칠 년에 두 개 꽂힌단 말이요. 두 병사 기다린다고 칠 년간을 어른갖다 저러고 묶어 세워 놓고 모기 물리고 잠자고. 나불 불고. 어른 저 꼴이 보기 좋소. 전하 아니시오. 육백년 사직의 마지막 군주이시오. 시정잡배는 아니잖소. 삼 형제 맘 먹으면 호랑이도 잡는 답니다. 가서 병사 잡아와.

효 : 칼 아흔일곱 개가 꽂히려면 앞으로 삼백사십삼 년이 걸려.

순단 : 그러면 아흔일곱 개 갖다 꽂으면 될 거 아니요. 뭘 망설이고 있소.

효 : 애비한테 칼 꽂는 자식 봤나 자네.

순단 : 네게 맡겨요.

효 등판에 꽂혔던 칼을 뽑는다. 효는 울부짖고 의자왕 가슴에 칼을 꽂으려 하니 의자왕이 버럭 소리친다. ……(중략)……(칼 꽂는다. 의자왕 울부짖는다. 순단이 三太子의 가슴 등판에서 칼을 뽑아 의자왕 등판에 가슴에 꽂는다. 기진한다. 43))

위의 장면에서 부각되는 인물들의 특징은 ‘광기’이다. 오태석이 즐겨 사용하는 인물의 행동양식이 바로 ‘광기’인 것이다. 순단의 행동은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광기는 소모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적인 것이다. 광기를 폭발시켜 문제적 상황이나 누적된 갈등을 일시에 해소해 버리는 결과를 의도하고 있다. 순단의 광폭한 칼 꽂기, 의자왕ㆍ태자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어우러지면서 갈등은 최고점에 도달한다. 이제 극의 방향은 해결로 나아갈 수 있는 국면을 어느 정도 마련한 것이다44).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극은 이제 결말로 이어진다. 모든 상황은 종결되고, 별신굿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현재는 굿이 시작되기 이전의 그때와 같은 상태는 아니다. 제의를 통하여 새로운 일상성45)으로 돌아온 것이다. 할멈의 죽음은 아이의 생환으로 이어지면서,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이라는 순환적 의식과 연결된다. 새로운 탄생은 순단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사항이다. 제의를 통하여 할멈의 뒤를 잇는 진정한 무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굿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하여 모든 갈등상황은 조화롭게 결말을 맺는다. 백제 병사들의 원한도 의자왕에게 칼 꽂기로 푸렸고, 마을 사람들의 불길한 생각도 굿을 통하여 완전히 해소되고, 죽어가던 아이도 할멈의 죽음으로 다시 살아난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굿의 정해진 제차(祭次)와 마찬가지로, 대립ㆍ갈등이 점점 증폭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하나씩 순서대로 밟아가면서 결국 화해의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백마강 달밤에〉는 오태석 특유의 결말제시 방법46)이 사용되고 있다. 제일 마지막에 의자왕이 “교장선생님”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극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교장선생님이 등장하여, 굿의 상황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의자왕 : 三太子, 성충이 평복 차림으로 자전거 타고 지나간다.

지환 : 교장선생님 오시오.

효 : 이 사람들 밤새네.

의자왕 : 하멈 여전허시고.

덕상 : 늦었구만요.

의자왕 : 욕들 보소.

덕상 : 살펴가시요47).

위의 장면에서 의자왕, 삼태자, 성충은 바로 우리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저승과 이승이 다시 한번 흔융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일상처럼 진행된다. 교장선생님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대답으로 응대한다. 그러면 이러한 결말은 무엇을 의도적으로 논리적 틀을 뛰어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방식의 상상력으로 인하여 오태석은 자주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곤 하였다. 이러한 비약적 결말 자체를 오태석 스스로는 “틈”48)이라고 주장한다. 틈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바로 오태석 나름의 독특한 극작의 원리이자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태석식의 결말방식은 독창성에서 매우 뛰어난 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결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의도자체는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뛰어난 의도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무대에서 형상화될 때, 과연 그러한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전현 별개의 것이다.

지금까지 현실의 고리와 전혀 연결되지 않았던 의자왕, 삼태자, 성충이 마지막에 교장선생님과 그 일행으로 등장한다. 과연 이들이 이?게 등장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 물론 이것도 역시 우리의 무속적 상상력에서 출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관객들에게 해석의 폭을 확장시키기 보다 오히려 해석의 혼란이나 무의미성을 초래할 수 있다. 만약 앞의 장면에서 교장선생님과 연관된 연결고리가 미리 제시되었다면 이러한 결말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도출될만한 아무런 논리적 연결고리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러한 독특한 결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태석은 항상 초논리성(超論理性)을 지향하고 있다. 초논리성이란 삼충적인 논리를 기저에 깔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날 때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상철은 오태석의 이러한 특징을 ‘신들린 연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49). 연극적 상상력의 풍성함과 그 형식적 새로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이다. 김열규도 오태석의 연극적 특징을 서구식 표현방식에서 벗어난 우리식의 마당놀이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50). 바로 초논리성이나 탈논리성의 근원적 유래를 민속연희의 구조와 원리에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논리성이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비논리성(비논리성)에 빠지기 쉽다. 결국 연구자들이 오태석의 연극을 ‘애매모호성’51) ‘난삽성’‘자의성’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오태석은 무속적 상상력이라는 초논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백마강 달밤에〉의 판을 짜고 있으나, 결말의 상상력은 과도한 상상력으로 인하여 오히려 극적 완결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와 같이 생략과 비약의 극적장치로 뛰어난 상상력을 표현할 경우, 항상 해 놓은 장면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장면자체가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불필요한 장면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 장면 하나가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않음으로 하여 작품 전체의 이미지가 난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장면 자체의 독창성이나 독자성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조화나 효율성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백마강 달밤에〉의 결말은 좀더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마련해야 타당성, 효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4.맺음말
지금까지 오태석의 〈백마강 달밤에〉를 중심으로 무속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연극화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전통연화를 현대화시키는 작업은 현대 극작가의 매우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였다. 대부분의 극작가들은 한국적 원형성을 찾기 위해서 굿이라는 제의를 현대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굿이라는 제의는 항상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이승과 저승을 하나의 시공간에 자연스럽게 혼용시킬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굿의 메커니즘은 대립과 갈등관계를 화해로 이끌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더 연극과 큰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백마강 달밤에〉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매우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은산별신굿」과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구성의 틀거리로 사용하고 있다. 오태석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의자왕, 성충, 계백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작품 속에 삽입하고, 새로운 서사구조를 만들어 간다. 특히, 순단이라는 극적 인물은 「바리공주」와매우 유사한 인물형을 가지고 있다. 순단은 금화라는 전생으로 인하여 이중적인 인물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순단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버려지고, 고난을 인내하고, 마침내 신성성(神聖性)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바리공주의 인물속성, 인생여정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일상성과 제의성의 공존」과 「광기와 초논리성」을 살펴보았다. 「일상성과 제의성의 공존」에서는〈백마강 달밤에〉의 극적 원리가 무속적 상상력 즉, 시공간의 융합성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특히 후반부의 「돌다리 가는 장면」에서는 현실적 인물과 신화적 인물이 전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어울리는 장면이 제시된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매우 밀접하다는 의식과 연결되고, 산 자의 논리로 죽은 자를 평가하기도 한다. 오태석은 민중적인 시각에서 의자왕 뿐만 아니라 성충과 계백까지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오태석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연결된다. 오태석은 부권부재에 대한 의식과 절대권력이나 충성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자신의 의식을〈백마강 달밤에〉에서 지속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광기와 초논리성」에서는 굿의 메커니즘을 이용한 〈백마강 달밤에〉의 결말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굿은 대립과 갈등이 해원으로 끝맺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와 규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광기로 표현된다. 순단의 고아기를 통하여 모든 갈등은 최고의 정점에 이르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해결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결말에 제시되어 있는 교장 선생님으로 환생한 의자왕의 설정은 문제적 장면으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좀더 세심한 연결고리가 설정되어야 비논리성에서 벗어나 초논리성을 가진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굿이라는 연희를 연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굿은 매우 풍부한 그 과정 자체가 상상력에만 의존하다보면 주관성의 과잉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 즉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논리적 연결고리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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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성,『韓國巫俗의 硏究』, 아세아문화사, 1978.
최길성,『한국민간신앙의 연구』, 계명대출판부, 1989.
한상철,「오태석론I」,『한국연극의 쟁점과 반성』, 현대미학사, 1994.
赤松智城ㆍ秋葉隆,『朝鮮巫俗의 硏究』, 심우성 옮김, 동문선, 1991.
Mircea Eliade,『샤마니즘』, 이윤기 옮김, 까치,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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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임동권, 「崇神과 협동의 場, 鄕土神祭」, 『은산별신굿』, 열화당, 1986, 75쪽.
2)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1, 354∼356쪽 참조.
3) 『한국민족호대백과사전』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900쪽 참조.
4) 임동권, 「崇神과 협동의 場, 鄕土神祭」, 앞의 논문, 76쪽 참조.
5)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백마강 달밤에』, 평민사, 1994, 17∼18쪽.
6)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는 설화와 상관성은 아래의 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김남석, 「오태석 희곡의 개방성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00, 40∼41쪽 참고.
7) 은산별신굿의 배경설화는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내분으로 인해 복신이 도침을 죽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복신을 죽여 결국 이러한 내분으로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조재훈, 「굿과 그 중층적 배경 ? 은산별신굿을 중심으로」,『인문사회과학연구』12, 공주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7, 358∼362쪽 참고.
8) 이장의 “신대요”, 덕상의“오늘 밤 신대 벼오고 차례 밟어가죠”라는 대사에서 나타난다.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18쪽, 21쪽.
9) 『은산별신제 종합실측조사 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98, 29∼49쪽 참조.
10) 임동권, 「崇神과 협동의 場, 鄕土神祭」, 앞의 논문, 77쪽 참조.
11) “동네사람들이 입에 백지 물고 제물(祭物)날라온다”라는 지문으로 처리되어 있다.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24쪽.
12) 임동권·최명희, 『은산별신굿』, 열화당, 1986, 35∼37쪽 참조.
13) 덕상이 영덕에게 “개천에 가 씻어. 나하고 가세”라고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30쪽.
14) 과거에는 목욕재계를 하였지만, 요사이는 손과 얼굴, 목 부위 등을 씻는 것으로 대신한다. 실제로 목욕재계를 마치고 굿을 거행하면 조금씩 깃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깃대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흔들린다. 『은산별신제 종합실측조사 보고서』, 앞의 책, 46∼47쪽 참조.
15) “꽃 받는거 어려운 일 아닌데 어렵게 하네 그 사람”이라는 지환의 대사가 있다.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29쪽.
16)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16쪽.
17)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38쪽.
18)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43쪽.
19)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48쪽.
20) 서울지역에서 구전되는 敍事巫歌 바리공주는 赤松智城과 秋葉隆(朝鮮巫俗の硏究1937.6)에 의해 채록된 2편이 있다. 또한 경기도 양주의 채록본 1편도 서울본과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대석, 『韓國巫歌의 硏究』, 문학사상사, 1980, 203∼207쪽 참조.
21) 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朝鮮巫俗의 硏究』, 동문서, 1991, 41∼43쪽 참조.
22) 윤이흠, 「무속신화의 구조에 관한 연구 ? 바리공주의 신화적 공감을 중심으로」,『한국종교연구』1, 집문당, 1986, 133쪽 참조.
23) 윤이흠, 「무속신화의 구조에 관한 연구 ? 바리공주의 신화적 공감을 중심으로」, 앞의 논문, 145쪽 참조.
24) 오태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20쪽.
25) 최길성, 『韓國巫俗의 硏究』, 아세아문화사, 1978, 250쪽 참조.
26) 조동일, 「영웅의 일생, 그 문학사적 전개 」,『동아문화』10,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71, 169∼172쪽 참조.
27) 서연호, 「巫劇의 原理와 類型」『韓國巫俗의 綜合的 考祭』,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再版), 250∼251쪽 참조.
28)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15쪽.
29) 이상언, 「한국 巫 명칭의 語義」, 『무속신앙』(한국민족학총서3), 교문사, 1989, 363쪽 참조.
30) 김태곤이 제시한 무당의 개념규정은 강신무에만 집중되어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巫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김태곤, 『韓國民間信仰硏究』, 집문당, 1983, 212∼213쪽 참조.
31) Mircea Eliade, 이윤기 옮김, 『샤마니즘』, 까치, 1992, 175∼177쪽 참조.
32) Mircea Eliade, 이윤기 옮김, 『샤마니즘』, 앞의 책, 428쪽.
33) 김방옥은 시간과 공간, 일루젼(illusion)과 디스일루젼(disillusion)의 넘나듦이 자연스럽게 숨쉬듯 서로 엇갈리며 표현되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방옥, 「목화의 숨쉬기 - 〈백마강 달밤에〉」, 『열린 연극의 미학』, 문예마당, 1997, 349∼351쪽 참조.
34)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30쪽.
35)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38·43·50쪽 참조.
36) 김용수, 「오태석 연극에 나타난 ‘과거 혼의 구조’와 ‘이중적 정서의 구조’」, 『한국연극학』11, 한국연극학회, 1998, 167쪽 참조.
37) 샤만들은 무력 중의 대부분이 모자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Mircea Eliade, 이윤기 옮김, 『샤마니즘』, 앞의 책, 154∼156쪽 참조.
38) 최길성, 『한국민간신앙의 연구』, 계명대출판부, 1989, 101∼102쪽 참조.
39)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36∼37쪽.
40) 윤학로는 〈춘풍의 처〉와 〈도라지〉를 분석하면서, 질서로 상징되는 아버지 또는 군주의 부재를 고찰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오태석 작품 곳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윤학로, 「부권부재의 희곡」,『오태석의 연극세계』, 현대미학사, 1995, 63∼84쪽 참조.
41) 임동권, 「崇神과 협동의 場, 鄕土神祭」, 앞의 논문, 84∼85쪽 참조.
42) 은산별신제는 특히 엄격한 금기를 따르고 있다. 임원으로 선정되면 대문에 금줄을 치고, 문 앞에 황토를 뿌려 잡인을 금하고 본인들도 외부 출입을 삼간 채 근신한다. 제물을 담당하는 화주·육화주·별좌들은 매일 찬물로 목욕재개하고 더욱 철지히 금기를 지킨다. 『은산별신제 종합실측조사 보고서』, 앞의 책, 50쪽 참조.
43)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47∼48쪽.
44) 김미도는 이러한 과정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구조로 보고, 결국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김미도, 「한국현대희곡에 나타난 굿의 연극성」, 『한국연극학』9, 한국연극학회, 1997, 45쪽 참조.
45) 이윤택은 이러한 결말을 “깨어나는 제3의 일상성”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윤택, 「무엇이 연극적인가, 무엇이 한국적인가 : 오태석의 〈백마강 달밤에〉를 중심으로 본 한국 현대연극의 정체성 문제」, 『공연과 리뷰』22, 1999. 4, 80쪽 참조.
46) 김유미는 이러한 결말에 대해 ‘공존’의 관점으로 해석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김유미, 「한국현대희곡의 제의구조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9, 36∼38쪽 참조.
47) 오택석, 〈백마강 달밤에〉, 앞의 작품, 52∼53쪽.
48) 오태석은 여백과 탄력, 파격을 비유적으로 “틈”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서연호, 「오태석의 창작활동」, 『도라지』(오태석희곡집4), 평민사, 1994, 350쪽 참조.
49) 한상철, 「오태석론Ⅰ」,『한국연극의 쟁점과 반성』, 현대미학사, 1994, 212쪽 참조.
50) 김열규, 「전통미에의 집념 연출가 오태석」,『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평민사, 1994, 330∼332쪽 참조.
51) 양혜숙, 「오태석論」, 『한국현역극작가론』2, 예니, 1987, 6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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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현철
한국예술종합학교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