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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적 상상력의 유형과 그 문학교육적 함의

온울에 2008. 5. 26. 04:02

목 차

Ⅰ.서론
Ⅱ . 문학교육과정의 편향과 상상력
Ⅲ. 상상력 개념의 현재성
Ⅳ. 상상력의 유형
Ⅴ. 결론 -시적 상상력의 교육과정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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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 
학술지명 한국초등국어교육 
ISSN  
권 18 
호  
출판일 2001. . .  

 

 

 

시적 상상력의 유형과 그 문학교육적 함의1)


Types of Poetic Imagination and Its Implication of Literature Education


김상욱
1-074-0101-08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시교육을 아주 어렵게 생각한다. 시는 쉽게 생각하면 너무 쉬운 나머지 시의 의미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거나, 어렵게 보면 지나치게 복잡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를 보는 학생들의 관점 역시 창조적 통찰력이나 경험의 발전과 무관하게 간주한다. 이는 무엇보다 시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

이 논문은 시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시의 의미가 구성되는 과정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가르치는 목적은 형식이 아니라, 시적 의미 그 자체이며, 언어를 통한, 언어 안에서의 상상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논문은 시적 상상력의 유형을 밝히고자 한다. 상상력에 관한 명료한 개념규정을 바탕으로 여섯 가지 상상력을 각기, 발견, 관찰, 연상, 유추, 투사, 평가 등으로 제시한 다음, 이들 각각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단순히 시를 이해할 때에만 준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창작에도 유효한 장치가 된다. 시적 상상력은 경험과 표현을 잇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In general, teacher tends to think difficultly the teaching of poetry. Because the poetry is so easy that teachers only paraphrase the meaning of poem. And the meaning of poem is too complicated to explain sufficiently. The student´s view of poetry also disturbs the development of the experience and the creative Insight. Its reason is based on disordered cognition of poetry.

And this monograph wants to suggest that conception, the most important thing in teaching poetry is to teach the imagination included each poems. And that, we shoud be teaching the process that the meaning of poem is constituted. The objective of teaching poetry is ˝Not the form, but the poetic meaning itself˝, and the objective of education in literature is the imaginative experience through the language, In the language.

For the purpose of this objective this monograph dares to analysis the types of imagination in poetry. Based on the clear-cut definition of imagination, I suggest kinds of imagination to the six conceptions, these are discovery, observation, association, analogy, projection, evaluation. These conceptions are contributed not only the comprehension of poem, but also the writing of poem. Poetic imaginations are the bridge between the experience and the ex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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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시를 앞에 두고 절망한다. 지나치게 쉬운 나머지 그저 동어반복이 되어 버리거나, 지나치게 복잡한 나머지 아무리 설명해도 잉여가 남기 때문이다. 그나마 특정한 하나의 해석을 선정하여 가르치나, 시적 언어가 갖는 풍부한 내포와 함축을 또 다른 지시적 언어로 환언(paraphrase)해 버리는 오류로부터 비껴날 수 없다. 시의 풍부함이 해석을 통해 더욱 풍부해지기보다 협소한 규정 속에 갇혀버리고 마는 형국이다. 더욱이 시에 대한 설명은 결코 시가 아니며, 어쩌면 시를 읽는 유일한 방법은 시 자체를 읽고, 그 안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뿐만이 아닌가 라는 회의를 떨치기 어렵다.

이러한 회의, 시교육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학문적 담론의 형식 안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언어교육론자들의 견해는 그 대표적인 일단을 입증해 준다.

작품 감상 이외에 문학이론이나 기타 전문적인 지식의 전수가 본격적으로 행해질 필요가 있다면 국어교육과 별도로 ‘예술로서의 문학’ 교과를 설치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다.2)

예술교과란 영역의 구획에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게 중심이 예술의 창작과 향수이며, 예술텍스트의 분석, 해석, 평가라는 개념적 논의를 홀대하는 편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시를 가르치는 것은 시를 쓰고, 읽는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를 매개로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특정한 문화적 활동3)을 가르치는 것 역시 의당 포함한다. 따라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음악교육 혹은 미술교육처럼 기예의 차원으로 속화시킬 수 없는 풍부함을 시는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발상에는 인문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기대가 담겨있지만, 그 기대가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획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그 자체가 그릇된 발상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교육론자들과 달리 지향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교육의 학문적 정립을 고민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이러한 회의4)는 존재한다 그러나 시교육을 둘러싼 이 모든 회의론은 정작 시를 교육의 공간 안에서 구축(辨築)하기보다 구축 (毆逐)하는 것일 따름이다. 적어도 교육은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창조성’을 가장 우위에 두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제외하고는 일정한 목표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 목표에 맞는 인간형을 형성하고자 진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유주의적 교육관 역시 자유로운 개인을 형성하고자 하며, 더욱이 그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라는 식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라, ‘~에로의 자유’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당위를 추구하는 자유이며, 그것 역시 인간이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는 ‘거대서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교육이 지속되는 한, 모든 교육적 실제는 이 거대서사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시교육 또한 시를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궁극적으로 어떠한 인간형의 형성에 도움을 줄 것인가라는 문제를 배제하고서는 교육의 공간 안에 존재할 이유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시교육의 이념5)을 상정한다면, 자연 그 이념은 구체적인 교과목의 차원에서 목표를 강제한다. 이념은 개별 교과 속에서 목표를 통해 현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그저 ‘시를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으로 두루뭉실하게 제시될 수는 없다. 목표는 어쩔 수 없이 목표에 이르는 경로가 제시되어야 하며,‘읽고, 또 읽는다’는 전통적인 교육의 방식은 목표에 이르는 경로일 수는 있으나 가장 비합리적 경로이며, 한 번 읽어서 척 모든 것을 아는 개인과 도무지 읽어도 읽어도 모르는 개인의 차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가장 비교육적인 경로임도 명확하다. 모든 이념은 목표라는 매개를 통해 교육의 내용, 곧 지식이든 경험이든 교육내용의 체계 속에서 각각이 위계와 관계를 맺은 채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교육내용으로 선정하고 체계화할 것인가? 본고는 이 시도의 일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교육내용으로 설정된 교육과정의 내용을 평가하고, 그 대안으로써 상상력, 곧 대상을 전유(專有)하는 독특한 인식의 방식이자 시적 형상화의 방식으로서의 상상력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 문학교육과정의 편향과 상상력
교육과정은 교육내용으로서의 경험 혹은 지식을 선정하고 배열한 공식적인 문서를 뜻한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단지 몇 쪽밖에 되지 않는 지면으로 그치지 않는다. 교육과정에는 교육의 실제를 방향 조정하는 교육의 이념과 목표가 진술되어 있으며, 그 목표에 따른 구체적인 학습의 목표들이 선정, 배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학습 목표는 현실적인 수업의 시수를 결정하기도 하며, 교재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목표에 이르는 상세한 안내를 수행하기도 한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교사가 교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이론적인 당위에 그칠 뿐이다. 교사는 교과서와 함께 제시되는 지도서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한 실정이다. 결국 교육과정은 학교 교육의 전반을 구체적으로 통제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과정의 이러한 현실적인 위력은 그 자체만으로 백안시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학교교육의 변화를 앞질러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충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의 교육과정이 그 가능성들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일단의 폐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시 교육과정의 구체적인 세부를 살펴보면, 문제점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교육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문제점은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초등학교의 문학교육과정을 들여다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1-1 작품에 표현된 말에서 재미를 느낀다. 2-1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말의 재미를 느낀다. 2-3 재미있는 말이나 반복되는 말을 넣어서 글을 쓴다. 5-3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표현한 부분을 찾는다. 6-2 작품에 나오는 여러 가지 감각적 표현을 음미한다.’라는 교육과정 내용의 제시는 시를 보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들 목표는 공통적으로 시를 언어의 문제로 인식한다. 더욱이 여기에서 언어의 문제는 ‘말의 재미’,‘반복’,‘인상적 표현’,‘감각적 표현’등으로 미루어 볼 때, 언어에 내재된 다양한 관련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언어 표현에 관심을 국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언어적 표현이 시를 이루는 중핵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시를 보는 지나치게 단순한 관점이며, 더욱이 이들 관점이 학년을 달리 하여 거듭 반복됨으로써 관점 자체를 고착시킨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다. 더욱이 이러한 편향은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다시금 문학의 형식적 구조를 강조하는 교육과정과 맞물려 형식주의적 시관을 확대 재생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 나아가 문학을 보는 형식주의적 편향이 의연히 현실의 교육과정과 문학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교육과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밝혀진 대로 제 7차 문학교육과정은 형식주의적 관점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아직껏 문학교육의 진전된 논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구태의연하게 형식주의로 치닫고 있지만, 중고등학교 단계의 교육과정은 형식주의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다원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6)이다. 그런데도 형식주의적 관점이 문학교육 전반에서 유독 전경화되는 것은 교육을 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인지적 영역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적 영역은 전통적으로 교육의 가장 중심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지적 영역의 이상 비대는 교육을 보는 관점을 편협하게 제한하였으며, 인지적 영역으로 포괄하기 힘든 감정 혹은 정서를 전적으로 배제하거나 왜곡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현행 문학교육과정 또한 다르지 않다. 7차 문학교육과정은 내용 체계를 구성하는 ‘지식-활동-태도’의 상호 연관을 분절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져 있다. 지식이 활동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태도의 형성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인데, 지식은 지식대로, 활동은 활동대로, 태도는 또 독립적으로 각기 존재함으로써 계기적으로 연관된 이들 체계가 분절적으로 방치되고 있다. 그 결과 태도의 항목들은 극히 왜소화된 나머지 교육과정의 내용 항목으로 설정하기조차 힘들거나, 과정은 규명되지 않은 채 결과만이 억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극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지 자체의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지적 활동으로 설명되는 인지적 영역은 사실 다양한 감정적 활동과는 엄격하게 구분된 채, 다루어져 왔다.7) 이른바 정의적 영역으로 지칭되는 모든 반응과 태도의 형성은 인지적 영역과 독립된 채 논의되었으며, 그 경계 또한 명확하게 단절된 형태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지가 없는 정의적 활동이나 정의적 요소가 바탕을 이루고 있지 않는 인지적 활동은 이론적 추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의 활동 속에서는 분리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음 아이스너의 주장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인지과정이 없는 감정적 활동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인지한다는 것이 아는 것이라면,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어떤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어떤 상태를 다른 상태와 구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은 사고의 산물이며 그것은 앎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정서적이지 않은 인지 활동도 있을 수 없다.‥‥‥ 요컨대 정서와 인지는 독립적인 과정이 아니며, 또한 분리될 수 있는 과정도 아니다. 그것들은 크기와 무게처럼 서로 얽혀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경험상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8)

결국 아이스너의 주장은 정서와 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심지어 대척에 두고 논의하는 것은 정서에 관한 올바른 이해도 아니며, 인지 자체를 보는 바른 관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감정적 반응을 계발시키는 것이 곧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이지, 분리되어 교육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크기와 무게’라는 비유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지식의 형식9)’이 여타의 교과목과 명확하게 다른 문학교육의 경우 문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학 활동은 의당 언어적 활동이자 예술적 활동이다. 문학교육 또한 예술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예술이 몸담고 있는 인간의 문화적 활동의 일부분이다. 더욱이 문화는 양식화된 형식으로 표현되며, 문학 또한 양식화된 형식을 통해 예술로서의 특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고 예술로서의 문학은 모든 예술이 갖는 두가지 계기, 곧 아름다움과 깨달음을 자신의 내부에 포함10)하고 있다. 물론 이 아름다움과 깨달음은 하나의 예술 작품 안에서 견고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깨달음만 있고 아름답지 않거나, 그저 아름답기만 할 뿐 깨달음을 건네지 못하는 예술 작품은 불완전하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둘 가운데 하나만 획득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닌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의 본질은 아름다운 깨달음이거나 깨달음이 있는 아름다움처럼 둘을 하나로 합한 그 무엇이다. 결국 아름다움과 깨달음의 융합이야 말로 문학 작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적 활동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크기와 무게’처럼,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을 하나로 결합한 가운데에서야 획득될 수 있는 지식의 형식이다.

문학교육을 문학의 본질에 더욱 육박하여 수행해야 한다면, 기존의 형식주의적 경사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이는 곧 인지적 영역만을 교육의 실제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편견들을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하나의 경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앞질러 상정해 볼 수 있는 경로는 존재한다. 그것은 먼저 인지의 개념을 확장하거나 폐기함으로써 가능하다. 교육과정의 내용이 교육적 장에서 수수되는 경험이나 지식의 총체를 의미한다면 지식의 형식 자체를 명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제적 지식에만 국한시키거나 활동을 방향 조정하는 원리적 지식 혹은 절차적 지식 등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제적 지식이나 원리적 지식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경험 그 자체, 곧 활동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비록 명료하게 계량화하고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학교육의 중핵을 이루는 미적 자질들에 대한 반응들은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어야 하며, 활동의 주요한 축으로 교실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경로는 내면화라고 지칭되는 정서적 과정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기존 문학교육의 교수 · 학습과정의 마지막 활동에는 항상 ‘내면화 과정11)’이 뒤따라 왔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저 검게 채색된 공백으로 존재할 뿐 교수 · 학습 속에서 공공연하게, 명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 역시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에 대한 명확한 이항대립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는 정의적 영역 자체를 보는 그릇된 관점임은 명확하다. 정의적 영역은 그저 개인의 내적인 수용과 반응으로만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적 영역 또한 인지와 결합되어 있으며, 인지의 과정 자체가 정의적 영역을 충분히 실현하는 양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의 구체적 실현 역시 인지와 정의의 이항대립을 해체함으로써 가능하며, 그 과정을 지식의 형식으로 포착하여 가능한 한 명시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비록 명제의 형식으로 명확하게 표현될 수는 없을지라도, 깨달음의 영역 속으로 끌어들여 논의함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논의할 수 있게 된다.

인지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정의의 영역을 구체화함으로써 기존의 이항대립적인 교육과정의 목표를 재규정하고자 할 때, 그 매개항의 하나로 상상력을 들 수 있다. 상상력은 인지적 영역으로 단순 환원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정의적 영역으로 자리매김 하기도 어려운 복합적인 개념이다. 상상력은 경험으로부터 촉발되는 사유의 한 방식임과 동시에 경험과 직선적으로 연결하기도 어려운 직관의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을 교육과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인지와 정의의 경계에 놓인 사유 능력을 문제 삼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기존 교육과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수 · 학습의 과정을 더 한층 역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주목에 값하는 개념이다.

더욱이 상상력은 문학을 언어의 문제로부터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사유와 인식의 문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개념이란 점에서 현재의 문학교육을 획기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매개항이기도 하다. 문학은 언어의 문제 이전에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며, 문학으로부터 받는 감동 역시 언어 이전에 삶을 보는 통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소설을 소설답게 바라볼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분명하게 수행하는 개념인 것이다.

문학교육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 역시 상상력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정은 엄연히 상상력의 정련을 문학교육의 주요한 목표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교육과정의 내용 속에 구체화하지 못한 채, 목표 수준에서만 선언적으로 기술됨으로써 유명무실한 구두선이 되고 말았다. 최근 들어 상상력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연구 성과12)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또한 개념적인 명료함을 통해 교육의 실제로 안착하기에는 여전히 추상적임도 사실이다. 상상력은 때로는 문학 일반의 속성과 동일시되는 가운데 구체성을 결하고 있거나13), 사조 혹은 양식으로 단순화되어 특정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활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협소하게 이해14)되고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구체화를 거부하는 개념도 아니며, 특정한 역사적 계기 속에서만 실체를 드러내는 개념도 아니다. 상상력은 문학작품의 창작과 수용을 근저에서 조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며, 작품의 구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실체이다.

Ⅲ. 상상력 개념의 현재성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흔히 그러하듯, 상상력 역시 아주 복합적인 개념이며, 가치평가적인 용어이다.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함축을 갖는 것은 오랜 개념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형성된 것이다.

상상력의 개념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상상력을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시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며, 모든 사유 형식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정신적 표상과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상상력은 환상과 직결됨으로써 감각 지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곧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생각과 결부되어 사용되었다. 결국 최초의 철학적 논의에서부터 상상력은 이미지화하는 능력이란 적극적인 의미와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나란히 연결되어 사용15)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원적인 양상은 상상력을 둘러싼 논의에서 항상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이 두 이질적인 개념들이 때로는 혼효되어 사용되거나 때로는 특정한 측면이 부각되어 이해되어 왔다. 예컨대 토마스 홉스16)는 상상력이 갖는 비현실성을 의식하여, 광기와 함께 연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상상력은 자체만으로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현실로부터 유리되기 쉽기 때문에 언제나 판단력과 함께 상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 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성적인 판단 속에서야 상상력은 광기로 떨어지지 않고, 제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홉스와 달리 칸트는 상상력의 창조성을 인정한다. 칸트는 상상력을 재생적 상상력과 생산적 상상력으로 구별한다. 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감각적 경험의 이미지화라는 일반적 의미의 상상이며, 후자는 경험이 아닌 직관을 통한 이미지의 종합으로 선험적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상상이다. 칸트는 이 생산적 상상력이 현실의 자연적 소재로부터 또 다른 자연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높이 평가17)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칸트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인 상상력을 상정하며, 이를 유동적이며 무제한적으로 펼쳐지는 미적 상상력으로 명명하였다. 이처럼 칸트는 상상력의 유형화를 시도하였지만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성 속에서 논구 하였으며, 표상과 환상의 두 가지 계기를 충분히 종합하지는 못하였다.

홉스의 논의에서 잘 드러나듯이 상상력은 중세 전반에 걸쳐 아주 위험한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이성과 대립되는 가운데 죄악이나 오류로 이끌기 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에 들어서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과학적 관점과 대립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지속되었다. 빠스칼의 경우 상상력을 ‘광포한 능력, 이성의 적’ 등으로 규정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가 전적으로 재조정된 것은 낭만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워즈워드는 상상력을 ‘가장 고양된 이성’이라고 지칭하였으며, 블레이크는 ‘인간의 상상력은 신의 계시이며 결실’이라고 평가18)하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에 이르러 이처럼 상상력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상상력이 예술적 창조의 원천인 창조성이나 독창성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창조성은 고전 시대에나 중세에도 역시 존재했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 창조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상상력을 개념 자체를 재조정한 것은 아무래도 낭만주의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들 낭만주의적 관점의 대표적인 이론은 코울리지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코울리지는 먼저 공상과 상상을 구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공상은 현실의 왜곡과 일탈이며, 상상력은 예술적 창조성과 결부된 채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상상력을 코울리지는 ‘모든 인간의 지각을 관장하는 주요한 담지체이며 생동하는 힘19)’이라고 규정하며, ‘종합의 원리’와 동일시하여 인식한다. 이는 상상력을 단순히 이미지화하는 ‘연상 능력’에 국한시키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으로 폭넓게 그 의미와 기능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코울리지를 비롯한 낭만주의적 시인들로부터 촉발된 상상력에 대한 논의는 최근 들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과 결부되어 논의되고 있다. 예컨대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 관점을 포함한다20)’는 것이다. 상상력이 창조성과 결부될 수 있는 것 또한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는 의미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람스가 낭만주의의 경향을 이론적으로 피력하는 가운데 거울과 램프의 비유21)를 들고 있는 데에서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곧 거울이란 현실을 반영하는 데 반해, 램프란 주체의 내부에서 외부 세계의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투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상상력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외적 현실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외적 현실로부터 자신의 사유와 감성을 거쳐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상상력의 합리적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관점에 바탕을 둔 상상력에 관한 논의는 시교육에 아주 구체적인 빛을 던져 준다. 곧 시를 언어의 문제로 국한시키기보다 시를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과 결부시켜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기실 시의 본질은 형식주의자들이 명명한대로 ‘낯설게 하기22)’이다. 기존의 경험적 대상을 상상력의 힘을 빌어 새로운 대상으로 낯설게 보게 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자 기능인 것이다. 비록 형식주의가 문학성의 다른 이름으로 찾아낸 ‘낯설게 하기’의 개념이 서사양식을 설명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할지라도 시의 의미를 가장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낯설게 하는 능력이야말로 상상력인 것도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무엇보다 상상력은 의미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기존의 지각을 새롭게 종합하는 구성적인 사유 능력이라기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상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상상적 세계가 이 현실과 전혀 관련을 맺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그저 공상이거나 환상이라고 간주한다. 생산적 상상력 혹은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논의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도 공상과 상상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상력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각, 곧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단순히 경험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창조성은 곧 새로운 관점으로 경험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상력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을 단순히 제한된 시공간에서의 즉자적 경험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지금이라는 시간적 제한, 여기라는 공간적 제한을 넘어 다른 것과 연결하는 사유의 능력인 것이다.

상상력에 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은 시를 이해하는 데에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예컨대 다음의 시를 들 수 있다.

귀뚜라미 울음

― 수유리에서

민영

저 이름 없는

풀포기 아래

돌멩이 밑에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의 울음

이 시에서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귀뚜라미의 울음’이다. 물론 울음 또한 경험적 대상의 과학적 실제와 다르다. 소리이며 소통의 신호인 것이지 귀뚜라미의 울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를 울음으로 표현한 것은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이기에 새로운 관점일 리는 없다. 그러나 정작 시 속에서 표현된 것은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이란 수식을 통해 획득된다. 수식을 통해 얻어진 한층 강화된 울음의 표현은 더 이상 경험적 세계가 아니다. 이미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표현된 세계인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세계, 곧 경험적 세계와 상상적 세계를 연결하는 사유의 방식이다. 상상적 세계의 형성을 위해 시인은 어떤 상상력을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경험적 세계인 데 반해,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이 작동한 결과이다. 그것은 곧 시인의 마음이 경험적 대상에 투영된 결과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상상력의 작용을 우리는 투사라고 명명할 수 있다. 주체의 마음 속 상태를 객관적 대상에 투영시켜 보는 상상력인 것이다. 기실 이 시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시인은 시의 제목과 부제를 통해 4월의 영령들이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투사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적 상상력이란 한 편의 시 안에서 경험적 세계와 상상적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 양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물론 한 편의 시는 경험적 세계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상상적 세계만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상상력의 발현 양식이며,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Ⅳ. 상상력의 유형
시 속에서 경험된 세계와 상상적으로 구성된 세계의 관계를 중심으로 상상력의 유형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는 연역적인 분류라기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시작품들에 바탕을 둔 귀납적인 분류들이기에 시적 상상력23)의 전체가 아니다.

① 발견

② 관찰

③ 연상

④ 투사

⑤ 유추

⑥ 평가

첫 번째 유형인 ① 발견은 경험적 세계를 그대로 제시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들 가운데 특정한 경험을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상상력임은 명확하다. 구체적인 시를 통해 살펴보면 더욱 쉽게 이해될 것이다.

掌篇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김종삼,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미래사)

이 시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경험적 세계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경험도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라기보다 경험을 일정한 미적 효과 아래 재구성하고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과 다른 상상적 세계가 틈입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양한 삶의 경험 속에서 예술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경험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로 옮기는 상상력이 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시는 특정한 순간을 그대로 옮겨온다거나, 언어적 대상, 예컨대 벽보나 편지글 등을 윤색없이 옮겨오는 것을 들 수 있다. 때로는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져 왔던 경험을 간추려 표현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와 같은 발견적인 상상력은 주로 현실주의적인 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특정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하지 않고 현실 그 자체를 표출함으로써 한 편의 시를 구성해 보이는 상상력이다. 이와 함께 실험적인 모더니즘적 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형식 실험을 감행하는 황지우의 시들, 예컨대 「벽·3」가 같은 시들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삶의 편린들을 그대로 시라는 공간 안에 부려놓는 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징적인 것은 모더니즘적인 시편들이 파편화 된 경험의 순간을 삶 전체의 은유로 간주하는 반면, 현실주의적인 시편들은 시 속에서의 경험적 세계를 삶의 동일한 변주인 환유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유형인 ②관찰은 더욱 깊고 더욱 넓게 경험적 세계를 밀어 올리는 사유의 방식이다. 누구나 볼 수 있지는 않은 것을 시인은 대상에 대해 깊이 천착함으로써 새롭게 들여다 본다. 경험적 세계를 상상적 세계로 끌어올리는 대신 경험적 세계 자체에 깊이 착근함으로써 경험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묘사해 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공터

‥‥‥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 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이 시에서 두드러진 상상력은 관찰이다. 그 관찰은 보이지 않는 ‘고요’를 보게 할 뿐 만 아니라, 범상한 생활인의 눈으로는 보기 어려운 ‘붐비는 바람, 잠든 바람’을 보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이란 관찰은 지극히 정교하고 놀랍다.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또렷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이 세계의 놀라운 추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시들은 무엇보다 묘사가 두드러진 시이거나 지극히 당연한 경험적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시들이다.

상상력의 세 번째 유형은 ③연상이다. 이는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다양한 상상적인 대상들을 함께 결부시켜 내는 상상력이다. 전통적으로 상상력의 가시적인 예로 빈번하게 언급된 것이며,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4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이 시에서 경험적 세계는 ‘잃어버린 사랑’이다. 그리고 나머지 수많은 소도구들인 밤, 겨울 안개, 촛불들, 횐 종이들, 눈물들 등은 이 사랑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연상적인 대상들이며, 상상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경험적 세계 앞에 대면했을 때, 시인의 상상력은 여지없이 개화하고 있으며, 그 상상적 연결은 연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연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한 편의 시가 구성될 수는 없다. 엄밀하게 결합될 수 있는 연상들만이 선택되고, 구성되어야만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누구나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연상이 아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연상에 머물 때 시는 난해해지고 만다. 연상의 고리들을 공유할 수 없을 때, 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 찾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연상으로 구성되는 경우 경험적 세계는 이 연상을 추동하는 중심이 되며, 다양한 상상적 세계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시적 상상력의 또 다른 유형은 ④투사이다. 앞의 예시에서 보인 대로, 투사는 대상속에 시적 주체의 정서와 인식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미래사>

이 회화적인 한 편의 시 안에서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보이는 것은 첫 행과 두번째 행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적 세계이다. 아마도 할머니의 깡마른 손이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단순한 외적 형상을 넘어 시인은 소와 할머니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더욱이 ‘함께’와 ‘서로’를 통한 유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교감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이 날카로운 결합 안에서 소는 그저 눈만 뚱글뚱글 굴리고 있는 동물이 아니라, 할머니의 적막과 위안을 함께 나누는 어엿한 주체로 상정된다. 시인은 시인 자신의 지각과 서정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이 정물에 개입한다. 마치 만화의 꼬리를 늘어뜨린 말풍선마냥 시인은 상상력의 힘을 빌어 이 두 존재가 서로 나누는 귀속말을 슬쩍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단순한 풍경이 존재의 비극적인 면모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전언으로 탈바꿈한다. 생의 비애, 존재의 고통이 이 짤막한 주관적 개입을 통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걸러진 생의 의미는 대상 자체의 의미라기보다 대상을 투사해 보는 주체인 시인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부과하는 의미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한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상상력은 경험적 세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이 더욱 부각되기에 이른다. 대상은 주체의 상상적 세계를 드러내는 방편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게 된다.

또 다른 상상럭의 유형은 ⑤유추이다. 유추는 더 이상 경험적 세계로부터 상상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경험적 세계는 전적으로 은폐된 채, 상상적 세계만이 전면에 드러난다.

시궁쥐

먹을 거라면 환장하는 새끼들에게

좀 쩝쩝댈 거라도 물어다 주자는 거겠지

아니면 배추잎이라도 장만해서

군색한 살림을 그럭저럭 꾸려나가자는 거겠지

‥‥ 중략 ‥‥

좀 쩝쩝거릴 것만 떨어지지 않으면 되겠지

아무리 더러운 똥오줌 진창바닥이라도

세대로 숨도 못 쉬는 쥐구멍 속에서도 모가지만

모가지만 붙어 있으면 되겠지 시궁쥐들은

배가 고프면 서로 잡아먹어도 되겠지

<최승호, 『대설주의보』, 민음사>

이 시의 시적 대상은 ‘시궁쥐’이다.그러나 시인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시궁쥐가 아니라, 이 시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은 그 무엇이다. 시인이 건네고자 하는 진정한 시적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유추를 통한 상상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이 시의 의미화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시궁쥐는 도대체 누구인가? ‘가난한 백성들’과 대립되며, 욕망에 파멸해가는 존재는? 그는 포괄적으로는 소시민들이다. 이 소시민들을 시의 시궁쥐 속에 대입해 보라. 비록 과장되어 있으며,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평가 속에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전반적인 흐름은 자연스럽다. 가족이기주의에 함몰된 채, 허겁지겁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 모으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그저 목숨이 붙어 있기만 한다면 그 어떤 부정한 행위조차 허겁지겁 해치우는 인간 군상들, 부끄러운 소시민들이야말로 이 시가 구성하는 탄핵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구체적인 경험의 대상들은 시 속에서 얼굴을 감추고 있다. 시는

그 경험들을 교묘하게 은폐한 채, 상상적인 시궁쥐를 통해 드러내며, 독자에게는 오히려 상상적 세계를 통해 경험적 세계를 재구성하는 독법이 요구된다.

끝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상상력의 유형은 ⑥평가이다. 이는 기존의 경험적 세계를 거부함으로써 시작되며, 경험적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을 상상적 세계를 통해 재구성해 보이는 방식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처럼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진술이 이와 같은 유형의 상상력이다. 경험적 세계 속의 님은 갔으나, 상상적 세계 속에서의 님은 의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현실 속에 경험하는 세계는 진정성의 세계가 아니며, 또 다른 실체는 오직 상상적 세계에서만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상상력은 다음 시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받들어 꽃

‥‥ 전략 ‥‥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 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곽재구, 『받들어 꽃』, 미래사>

이 시의 경험적 세계는 전쟁놀이이다. 기관총, 수류탄, 전차, 항공모함이 난무하는 아이들의 놀이가 경험적인 세계이다. 시인은 이를 허위나 거짓으로 평가하고, 그 자리를 ‘받들어 꽃’으로 대체한다. 꽃의 세계는 곧 상상적 세계이며, 진정성의 세계이기도하다.

지금까지 제시한 상상력의 유형은 기실 이론적인 분류일 따름이다. 실제 한 편의 시는 이들 다양한 상상력들이 서로 긴밀하게 결합된 채 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다만 다양한 상상력들이 균등하게 제시되기보다 특정한 상상력들이 전경화되는 것이다. 이들 전경화되는 상상력의 유형을 포착하면,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되며, 시를 창작하는 원리를 손쉽게 확인할 수도 있다. 시교육의 두 측에 해당하는 창작과 수용을 모두 가능케 하는 중심축으로 상상력의 유형이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상상력의 유형을 통해 경험적 세계를 밀고 나아가는 상상력의 방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이나 생태적 상상력, 혹은 정치적 상상력 등이 이러한 상상력의 방향과 연결된다. 경험적 세계를 상상적 세계로 연결하는 일정한 경향들이 이들 상상력의 방향이며, 개별적인 시인들은 저마다 시대에 따라, 삶을 응시하는 문제의식에 따라 특정한 방향의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착목할 경우 상상력의 교육은 문학사를 가르치는 유효한 방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력을 문학교육의 공간 안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문학을 언어의 문제 이전에 삶의 문제이며,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임을 부각시 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문학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형식주의적 관점을 탈각하고, 문학을 통해 삶과 현실을 응시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Ⅴ. 결론 -시적 상상력의 교육과정적 함의
지금까지 제시한 몇몇 시적 상상력의 유형은 이론적 노고의 결실이 아니다. 다만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시들을 통해. 대상을 장악하는 시인의 사유 방식을 귀납적으로 추출해 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곧 추상적인 이론화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서, 교육적 의미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적어도 이론을 앞질러 갈 수 있다. 교육이 언제나 학문적으로 견고하게 응축된 결과만을 지적·문화적 자산으로 전수해왔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어교육학의 학문적 완성을 기다려 국어교육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과학교육이 기대고 있는 물리학·화학 등의 개별 학문 역시 현상적으로 견고하게 여겨지나 기실 끊임없는 미끄러짐 속에 놓여 있는 상대적인 안정성일 따름이다. 결국 학문적 체계가 정교하게 구축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현실적 필요성이 광범위한 해당 사회의 공동체 내부에서 공준되기만 한다면, 곧 교육의 내용으로 선택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실천적인 위력을 가진 채 교육의 공간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현실적인 작동방식을 전제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여기에서 펼친 소론이 즉각적으로 현실의 학교교육으로 전화되기에는 더 많은 정교화된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지금까지 제시한, 발견·관찰·유추·투사·평가 등 상상력의 구체적 내용들이 충분히 일반화할 수 있는지 다각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평가’의 경우를 들어 보자면, 다른 여타의 유형들, 특히 가장 풍부하게 발견되는 유추와 그 위상이 적절하게 설정되었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을 넘어 심지어는 이들 유형들 중 몇몇은 폐기되어 버리거나, 내포를 달리한 채 심화되거나, 외연조차 벗어던진 채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들 유형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사유의 방식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가운데 서로 습합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정할 수 있는 문제이며, 그러할 경우 무엇이 지배적인 상상력의 유형인지를 확증하는 것도 쉽지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점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상상력의 유형화가 가능하며, 그것이 교육의 공간 안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의의 합리적 핵심조차 유실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단정적인, 그리고 철회할 수 없는 진술조차 형식주의를 넘어서서, 시를 사유와 분리한 채 언어의 결합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는 기존의 교육적 관습을 극복할 수 있는 더욱 바람직한 시야와 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면, 그 관점과 방법이 더욱 효율적으로 교실로 틈입할 수 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무시되어야 함은 명확하다.

그러나 이 모든 유보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적 상상력의 유형을 교육과정의 내용으로 구체화함과 동시에 교실로 끌어들이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그것은 단순히 목표로만 제시되어 있는 상상력의 정교화를 구체적으로 교육과정의 내용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문학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를 더욱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의 유형을 교육내용으로 선정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닫는 문학교육의 편향을 극복할 수 있으며, 나아가 문학을 언어 예술로 간주하는 편협한 관점을 넘어설 수 있는 유효한 방법적 시각을 마련해 준다는 점이다. 문학을, 특히 시를 언어의 문제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 곧 상상력의 문제로 정당하게 자리매김함으로써 문학의 본질에 한결 육박해 가는 문학교육의 설계와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덧붙여 상상력의 유형은 문학교육을 단순히 수용의 과정으로만 단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수용과 생산을 동시에 문제삼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창작교육을 위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상상력의 유형들을 구체적으로 실험해 봄으로써, 실질적인 창작의 과정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천들이 가능해질 때,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대치되어 있는 현재의 교육과정을 근본적으로 재규정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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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이 연구는 2000년도 춘천교육대학교 교내 지원 연구비로 수행되었음.
2 이용주, 『박붕배친수 회갑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 1986,333면
3 이용주 외, 「국어교육학 연구와 국어교육의 구조』, 『사대논총』 46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1995
4 김은전은 문학교육의 목표를 ‘문학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문학을 통한 인간 교육’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인격 형성을 주요한 목표로 설정한다. 그러나 정작 작품 자체에 대한 읽기는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며, 이는 시교육에서도 다르지 않다. 김은전, 「제5차 국어과 · 한문과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세미나」, 한국교육개발원, 1986.
5 김상욱, 문학교육의 이념과 목표, 『문학교육과정론』, 삼지원, 1997
6 김상욱, 「7차 문학교육과정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함께 여는 국어교육』 1999 가을, 1999
7 타일러의 교육목표 분류학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는 인지적 영역을 정의적 영역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선정하여 목표를 분류하였으며, 별도의 활동으로 정의적 영역을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분류는 교육목표 분류의 관행을 확립하였으며, 현행 문학 교육과정의 목표 분류도 이 틀을 따르고 있다. Bloom, B.S., 『교육목표분류학:(1)지적 영역』(임의도 외 역), 배영사, 1972.그러나 이러한 이원적 분류 체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문학교육을 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문학교육의 대상인 문학작품은 인지와 정의가 동시에 개진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이스너는 또 다른 관점에서 타일러의 분류 자체가 ‘실제로는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우연적인 일을 직선적이고 조직적으로 개념화시킨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인지적 영역 자체가 갖는 유동성을 지적하고 있다.E. W. Eisner, 『교육적 상상력』(이해명 역),단대출판부,1983,16면
8 Eliot W.Eisner, 『인지와 교육과정』(김대현 · 이영만 · 김혜경 공역), 교육과학사, 1990, 47면.
9 Hirst, P.H. and Peters, R.S., The Logic of Education, Routledge & Kegan Paul, 1970, p.69.
10 까강은 이를 인식적 계기와 가치평가적 계기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곧 인식적인 깨달음의 계기와 정의적인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계기로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이 두 측면이 모든 예술적 대상이 인간에게 불러 일으키는 감동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Kagan, M., 『미학 강의』(진중권 역), 새길, 1992, 136면
11 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삼지원, 1994, 287면.
12 우한용, 「상상력의 작동 구조와 교수-학습」, 『문학교수학습방법론』, 삼지원, 1998.
13 윤여탁, 「문학교육에서 상상력의 역할」, 중한인문과학연구회 제3회 학술발표대회자료집, 1999.
14 정정순, 「1920년대 한국 낭만주의 시와 상상력 교육」, 『문학교육학』 2000 여름, 2000.
15 Thomas, N.J.T., "A stimulus to the imagination", Psyche 3. 1997.
16 Thomas Hobbes, 『리바이어던 : 국가론』(이정식 역), 박영사, 1984, 제1부 제8장.
17 Kant, Ⅰ., 『判斷力 批判』(이석윤 역), 박영사, 1992, 180~202면.
18 Thomas, N. J. T., "Are theories of imagery theories of imagination? An active perception approach to conscious mental content". Cognitive Science 23, 1999, pp. 207 ~ 245.
19 Coleridge,S. T., Biographia literaria (G. Watson, Ed.). London: Dent., 1975.
20 Hamlyn, D. W. Imagination. In S. Guttenplan (Ed.), A companion to the philosophy of mind (pp.361 ~366). Oxford: Blackwell. 1994.
21 Abrams, M. H. (1953). The mirror and the lamp: Romantic theory and the critical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2 Erlich,V .,『러시아형식주의』(홍승용 역), 문학과지성사, 1988.
23 이에 관한 상세한 실례는 김상욱(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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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김상욱
춘천교육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