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바둑..!/놀이 이론들~

[=] 우리의 민족놀이

온울에 2008. 8. 17. 00:18
우리의 민족놀이

 2007/11/29 흑룡강신문

우리의 민속놀이의 변천



조선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농경생활을 영위하여오면서 자기들의 락천적인 기상과 풍부한 정서로 흘러넘치는 다채로운 민속놀이를 창조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세세대대로 즐겨오고 있다.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민족의 민속놀이는 그 시원을 원시사회에 두고있다.


≪음력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련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이것을 영고라 불렀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낮에 밤을 이어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이것을 무천이라 하였다.≫


≪항상 오월에 파종이 끝나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였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낮과 밤을 쉬지 않았다. 그 춤은 수십명이 다 함께 일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땅을 밟아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고 손과 발이 상응하는데 그 절주가 방울춤같았다. 시월농사를 끝마치면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다.≫


상술한 문헌기록들은 원시사회 민속놀이의 일각을 보여주고있는바 매년 봄파종이 끝날 때와 가을걷이를 끝마칠 때면 우리 민족의 조상—원시종족들이 ≪음주가무≫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이렇게 싹튼 조선민족의 민속놀이는 노예사회를 거쳐 삼국시기(고구려, 백제, 신라 시기)에 이르러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였다.


고구려에서는 설날, 정월 보름, 3월 3일, 10월을 명절로 맞았는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정월 보름과 3월 3일의 민속놀이이다. 매년 정월 보름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강가에 모여≪석전(돌팔매놀이)≫을 하였다. 3월 3일은 5부의 병사들이 모여 평소에 단련한 무술을 겨루는 날로서 이날엔 활쏘기경기(사냥경기)를 진행하였는데 이 활쏘기명중률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놀이외에도 고구려에는 씨름, 수박회 등이 있었다. 백제의 인민들도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였는바 활쏘는 장소를 만들어놓고 매달 초하루, 보름에 활쏘기를 련습하였다. 또한 백제에서는 투호, 바둑, 윷, 악삭, 룡주회 등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투호는 일정한 거리에 단지를 놓고 화살을 던져 단지안에 들어가게 하는 놀이였다. 악삭은 후세의 쌍륙으로서 그 노는 방법은 윷과 비슷한데 다른 점은 ≪말≫이 많고 ≪말≫을 쓰는 법이 좀 복잡한것이다. 룡주회는 구슬을 다루는 놀이였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에서는 설, 수리날(단오), 8월 한가위(추석)등을 명절로 맞이하였으며 제기차기(축국),  연띄우기, 길쌈놀이, 활쏘기 등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고려시기에 이르러 설, 정월보름,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 등 날을 명절로 삼았다. 이 시기에는 활쏘기와 말타기의 풍습이 계승됨과 아울러 격구(말을 타고 달리면서 공채로 공을 치며 노는 운동)이 성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윷, 바둑과 함께 장기가 있었고 남성들의 씨름과 녀성들의 그네뛰기가 전파되였으며 줄당기기, 수희, 석전, 대말타기, 돌던지기, 연띄우기, 영등놀이 등이 있었다.


리조초기, 즉 15~16세기에 진입하여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농한기에 명절을 정하고 그날을 다채로운 놀이로 즐기는 풍습을 견지하였다. 설과 정월 보름날을 일년중의 제일 큰 명절로 삼아온 인민들은 여러가지 놀이로써 이날을 즐겼는바 그중에서도 화적놀이(해마다 정월 보름에 농가에서 농사를 형상한 가장물을 세워 일년의 풍년징조로 삼는 놀이), 돌팔매놀이가 대표적이다. 5월단오에는 씨름, 그네뛰기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며 8월추석에는 줄당기기, 길쌈놀이 등을 하였다.


리조중기, 즉 17~19세기 전반기의 민속놀이풍습은 선행시기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더욱 다채롭게 발전되였다. 정초에는 줄당기기, 널뛰기, 시절윷놀이, 사공놀이, 사자놀이, 관원놀이, 쥐불놀이, 연띄우기, 바람개비놀이, 다리밟기, 수레싸움 등 놀이가 널리 퍼졌으며 3월 3일에는 화전놀이 5월단오와 8월추석날에는 씨름과 그네뛰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리조말기, 즉 19세기후반기-20세기초에 와서 우리 민족인민들이 해마다 맞이한 명절은 후세의것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 이 시기의 민속놀이에서 과거의 일부가 없어지기는 했으나 선행시기의 대부분 민속놀이가 계승 발전되였다. 이 시기에 민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놀이로는 탈놀이, 농악놀이, 그네뛰기, 씨름, 널뛰기, 줄당기기, 활쏘기 등이였다. 이 밖에도 윷놀이, 장기, 고누를 비롯한 겨루기놀이들과 연띄우기, 팽이돌리기, 썰매타기 등 여러가지 어린이놀이들이 전해졌다.




팽이돌리기


놀이유래: 


예로부터 시골에서는 우리 민족의 어린이들이 나무로 팽이(축을 중심으로 둥근둥체가 회전운동을 하는 일종의 놀음도구)를 직접 깎아만들어서 추운 겨울날 강가나 연못 또는 논바닥의 얼음우에서 팽이돌리기를 하였다.


팽이는 지방에 따라 ≪패이≫, ≪팽돌이≫,≪뺑이≫,≪빼리≫,≪뺑돌이≫,≪뺑생이≫,≪봉애≫,≪포애≫,≪세리≫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


팽이는 보통 나무로 만드는데 박달나무, 대추나무, 소나무의 관솔 등 무게있고 굳은 나무로 만든다. 팽이는 균형이 잘 잡히게 깎아서 머리를 흔들지 않고 박은듯이 한자리에서 돌게한 것을 잘 만든것이라고 하는데 한곳에 박은듯이 서서도는 팽이일수록 오래 돌기때문이다.   


팽이의 형태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몇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제일 잘 돌고 오래 도는 팽이인 말팽이는 머리가 평평하고 길이는 원주형으로 내려오다가 끝을 뾰족하게 원추형으로 깎았다. 그 모양이 곡식을 되는 말과 같은데서 말팽이라고 한 것 같다. 말팽이는 깎기도 비교적 쉽고 오래 돌기 때문에 가장 널리 보급되였다.


머리와 팽이 끝을 다 뾰족하게 깍아서 아무 쪽으로나 돌릴수 있게 만든 팽이를 장구팽이라고 한다. 장구팽이는 말팽이 보다 키가 크다.


줄팽이는 팽이허리에 잘룩하게 줄을 내여 깍은것이다. 줄팽이를 돌릴 때에는 팽이채의 노끈을 잘룩한 줄에서부터 감아올려서 돌린다.


줄팽이와 장구팽이의 머리에는 원의 중심을 오목하게 파고 그 주위에 여러가닥의 색줄을 칠하여 아름답게 장식하기도 한다.


팽이채는 보통 40~50cm 길이로 굵기가 아이들의 엄지손가락만한 싸리나무같은 것을 잘라서 만들며 그 끝에 노끈을 감아도 빠지지 않게 약간 흠을 파고 20~30cm 길이에 해당하는 노끈을 맨다. 팽이채를 만들 때 노끈을 끝까지 잘 꼬아서 하면 팽이를 칠 때 팽이에 맞는 부분이적어서 잘돌수 없으므로 노끈의 끝을 약간 실이 풀려 너슬너슬하게 한다. 그래야 한번만 쳐도 오랫동안 팽이가 살아돌수 있게 된다. (팽이가 도는 것을 <산다>고 함)


팽이돌리는 방법은 팽이채의 노끈을 팽이 허리에 감고 왼손에 쥔 팽이를 얼음우에 놓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팽이채를 잡아당기여 돌게 한다. 팽이가 돌다가 죽으려 (팽이가 멎는 것을 ≪죽는다≫ 고 함.) 하면 팽이채로 팽이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팽이허리를 쳐서 계속 돌게 한다. 팽이가 돌때에는 왕벌이 우는 소리와 같은 ≪윙윙≫소리가 나는데 어린이들의 흥미를 돋구어준다.


팽이돌리기는 예닐곱살부터 열두서너살난 어린이들이 주로 하는데 보통 5~6명 이 모여서 누구의 팽이가 더 잘 소리를 내면서 오래오래 도는가를 경쟁한다. 이때 도는 팽이를 서로 부딪치게 하고 누구의 팽이가 더 오래 살아남는가를 경쟁하기도 한다. 또한 팽이돌리기는 몇사람씩 편을 가르고 일정한 곳에서 팽이를 돌리면서 출발하여 지정된 곳까지 갔다가 돌아와 팽이와 팽이채를 자기편 아이에게 전하고 또 그다음 아이에게 전하여 먼저 끝나는 편이 이기는 집단적경기도 한다.


우리 민족의 어린이들은 팽이돌리기를 하면서 흥이나면 다음과 같은 노래들을 불렀다.


☆ 윙—윙 잘도 돈다


내가 깎은 관솔팽이


왕벌 우는 소리내며


나의 팽이 잘도 돈다



윙—윙 잘도 돈다


내가 만든 박달팽이


두발가진 승냥이는


나가라고 소리친다


   


☆ 팽글팽글 잘도 돈다


요리조리 잘도 돈다


고추 먹고 매염매염


담배 먹고 매염매염



겨울 같은 얼음판우에서 이런 노래들을 부르면서 팽이를 돌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롱스럽고 귀여움을 느끼게 한다.


동지 섣달에 엄한을 무릅쓰고 하는 팽이돌리기는 추위가 가시기 시작하면 팽이놀이를 그치고 팽이에 기름을 쳐서 그것을 벽장에 보관하여 다음해에 꺼내 쓰며 나이를 먹어 커감에 따라 팽이의 크기도 커가며 동생이나 동네의 어린이에게 팽이를 물려준다.






화투치기


놀이유래: 


화투치기는 우리 민족 인민들속에서 널리 전파된 놀이의 하나이다.


화투는 일년 열두달을 상징하여 매달이 각각 넉장으로 되여있으며 전부 48장으로 이루어졌다. 화투는 그림에 따라 광자가 씌여있는 20끗짜리, 10끗짜리, 5끗짜리 그리고 수자로 쓰이지 않는 홀껍데기 등 네가지로 나뉜다. 일년 열두달을 상징한 구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월: 송학


2월: 매조


3월: 사꾸라


4월: 흑싸리(흑쌀)


5월: 란초


6월: 목단


7월: 홍싸리(홍살)


8월: 명월


9월: 국화


10월:단풍


11월:오동


12월:비



화투치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보통 월별로 그림을 맞춰가는 민화투 (≪늘화투) 라고도 함)는 끗수를 계산하여 가장 많이 딴 쪽이 이기는것으로 되여있다. 이 민화투에는 ≪약≫이 라는 것이 있다. ≪약≫에는 란초약(5월), 단풍약(10월), 오동약(11월),비약(12월)등이 있는데 그달의 4장을 모두 차지하면 ≪약≫을 한것으로 된다. 규정에 의해 ≪약≫을 하지 못한 사람은 ≪약≫을 한사람에게 자기가 딴 끗수에서 20끗 또는 40끗을 주는것이다. 그리고 5끗자리 띠중의 ≪홍단≫,≪청단≫, ≪초단≫등의 세가지 띠를 차지해도 ≪약≫과 같이 계산해주는수가 있다. 이외에도 ≪륙백≫이란 놀이가 있는데 이 놀이는 600점을 먼저하는 편이 이기는 놀이이다.


화투치기는 2명 내지 3,4명이 노는 것이 통례이나 그 이상되는 경우도 있다.




장  기


놀이유래:


장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 남성들이 즐겨왔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즐기고있는 대중적인 오락의 하나이다.


장기에는 장기판과 장기씨(흔히 말 또는 장기쪽이라고 함)가 있다. 장기판은 바둑판보다는 좀더 큰 정방형의 목판(평판)을 사용한다. 판에는 가로 9렬, 세로 10렬의 줄을  긋는데 홈을 가늘게 파고 그안에 먹선을 넣는 것이 보통이다. 장기씨는 량편이 각각 16개인데 ≪장군≫이 한개씩, 한쪽은 ≪초≫라고 쓰는데 이것을 ≪궁≫이라 하였다. )이고 ≪차≫가 2개, ≪말≫이 2개, ≪상≫이 2개, ≪사≫가 2개,≪포≫가 2개, 병졸이 5개씩이다. 장기씨의 기호와 수가 량편 다같기 때문에 ≪한≫측은 글자를 정자로 쓰고 붉은 색으로 표시하며≪초≫측은 글자를 초자로 쓰고 푸른색을 먹인다. 그리고≪한≫측의 졸병은 ≪병≫이라 쓰고 ≪초≫측의 졸병은 ≪졸≫이라고 쓰는 것이 보통이다. 장기씨의 크기는 ≪차≫,≪말≫,≪상≫, ≪포≫ 등이 같고≪사≫,≪졸≫은 이보다 작으며 장군은 제일 크다. 장군을 ≪한≫,≪초≫라고 새긴 것은 ≪팔년풍진초한전≫을 본뜬것이다. 과거에 장기씨의 형체는 나무의 생김새대로 잘라서 만들었는데 대체로 크기는 같으나 모양이 다양하였으며 때로는 륙각형으로 다듬어 만들기도 하였다. 지금은 대개 기계로 둥글게 만드는데 균형미는 있다 하겠으나 악취는 오히려 재래의것이 월등하다.



대전이 시작되기전 장기씨의 배치는 그림에 표시된것과 같이하고 푸른 장기쪽을 가진 사람이 먼저 둔다. (지금은 약자가 선수라고 약자가 먼저 둔다.)그러나 장기씨의 배치에서 ≪상≫과 ≪말≫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놓을수 있으며 ≪말≫두개를 모두 ≪사≫곁에 놓는 것을 ≪량귀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술여하에 따라 두는 사람이 임의대로 정한다.


장기는 먼저 ≪군사≫-장기씨를 규정된 자리에다 놓고 서로 엇바꾸어가면서 한번씩 자기 ≪군사≫를 필요한 밭에 움직여 상대방의 ≪군사≫를 잡아떼면서 승부를 겨룬다. 승부는 상대방의 ≪장군(궁)≫을 잡아 떼는것으로 결정된다.


매개 장기씨는 일정한 규정에 의해 움직이는바 이것을 ≪행마≫ 또는 ≪말을 쓴다≫고 한다. 장기씨를 쓰는 법(행마법)은 다음과 같다.


≪차≫—동서남북(전후좌우) 어디로든지(몇구간이고) 일직선으로만 다닐수 있으나 그 선상에 상대방의 말(장기씨)이 있으면 잡아먹을수 있으나 넘어갈수 없다.


≪포≫--≪포≫역시 전후좌우로 일직선으로 쓸수 있는데 반드시 다른 말을 한 개 넘어서만 쓸수 있으되 ≪포≫는 같은 ≪포≫를 넘지 못한다. ≪포≫가 넘는 장기씨(말)를 ≪포다리≫라고 한다.


≪말≫—그림 2의 대각선끝에서 반대쪽끝까지 단번에 움직여간다. 그러나 만약 ≪말≫이 가는 길에서의 첫번 꺾어지는 곳에 상대편의 ≪군사≫가 있는 경우에는 ≪멱≫이라고 하여 갈수 없다.


≪상≫—그림 3의 대각선으로만 이동할수 있는데 ≪상≫의 경우에는 두곳에 ≪멱≫이 있다. 즉 ≪상≫이 가는 길에 첫번 꺾이는 곳과 그다음으로 된 곳에 상대편의 ≪군사≫가 있으면 갈수없다.


≪병≫,≪졸≫—림전무퇴의 정신을 발양하여 좌우와 앞으로만 한 구간씩 갈수 있으며 절대로 물러설수 없다.


≪사≫—그림 1의 ≪궁≫안에서 항상≪장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궁≫안에서 항상 ≪장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궁≫안에서만 선을 따라 한번에 한 구간씩 쓸수 있다.


그런데 ≪장군≫과 ≪사≫를 제외한 모든 ≪군사≫들은 상대방의 ≪장군≫을 향하여 공격할수 있고 움직이는 길점에 상대방의 ≪군사≫가 놓이면 잡아먹을수 있지만 길목에 상대방의 ≪군사≫가 있으면 갈수 없다. 그리고 자기가 장기씨를 한번 써서 가닿는 곳에 상대방의 장기씨가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잡는데 ≪포≫는 ≪포≫를 잡을수 없다. 장기의 승부는 이런 각종 병종으로 상대방을 공격하여 다음 한수로 상대방 ≪장군≫을 불러도 상대방이 계속 피할수 있게 되면 장기는 비기고만다. 장기에서는 한번 두번 다시 물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한사코 물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롱거리로 되는 경우가 많다.


장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례절이 있다. 장기씨는 붉은 색과 푸른색(혹은 검은색)으로 구분되여있는데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윗사람에게 붉은색의 장기씨를 먼저 권하는 것을 례절로 삼았으며 ≪약자 선수≫라 하여 수가 약한 사람이 장기수를 먼저 쓰는 것을 하나의 관계로 지켜왔다.


장기는 대개 실내에서 두게 되지만 집밖에서 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무더운 한여름 서늘한 나무그늘아래에서 로인들이 장기판을 둘러싸고 흥겨워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장기판이 벌어지면 어느덧 모여들어 들여다보는 사람이 많게 된다. 이때 정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열중하며 마침내 훈수하게 되고 나중에는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판을 잡는수도 있다. 예로부터 ≪장기훈수는 뺨을 맞아가면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훈수군이 자기가 보고있는 편의 ≪군사≫가 곧 잡혀죽게 되였거나 한수 잘쓰면 상대방을 이길수 있는 좋은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는 사람이 그 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을 때 ≪상발이 좋다≫거나 ≪명사이다≫라는 식으로 귀띔을 해준다. 그래도 두는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직접 수를 대주거나 대신 장기씨를 써주기도 한다. 훈수로 인하여 상대방이 기울어지거나 지게 되면 장기수를 되물릴 내기를 하면서 서로 말씨름까지 벌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오락적특성으로하여 예로부터 장기와 관련한 흥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는바 그 일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리조왕실의 집안이였던 서천령이 매일 장기로 세월을 보내다가 수가 높아감에 따라 이 세상에는 자기의 적수가 없다고 자처하게까지 되였는데 그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였다. 군역살이를 떠나게 될 한 늙은 농민이 이 소문을 듣고 그의 거만한 코대를 꺾어주고싶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던 끝에 좋은 꾀를 생각해내였다. 늙은 농민은 군역살이를 가는 길에 자기가 먹이던 말 한필을 끌고 서천령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공께서 장기를 썩 잘 두신다니 소인과 한번 대전하여 제가 지면 이 말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천령이 응락하자 장기가 시작되였는데 늙은 농민은 세번 두어 두번 지자 선뜻 자기 말을 내주고 ≪을을 잘 먹여주소서. 후일에 군역살이기간이 끝난 다음 다시 찾아와서 또 한번 장기를 두고 제가 이기면 찾아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기에 워낙 지신이 있는 서천령은 ≪좋도록 하게≫하고 선뜻이 대답하였다. 서천령은 말을 잘 먹여 살찌게 하였는데 때마침 군역살이를 마친 늙은 농민이 다시 찾아와서 장기를 청하였다. 장기가 시작되자 서천령을 ≪좋도록 하게 ≫하고 선뜻이 대답하였다.  장기가 시작되자 서천령은 늙은 농민의 수에 완전히 제압되여 련속 3전3패로 패배를 당하였다. 늙은 농민이 말하기를 ≪소인은 이말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에 복무하는 기간에 누구도 길러줄 사람이 없어 고심하던중 마침내 공의 댁에 부탁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것인데 공께서 이렇게 말을 잘 길러주시였으니 무어라고 감사의 마을 드려야 옳을지 알수 없습니다.≫라고는 말을 찾아가버리고 말았다는것이다.


15세기 학자로 이름난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인 로사신이 리조봉건정부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장기를 즐겨 신분이 높고낮음을 가리지 않고 놀았는데 ≪차≫가 상대방에게 잡혔을 때에는 언제나 애걸복걸하여 물렀다고 한다. 이로부터 당시 ≪바라건대 로정승의 <차>처럼 되여 불로장생하였으면 좋겠다.≫는 속담까지 생겼던것이다. 16세기 사람인 류희춘의 ≪미암일기≫에는 그가 자기 집을 찾아온 수많은 친구들과 거의 모두 장기를 놀았고 때로는 자기의 안해와도 장기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리조시기 장기와 관련된 기록들에는 장기씨(장기쪽)와 노는 방법도 전하고있다. 장기는 옛날에 ≪상회≫라고 하였는데 리조중엽부터 ≪장기≫라고 표기하였다.




연띄우기


놀이유래:


연띄우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즐겨 온 민속놀이다.


지난날 조선민족의 어린이들은 겨울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노래를 흥겹게 부르면서 연을 하늘공중에 높이 띄워올리는 놀이로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적인 연의 형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네모연을 비롯하여 방패연, 가오리연, 허수아비연 등이 대표적이다.


네모연은 약간 갸름한 네모형의 연을 말하며 방패연은 연의 생김새가 방패모양과 같은 연을 말한다. 방패연은 연에다가 그림을 그린 것, 색종이를 오려붙인 것, 색칠을 한 것, 꼬리 또는 발을 단 것 등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이를테면 꼭지연(연의 머리가운데에 반달모양 또는 활모양으로 색종이를 오려붙인 방패연), 반달연(연의 머리가운데에 반달모양 또는 활모양으로 색종이를 오려붙인 방패연), 치마연(연가운데 가로선 아래 부분만 색칠하여 마치 녀자가 흰저고리에 색치마를 입은 것 같게 한 방패연), 동이연(연의 머리나 허리에 띠를 두른 방패연), 박이연(연바탕 전부나 부분에 동그란 점 같은 것을 박은 방패연)등이 그러하다.


가오리연은 그 형태가 가오리비슷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인데 지방에 따라 낙지연, 가재미연이라고도 하며 꼬리연이라고도 이른다. 가오리연의 특징은 연에 꼬리를 길게 붙여 바람이 꼬리를 타고 흐르게 하여 연을 쉽게 띄울수 있게 한데 있다. 그리고 허수아비연은 사람이나 동물 등의 모양을 따서 만든 연을 말한다.


연의 크기는 각 지방의 전통과 풍세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센 해변가의 지방에서는 연을 대문작만큼씩 크게 하고 내륙지방에서는 그렇게 크게 하지 않는다. 연은 주요하게 살(일명≪달)이라고도 함)과 종이 그리고 실로 만든다. 창호지나 백지가 마련되면 그것을 규격에 맞추어 자른후 그 종이 기이의 한끝을 약 2cm가량 접어서 머리를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다시 접는다. 그리고 직경이 연길이의 3분의 1쯤 되는 동그라미를 가운데에 오려낸다. 이런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연살을 만든다. 연살재료로는 대가 가장 좋다. 대가 없을 때에는 사리, 수수대, 갈대 같은 것을 대용하기도 하는데 모두 껍질을 좁게 째서 길게 다듬은 것을 쓴다. 연살을 종이에 붙일대에는 먼저 풀을 바른 살을 연머리에 붙인다.(머리부분에 접은 종이는 남겨두고).


다음에는 네귀에서부터 x형으로 귀살을 붙이고 그 다음엔 연길이의 중심에 머리살에 직각이 되도록 꽁수살을 붙인다. 마지막에 허리살을 붙이는데 그것을 먼저 붙인 세개의 연살이 교차된 배꼽에 댄다. 살을 붙인후에는 연줄을 맨다. 연줄을 매는 곳은 보통 세곳인데 연줄을 단단히 매여 연 조종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네곳, 다섯곳에도 잡는다. 머리살 량귀에 건 머리줄을 걸고 이것과 꽁수살 하반부에 건 꽁수줄을 한데 모아쥐고 꼭지를 들어 연실에 맨다. 연줄 매는 곳은 그 줄수에 따라 다르다. 연줄을 합쳐서 꼭지를 틀 때에 벌이줄을 가장 길게 하고 다른 줄은 그보다 짧게 해야 연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기 쉽다. 연실로는 무명실, 벨실, 명주실 등을 쓰는데 그중에서도 명주실이 가볍고 질겨서 가장 좋다. 연실은 ≪얼레≫에 감는다.


연을 날릴때에는 바람길을 따라서 연을 얼려서 일정한 높이에 올린다. 그러면 연은 바람을 안고 높이 떠오르며 ≪얼레≫의 실은 자동적으로 풀린다. 연은 바람에 떠야 하므로 중앙구명의 크기와 이마를 실로 조이는 정도와 실을 매는 위치와 길이를 알맞게 해야 하는바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그 호불호가 결정된다.


연띄우기는 보통 높이 띄워올리기를 주로 하며 솜씨있는 연군들은 연줄을 재간스레 채고 낚아 올라갔던 연이 곤두박히듯 떨어지게 하다가는 다시 솟아오르게도 한다. 연띄우기의 다른 한 재미는 연싸움이다. 이것은 여럿이 연을 띄워놓고 연끼리 서로 부딪치게 해서 상대편이 연을 마사버리기도 하고 줄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연띄우기계절은 대체로 초겨울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추위가 가시기전에 끝나는데 가장 본격적인 시기는 음력 정월초부터 대보름날까지이다. 어린이들을 놓고보면 이 기간은 연띄우기명절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특히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한해의 액운을 날려보낸다는 뜻에서 액연을 띄우게 되는데 이런 행사를 ≪악막이≫ 또는 ≪액막이≫라고 한다. 이때에 연의 꼬리에 ≪액≫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이니 ≪송액영복≫이니 혹은 ≪집안식구 아무개 무슨 생 몸의 액을 없앤다.≫라고 써서 그 연을 띄우다가 해질무렵에 연줄을 끊어버리고 연을 영원히 날려보낸다. 이렇게 하면 그해의 재액을 멀리 쫓아보내는것으로 된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그이튿날부터는 연을 띄우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연띄우기는 바깥에서 여럿이 모여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기 때문에 건강에 좋고 물체를 공중으로 비행시키는데 대한 흥미와 지식을 키우는데 유리하고 높이 뜬 연이 재주를 부리게 당기는 재미 또한 좋아서 어린이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 놀이를 즐겨왔다.


옛문헌인 ≪삼국사기≫에는 7세기에 김유신이 싸움터에서 연을 날려 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덕왕 16년이자 진덕녀왕원년인 정미년(647년)에 대신 바담과 렴종은 녀왕으로서는 나라를 다스릴수 없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켜 녀왕을 페위시키려 하였다. 이리하여 반란군은 명활성에 진을 치고 왕을 지키는 군사는 월성안에 방어진을 치고 10일동안 서로 공방전을 벌렸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날 한밤중에 큰 별똥이 월성안에 떨어졌다. 이것을 바라본 비담의 무리는 휘하장병에게 말하기를 별똥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류혈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녀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그의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환성을 올리니 천지가 흔들릴 지경이였다. 녀왕은 이 환성을 듣고 대경실색하였다. 이때 왕사의 지휘관인 김유신장군이 녀왕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인형을 만들어 이것을 큰 연에 매달아 불을 질러 올려보내니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올라가는것같이 보이였다. 이튿날 김유신은 말을 놓아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되올라갔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적군의 장병들은 의아하여 동요하게 되고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근거하여 김유신이 연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기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가 삼국계책에 리용한것으로 생각된다. 옛날에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조건하에서 연이 군사적목정에 리용된 사정은 최영장군에 얽힌 전설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옛날 고려말의 명장 최영장군이 제주도를 징벌할 때의 일이다. 섬주위(성주가 살고 있는 성벽이라고도 전함)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병사가 진군할수 없었으므로 최영장군은 묘안을 생각해냈다. 말하자면 연밑에 갈대씨를 담은 주머니를 달아 그 연을 높이 띄워 섬주변 갈대밭에 그 씨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그해 가을에 섬주위는 마른 갈대로 덮이게 되였는데 거기에 불을 놓아 가시밭을 태워 마침내 상륙하여 섬을 점령하게 되였다 한다. 이런 이야기들과 문헌기록들을 미루어보아 연띄우기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윷놀이


놀이유래:


윷놀이는 조선족인민들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즐겨온 대중적인 놀이의 하나이다. 과거에 해마다 설이 가까워오면 윷놀이가 시작되고 정초에는 어느곳을 가나 윷놀이가 성행하였다.


윷은 그 크기나 재료에 따라 가락윷(장작윷), 밤윷, 콩윷, 팥윷 등으로 나누는데 어느 종류나를 물론하고 윷쪽은 네개이다. 가락윷은 길이 15~20cm, 직경 3~5cm정도의 곧고 둥근 나무 두개를 각각 절반씩 쪼개여 네가락을 만든 다음 배를 약간 불룩하게 하기 위하여 등과 배의 경계선을 얼마간 깎아낸다. 그것은 윷을 던졌을 때 윷쪽이 굴러서 엎어질듯하다가 젖혀지며 젖혀질듯하다가 엎어지는 변화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가락윷의 나무는 박달나무나 밤나무 그리고 싸리나무를 스는 것이 보통이다. 밤윷은 작은 밤알만한 크기의 나무쪼각으로 만든 것을 말하며 콩알이나 팥알을 절반씩 쪼개여 금을 그어 사용하는 윷을 콩윷 또는 팥윷이라 부른다.



윷쪽을 던지는 방법에는 보통 윷쪽이 사람들의 앉은 키보다 얼마간 높게 올라갈 정도로 던지거나 조그마한 공기따위에 넣어 휘두르다가 바닥에 휙 던지거나 또는 윷쪽을 손에 쥐였다가 두꺼운 종이로 만든 원주 같은 구멍안에 떨어뜨리는 방법 등이 있다. 이렇게 네개의 윷쪽을 던졌을 때 윷쪽 하나하나가 엎어지거나 젖혀지는데 윷 네쪽의 정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경우가 생긴다.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젖혀지면 ≪도≫, 둘이 엎어지고 둘이 젖혀지면 ≪개≫, 하나가 엎어지고 셋이 젖혀지면 ≪걸≫, 넷쪽이 다 엎어지면 ≪모≫라고 한다. 그런데 윷쪽을 던져 떨어진 윷쪽의 하나(혹은 두쪽)가 지정된 범위밖으로 나가면 ≪락판≫이라 하여 무효로 하거나 일정한 벌칙을 적용하기도 한다.


윷놀이는 두사람이 할수도 있지만 여러 사람이라도 둘로 나누어지는 수만 되면 편을 갈라서 놀수 있다. 그러나 보통 네사람이 서로 편을 갈라서 노는 것이 상례로 되고있다. 여럿이 할 경우에는 상대편과 한사람 건너씩 앉고 윷을 던지는 순서는 시계바늘이 도는것과는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윷을 친다.


윷놀이의 놀이방법은 윷판을 놓고 쌍방이 각각 윷을 던져나온 결과에 따라 말 4개를 전진시켜 최종점을 먼저 통과하는 편이 이기는것으로 되여있다. 이 경우에 말 하나가 출구(최종점)를 벗어나면 ≪한동≫했다고 하며 4동이 나면 이기는것으로 된다.


윷판은 말판 또는 말밭이라고도 부르는데 8절지 또는 4절지 정도의 넓이를 가진 종이나 판자에 선과 밤알만한 검은 점을 찍어서 만든다. 매개의 검은 점은 상대편과 자기 편 말이 머무는 곳인데 이것을 ≪밭≫이라고 한다. 윷판은 한쪽이 다섯밭씨로 성사각형의 20밭과 중앙을 정점으로 하는 x자형의 다섯밭씩 해서 도합 29밭이 있는데 밭의 이름은 지방에 따라 서로 차이나는것들이 있으나 보통 쓰이는 이름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말은 윷을 던져 나온 결과에 따라 전진시키게 되는데 이것을 ≪말을 쓴다≫고 하며 처음 윷을 던져 나온 결과대로 자기말을 처음으로 말판에 놓는 것을 보통 ≪말을 단다≫고 말하며 이미 달았던 말을 윷이 난데따라 움직일 때에는 ≪말이 간다≫고 한다. 말은 윷을 던져 ≪도≫가 되면 한밭, ≪개가≫되면 두밭, ≪걸≫이 되면 세밭, ≪쓩≫이 되면 네밭, ≪모≫가 되면 다섯밭을 가게 된다. 그런데 말이 윷판(말판)을 지나는데는 일정한 규정들이 있다. 이런 규정들은 여러가지 권한과 제약을 주므로 놀이는 한결 더 미묘해진다.


그중요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1)말판에서 말이 전진하는 길은 가까운 거리와 우회하는 거리 등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가까운 거리는 ≪모밭≫,≪송밭≫,≪쨀밭≫을 거쳐 ≪먹임밭≫으로 오는 길이다.  제일 우회하는 길은 ≪뒤모≫,≪찔도≫,≪쨀밭≫등을 지나 ≪먹임밭≫으로 오는 길이다. 첫번째 길은 12점이면 나지만 두번째 길은 17점이라야 난다. 그리고 가장 우회하는 길은 21점이라야 난다. 때문에 누구든지 말판을 쓸 때에는 가까운 길로 말을 몰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첫번째의 제일 가까운 거리를 취하려면 말이 일단 ≪모밭≫과 ≪방≫에 머물도록 윷이 나야 하며 윷판을 쓰는 작전계획이 짜져야 한다. 례하면 ≪걸밭≫에 자기 말이 있는데 다음에 ≪개≫가 나면 그 말이 ≪모밭≫에 오므로≪앞모토≫로 가는 방향을 취할수 있지만 만약 ≪걸≫이 나면 ≪모밭≫에 머물수 없으므로 아무리 ≪앞모토≫쪽으로 가고싶어도 못가고 ≪뒤모≫로 가서 우회하게 된다. ≪뒤모≫를 넘서선 말은 또 ≪뒤모≫로 가서 우회하게 된다. ≪뒤모≫를 넘어선 말은 또 ≪뒤꽂이≫에 일단 머물도록 윷이 나지 않으면 다시 ≪찔도≫의 방향으로 넘어서서 더 우회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앞모토≫의 방향으로 들어간 말도 ≪방≫에 일단 머물지 못하면 ≪방딴발≫쪽으로 오지못하고 ≪송윷≫쪽으로 우회하여야 한다.


2)≪모≫나 ≪쓩≫이 나면 그것이 다시 나지 않을 때까지 같은 사람이 련속 더 노는 특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이상 논 윷의 결과를 가장 쓸모있게 잘 리용할줄 알아야 한다. 례컨데 ≪모≫가 나서 다시 더 치였는데 다음에는 ≪개≫가 났다고 하면 이때 반드시 한말에다 다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이 가는데 유리하도록 두개의 자기 말에 나누어서 따로 쓸수도 있다.


3)자기의 말이 있는 밭에 남의 말이 나중에 가서 엎치면 자기 말은 잡히고만다. 이렇게 윷을 쳐서 남의 말을 잡은 사람은 윷을 한번 더 치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자기의 말을 빨리 전진시키는것만이 훌륭한 작전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잡으면 그만큼 상대편에 손실을 주면서 자기는 다시한번 윷을 더 치게 되는것이다. 상대편이 거의 이기게 된 최후단계에 가서 그 말을 잡으면 윷판의 형세가 뒤집혀져 지금까지 불리하던 편이 오히려 이기게 될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편의 말을 잡으려고 하면 윷이 무엇이 나야 되겠는가를 잘 타산하고 윷을 던지는데 기교를 부려야 한다. 여기서 무엇이 나야 잡겠는가를 따지는 것을 ≪진≫이라고 한다. 하여 ≪개≫가 나야 남의 말을 잡겠으면 ≪개진≫이라 하고 두 ≪모≫와 ≪걸≫이 나야 잡을수 있으면 ≪두모걸진≫이라 한다. 자기의 말판을 쓸 때에는 빨리 나갈 가까운 길도 보면서 또한 상대편에게 잡히지 않을 길도 고려해야 한다.


4)자기 말이 있는 밭에 또 자기 말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두말이 함께 전진할수 있다. 이것을 ≪굽는다≫, ≪볶는다≫고 말한다. 말을 ≪볶는≫것을 ≪석동문이≫라하며 네 말을 ≪볶는≫것을 ≪넉동문이≫라 한다. 이 ≪볶는≫문제를 가지고서도 작전에서는 여러가지로 머리를 쓰게 된다. 겨울에 어디를 가든지 볼수 있는 윷놀이는 매우 흥을 돋구어주는 오락으로서 흔히 밤을 새우군 한다. 윷을 치다가 목이 마르면 막걸리나 동치미국물을 마셔가며 윷을 던지면서 신명나는 소리를 하거나 말판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는 모습들은 우리 민족의 담백하고 검소한 생활의 일각을 보여주는 흐뭇한 정경이라 하겠다.


예전에 서울이나 시골에서는 윷놀이대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우승한 사람 또는 우승한 편에게는 광목따위를 푸짐하게 상으로 주었다.


윷놀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알수 없으나 옛문헌에 의하면 삼국시기에 벌써 우리 조상들이 즐겨놀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신라이전부터 대개 정초에 농민들이 편을 갈라 한편은 산농이 되고 한편은 수향이 되여 윷놀이로 승부를 겨뤄 산농이 이기면 고지의 농사가 잘되고 수향이 이기면 저지의 농사가 잘된다는 판단을 내리는 오락으로 놀아온것이라고 말하며 어떤 학자들은 부여종족시대에 다섯가지 가축을 다섯 부락에 나누어주어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윷놀이가 기인된것인데 그래서 ≪도≫를 돼지, ≪개≫를 개, 또는 닭,≪윷≫을 소,≪모≫를 말에 비유한것이라고 추단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윷놀이가 백제의 관직명인 주가, 구가, 우가, 마가, 대사 등에서 유래한것으로 보고있는 것이라 간주하고있다.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어느 옛날 한 장수가 적과 싸우던중에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윷놀이를 창안했다거나 윷판은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 결전장인 해하의 진형을 본뜬것이라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상술한 설법들중에서 어느것이 옳은가를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




씨  름


놀이유래:


씨름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남성들이 즐겨온 민속놀이로서 지금에는 민족체육경기의 한 종목으로 되고있다.


씨름이란 두사람의 힘겨루기로서 심판의 신호에 따라 서로 마주본후 제마끔 힘겨루기로서 심판의 신호에 따라 서로 마주본후 제마끔 한쪽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힌 자세를 한 다음 오른손으로는 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오른쪽다리를 잡아쥔 동시에 일어나서 힘과 손발의 기술을 발휘하여 먼저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상대방의 무릎우의 어느 한 부분을 먼저 땅에 닿도록 하면 이기게 된다.


평소에는 상술한 방식대로 하지만 씨름대회 같은 큰 경기에서는 허벅다리에 샅바(쏙새 또는 살태라고도 함.)를 걸고 한다. 샅바를 쓰는 것은 근래에 생겼는데 샅바를 어느쪽의 허벅다리에 매는가 하는데 따라 ≪왼씨름≫과 ≪왼씨름≫과 ≪오른씨름≫으로 나뉘여진다. 말하자면


≪왼씨름≫은 샅바를 오른쪽허벅다리에 걸고 왼손으로 상대편 왼쪽다리에 건 샅바를 잡고 오른손으로 상대편의 허리샅바를 잡고 오른쪽어깨를 서로 맞대고 하는 씨름이고 ≪오른씨름≫은 이와 반대로 하는 씨름을 말한다. 평소에는 샅바를 쓰지 않고 씨름을 하는데 이런 씨름을 지방에 따라 ≪민둥씨름≫,≪네굽씨름≫,≪허리씨름≫,≪통씨름≫,≪장난씨름≫이라고 이른다.



씨름의 기술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바 그가운데서도 안걸이, 밭걸이, 배자기, 둘러치기, 무릎치기, 꼭뒤잡이…등이 중요한것으로 된다. 안걸이는 상대편의 가랑이안으로 발을 넣어 걸어넘어뜨리는 기술이다. 이것은 ≪안니기≫라고도 하는데 안걸이를 건 사람의 힘이 약하면 안걸이를 건 사람이 도리여 넘어지고 만다. 밭걸이는 상대편의 두다리밖으로 걸어넘어뜨리는 재주인데 이를 ≪밭니기≫또는 ≪덧걸이≫라고도 한다. 배지기는 자기 배를 상대방의 배에 바싹 붙이면서 상대방을 번쩍들어서 메여치는것으로서 ≪배치기≫라고도 한다. 둘러치기는 상대방을 빙빙 돌리다가 메여치는것이며 무릎치기는 무릎힘이 없어보이는 순간을 타서 상대방의 무릎쳐서 넘어뜨리는 기술이다. 꼭뒤를 잡아 쓰러뜨리는 기술을 말한다. 씨름은 바로 이와 같은 여러가지 기술을 재치있게 리용하면서 승부를 겨루는것이다.


씨름은 평상시에 넓은 마당이나 개천가의 백사장이나 또는 잔디밭에서 하는 것이 보통이나 운동경기때에는 운동장에 씨름판을 만드는 것이 관습으로 되고있다. 씨름판은 일반적으로 모래를 두껍게 깐 원형으로 하며 모래가 없는 실내에서는 모래 대신 두툼한 큰 방석을 깔고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5월단오, 팔월추석을 비롯한 명절이거나 농한기에 씨름판이 흔히 벌어졌다. (지금은 주로 운동대회때에 씨름이 있게 된다.) 지난날 씨름경기를 할 때에는 씨름군들의 나이와 힘에 근거하여 ≪애기씨름≫,≪중씨름(포씨름이라고도 함.)≫,≪상씨름≫등 등급을 나누어 하였으며 경기는 대개 ≪애기씨름≫부터 시작하였다.


씨름경기는 3회전에서 두번 이기면 우승자로 된다. 최후의 우승자를 옛날엔 ≪장군≫ 또는 ≪판막음≫이라고 불렀다. 한판의 경기시간은 지방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승부가 나지 않으면 2분씩 연장하여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한다. 한판의 경기가 끝나면 1분간 휴식할수 있으며 장외의 지도를 받을수 있다. 경기에서 두 선수가 동시에 넘어졌을 때에는 무승부로 한다. 경기에서 두 선수가 동시에 넘어졌을 때에는 무승부로 한다. 두 선수중 어느 일방이 경기를 계속할 것을 거절하면 거절한 선수가 진것으로 친다. 부상당한 등 원인으로 경기를 계속할수 없거나 선수가 검록원의 통지를 받고도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에는 모두 진것으로 한다. 만약 두 선수가 모두 상하여 경기를 계속할수 없게 되였을 때에는 기권으로 인정한다.


재래로부터 씨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상으로 황소를 주는 것이 관례로 되고있다. 이것은 지난날에 황소가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되여있었고 또 씨름이 생산과 밀접히 결부되여있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씨름경기의 주최측에서는 상품으로 줄 황소를 미리 사다가 씨름판에 매여둔다. 씨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황소를 상으로 받은 다음 황소를 타거나 황소를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씨름판을 돌며 관중들은 환성을 올리는 것이 통례로 되고있다.


씨름은 팔과 다리 힘을 포함한 전신운동으로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 인민들은 이것을 즐겼다. 기원 4세기말의 고구려무덤으로 확정된 씨름무덤에는 씨름하는 장면을 생동하게 그린벽화가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큰 나무그늘밑에서 두 힘장수가 웃통을 벗어던지고 맞붙어서 안낚시를 걸것인가 아니면 덜미잡이를 하여 재치있게 넘어뜨릴것인가 하고 틈을 노리고 있는 긴장한 장면을 엿볼수 있다. 씨름군들의 옆에는 젊어서는 씨름개나 했음직한 지팽이를 짚은 늙은이가 심판을 서고있다. 이 벽화는 우리 민족의 씨름이 고구려때에 벌써 널리 퍼진 민족체육경기중의 한 종목이였음을 실증하여주고있다.


씨름은 고구려시기뿐만아니라 고려나 리조 시기에도 성행하면서 민간놀이는 물론 무사들의 필수종목으로 되였다. 고려때에 씨름판명수를 ≪용사≫라고 불렀으며 국가에서 씨름판을 벌리고 왕이 열병의 뜻으로 나가 보군하였다. 리조초기에는 씨름 잘하는 사람을 ≪력사≫라고 일렀으며 왕을 호위하는 ≪갑사≫를 씨름군가운데서 선발하기도 하였다. 리조중기와 후기에 이르러 씨름은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였다. 리조중기와 후기에 이르러 씨름은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였다. 18세기의 문헌인 ≪경도잡기≫는 당시 서울의 단오풍습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서울의 소년들이 남산기슭에 모여서 씨름을 한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마주 무릎을 꿇고 저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또 저마다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다리를 잡은 다음 일시에 일어나면서 서로 들어메치는데 안낚시, 바깥낚시,덜미잡이 등 여러 수가 있다.≫고 기사하였고 반세기후에 나온 문헌≪동국세시기≫는 이를 더 보충하면서 ≪힘이 세고 손이 민첩하여 여러 판을 해서 다 이긴 사람을 <도결국>(판막음)이라 한다… 단오날 이 놀이가 매우 성하여 서울, 시골할것없이 많이 한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사랑속에서 전래된 씨름은 오늘도 자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 인민들이 즐겨온 씨름에는 여러가지 흥미있는 설화들이 따르고있는데 한가지를 들어본면 다음과 같다.


예날 굴암사에 힘이 센 한 중이 살고있었다. 그 중은 늘 씨름을 해서 자기를 이길자가 세상에 없다고 장담하였다.


어느날 한 손님이 말에다 미역을 싣고가는 길에 해가 저물어 그 절에서 하루밤 묵게 되였다. 중은 손님의 람루한 차림새를 보고 손님에게 씨름하기를 청하고 만약 자기가 지면베 15필을 손님에게 주고 자기가 이기면 미역 한바리를 자기에게 내놓으라고 내기를 걸었다. 그러나 손님은 중의 청을 거절하며 자기는 씨름할줄도 모르는데다가 먼길에 배도 고프로 몹시 피곤하여 응할수 없다고 했다.


이튿날 손님이 길을 떠나려 하자 중은 손님에게 ≪내가 무서워 감히 덤비지 못하는 겁쟁이니 내 오줌물에나 데죽으리라≫라고 하며 희롱하였다. 손님은 이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어 말을 나뭇가지에 매놓고 가던 길을 멈추고 중에게 ≪내가 너와 힘을 겨루려 하지 않는데 나더러 오줌물에 데죽으리라 하니 불쾌하기 그지없다. 네 원대로 겨루어보자. 내 다리를 안쪽으로 걸겠는가? 바깥쪽으로 걸겠는가? 아니면 둘러내겠는가? 들어보겠는가? 네 재주껏 해보아라≫하고 한손으로 중의 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휘여감은후 중을 번쩍 들어 어깨우로 쳐드니 중은 손님의 머리우에서 버둥거리였다. 손님은 말하기를 ≪내가 지금 너를 땅바닥던지려 하는데 네가 당장 죽을테냐 아니면 두어달 고생하다가 죽을테냐? 네 소원대로 해주마≫하고 꾸짖으니 기가 꺾인 중은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손님은 ≪내 너를 용서하여 당장 죽게 하리라≫고 말하고나서는 중을 돌주추사이로 던지니 어께가 반은 으스러졌다. 손님은 중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에게 까닭없이 욕먹은 것을 푼것뿐이다. 베 15필은 욕심내지 않는다≫하고 길을 떠났다. 그후 몇 달 있다가 그 중이 죽었다고 한다.




숨박곡질


놀이유래:


숨박곡질은 아무 기구도, 남녀구별도 없이 가장 기동서있고 즐겁게 놀수 있는 전통적인 어린이들의 놀이다.


숨박곡질은 술래잡기 또는 술래놀이라고도 한다. ≪술래≫라는 말은≪순라(巡邏)≫에서 온것인데 봉건사회에서 경비를 위해 순찰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숨박곡질이 아주 오랜 시기부터 전해오는 놀이임을 대뜸 짐작할수 있다.


숨박곡질은 여러 아이들가운데서 한 아이가 술래가 되여 숨은 아이를 찾아내는 놀이로 그에게 잡힌 아이가 다음 술래가 되고 잡지 못한 때에는 거듭 술래가 된다.


숨박곡질은 지방에 따라 노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보편적으로 류행된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한 마을에 있는 여러 아이들이 일렬로 늘어선 다음 ≪차례세기≫로 마지막에 남은 아이가 술래로 되거나 여러 아이들중에서 가위, 바위, 보로 진 사람이 술래가 된다. (술래를 ≪범 ≫이라고도 함.)


술래가 경정되면 그 술래가 기둥 또는 나무나 벽 등 적당한 곳을 진으로 정하고 그곳에다 얼굴을 대고 손으로 눈을 가린채 하나, 둘, 셋…열까지 세게 된다. 그동안 다른 아이들은 제가끔 재빨리 흩어져서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숨는다. 술래는 수를 열까지 다 센 다음 (술래는 다른 아이들이 숨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수를 될수록 빨리 센다.)얼굴을 들고 눈을 뜨고 일어나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숨은 아이들을 찾는다.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게 되면 그 자리에서 인츰 찾은 사람의 이름을 부름과 함께 ≪저기 있다≫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는 술래가 재빨리 자기 진지에 돌아와서 손이나 발을 진에 댄다. 그러면 발견된 아이는 ≪죽는것≫으로 된다. 그러나 발견된 아이가 술래보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와서 손으로 진을 짚거나 몸을 진에 대기만 하면 그 아이는 비록 발견되였다 하더라도 ≪살아≫나게 된다. 술래는 한 아이를 찾고마는 것이 아니라 숨은 아이들을 다 찾아내야 한다. 술래가 숨은 아이들을 찾을 때 잡힌 아이들과 또 제대로 살아난 아이들은 모두 진 주위에 모여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범장군 나온다



솔개가 떴다


병아리 숨어라


에미 날개밑에


애기 다리밑에 꼭꼭 숨어라


나래미가 나왔다


  


꼭꼭숨어라


멀리카락 보인다


쥐새끼가 물어도


꼼짝말고 있어라


 



 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 함께 손벽을 치며 숨은 아이들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 함께 손벽을 치며 숨은 아이들을 응원한다. 그러면 술래는 초조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은 아이들을 찾아다닌다. 숨은 아이가 술래 모르게 달려와서 먼저 진을 짚으면 그도 ≪살아≫난다. 이렇게 해서 숨었던 아이들이 다 나오면 숨박곡질은 한판이 끝나는것으로 된다. 잡힌 아이--≪죽은≫아이가 다음 판에서 술래를 하고 (잡힌 아이들이 많으면 그들끼리 다시 가위, 바위, 보로 술래 한사람을 뽑는다)잡힌 아이가 없이 다 ≪살아≫났을 때에는 원 술래가 계속 술래질을 하게 된다. (혹은≪차례세기≫ 로 다시 술래를 정하기도 한다.)


숨박곡질은 대낮에도 하지만 대개는 어스름한 저녁에 많이 한다. 이런 숨박곡질에서 술래는 갖은 방법을 다해 숨은 아이들을 많이 잡으려고 하며 숨은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술래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나려 한다. 지난날 우리 민족의 어린이들은 명랑하고 쾌활하게 이런 놀이를 하면서 지혜와 기민, 용감성을 키웠다. 지금도 이런 놀이는 농촌에서 어린이들에 의해 계승되고있는것이다.




줄당기기


놀이유래:


줄당기기는 조선민족의 민속놀이가운데서 승부를 겨루는 내기중 인원이 제일 많이 동원되는 용감하고 웅장한 장관을 이루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주로 남자들이 하는것인데 집단의 지혜와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적이다.


15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18세기에 나온 ≪화계집≫, 19세기에 출판된 ≪동국세시기≫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이 전하는데 의하면 중당기기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집거하는 많은 지방들에서 성행하여온 대중적인 오락행사이다.


과거에 우리 민족 인민들은 주로 음력 정초(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 줄당기기를 성대히 진행하였다. 줄당기기는 흔히 동네를 단위로 해서 편을 가르는 것이 상례로 되였었다.


줄당기기는 처음에 대개 12~13세, 17~18세기되는 청소년들이 두편으로 갈라져 작은 줄당기기를 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는데 이것을 ≪애기줄당기기≫라고 부른다. 아래우 두 동네의 청소년들이 세배가 거의 끝날무렵인 정월 3~4일경부터 시작하여 낮에 각각 자기 동네의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벼짚을 얻어모아다가 줄을 드려서 초생달이 뜰무렵에 두 동네의 경계에서 줄당기기(애기줄당기기)를 한다. 줄에는 ≪수줄≫과 ≪암줄≫의 구별이 있는데 량편은 각각 그중의 어느 한줄을 준비한다.≪암줄≫과 ≪수줄≫을 련결시킬 때는 줄끝의 암고리(암줄)에 숫고리(수줄)를 집어넣고 여기에 비녀목을 꽂아 고정시킨다. 줄을 당길 때에는 기세를 높여 ≪우역사!≫,≪우역사!≫하는 우뢰와 같은 함성을 올린다. 승전한 편 청소년들은 자기들이 드린 줄과 상대편으로부터 빼앗은 줄을 한데 합쳐서 어깨에 메고 ≪우야 허훠 억술레!≫라고 높이 웨치면서 자기 동네를 돌아다닌다. 이것은 자기들의 승전을 동네에 보고하는 동시에 래일의 더 큰 승전을 위해 더욱 많은 지원을 하여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긴 편 동네 어른들은 이 승전을 무한히 기뻐하면서 짚과 기타 자재들을 더 많이 준비하여준다. 패전한 동리어른들도 물론 그대로 있지 않는다. 이들은 전날의 패전을 승전으로 바꾸도록 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짚을 준비하여주며 고무추동한다. 그런데 패전한 편의 원줄은 벌써 상대편이 로획하여갔고 상대편은 그것을 다시 새줄에 합쳐서 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날에 진 편이 패전을 만회하려면 적어도 지난번 줄의 크기의 2배이상의 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이러한 행정이 7~8차이상 반복되는데 매번 줄의 크기는 2를 공비로 하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 줄의 굵기가 이렇게 증가되는 동시에 량편에 동원되는 인수도 역시 그렇게 늘어난다. 이러한 애기줄당기기는 대개 정초 12~13일경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에 두 동네의 풍물(농악)들이 매일 저녁 동원되여 전투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에로 이끌어간다. 정월초생달이 하루하루 살이 불어갈수록 밤마다 두 동네의 한길에서는 구성지게 먹이는 사설에 따라 아이들의 야무진 목소리로 받는 ≪쾌지나 칭칭나네≫소리가 밤가는줄 모르게 드높아진다.


큰줄당기기는 동네를 단위로 편을 가르기도 하고 판이 클때에는 몇 개 동네를 단위로 해서 편을 뭇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도 편갈이는 물론 아래우 두 동네를 각각 핵심으로 한다. 큰줄당기기는 애기줄당기기때와는 달리 수백명 지어는 수천명이 참가하기 때문에 줄도 대단히 길고 굵게 드린다. 보통원줄의 직경은 50~60cm,길이 300~400m나 되며 거기에 다 사람들이 쥐고 당길수 있도록 1m, 간격으로 직경 9~10cm, 길이 3~4m의 작은 줄을 량옆에 수백개 드러맨다. 줄을 당기다가 끊어지면 그 줄을 뜨린 편이 지게끔 되여있어 사람들은 줄을 든든히 드리기 위하여 별의별 수를 다 쓴다. 줄의 재료는 보통 벼짚이나 칡, 삼 같은 것을 적당히 비례로 섞지만 드리는 방법은 두 편이 다 엄격히 비밀에 붙인다. 줄이 다 마련되면 경기가 있기 하루전에 량편이 각각 동줄을 가득단 괴물과 같은 큰줄을 겨루기를 할 넓은 들판에 내다가 일직선으로 늘이고 대개 1~2m가격으로 긴 지레대를 두개씩 엇비슷하게 묶어서 줄을 괴여놓는데 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큰줄당기기는 애기줄당기기와는 달리 대낮에 한다. 큰줄당기기를 하는 정월 대보름날 아침은 자못 흥성거린다. 이날 아침부터 량편에 속한 수십개 동리의 농민들이 각각 농악대를 앞세우고 사방으로부터 줄당기기경기장을 향하여 모여든다. 대개 농악대의 선두에는 ≪농사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가 서있고 그뒤로 울긋불긋한 농악복색들을 차린 수십명의 새납, 꽹과리, 징, 장구, 대고, 소고 연주자들과 함께 무동(어른의 어깨우에서 춤추는 소년)이 이 농악에 따라 춤을 추면서 천천히 행진하여 온다. 이 농악대는 줄당기기장소에서 적당히 떨어진곳까지 와서 각각 자리를 잡고 경기가 진행될 때까지 장시간 쉴새없이 농악놀이를 계속한다. 부근에 모인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은 줄당기기가 시작되는 시간을 기다린다.


가장 고조된 분위기속에서 한낮이 되여오면 량편의 장정들이 늘어서서 각기 자기 줄을 메고 (줄을 메는 방법은 줄을 괴였던 긴 제레대들을 뽑아 가로 줄을 받쳐서 어깨에 멘다.)경계선까지 느릿느릿 다가와서 서로 줄을 맞잇는다. 이렇게 준비가 다되면 량편 편장(지휘자)의 신호로 당기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되면 요란하던 모든 잡음들이 일시에 뚝 그치고 오직 수천 군중들의 ≪우역사! 우역사!≫하는 소리만이 중탁하게 울린다. 악기중에모든 새납, 징, 꽹과리 등 일체 쇠소리는 다 그치고 장구, 대고, 소고만이 수십, 수백명의 모든 정력을 다 짜내듯이 극도로 긴장하게 울린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육중한 큰 줄은 들렸다 내렸다 하며 끌려오기도 하고 끌려가기도 한다. 만일 한편이 계속 끌려가기 시작하면 구경군들이 달려나와 도와준다. 지어 구경하던 부녀자들도 앞치마에 돌을 가득 담아가지고 나와 줄에 매달린다. 이리하여 처음 불리하던 편에 오히려 더 많은 인원이 생기고 정세가 급전하여 약자가 강자로 전환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다만 어느 한편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편에도 발생하여 이런 현상이 몇번 반복되는 과정에 그날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이러저러한 정도로 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줄당기기의 결정적 승부에 직접 참가하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엄격한 규정(선수외에는 참가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으며 또 이 규정을 리행하기 위하여 량편이 각각 많은 감시인원을 파견하여 감시하지만 이러한 조치들도 군중이 움직이는 그러한 추세를 도저히 저지할수 없는것이다.


승부가 나서 이긴 편은 애기줄당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줄은 물론 진 편의 줄까지 메고 농악을 울리면서 승승장구로 마을에 돌아온다. 이긴 편은 승리감에 흥이 나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긴 편의 마을은 그해에 풍년이 들고 무병, 무재한다는데서 더욱 기꺼워하는것이다. 또한 이긴 편의 줄을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뿌리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어부가 이긴 편 줄을 한토막 배에 싣고가면 배는 폭풍을 만나지 않으며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속신이 있어 이 줄을 어부들이 돈을 주고 사가기도 하였다.


장쾌하고 신바람나는 이 대중적인 놀이는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속되고있으며 민족경기의 한종목으로 발전되고있다.



바람개비놀이


놀이유래:


전하는데 의하면 오랜 옛날부터 음력 정월 보름날이 되면 어린이들이 《보름벼가리》에 바람개비를 다는 놀이를 경쟁적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보름벼가리》란 한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벼, 보리, 조, 강냉이 등의 이삭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묶은것이였는데 거기에 큼직한 바람개비를 달아서 대문곁에 세우고 바람결에 따라 그것이 도는 것을 보며 즐기는 놀이를 말합니다.


또한 어린이들은 바람개비를 가지고 뛰여다니면서 그것을 돌리며 재미나는 놀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망차기


놀이유래:


망차기놀이는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놀이로서 남녀가 다 놀았다는 말도 있으나 소녀들의 놀이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고려시기부터 여러 지방에서 놀아온 흥미있는 대중오락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이 놀이를 평안도지방을 비롯하여 북쪽지방에서는 망차기라하고 중부이남지방에서는 돌차기 또는 말차기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망차기라는 이름은 놀이에 쓰는 돌을 망, 마우 또는 말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였습니다.




바둑


놀이유래: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입니다. 바둑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창조되여 전해오다가 세나라시기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바둑은 오래전에 벌써 이웃나라들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바둑은 한때 군사가들이 전술을 련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애용되였다고 합니다.


바둑놀이는 고려시기에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는데 국제경기에서도 뛰여난 솜씨를 보여 명성을 날렸다고 합니다. 13세기중엽에 곽희봉, 조정통이라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바둑원정까지 간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바둑판을 가볍고 바둑알을 놓는데 감촉이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둑틀안에 쇠줄을 늘여 바둑알을 놓을 때 치렁치렁 울리게 하여 흥취를 돋구게 하였습니다.


흰바둑알은 조개껍질로 만들고 검은 바둑알은 검은 돌을 갈아서 만들었습니다.



바둑


놀이유래: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입니다. 바둑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창조되여 전해오다가 세나라시기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바둑은 오래전에 벌써 이웃나라들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바둑은 한때 군사가들이 전술을 련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애용되였다고 합니다.


바둑놀이는 고려시기에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는데 국제경기에서도 뛰여난 솜씨를 보여 명성을 날렸다고 합니다. 13세기중엽에 곽희봉, 조정통이라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바둑원정까지 간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바둑판을 가볍고 바둑알을 놓는데 감촉이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둑틀안에 쇠줄을 늘여 바둑알을 놓을 때 치렁치렁 울리게 하여 흥취를 돋구게 하였습니다.


흰바둑알은 조개껍질로 만들고 검은 바둑알은 검은 돌을 갈아서 만들었습니다.


 


돌팔매


놀이유래:


돌팔매놀이는 옛날부터 우리 인민들의 전통적인 정월명절과 단오명절 놀이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돌팔매놀이를 옛날에는 석전 또는 척석회 즉 돌로 싸우는 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이는 싸움을 본따서 시작한 무술단련의 성격을 띤 놀이였습니다.


돌팔매놀이는 조선 여러 지방에서 많이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규모에 있어서 평양의 놀이가 성대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있습니다.


돌팔매놀이는 무예를 닦기 위하여 해마다 대동강에서 진행한 우리 인민들의 년중행사의 하나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던 것이 이 놀이를 땅우에서 놀게 되면서부터 그 이름이 석전이라고 유래된것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전》에 의하면 해마다 정초에는 패수에서 패를 지어 놀았는데 왕이 이를 구경하였다고 합니다.


이 놀이는 그후에 실지 전투에 적용되면서 우리 나라 각 지방에 널리 펴져 후세에 전해져왔습니다.


놀이는 지방에 따라 시기와 그 이름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편쌈》,《편전》이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평양에서는 내성밖 넓은 들판에서 놀았는데 남문일대를 《가막골》또는 《선윤패》라 하고 서문일대를 《서문패》 또는 《감사패》로 나누고 섣달그믐께부터 시작하여 대보름날까지 하여 승부를 갈랐다고 합니다.


고려에서는 나라에 《척석군》이라고 하는 돌팔매부대를 두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후 세종왕은 한때 없어졌던 돌팔매부대를 새로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리조초기의 돌팔매놀이는 5월단오날에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돌팔매놀이는 200발자국을 사이두고 서로 기발을 꽂아놓은 다음 팔매군들끼리 싸워 서로 기발을 빼앗아오는 방법으로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돌팔매놀이는 나라를 지키는데서 의의가 컸습니다.


1510년에는 왜구가 경상도 3포(부산포, 제포, 영포)등지에 침입하여 살육과 략탈을 일삼았습니다.


이때 안동, 김해의 돌팔매군들이 용감히 떨쳐나가서 돌팔매질로 앞에 나타나는 놈마다 명중시켜 적이 한발자국도 기여들지 못하게 하였고 끝끝내 원쑤를 물리치고야 말았다고 합니다.


또한 임진조국전쟁때 행주산성싸움에서도 돌팔매로 원쑤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습니다.


그때 적들이 수적우세를 믿고 계속 달려들자 아군에게는 화살과 탄환이 부족되였습니다. 그러자 성내 녀성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 용사들에게 가져다주었으며 용사들은 그것으로 달려드는 놈들을 때려잡았습니다.


왜적들이 수차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날랜 우리 용사들은 돌팔매로 어김없이 원쑤들을 쓸어눕혔습니다.


이렇게 되어 임진조국전쟁사이 길이 전해지는 유명한 행주산성싸움은 승리하고 행주치마라는 이름까지 나왔습니다.


돌팔매놀이는 아무때나 하지 않았으며 일단 놀이를 하는 경우에는 엄격한 질서에 따라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돌팔매놀이는 우리 선조들의 애국적이며 용감한 기질을 전해주는 민속놀이의 하나입니다.




달맞이


놀이유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정월 대보름날 저녁의 달을 일년중 제일 좋은 달이라고 하여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저녁이 오면 달맞이를 하는 습속이 있다.


대보름날 저녁에 마을사람들은 달맞이하기 위하여 추위도 무릅쓰고 홰불을 켜들고 산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동쪽하늘이 붉어지고 밝은 대보름달이 솟아오를 때 저마다 홰불을 땅에 꽂고 두손을 모아 합장하며 달에게 절을 하고 자기의 소원을 빈다. 대보름날 달은 될수록 남보다 먼저 보는 것이 길하다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산에 올라간다. 먼저 달을 본 사람은 년운이 좋아서 총각은 장가를 가게 되고 처녀는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한다. 또한 농사군들은 달맞이할 때 달빛이나 달의 위치로 그해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달빛이 희면 장마가 지고 붉으면 가물어 농사에 피해를 준다고 하며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들 징조이고 북쪽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달맞이를 할 때 농촌마을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였는데 그 일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렴)가세가세 달맞이가세


높은산으로 달맞이가세


가세가세 달맞이가세


일보이보 다리를 밟아


천리만리 걸어걸어


일월이라 대보름날


일년중에 으뜸일세



    (전렴)달모습을 살펴보자


금년시절 어떠한가


달아달아 밝은달아


우주강산에 비친달아



    (전렴)상원만 달밝은데


동리처녀 한데모여


소원성취 발원하며


춤과 노래로 즐겨보세



    (전렴)달아달아 밝은달아


온누리를 비친달아


저달맞이 노래하며


밤새도록 즐겨볼가




농악놀이


놀이유래:


 농악놀이는 예로부터 농민들사이에서 전승되여온 민족적 색채가 짙은 종합적인 놀이이며 농촌의 가장 대표적이고도 군중적인 오락이다. 농악놀이는 한두사람이 방안에서 노는 놀이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넓은 뜰이나 들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뛰며 달으며 노는 것이 특징이다. 멋지고 재미나고 신나고 힘이 솟는 농악놀이는 씩씩하고 활달하고 창조적인 우리 민족 인민들의 기질과 풍격을 구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농악놀이는 크게 농악무, 농악회, 농악노래, 농악대 등으로 구성되고있다.



농악무에는 ≪마당돌이≫와 ≪구정놀이≫가 있다. ≪마당돌이≫는 전반 사람이 대렬을 지어 둥그렇게 돌며 가지가지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원무이다. 가락에 따라서 각각 제멋대로 즉흥무도 추며 둘씩셋씩 짝을 지어 끼리끼리 대무도 춘다.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들쑥날쑥 서로 엇갈리기도 한다. 잡이들이 돌거나 돌려서서 연주할 때에는 탈을 쓴 잡색들이 가운데로 들어서서 각각 제격의 춤을 춘다. ≪구정놀이≫는 ≪영산놀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잡이나 잡색들이 각기 개인의 연기를 뽐내는 독무, 대무 등이다. 이런 독무, 대무 등은 각 개인의 연기수준을 비기는 경연과 다름없는 놀이이고 설장구는 장구장이들의 놀이이다. 법고놀이는 북잡이들의 놀이며 소고놀이는 소고잡이들의 놀이이다. 이런 놀이들에서는 한사람씩 나와서 단독 연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단독 연기자가 지휘자로 되여 자기가 속한 잡이대렬을 이끌고 대렬무를 창조지휘하는 것이 통례이다.


농악회는 극회적인 놀이이다. 전반 사람이 대오를 짓고 연무하는 것은 ≪마당돌이≫와 같으나 장단만 맞추어서 마음대로 추는 군무와는 달리 대렬무의 형식으로 노는 놀이이다. 이것은 ≪진굿≫,≪문잡이≫, ≪도적잡이≫,≪허허굿≫,≪노래굿≫,≪풍류굿≫ 등과 잡색의 탈놀이로 이루어진다. ≪진굿≫에는 ≪모란진≫,≪국화진≫, ≪아자진≫,≪을자진≫등이 있는데 뛰여닫는 분렬행진으로 군대가 진을 치고 훈련하는 것을 본딴 놀이이다. ≪문잡이≫는 두 군사가 진을 치고 훈련하는 것을 본딴 놀이이다. ≪문잡이≫는 두 군사가 관문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것을 내용으로 한것으로서 령기로 문을 세우고 두편의 농악대가 서로 옥신각신하며 오르는 양을 하는 놀이이다. ≪도적잡이≫는 이름그대로 도적을 잡는 것을 내용으로 한 놀이이다. ≪탈놀이≫는 잡색의 우두머리인 총쟁이가 놀이를 지휘한다. 지방에 따라 인물과 인원수가 같지 않으나 봉산탈놀이, 강령탈놀이와 모두 비슷하다. 다만 농악탈놀이는 간단하며 장황한 대사가 없이 춤이나 너름새로만 그 내용을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모두가 량반이나 중의 추태 또는 비행을 폭로하고 풍자, 야유하는 내용으로 되여있는 것은 다른 탈놀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농악탈놀이에서는 거문고, 가야금, 당비파 반주가 아니라 타악기반주인만큼 동작이 강하고 억세며 사건이 길지 않고 극히 짧으면서도 빠른 것이 특징적이다.


농악노래는 농악놀이에 따르는 노래로서 일하며 부르는 ≪상회소리≫,≪만두레소리≫와 같은 민요(농사와 관련된 민요)도 있고 기타 노래도 있다. 농악노래는 일정한 자리에 서서도 부르고 행렬중에서도 부르는데 주악이 그치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그치면 주악을 계속하기도 하며 징소리는 내지 않고 북장구와 가볍게 울려주는 꽹과리가락의 반주로 부르기도 한다. 한사람이 선소리를 멕이면 군중이 받는 화창도 있고 일제히  함께 부르는 제창도 있다.


농악기는 타악기를 중심으로 하는데 주로 꽹과리(쇠), 징, 장구, 북, 소고 등이 있다. 농악대는 주요하게 기수, 총각, 장구, 북, 소고 등이 있다. 농악대는 주요하게 기수, 총각, 대방, 잡이, 잡색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기수(부락의 상징인≪농사천하지대본≫이 라고 쓴 농기, ≪령≫자를 쓴 령기를 든 사람)에 2명, 군률을 수호하는 위엄으로 내세운 총각, 대방에 2명이 있으며 잡이는 그 수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꽹과리를 치는 쇠잡이가 4~5명 , 징수(징을 치는 사람) 한두사람, 장구잡이 4~5명, 북잡이 5~6명, 소고잡이 7~8명 정도로 되여있다. 잡색에는 초쟁이(포수), 량반광대, 할미광대, 각시광대, 창부(남자광대) 각각 2명, 비리쇠는 보통 1명을 두나 지방에 따라 그 수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농악놀이에서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 농악놀이의 지휘자가 되는데 이를 상쇠라고 한다. 상쇠는 항상 대렬의 선두에 서서 악대의 진영을 일렬종대, 원형 등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시키며 악곡의 변화도 상쇠의 손에 달린다. 상쇠는 머리에 상모를 단 전립(벙거지)을 쓴다. 상쇠는 상모를 앞뒤로 흔들기도 하고 뱅뱅 돌리기도 하여 재주를 부리며 춤을 추는데 이것을 상쇠놀이라고 말한다. 농악대의 기수, 기타 잡이들도 전립을 쓰기는 하나 많은 경우에는 아름답게 장식한 종이고깔을 쓴다. 잡이들은 붉은 마고자에 누른색, 흰색, 검은색의 끝동을 소매에 달아 입고 남색허리띠를 가슴에 눌러 띠여 뒤로 잡아매고 가지가지 색갈의 무명주 온폭 드림을 구색을 맞춰 세폭씩 뒤들에 매달아 드린다. 잡색들은 각각 제특징대로 탈을 쓰고 옷차림을 한다.


예전에 농악놀이는 모내기, 김매기 등 농경작업을 할 때 벌어졌을뿐만아니라 정초, 단오, 백중, 추석 등 명절날이나 기타 집단적행사, 유회, 오락에서도 거행되였으며 매구(섣달그믐날 밤에 지난 1년동안의 부정한 것, 불길한것을 농악으로 써 다 돌아내고 깨끗이 털어씻고서 복스러운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나 지신밟기 등 무속적행사에서도 벌어졌다. 이렇듯 군중이 모이는 곳에서는 농악놀이가 벌어졌으며 농악이 울리는 곳에는 으레 농악놀이가 따르기 마련이였다. 그러나 이가운데서도 모내기나 김매기때에 작업에서 오는 피로를 덜고 작업효률을 높이기 위한 농악놀이가 제일 우리의 이목을 끈다.


모내기나 김매기철에 같은 두레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마을 ≪령자≫님 또는 상쇠잡이집 마당에 모인다. 그들은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쓴 농기를 장대에 달고 꿩장목을 그 꼭대기에 꽂아서 마당앞에 내세운 다음 (룡을 그린 기발을 내걸기도 함. )그 농기를 중심으로 농악놀이를 한다. 한바탕 마음껏 뛰놀다가는 농기를 앞세우고 논두렁길이나 들판길을 따라 한줄로 서서 꽹과리, 북, 징 등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농부가의 가락에 맞춰 마구잡이춤을 추며 또는 아이를 어깨에 올려 춤을 추게 하고 껑충껑충 멋을 부리면서 일터로 나간다. 일터에 이른후 논두렁이나 밭머리에 농기를 꽂아놓고 한참동안 상모를 돌리며 놀다가 령자님이나 상쇠잡이를 비롯한 한두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논판에 뛰여들어 모내기와 김매기 등을 한다. 이때 상쇠잡이는 북을 둘러메고 장단을 치며 선소리를 먹이면 군중들은 소리를 받아 후렴을 제창하면서 일을 하는데 그 속도가 때로는 느리기도 하고 때로는 소나기처럼 숨가쁘게 몰아치기도 한다. 특히 일이 거의 끝날무렵이나 해가 질무렵에는 장단을 빠르게 쳐서 용기를 내고 환성을 울리며 일할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자에서 생긴 일, 그때에 해야 할 말거리를 그냥 노래로 부르기도 한다.


저물녘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일터로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농기를 앞세우고 한줄로 서서 흥겨운 농악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면서 돌아온다. 그날의 작업주인집 추녀끝에 농기를 세워두고 바깥마당에서 한바탕 열두 상모를 돌리며 또 즐거운 여흥이 벌어지고 이어서 멍석을 펴고 마당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이것은 농촌의 흐뭇한 광경이다.


독특한 민족적정기와 향기가 풍기는 농악놀이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다. 고대 우리 조상들의 풍습을 기록한 옛문헌 ≪위서≫, ≪후한서≫등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이 봄갈이와 파종이 끝난 5월단오거나 추수가 끝난 음력 10월에는 모두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는 낮에 밤을 이어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필자가 보건대 이것이 농악놀이의 원시형이라고 느껴진다. 또 청동기나 철기를 만들어쓸 때부터 농악에 사용되는 징, 꽹과리 등이 나타났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농악놀이와 같이 복잡하고 다채로운것이였을 수는 없으며 처음에는 극히 단조한것이였을것이다. 그러던것이 우리 인민들의 생활력사와 더불어 간단없이 발전되여 현재 전승되고있는 고급적인 농악놀이에 까지 이른것이다.




놋다리놀이


놀이유래: 


옛날에 해마다 달빛이 온 천지를 물들이는 정월 대보름날이나 작은 보름날 저녁이 되면 명절입성을 곱게 차려입은 수십명의 부녀자들이 한곳에 모여 놋다리놀이를 하였다. 놋다리 놀이를 놋다리밟기 또는 기와밟기라고도 부른다.


맨앞에는 ≪창립≫(자손을 둔 녀자)이라 하여 자손을 많이 둔 50~60세되는 할머니들이 서고 그다음에는 장년이라하여 30세이상 되는 부인들이 따르며 그뒤에는 수십명의 젊은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일렬종대를 짓고 전체가 앞사람의 허리를 두팔로 감아쥐고 엎드려 긴 ≪다리≫를 만드는데 이것을 ≪놋다리≫라고 한다. 놋다리를 만든 다음에는 그우에 공주로 뽑힌 예쁜 소녀를 올려 걸어가게 한다. (두사람이 량쪽에서 손을 잡아주며 부축함)이때 앞에 있는 ≪창립≫과 장년들이 먹임소리를 부르면 뒤에 굽힌 아낙네와 처녀들이 제창을 하면서 밤새도록 즐긴다.



이 놀이는 지방에 따라 노는 방법이 약간씩 달랐다. 어떤 지방에서는 놋다리를 만든 다음 맨뒤꼬리에 있는 사람부터 한명씩 순서로 놋다리우를 건느게 한다. 다 건너 맨앞에 이르면 내려서 그 자리에 허리를 굽히고 다시 놋다리를 이룬다. 이렇게 놋다리건느기를 차례로 계속한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남북 량켠으로 갈라져서 우에서 말한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리를 빨리 건느는 내기를 한다. 다리를 건느느것은 처녀애를 시킨다. 이 내기가 끝나면 처녀애를 목마를 태워가지고 서로 밀고 넘어뜨리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밤이 깊도록 노래를 부르며 놀았는데 그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그어데서 손이왔노 경상도서 손이왔네


몇대간을 밟고왔노 쉰대간을 밟고왔네


무슨옷을 입고왔노 철갑옷을 입고왔네


무슨갓을 쓰고왔노 룡당갓을 쓰고왔네


무슨갓끈 달고왔노 수정갓끈 달고왔네


무슨망건 쓰고왔노 외올망건 쓰고왔네


무슨풍잠 달고왔노 호박풍잠달고왔네


무슨창의 입고왔노 남창의를 입고왔네


무슨띠를 띠고왔노 관디띠를 띠고왔네


자주비단 동저고리  


무명주 고루바지


오록조록 구비입고 


무슨버선 신고왔노 타래버선 신고왔네


무슨신을 신고왔노 목파래를 신고왔네


무슨반에 밥을 주노 재주반에 차려주네 


이 민요는 놋다리놀이의 모습을 진실하고도 소박하게 그려냈을뿐만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의복과 몸차림새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전수하고있다. 놋다리놀이에서 불리우는 기타의 노래들도 대체로 몇간의 놋다리를 건너왔고 손님은 어디서 왔으며 그의 행장은 어떠한가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놋다리놀이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는바 문헌에 의하면 적어도 고려때로부터 이 놀이가 있었으며 리조시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매우 성행하였다. ≪동국세시기≫는 이런 실정을 다음과 같이 생동하게 기록하고있다. ≪안동풍속에는 마을녀자들이 늙고 약한 사람 할것없이 밤에 떼를 지어 성밖에 나가서 물고기를 길이로 죽 꿴 형상으로 전후로 길게 늘어엎드린다. 그리고 한 어린 소녀아이가 엎드린 녀자들의 등우로 걸어가게 하고 좌우에서 그를 부축하여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면 아이가 먼저 <이것이 무슨 다리요?>하고 선창을 하면 엎드린 사람들이 모두 <청계산놋다리요>라고 한다. 이렇게 큰길을 따라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하다가 밤이 샌 뒤에야 그친다.≫




널뛰기


놀이유래:


널뛰기는 그네뛰기와 마찬가지로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장쾌하고 건전한 녀성들의 놀이이며 민족체육의 하나이다.


지난날에 우리 민족의 녀성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과 5월단오, 팔월추석 등 명절이오면 옷을 차려입고 재미나는 널뛰기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널뛰기는 설비가 복잡하지 않고 특별히 넓은 장소도 필요되지 않으며 어느때에나 간단히 놀수 있기 때문에 어린 처녀들로부터 부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녀성들이 다 즐기는 놀이이다. 널뛰기는 유쾌하고 흥미있는 놀이인 동시에 녀성들의 신체단련에도 매우 유익한바 속담에 ≪정월에 널뛰기를 하면 그해에는 발바닥에 가시 들지 않는다.≫고 한 것은 녀성들이 널뛰기를 하면 몸이 단련된다는 뜻이다.


널뛰기는 크고 긴 널판의 중심부분밑에 목침이나 또는 짚묶음, 가마니뭉치따위를 괴여놓은 다음 널판중간에 한사람이 서거나 앉고 널판 두끝에 한사람씩 올라서서 서로 탄력을 리용하여 공중으로 솟구쳐오르기와 내리구르기를 엇바꾸어 반복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놀이이다.


널뛰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높이 뛰여올라 한바퀴 돌아내려오기,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내리뛰기, 발을 앞으로 쭉 폈다가 내려오기, 손을 자유롭게 놀리면서 발의 앞뒤 또는 옆으로 벌리면서 률동적으로 뛰는 방법들이 그 실례로 된다.


널뛰기를 할때는 서로 경쟁을 하였는데 지방에 따라 경쟁방법이 조금씩 달랐다. 적지 않은 지방에서는 눈금을 박은 긴 줄을 신발에 매달고 솟구쳐오르는 높이를 재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널뛰기를 할때에는 명랑하고 유쾌한 흥취를 한결 더 돋구어주는 민요들도 많이 불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 녀성들이 즐겨한 널뛰기는 오늘도 근로녀성들속에서 사랑을 받는 민족경기종목으로 발전하여 널리 퍼지고있다. 오늘의 널뛰기경기는 제정된 시간안에 어느 조가 더 높이, 더 보기좋고 재치있게 뛰는가에 따라 승부를 가르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경기방법에는 높이 뛰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곧추뛰기와 재치있게 서로 엇바꾸어뛰기, 재주부리기가 있는데 경기는 보통 2분 내지 3분동안 진행한다. 이를테면 곧추뛰기의 성적은 제정된 시간내에 두 선수가 널을 뛰여 풀어올린 실의 길이를 합하여 계산하며 각 조에서 풀어올린 실의 총길이를 측정하여 등수를 정한다. 성적이 같으면 실수한 차수가 적은 조가 앞에 놓이는데 그 차수가 같으면 다시한번 뛰여서 등수를 정한다.


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과 전설이 따르고있다. 18세기에 생존했던 류득공은 ≪경도잡지≫에서 널뛰기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항간의 부녀들이 흰 널판을 짚단우에 가로 걸쳐놓고 량쪽끝에 갈라 서서 급히 굴러서 몇자쯤 뛰여올라간다. 그때 몸에 찬 옥소리가 쟁그렁쟁그렁울리고 지쳐 그만두는것으로 락을 삼는다. <그곳 부녀들이 널우에서 춤추는데 이것을 판무라 한다.>고 했다. 이것과 비슷하나 리조초에 류구의 사신이 입조할 때 도리여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은것인지?≫ 어떤 학자들은 이런 문헌기록에 근거하여 류구의 한회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것이 고려시대에 류구로 건너간것이라고 추측하고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널뛰기가 말타기나 격구의 영향하에서 생긴것이라고 보고있다. 그리고 민간의 전설에 의하면 봉건사회의 도덕적구속으로 인하여 밖에도 마음대로 나들수 없었던 우리 녀성들이 담장곁에 널을 놓고 뛰여오름으로써 밖을 내다보려는 마음에서, 또한 한 녀성이 봉건관료들에 의해 옥에 갇힌 남편을 걱정하여 높은 담장을 넘겨다보기 위해서 생각해낸것이라는 말도 있는것으로 보아 자세한 것은 알수 없으나 널뛰기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공기놀이


놀이유래:


공기놀이는 오랜 옛날부터 소녀들의 놀이로 널리 전해져왔습니다. 공기놀이는 시기와 지방에 따라 그 이름과 방법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공기놀이를 《공기줏기》,《공기잡기》라고도 하였고《조알채기》또는 《조알질》,《짜구받기》라고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공기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널리 쓰인 이름이였다고 합니다.


리조 현종때의 학자인 리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서 《우리 나라 아이들이 둥근 동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공기놀이는 다른 여러 놀이이름과 같이 공기돌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놀이라는 뜻에서부터 유래된것입니다. 공기놀이는 그 이름과 방법이 많고 온 나라에 알려져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네뛰기


놀이유래:


그네뛰기는 예로부터 조선민족 녀성들이 즐겨온 민속놀이며 민족적정서와 향취를 풍기는 민족체육의 하나이다.


그네를 지방에 따라 ≪굴리≫,≪굴레≫,≪굴기≫,≪훌기≫,≪궁구≫,≪군디≫라고도 이르며 한어로 ≪추천≫, ≪비선희≫라고도 부른다.


흘러간 세월에 사람들은 그네를 흔히 동네 어귀나 백사장을 낀 버들방천이나 전망좋은 등산에 서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버드나무 또는 로송나무의 큰 가지에 맸다. 그네뛰기경기를 할 때에는 경기장이나 놀이판에 특별히 그네틀을 세우고 그네줄을 맸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가설한 그네를 ≪땅그네≫라고 한다. 그네줄에는 앉을깨(발판)를 얹어서 두발이 편하게 놓이여 잘 구를수 있게 하고 부드러운 무명으로 안전줄을 매여 줄 잡은 두손목을 그네줄에 련결시킴으로써 그네를 뛰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구르고 챌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안전줄 매는 방법은 근세부터 있게 된 것 같다.



지난날에 그네뛰기는 일반적으로 음력 4월 초파일무렵에 시작해서 5월단오날까지 약 한달동안 계속되였는데 특히 단오날에는 그네뛰기경연대회를 여는 것이 통례였다. 이날에는 오랜 봉건유습에서 기인된 심한 내외법으로 하여 일년 내내 집대문안에서 바깥구경을 못하던 젊은 녀인네들이 이날만은 너나없이 계절에 어울리는 새옷차림을 하고 그네터로 몰려가서 그네뛰기로 하루를 마음껏 즐기면서 저물어가는 줄도 몰랐다. 또한 이날의 그네뛰기는 처녀들이나 젊은 부인들만 한 것이 아니라 중년부인들도 한몫 끼였으며 또 어떤 지방에서는 늙은이들까지 앉은그네나마 한번씩 뛰여보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네뛰기경연대회때에는 그네에 몸을 실은 녀인이 높이 올라가는것으로 승부를 결정하였는데 그 구체적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그네를 적당한 곳의 나뭇가지에 맨것만큼 앞에 나뭇가지 또는 꽃가지를 목표물로 정하고 또는 꽃가지를 목표물로 정하고 그네가 앞으로 솟아오를 때 그것을 발끝으로 차거나 입에 무는것으로 내기를 하였고 둘째로, 그네앞쪽 적당히 떨어진 곳에 방울줄을 높이 달아놓고 그네가 앞으로 솟아오를 때 방울줄을 몇번이나 찼는가 하는것으로 승부를 결정하였고  셋째로, 그네의 발판밑에 자눈을 박은 줄을 매달아 그네가 올라갔을 때 줄이 정지점에서 공중 얼마나 올라갔는가를 측정하여 우렬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네를 혼자 뛰기도 하고 두사람이 마주서서 뛰기도 하는데 전자를 ≪외그네뛰기≫라 하고 후자를≪쌍그네뛰기≫ 또는 ≪맞그네뛰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쌍그네는 여흥적으로 뛰는 것이지 경연대회에서는 뛰지 않는다.


그네뛰기는 조선민족녀성들의 몸과 맘을 단련하는데 적합한 운동이며 그들의 우아하고 명랑하고 씩씩한 모습을 구김없이 펼쳐보여주는 놀이이다. 지난날 해마다 5월단오가 되면 아름드리 큰 나무 가지에 휘영청 늘어지게 그네줄을 매놓고 울긋불긋 곱게 차려입은 젊은 녀인들이 그네줄에 몸을 싣고 바람에 치마자락을 휘날리며 소리개같이 반공에 높이 솟아올랐다가 물차는 제비와도 같이 내리여 날래게 땅을 스치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한폭의 움직이는 그림과 같았으며 ≪선회≫와도 흡사했다. 고전명작≪춘향전≫에서는 춘삼월 어느날에 춘향이 광한루앞로변에서 그네뛰는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상술한 정황을 련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에 이처럼 우아한 그네뛰기는 총각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또한 총각들과 그 부모들은 그네뛰는 때를 남의 집처녀의 선을 보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춘향전≫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옛소설들에는 그네를 뛰다가 사랑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그네뛰기를 시적게기로 삼은 민요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있는 그네뛰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법들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북방융적들이 한식이 되면 그네뛰기를 하여 가볍게 뛰여오르는 것을 연습하였는데 후일에 중국녀자들이 그것을 배웠다.≫는 문헌적 기록에 근거하여 여기서 말하는 ≪북방융적≫이란 우리 민족의 조상인 고대종족을 가리킨것이라고 하면서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그네뛰기를 즐기였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동국세시기≫에 기록된 상술한 추측을 배제하면서 그네뛰기가 원래 북방 새외종족의 놀이던 것이 춘추시대에 제국을 거쳐 중국에 류입되고 당조때에 궁중놀이로 성행하다가 다른 잡회와 함께 우리 민족에게 전래된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이밖에 민간에서도 그네의 유래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있는바 옛날 강릉의 문무겸전한 한 위인이 밤마다 파리와 모기 등 날벌레가 덤벼들어 귀찮게 굴기 때문에 생각끝에 그가 파리나 모기를 피하기 위하여 요람을 만든 것이 그네의 시초였다고 한다.


보다싶이 그네뛰기의 유래에 대한 설법은 매우 구구하다. 그러나 고려 고종대에 최충헌,최이부자가 가끔 궁전뜰이나 자신의 저택정원에서 호화로운 추천회를 거행했다는 문헌기록을 보거나 또 같은 고종때에 나왔다는 ≪한림별곡≫의 제1절에 그네에 관한 대목이 있는 것을 미루어보아 대체로 13세기초부터 당시의 문헌들과 작품에 그네뛰기가 언급되고있는바 그 유래가 오래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13세기초에 벌써 자연수목에 그네줄을 매고 뛰였을뿐만아니라 놀이판한가운데 그네틀을 세워 그네줄을 매고 채색비단과 꽃으로 장식한 일이 있었다.


그네뛰기는 리조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성행하여 전민적인 놀이로 발전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네뛰기는 단순한 오락일뿐아니라 일정한 기준을 정하고 높이 뛰여오르기를 다투는 경기적인 성격을 띤 놀이로 되였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5세기에 서울인민들은 단오가 되면 서울 한복판 종로 네거리 뒤골목에 화려하게 그네터를 설치하고 서울시내를 남북 두패로 나누어 내기를 하였는데 그런 때에는 서울안의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한 15세기의 시인 성현이 지은 시에 의하면 벌써 15세기에 경기에서 그네가 솟아올라가는 높이를 측정하기 위하여 그네줄앞에 높게 방울줄을 다는 방법이 있었다.


조선민족 녀성들의 전신운동에 유익하고 민족적특성이 농후한 그네뛰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의 생명력을 과시하였고 지금도 인민들속에서 성행되고있다.




강강수월래


놀이유래: 


과거에 해마다 음력 8월추석 달 밝은 밤이 되면 새옷으로 곱게 단장한 마을의 같은 또래의 부녀자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노는 놀이가 있었는데 이를 강강수월래놀이라고 한다. 이는 녀성들의 놀이중에서 가장 정서적이며 률동적인 놀이이다.


수십명에 달하는 부녀자들이 밝은 달빛아래서 다정하게 서로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그린 다음 목청 좋은 한 녀성이 맨앞이나 원형을 이룬 한복판에 서서 소리를 먹이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수월래≫하고 후렴을 합창하면서 빙빙 돌아가며 춤을 춘다. 처음에는 먹임소리가 느리고 춤도 느리게 추다가 점차 먹임소리가 발라지는데 따라 ≪강강수월래≫라고 부르는 후렴소리도 잦아지고 원형을 이루며 추는 춤도 한층 빨라지며 선도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춤추다가 맥이 진하면 끝난다. 이 놀이를 한번 하고 피곤하면 잠시 쉬였다가 다시 거듭하며 노는 사람이 많으면 여러 패를 지어 놀기도 한다.


이 민속놀이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먹이는 소리(선창)와 그것을 받는 ≪강강수월래≫라는 후렴(받는소리)이 교차되는 독특한 합창가요형식으로 되여있는데 이 노래에서 먹이는 소리는 지방에 따라 그 내용이 같지 않으나 받는 소리에는 변화가 없다. 이런 노래에는 여러가지 변종이 있는데 어떤 것은


달밝았다 계명산천에 달밝았다


강강수월래


달밝으면 오늘밤도 승전이라네


강강수월래


나는좋네 나는 좋네


강강수월래


석달열흘 기다려도 나는좋네


강강수월래


우리님은 승전하고 오실 테니


강강수월래


라고 하면서 서정적주인공인 녀성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올 남편을 그리면서 만약 남편이 싸우다 희생되면 자기가 대신나가 싸워 대대손손 살아온 이 땅을 굳건히 지켜가겠다는 영웅적 기백과 락천적정신을 노래하였으며 어떤 것은


떨쳐보세 떨쳐보세


강강수월래


위국충절 떨쳐보세


강강수월래


호미들면 농군이요


강강수월래


총을 들면 수군일세


강강수월래


라고 하면서 과거 우리 민족 인민들의 부지런한 근로정신과 자기의 향토를 피로써 지키는 병사로 된 긍지감 및 전투적기백을 구가하였으며 또 어떤 노래는


해는지고 달떠온다


강강수월래


하늘에는 베틀놓고


강강수월래


구름잡아 잉어걸고


강강수월래


별을 잡아 무늬놓고


강강수월래


째깍째깍 잘도짠다


강강수월래


그베짜서 무엇하나


강강수월래


우리 오빠 장가갈적


강강수월래


가마휘장 두를라네


강강수월래


와 같이 베짜는 녀성들의 근로정신과 그들의 후더운 마음씨와 인정미를 읊조리고있다.


강강수월래놀이는 원시사회사람들이 공동축제등과 같은 모임때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뛰놀던 원시형태의 춤에서 그 시원을 찾아볼수 있으나 대개 16세기말부터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창작, 전승된것이라고 생각된다.  ≪강강수월래≫라는 말은 보통 두가지 뜻으로 해석되고있다. 하나의 해석은 한자로 ≪强羌水越來≫, 즉≪순라(巡邏)≫에서 온것인데 ≪강강수월래≫라는 이 말은 주위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보다싶이 이 두가지 해석에서 어느 경우든지 다 이것은 외래침략자들을 막아내고 자기의 향토를 수호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투쟁과 결부되여있다는 것을 간파하기 어렵지 않다.


[=]  http://www.hljxinwen.cn/2007-11-29/0004448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