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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상학적 의미와 진리문제

온울에 2008. 5. 14. 14:51

목 차

1.들어가는 말
2.의식의 지향성
3.의미지향과 충족
4.근대 객관주의적 의미론과 진리관에 대한 비판
5.의미와 진리의 고향: 생활세계
6.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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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새한철학회 
학술지명 철학논총JOURNAL OF THE NEW KOREAN PHILOSOPHICAL ASSOCIATION 
ISSN 1226-9379 
권 26 
호 1 
출판일 2001. 10. 30.  

 

 

 

현상학적 의미와 진리문제


조주환
(Cho, Ju-Hwan)
대구가톨릭대학교 ( Cathilic University of Daegu )
1-066-0104-08

국문요약
이 논문은 현상학적 의미론을 진리론을 통해 해명하는데 주 목적이 있다. 형식논리학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전통적 진리관이 단지 명제와 명제간의 일관성이나 무모순성 혹은 명제와 그 명제에 의해 지칭되는 대상 사이의 일치성만을 주제로 다루는 데 반해, 현상학적 진리론은 근본적으로는 전통적 일치설을 따르지만, 이 ‘일치’가 실질로 가능하게 되는 지향적 연관성을 해명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 만약 진리의 문제가 명제와 명제 혹은 명제와 대상 사이의 형식적 일치성만을 문제삼는다면, 지극히 소박한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 후설의 의미론과 진리론의 특성은 바로 이 형식적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연관, 즉 명제를 통해 지향된 의미가 대상에 관한 직관을 통해 어떻게 충족되는지를 해명하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설의 현상학적 진리관이 명제 자체가 가지는 진리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명제적 진리, 즉 술어적 진리와 선술어적 진리연관 사이의 지향적 고리를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설의 진리사유를 명제 이전의 순수 체험으로만 돌아가는 근대적 환원주의로 잘못 읽거나 혹은 명제적 진리 자체에만 구속되는 언어적 환원주의로 말못 읽어서는 안 된다. 후설의 진리사유의 특성은 바로 술어적 진리와 선술어적 진리연관 사이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데서 발견된다. 이 보편적 상관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지반은 바로 ‘생활세계’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진리관은 전통적 진리사유가 은폐시켜 왔거나 망각해버린 진리의 최종적 토대인 생활세계적 진리관을 정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문요약
Das Problem der Ph?nomenologlschen Bedeutung und Wahrheit
Diesel Arbeit besch?ftigt sich mit dem Vergleich der traditionellen Wahr-heitslehre mit dem ph?nomenologischen. Die traditionelle Wahrheitslehre, die man die formale Logik nennt, behandelt die Konsequenz und die Nicht-Widersprchlich-keit zwischen Propositionen oder die ?bereinstimmung einer Proposition mit dem Gegestand, auf den dieselbse hinweist. Die ph?nomenologische Wahrheitslehre folgt im Prinzip der trationellen Wahrheitslehre. Sie zielt jedoch darauf ab, den inten-tionalen Zusammenhang zu kl?ren, in dem jene ?bereinstimmung wirklich m?glich wird. Wenn sich die Frage der Wahrheit nur mit die ?bereinstimmung zwischen Propositionen oder zwischen einer Proposition mit dem Gegestand bezieht, wird dies f?r sehr naiv gehalten. Der Zug der Wahrheitslehre von Husserl liegt darin, den wirklichen Zusammenhang zu kl?ren, der diesel formale ?bereinstimmung m?glich macht. Kurz gesagt, er liegt darin, zu kl?ren, wie der durch die Proposition intentionierte Sinn durch die Institution ?be den Gegenstand erf?llt wird. Die Wahrheitslehre von Husserl ignoniert allerdings nicht den character der Wahrheit, den die Proposition selbst hat. Erversucht nur die propositionale Wahrheit, d.h. den intentionalen zusammenhang zwischen der pr?dikativen und vor-pr?dikativen Wahrheit zu kl?ren. Daher solte man das Denken von Husserl ?ber die Wahrheit weder als den modernen reduzianismus ansehen, nach dem man zum renen Erlebnis vor der Proposition zur?ckgeht, noch als den sprachlichen Reduktionismus, der nur von der propositionalen Wahrheit selbst abh?ngig ist. Der Zug des Wahrheitsden-kens von Husserl wird darin gefunden, daß das urspr?ngliche und allgemeine Verh?ltnis zwischen der pr?dikativen und der vor-pr?dikativen Wahrheit gekl?rt wird. Die allgemeinen Grundboden, in denen dieses allgemeine Verh?ltnis m?glich wird, ist die ‘Lebenswelt’. Die ph?nomenologische Warheitslehre wird dadurch vollendet, daß die lebensweltliche Wahrheitslehre ger?ndet wird, die durch das traditionelle Wahrheitsdenken versteckt oder vergessen wurde.


한글키워드
현상학적 의미론과 진리론, 생활세계
영문키워드
Themen : ph?nomenologische Bedeutungslehre und Wahrheitslehre, Lebensweltliche Wahr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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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는 말
후설의 현상하게 있어서 의미와 진리의 문제는 마치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동일한 주제이다. 의미의 문제를 현상학적 연관성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현상학적 진리관을 해명하는 문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후설의 의미론을 그의 진리관을 통해 조명해보는 방법을 택하여 전개해나간다. 의미의 현상학적 진리관을 통해 이해한다는 이 글의 주제에 따라 우리는 후설의 진리관을 해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진리에 관한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는데도 새삼 진리에 대해 현상학적 연관 속에서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진리의 문제를 논리학이나 인식론 아니면 형이상학이나 선험철학적 지평에서 다루어왔다. 논리학은 주로 진리의 문제를 진술의 진리에 한정하여 규정을 하는 반면, 형이상학이나 선험철학은 인간과 존재에 관련해서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전통적 진리관이 주로 명제와 사상의 형식적 일치를 논리적으로 문제삼는 반면에, 진리의 문제를 존재론적 지평으로 확장시켜 선논리적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논리적 지평 안에서 진리의 문제를 진술의 진리로 한정하여 다루는 전통적 진리관은 진술과 진술 사이의 형식적 일치만을 문제삼을 뿐, 실질적으로 이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리고 진리의 문제를 선논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와 존재 일반으로 확장해 간다. 하이데거의 진리는 바로 현존재의 개시성과 존재의 비은폐성으로 규정하여 전통적인 명제진리의 통속성을 넘어서려고 한다. 이처럼 진리의 문제를 지나치게 형식적 연관 속에서 다루는 논리적 혹은 인식론적 진리관과 이 진리관의 형식적이고 좁은 틀을 벗어나 존재 일반과 관련시켜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확장해가는 존재론적 진리관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관을 후설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한다. 진리의 문제를 논리적 지평 안에서 규정하여 온 전통적 진리관은 진리에 관해 논리적 관점에서 매우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협소하며 동어반복적 속성을 갖는다. 반면 존재론적 진리관은 진리 자체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포기한채, 포괄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모호한 측면을 갖는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모호하기 않은 진리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마리를 후설을 통해 확인하려고 한다1). 순한 진술 상호간의 형식적 일치만을 문제삼는 전통적 진리관의 좁은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연관을 진술과 사상(事象)의 실질적 일치연관으로 확장해가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의 비은폐성이라는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신비적인 진리연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실질적 진리연관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글은 진리를 명제적 영역에만 한정하여 규정하는 형식적 진리관을 넘어서기 위해, 명제적 진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실질적 진리연관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후설의 현상학적 진리관은 주관과 객관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진리공식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새로운 영역에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단순히 주관적이지도 동시에 객관적이지도 않는 선험적 장으로 되돌아가 주관과 객관이 이미 만나는 지평에서 확인한 대상의 소여방식을 새롭게 주제화한다2). 대상 자체가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진리가 가능하게 되는 선험적 지평을 열어 밝혀 보이려는 후설의 진리관은 선험적 주관성을 떠나 ‘진리의 존재론화’에로 단적으로 전환한 하이데거의 진리관과는 대조적이다. 후설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 자체가 아니라 이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연관, 즉 대상의 자기소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장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성취하는 일련의 의식연관을 기술적(記述的) 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후설의 입장은 항상 진리를 성취하는, 혹은 진리를 진리로서 확증해 가는 의식의 작용(Leistung)인 노에스시적 측면과 이에 상응해 구성되는 진리 자체인 노에마적 연관을 함께 다루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후설의 현상학적 진리관을 대상의 소여방식과 관련해서 이해한다고 할 경우에, 의식과 대상의 분리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도식에서 이해된 진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후설의 진리관을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 채널은 바로 그의 지향성개념이다.

2.의식의 지향성
현상학적 진리관이 대상의 소여방식(die Gegebenheitsweise)을 주제화한다는 사실은 진리 자체를 소박하게 주관적 혹은 객관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진리는 어떤 이유로도 심리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진리 자체가 심리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될 경우에,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진리개념으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약 진리를 주관과 상관없는 순수한 객관적인 것으로 강조하여 진리 ‘자체’의 성격, 즉 진리의 즉자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독단적인 진리관에 머물게 된다. 후설은 이러한 상대주의적-객관주의적인 통속적 진리관을 그 근본으로부터 허물기 위해 의식과 대상 사이, 즉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다양한 방식을 해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바로 지향성, 즉 의식은 항상 대상에 관한 의식이라는 근본적인 구조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후설은 당시의 심리학주의적 진리관을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철학적 모티브인 지향성개념을 그의 스승 브렌타노로부터 이어받는다. 그러나 스승의 지향성 개념에는 아직 심리적 계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심리주의적 편견을 극복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비판을 제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당시의 객관주의적 편견에 취해 있는 마이농의 진리관 역시 진리가 성취되어지는 의식연관에 대한 해명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한다3). 그러므로 후설은 지햐성개념을 심리주의적-객관주의적 진리관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간다.

브렌타노는 심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구분하기 위해 지향적개념을 끌어들인다. 심리적 현상은 물리적 현상과는 달리 심리적 현상은 자신의 대상에 지향적으로 관계한다. 심리적 현상을 물리적 현상과 구분하기 위해 브렌타노가 끌어들인 지향성개념은 후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적 동기를 마련해 준 브렌타노를 자주 언급한다4).

그러나 후설은 브렌타노 역시 무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방법을 심리적 현상을 연구하는 심리학에 그대로 옮겨오는 문제점을 가진 것으로 비판한다. 후설이 보기에 브렌타노는 마치 물리적 현상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심리적 현상에 관한 과학적 연구 역시 그러한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과학주의적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후설은 『위기』에서 그는 〔브렌타노〕 “자연과학적 전통의 편견에” 아직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5). 후설이 보기에 스승인 브렌타노는 아직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성취되어지는 진리연관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주의적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브렌타노의 진리관은 전통적인 심리학주의적 진리관을 넘어서지 못한다. 브렌타노 역시 심리적 명증과 논리적 명증을 혼동하여 진리를 마치 심적 명증으로 이해하여 상대화시키는 당시의 진리관을 비판한다. 당대의 심리주의자였던 지그바르트(Sigwart)는 진리를 시간적인 체험흐림으로 용해시킨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진리의 이념적이고 초시간적 성격을 간과하고 진리를 실질적 체험연관 속에서 생성ㆍ소멸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6). 그러나 후설이 보기에 그는 아직 심리적 명증과 논리적 명증을 구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후설이 보기에 자신의 스승은 다만 논리적 명증이 단순한 심리적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만 했을 뿐, 이에 대한 철저한 지향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심적 체험들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하나의 경험적 내용과 같은 것을 진리로 ‘파악하지’ 않는다. “진리는 여러 현상들 중의 현상이 아니라, 진리는 전혀 다른 의미의 체험, 즉 하나의 보편적이고 이념적인 체험이다7).”

심리적 현상은 물리적 현상과는 달리 항상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소위 브렌타노의 ‘지향적 내재’는 바로 이것을 말한다. 표상에는 표상된 것이, 판단에는 판단된 것이, 사랑과 미움에는 각각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지닌다. 그러나 후설이 보기에 브렌타노는 마치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난다거나 아니면 그 대상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지향성이 바로 의식과 대상 사이의 아프리오리한 보편적 상관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브렌타노의 지향성, 즉 의식과 대상 사이의 관계성인 지향성은 의식과 대상 사이의 실질적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오인되고 말았다8). ‘대상이 의식 속에 지향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던 대상이 실질적으로 의식 안으로 들어오거나 의식에 나타난다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포함되어 있음”은 의식과 대상 사이의 실질적 관계를 다 허물고 나서 만나는 의식의 절대적 사실(Faktum)이다.

3.의미지향과 충족
논리적-개념적 사유에 의해 굴절되기 이전의 선험적 장에서 진리 자체를 단적으로 붙들려는 현상학적 진리관은 우성 대상 자체의 주어짐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연관을 주제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태가 개념에 의해 옷입혀져 굴절되기 이전의 근원적 지평에서 단적으로 붙들려는 현상학적 진리관은 대상 자체의 소여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지향적 연관을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상 자체에 대한 원본적 직관이 가능하기 위한 일련의 의식연관을 해명함으로써, 진리를 주관주의적으로나 객관주의적으로 주조해가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걷어내는 것이 중요한 절차이다. 브렌타노의 심리주의적 경항은 결국 진리 자체를 주관화함으로써, 진리가 성취되어지는 선험적 지평을 열어가는 데 실패했다. 반면에 심리학주의적 경향에 지나친 반응을 표했던 그 당시의 객관주의적 진리관 역시 진리를 의식과 무관하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마이농의 진리관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마이농은 진리의 객관성을 정초하기 위해 브렌타노의 지향성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지향된 내용과 지향된 대상 사이의 애매성을 걷어내는데 관심을 가진다. 그는 브렌타노의 ‘내재적 대상’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심리주의적 색채를 완전히 걷어내기 위해 진리 자체를 의식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데로 나아간다. 그는 “대상은 그 본질상 파악 작용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요, “시간적으로는 파악 작용에 뒤따르는 경우일지라도,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이보다 앞서는 것”으로 규정한다9). 이처럼 마이농의 객관주의적 진리관은 진리가 성취되어지는 지향적 연관성에 대한 해명을 뒤로 하고 지나치게 반심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이는 결국 맹목적 객관주의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진리 자체가 진리 파악작용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어서도 안 되지만, 진리 자체를 파악작용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마이농의 객관주의적 진리관 역시 지나친 반심리주의적 입장이다. 우리는 심리학주의에 대해서 반심리학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지만, 심리적 연관 자체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어떻든 진리를 구성하는 심리적 활동의 성취물이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 (Es Selbst)에 대한 지나친 향수는 자칫 진리 그 자체가 성취되어지는 지향적 과정 자체를 해명해야할 과제를 손쉽게 포기하는 꼴이 된다.

우리가 진리를 현상학적 연관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진리가 성취되어지는 주관적 측면과 대상적 측면을 함께 고려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판단을 통해 지향된 의미가 어떻게 충족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상관적으로 다루어야 함을 뜻한다. 진리를 현상학적 의미로 이해할 때, 지향된 것이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주어지는 경우이다. 따라서 진리는 바로 지향(Intention)과 충족(Erf?llung)의 일치 혹은 같은 말이지만 판단을 통해 사념된 것과 주어진 것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10). 따라서 진리가 이루어지는 지향적 연관은 바로 판단된 사태가 판단의 체험 속에 그 자체로 현전하는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11). 말하자면 진리는 그 자체 주어진 사태에 대한 통찰이며, 파악이다. 후설에 의하면, 진리는 “사념작용과 이 작용이 사념하는 것이 ‘그 자체’ 현전하는 것, 즉 진술의 현실적 의미와 그 자체 주어진 사태사이의 일치의 체험이며, 이 일치의 이념이다12).”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체험은 일종의 감정과 같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판단되는 사태의 현존과 관련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체험은 주관적인 명증적 체험과 혼동되어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진리헤험 연관은 주관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상의 일종의 명증적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체험은 진리를 성취하려는 의식의 작용의 측면과 지향된 것이 충족되는 작용의 측면에서 상관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의식의 작용 측면, 즉 노에시스적인 측면에서의 진리는 대상 자체를 정립하는 것, 즉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단적으로 정립하는 것이고, 노에마적 측면에서의 진리는 대상이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대상의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의미의 진리는 바로 진리가 성취되어지는 일련의 지향적 과정을 해명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진리 체험이 이루어지는 지향-충족의 상관적 관계를 해명하는 일로 확장된다. 후설은 이런 점에서 진리의 문제를 명제적 차원에서만 다루는 정합논리학과 진리를 명제 이전의 지향과 충족의 상관관계 속에서 다루는 ‘진리논리학’(Wahrheitslogik)13)을 구분한다.

전통적인 진리설이 다만 명제적 질서안에서의 일치만을 문제삼는데 반해, 현상학적 진리관은 명제 이전의 체험연관으로 돌아가 그 명제적 진리가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 분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선 명제적 진리는 바로 명제적 진리 이전에 의식과 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진리성취의 절차 자체이다. 그런데 후설에 있어서 진리는 다름 아닌 명제 이전의 차원에서 구성되어지는 ‘의미’ 자체이다. 후설에 있어서 진리와 의미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관계이다. 의미의 동일성과 객관성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진리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당시의 심리학주의적 진리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후설의 진리론은 바로 의미의 동일성을 새롭게 복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설의 진리관을 의미론적 차원에서 접근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입장은 개념의 옷을 입기 이전에 이루어지는 의미연관, 즉 의미지향과 충족을 통해 성취되어지는 선명제적 과정에 대한 해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후설은 『논리연구』의 마지막 「제6연구」에서는, 지향된 의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충족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명증적인 의미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다룬다. 판단을 통해 지향된 의미를 하나의 의미체로 충족시켜주는 의식작용은 무엇인가? 후설은 지향된 의미의 충족은 바로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지각은 다른 의식작용에 비해 대상 자체를 단적으로 붙드는 일차적 작용이다. 이처럼 후설이 진리체험을 위한 근원적 토대로서 지각의 확실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각은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가장 친숙한 경험이며, 이 친숙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리야말로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후설의 진리론은 바로 객관적 진리의 토대를 이루어 왔던 역사적 지평인 생활세계적 진리를 복권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리가 성취되는 선논리적이고 선 개념적인 질서에 대한 지향적 해명으로 지평을 확장해 간다.

4.근대 객관주의적 의미론과 진리관에 대한 비판
철학을 확실한 체계 위에 구축하기 위한 근대인들의 열정은 체계 이전의 근원적 진리를 읽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철학을 가장 확실한 토대 위에 구축하기 위한 근대인들의 열정은 우선 수학을 학문적 모델로 삼는다. 고대 이래 수학만큼 가장 정확하고 엄밀한 학문은 없었다. 특히 기하학에 대한 근대인의 신념은 절대적이었다. 근대인들은 공리를 근거로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추론된 기하학의 체계야말로 근대 학문의 이념을 대변하는 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근대인들의 확신은 고대인들이 수학에 대해 가졌던 학적 신념 이상으로 기하학의 질서를 모든 것을 체계화하기 위한 방법적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자연에 대한 수학화, 즉 수학적 자연과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주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일관되고 체계적인 길을 확보해주는 기학학적 질서로써 자연을 수학화하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근대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의 수학화는 바로 수학적 질서로 읽혀지기 이전의 생생한 자연을 은폐시키고 말았다. 이 은폐된 생생한 자연은 바로 생활세계이다. 모든 체계 이전에 생생하게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를 가장 근원적 진리로 읽어내는 것이 현상학적 진리론의 주제이다. 이 근원적 진리의 복권을 통해 아무리 순수한 객관적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삶의 세계와 분리될 수 없이 엉클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현상학적 진리론의 특징이다.

세계는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미 주관적-상대적인 것으로 주어져있다. 이 세계는 합리적으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감각적이고 직관적 경험의 세계로서 주어져 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이미 오랫동안 경험해 온 나름대로의 질서와 타당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 이미 주관적-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친숙하게 된 것들은 수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위협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런 합리성과 객관성을 정초지우는 확신한 신념 체계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신념(doxa)의 질서 위에서 비로소 합리적 질서와 객관적 지식(episteme)이 정초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소박한 객관주의자들은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다.

순수기하학은 순수 이념성들에 관한 학으로서 직관적으로 주어진 환경세계에서 경험하는 물체를 그것의 극한 형태로 추상해나간다. 주어져 있는 물체를 이념화와 구성으로 방법으로 이념적 극한 형태로까지 추상함으로써 정밀성을 얻기 위해 구체적 물체를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추상화한다. 기하학의 측정술은 학 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진 환경세계를 객관적 인식의 대상으로 추상화하고 이념하기 위한 이론적 척도로 적용된다. 객관성을 정밀성으로 대체하기 위한 측정술은 이상적인 극한 형태들에로 접근하기 위한 기술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갈릴레이는 기하학적 명증성들의 원천에 대한 물음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하학은 어떻든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정밀한 학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직관된 세계의 본질적인 주관적 파악의 상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수단이 바로 기하학의 방법이다14). 기하학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비대상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기하학의 방법에 의해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갈릴레이의 생각 속에는 기하학의 측정술은 우리의 상대적 경험을 이념적 극한 형태로 접근하게 하는 가장 믿을 만한 기술이라는 소박함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순수 수학은 우리의 구체적 경험을 추상하고 단지 그것들의 형태들에만 관계한다15). 그러나 감각적으로 직관된 물체들 역시 일종의 감각적-유형적 관련성을 가지고 이미 주어져 있다. 경험적으로 직관된 환경세계는 경험적으로 전체에 걸친 양식을 갖는다. 비록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보편적 양식에 의해 전체적 통일성을 간직하고 흘러간다. 이것은 학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실질적 아프리오리이다. 모든 학적 인식의 명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질서가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의 유형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근대의 과학주의적 방법론에 의해 은폐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의 보편적 양식이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디까지나 아직 학적 인식으로 해명되지 않는 모호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기에 모호하게 인과적 양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 전체를 학적으로 인식하는 데 수학은 도움을 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직관된 구체적 경험을 산술화의 방법으로 의미를 공동화한다는 사실이다. 일종이 기하학의 산술화를 통해 현실적 시공간적 이념성들이 순수한 수의 형태로 추상되어 버린다. 모든 형태의 경험들이 수량화를 통해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보편수학의 이념을 완성해왔다. 이 보편수학의 이념은 수적으로양화될 수 없는 질료적 내용까지도 형식적 보편성으로 추상하고, 형식적 규칙에 따라 모순없이 추상하는 데서 완성된다. 단지 기술적 조작에 의해 수량화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을 뿐, 이들의 성과에 대한 근원적 사유는 일찍이 배제된다16). 이와 같이 수량화된 자연은 그 구체적 의미를 다 토해내어 버린 공동화(空洞化)된 의미로 변형된다. 모든 수학적 명증성들은 구체적 직관의 명증성에 고향을 두고 있다는 보다 시원적인 반성이 수학적 물리학자들에게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반성은 갈릴레이에게도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모든 수학적 의미들의 의미기반이라는 근원적 반성이 차단된 채, 우리의 구체적인 그 세계가 수학적 이념들의 세계로 추상화되었다. 학문 이전의 직관된 자연을 이념화된 자연으로 대체하는 것은 바로 갈릴레이와 더불어서이다17). 모든 이념화에 전제된 현실서으로서 직접 주어져 있는 것 대신에 방법적으로 이념화하는 작업수행을 대체시킴으로써 자연과학의 의미기반인 생활세계는 계속 은폐되어 왔다. 이 생활세계를 이념의 옷으로 포장한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활세계를 객관적 진리라는 규준으로 추상화하고 상징의 옷으로 분장한다. 결코 수량화될 수 없는 감각적 성질들을 규정된 수의 지표롤 추상해버림으로써, 생활세계는 그 구체적 역사성과 의미성을 토해내어 버린다. 이런 점에서 갈릴레이는 자연 속에서 정확한 규칙성을 발견한 자이면서도 동시에 생활세계를 은폐시킨 자이다18).

학 이전에 혹은 학 이외의 삶의 진리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초월하는 그 자첼의 존재를 읽어내기 위한 실마리로서 역할을 한다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념화 이전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들에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으로부터 모든 객관적 의미 형성물들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하는 절차가 단절되었다. 특히 의미의 공동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자연의 수학화를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일이 요구된다. 이것은 바로 그 자체 객관적 진리로 추정되는 것들의 근원적 의미, 즉 그것들이 근원적으로 건립되는 역사적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19).

이와 같은 해명이 결여될 경우, 자연은 순수한 물체 사물로서 나타난다. 모든 정신적인 것과 인간 실천에서 사물로서 성장된 모든 문화적 성질들이 사상되어 버린 그 자체 완결된 실재적 물체 세계로서의 자연의 이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20). 그러나 자연과학적인 합리적 자연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체 세계이지만, 그것은 합리적 이론을 수행하는 주관성은 전제해야만 하지 않는가? 오히려 이 심리적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연보다 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하지 않는가? 어쨌든 자연은 주관성에 호소해서 비로소 그 의미를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객관적 자연인식의 근거로서 주관성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그러나 로크에 의해 개시되고 흄에 이해 완성된 주관성에 대한 물리학적 이해는 자연주의적 심리학의 모습을 띤다. 물리학의 설명적 방법을 모든 정신적인 것에까지도 적용함으로써 심리적인 것의 자연화를 수행하였다. 데카르트와 동시대인이었던 흄은 정신적인 것까지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물리학주의를 대변하는 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물리학적 방법에 호소해서는 학적 인식을 구성할 수 없다는 회의에 직면한다. 수학과 물리학의 합리성에민 의존해서도 객관적 진리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신념이 붕괴되면서 이제 새로운 조망 방식, 새로운 철학적 사색이 절박하게 요구된다. 과학적 객관주의로부터 선험적 주관주의로의 전회가 일어난다21).

객관주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야말로 참된 인식이라는 전체 하에서 가능한 한 주관적인 것에서부터 독립된 객관적 인식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선험주의는 객관적으로 참된 세계는 다름이 아니라 학문 이전의 삶이 경험 위에서 구축된 보다 높은 단계의 구성물로 규정한다. 객관적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성취해내는 주관성으로 되돌아가서 그 근원을 묻는 것이 우선적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에 있어 제1의 것은 우선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성이다. 수 천년이래 지속되어 온 객관주의를 선험적 주관주의로 전회한다는 것은 혁명이다. 말하자면 더 이상 심리적 실재물인 아닌 선험적 주관성을 모든 철학적 사유의 절대적 단초로 확보하기 위해 객관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주관중심의 패러다임, 그것도 모든 심리적 요소를 제거한 철저한 선험적 주관 중심주의로의 혁명적 전환이 요구된다. 이것은 근대 물리학주의 위에 성립한 주-객의 대립을 초월하는, 즉 객관주의에 대립하기 위한 소박한 선험주의가 아니라 이 둘의 근원적 긴장을 초월하는 절대적 주관성을 해명하는 선험철학의 최종형식으로서의 현상학을 목표로 지향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야말로 우선은 선험적 주관성에로 전회하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하나의 선험철학의 이념만을 제시했을 뿐 실지로는 합리주의적 심리학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말하자면 객관주의를 허물기 위한 동기는 발견했지만, 실지로는 그 역시 객관주의의 편견에 붙들려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 사상의 이념을 철저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그를 넘어 새로운 선험주의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적 판단중지는 철저한 인식의 정초라는 전제 하에서 지금까지 단순히 추정적으로만 타당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신념들 자체를 근본에서 허물러버리는 작업이다. 모든 학문적 타당성들이나 혹은 학문 이전의 생활세계 속에서 경험한 타당성들에 대한 신념역시 근본적으로 판단중지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철학적 근본주의의 대변자이다. 모든 철학자들, 즉 진정으로 철학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작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데카르트적 판단중지의 동기는 충분히 받아들이지만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철저성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적 환원은 우리의 구체적 경험과 이것의 상관자인 일상세계를 일거에 무효화시켜버린다. 우리의 경험이 가지는 신념의 확실성 자체를 보편적으로 부정하는 데카르트적 판단중지는 경험의 보편적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합리주의적 편견에 취해 있다. 물론 고대 회의주의자들처럼 합리적 지식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의사-회의주의적 판단중지 역시 철저성이 결여되어 있다22).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판단중지는 우선 데카르트처럼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자로서의 주관성을 인식의 필증적 토대로 규정한다. 즉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를 수행하는 자는 이 회의 과정에서 배제된다. “나는 존재한다”는 필증적 명증성은 결코 회의의 대상일 수 없다. 이점에서는 현상학적 환원은 데카르트적 환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데카르트적 판단중지의 근본적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계 자체에 대한 판단중지는 결코 세계의 보편적 의미를 일거에 무효화하는 절차가 아니라 세계를 단지 나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즉 세계는 나의 사유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하는 절차이다. 말하자면 나의 사유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나의 사유 속에 사유된 내용인 관념으로서 혹은 사유된 대상인 현상(Ph?-nomen)으로 주어질 경우에는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세계의 의미가 나의 사유 속에 관념으로서 주어진다고 해서 버클리의 경우처럼 단순한 주관적인 감각 현상으로서 주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한갓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공리적 명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는 나의 사유작용과는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유된 대상으로서 함께 그 지평으로서 이미 주어져 있음을 반성적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후설적인 의미에서의 현상학적 판단중지이다. 나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로서 규정되지 않는 한, 세계는 단지 소박한 양상 속에서 추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자연적 사물의 총체 이상이 아니다23). 그러므로 우리가 데카르트적 판단중지에서는 의식 바깥의 실질존재와 의식 내의 내재존재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명증성의 양사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를 필증적 영역으로 정초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보편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현상학적 판단중지의 경우에는 이 둘이 결코 별개의 명증성의 영역이 아니라 단지 판단중지 이전과 이후의 양상에서 본 소여방식에서의 차이점을 가질 뿐이다. 말하자면 실질존재와 내재존재는 상호 함축적이며, 다른 영역의 명증성을 자신의 명증성의 영역 속에 이미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판단중지는 자아나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예측적 통념(Vor-meinung)을 철저하게 배제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자아와 세계에 대한 물리학적 편견인 이원론적 도식 자체를 철저히 걷어치우는 데까지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판단중지를 통해서 신체, 인간 등으로 불리는, 즉 이미 세계와 지향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구체적 인간이 마음 혹은 혼이나 지성 등의 개념으로 세계와 분리된 자아로 추상화되어버렸다. 그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괄호로 묶어버렸다. 만약 판단중지가 철저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면, 자아를 더 이상 세계의 잔여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즉 세계를 다 걷어내고 남아 있는 자투리로서의 자아는 결국 세계와 대립하는 하나의 순수한 무세계적 극에 지나지 않는 공리이다. 이미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자아와 소박하게 모든 물체적인 것을 다 추상하고 남는 일종의 순수한 영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24). 이것은 영혼-물체 혹은 정신-신체 혹은 주관-객관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어느 한 쪽을 괄호침으로써 다른 한 쪽의 순수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오래된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박한 신념은 자아의 의미도 세계의 의미도 다 잃게 만든다. 세계에 대한 소박한 신념 자체를 철저하게 괄호침이 없이는 세계의 유의미성을 얻을 수도 없다. 즉 자아로부터 외부세계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신념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순수 자아는 지껏해야 순수 영혼에 머물고 만다. 모든 전제된 타당성을 철저히 억제하는 진지한 수행이 없이는 이 수행에 앞서 주어져 있는 근원적 사태, 즉 자아와 세계는 이미 상관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태가 드러나지 않는다. 후설은 그의 『제일철학』에서 이를 다소 불가적 냄새가 나는 다음 말로 대신한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얻음이다25).” 이런 맥락에서 후설의 현상학적 판단중지는 결국 세계에 대해 지금까지 추정적으로 믿어온 소박한 신념들-‘자명성’이란 이름으로 ? 의 타당성을 일시적으로 그 효력을 중지시키는 절차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를 상실해버린 자아는 세계 속의 주제로 등장할 수 없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세계를 상실한 자아의 기능들로부터 그 의미를 길어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추론의 힘에 의해 쉽게 추상해내려고 한다. 세계를 상실한 자아의 섬으로부터 세계의 구체적 의미를 어떻게 길어낼 수 잇는가 하는 엄청난 수수께끼를 데카르트는 단지 합리적 추론에 호소하여 해결한다.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더불어 세계의 의미는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아니 상실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자 역시 세계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신념은 자아는 이미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지 관계, 즉 지향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현상학적 근봉상황으로서 데카르트적 판단중지에 의해서는 폭로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데카르트는 여전히 심리-물리라는 낡은 이분법적 카드로 승산없는 도박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나/너, 내부/외부, 내재/초월 등과 같은 모든 구별들은 절대적 자아 속에서 비로소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데카르트에게는 은폐된 채로 남아 있다26).

심리학적으로 왜곡된 데카르트적 선험주의, 즉 자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물로 소박하게 생각하는 객관주의의 편견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계기들은 당대의 경험론자들, 특히 흄에 의해 마련된다. 말하자면 진정한 선험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경험론자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로크는 여전히 합리적 정신에 의거해 객관주의적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비록 물체에 관한 인식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이긴 하지만, 물체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음 역시 물체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만으로 완결된 실재적인 것으로, 즉 타불라 라사로서 규정하고 있다. 마음은 단지 공판과 같은 상자이고 이 상자 안에 주어져 있는 감각적 경험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로크에 있어서는, 모든 의식 체험들이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지향성이 고려되고 있지 않다. 버클리는 물체를 단순한 감각의 다발로 규정하면서도 마음을 하나의 독립적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흄에 이르러서는 물체든 마음이든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심리적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들에 실체적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지 심리적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적 범주, 특히 인과율 자체도 연상에 의한 심리적 추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의심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객관적 인식의 파산을 의미한다27). 따라서 흄은 학적 인식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극단적인 회의론에 빠져들었다. 흄은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실증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함으로써 그것을 넘어 학적 인식의 성취과정에 대해 지향적으로 해명해야 할 과제를 회피해버리는 나약한 실증주의자로 대변된다28).

그러나 흄의 이러한 나약한 입장 속에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할 것이라는 객관주의의 맹목적 열정을 동요시키는 진정한 철학적 동기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객관주의적 인식방식에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물론 버클리나 흄의 방식이 내적으로는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든 물체적 자연은 의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세계의 객관성과 그것의 존재의미에 대한 평가가- 비록 흄은 회의론으로 끝나버리긴 했지만 ? 어떻든 의식과의 관계방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데카르트보다는 버클리나 흄에게서 발견된다.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이 아니라 의식의 성취작용에 의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데카르트에게는 고려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세계든 학문적 세계든 그것은 의미 의식작용에 의해 사유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29). 그 당시의 수학화하는 객관주의나 세계 자체가 수학적-합리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객관주의적 신앙이 근본으로부터 흔들리게 하는 내적 동기는 흄을 통해 마련되었다.

이처럼 흄에 의해 동요되기 시작한 객관주의를 합리론의 계열에 서서 새로운 선험주의로 다시 청조하려고 한 사람이 칸트이다. 그가 고백하듯, 흄에 의해 자신의 독단의 잠을 깬 칸트는 이제 전통적인 데카르트인 독단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칸트가 비록 흄으로부터 자신의 독단의 잠을 깨어났다고는 고백하지만, 흄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그리고 볼프로 이어지는 합리주의적 전통 위에 그대로 서 있다. 인식을 성취하는 주관성을 문제삼지 않고서 객관성에 대해 논의하는 개관주의의 소박함, 즉 일상적 경험이든 높은 단계의 학적 인식이든 그것은 결국 의식적 삶의 형성물이라는 사실에 둔감했던 그 당시의 객관주의적 전통을 뿌리 채 흔들었던 흄의 진정한 동기가 칸트에 의해 충분히 발견되지 못했다. 흄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세계의 존재는 주관적 작용에 의해 성취되는 존재라는 수수께기를 어떻게 풀 수 있는가이다. 즉 그는 세계 자체를 주관화하는 철저한 주관주의가 어떻게 주관을 초월하고 있는 세계존재에로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수수께끼 앞에서 차라리 회의론자로 고백하고 만다. 그러나 칸트는 이 수수께끼 자체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았다. 그는 이 수수께끼와 관련된 수많은 전제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30). 칸트에 있어서는 모든 인식의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서 모든 학문적 형성물들이 성취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성찰하려는 선험적 동기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5.의미와 진리의 고향: 생활세계
우리가 진리를 형식적으로 개념적 차원에서 문제삼는다면, 그것은 단지 분석적-형식적 아프리오리만을 주제화하는데 불과하다. 객관적 진리의 논리적 타당성만을 문제삼아 온 전통적 진리관은 객관적 진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영역에 대한 해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실질적 영역을 주제로 하는 실질적 존재론이나 영역적(regional) 존재론은 바로 형식적 진리론의 실질적 토대인 생활세계를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생활세계적 논리학을 현상학적 의미의 선험논리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선험논리학에로 이르는 길은 모든 객관적 진리가 토대하고 있는 생활세계적 경험의 근원적 진리에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 타당성을 발생적 관점에서 다시 묻는 것이다. 모든 객관적 진리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인식론적 지평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선험적 토대인 생활세계적 진리가 가지는 존재론적 함의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소박하고 단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생활세계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아프리오리에 대한 해명이 없이, 논리적이고 개념적 차원에서의 진리만을 문제삼는다면, 단지 술어적 진리에 머무르고 만다. 술어적 진리가 구성되어지는 선술어적 경험의 진리를 단지 상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진리성을 폐기한다면, 모든 객관적 진리의 고향인 생활세계적 경험의 보편적 진리성을 학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 생활세계적 경험의 보편적 진리성은 모든 논리적-객관적 진리들의 타당성을 그 발생적 차원에서 다시 되돌아가 다시 물어야 할 최종적인 법정이다.모든 학문적 진리들이 이 생활세계적 경험의 근원적 진리성과 상호 맥락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대 과학의 합리주의적 편견에 의해 망각되고 말았다. 아무리 순수한 객관적 학문의 자명한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합리성과 객관성에 앞서 주어져 잇는 생활세계의 직관적 명증과 진리성에 그 토대를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근대 과학의 과학주의적 편견에 의해 은폐되어 왔다.

과학과 비과학을 인위적으로 구획지우는 데 급급했던 근대과학주의는 결국 과학과 비과학이 그 발생적 차원에서 서로 관련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말았다. 모든 논리적 명증들을 발생적으로 허물어갈 때 만나는 최종적 토대는 바로 이미 우리가 세계와 친숙하게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바로 직관을 통해 가능하든 사실이 드러난다.모든 객관적 진리는 바로 이 직관적 진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근대철학의 방법론적 편견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모든 논리적 명증들은 매우 복합적인 선논리적 층들 위에 정초지워져 있다는 사실이 형식논리학자나 전통적인 인식론자들에게는 간과되고 말았다. 진리의 문제를 단순히 술어적 질서의 일관성에서 확인하려고 한 전통적 진리관은 진리는 그것을 구성하는 일련의 의식작용과 그 작용들의 지평으로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와 발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술어적 진리들이 진리로서 확증되기 위한 보편적 지반인 생활세계에 발생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채 단지 술어적 명증으로서의 진리만을 문제삼는다면, 이것은 진리 자체의 타당성을 형식적으로 정초하는 것에 몰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후설 역시 자신의 초기 정적 현상학기에서는 진리 자체의 타당성을 형식적으로 정초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진리를 심적 요소로서 규정하였던 그 당시의 심리학주의에 저항하면서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정초하는 일에 오로지 관심을 가졌던 초기 현상학기의 진리관은 아직 진리 자체의 발생적 연관을 묻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발생적 현상학기에 들어오면서, 진리는 바로 생활세계의 보편적 경험에 발생적 토대를 두고 잇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현상학적 진리관이 생활세계적 환원을 통해 진리 발생의 근거를 해명한다는 특징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후설의 선험논리학의 이념은 바로 주관-객관의 이분법적 입벌림이 일어나기 이전의 선명제적 사상적(sachlich) 영역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진리개념으로 새롭게 규명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잇다. 물론 선명제적 영역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진리의 명제적 성격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명제적 진리연관이 발생할 수 있는 근원적 토대를 밝힘으로써 명제적 진리에만 구속되어 있던 전통적 진리관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후설은 결코 언어 자체가 가지는 진리적 성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사유, 그것이 진리 사유라 하더라도 언어적 수행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언어는 단순한 물리적 자연이 아니라, 소위 정신세계 혹은 문화세계의 대상으로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습득적인 부호체계이다31). “언어는 곧 인간성의 지평에 속한다. 인간성은 처음부터 직접이든 간접이든 언어공동체로서 의식된다32).”

이와 같이 진리는 단순히 언어적 질서 안에서 추론되는 일치성이나 무모순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전승되어 오는 생활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 생활세계의 해석으로서의 진리사유는 바로 언어적 수행이기에 이 생활세계로의 선술어적 환원 역시 언어적 수행이며, 언어의 세계성과 세계의 언어성을 지향적으로 드러내려는 환원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진리사유는 진통으로 통해 전승되어 오는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진리사유는 학적 전제를 가지고서 소박하게 해석된 학문적 세계와 선학문적(vor-wissenschaftlich) 생활세계 사이의 근원적 상관관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학문적 세계의 타당성이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생활세계의 근원적 명증을 해명하는 것이다. 모든 학적 명증성들은 이 생활세계의 근원즉 명증(Ur-evidenz)에 토대를 두고 있는 한갓 형식적 명증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진리사유는 결국 근대철학자들에 의해 망각된, 그러나 모든 이론적 및 실천적 학문들의 보편적 지평으로 이미 항상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의 해석학으로 드러난다.

6.맺음말
후설의 현상학적 진리사유는 결국 의미론의 타당 근거에 대해 해명이다. 단순히 학적 원리나 이념의 타당성을 형식적으로 정초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초기 현상학기에서는 아직 발생적 관점에서 진리사유를 철저하게 진행시켜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의미와 진리의 타당성 자체에 대한 발생적 비판을 주제로 삼았던 발생적 현상학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관심은 생활세계를 주제로 부각시킨다. 물론 후설의 진리사유의 타당성정초와 그 타당성 자체에 대한 발생적 비판을 불연속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모든 상대주의적 진리관에 저항하면서 진리의 보편타당성 정초를 위해 선험적 자아에로의 환원을 주제로 삼았던 초기 후설의 관심도 결국 선험적 자아의 지평으로 이미 주어져 잇는 생활세계를 주제화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이었다. 그러므로 후설의 진리사유는 진리 자체가 성취되어지는 일련의 구체적 연관, 즉 진리와 인간적 삶의 구체적인 지향적 연관성을 풀어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후설의 진리사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역사성을 부각시키는데서 드러난다.진리를 한갓 개념과 논리의 질서 안에 묶어 둠으로써 진리 자체의 역사적 성격을 간과했던 전통적 진리관을 비판 ㆍ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진리 자체의 논리적-객관적 타당성을 정초하려 했던 초기 현상학에서는 아직 진리의 역사적 함의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의 타당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후기 발생적 현상학은 진리의 역사성에 대한 해명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술어적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선술어적 진리연관을 자신의 역사로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로서의 판단들은 의미발생, 의미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33).” 진리의 발생의 지향적 해명은 바로 역사적 해명이다. 후설은 “모든 지향적 해명은 그 자체가 역사적 해명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것이고 … 역사의 지평을 함축한다34).” 진리 자체의 소여를 가능하게 하는 발생적 연관에 대한 해명은 진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 즉 ‘전통’이란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지평을 주제화하는 것이다. 명제의 진리는 명제 자체로부터 주장된 진리가 진리로서 입증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지향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이 충족될 경우에만 충분히 인식된다35). 따라서 현상학적 의미에 있어서 술어적 진리성과 선술어적 역사성은 별개의 것일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함의가 고려되지 않은 채, 선험적 주체에 의해 진리가 구성되는 것으로 읽혀질 경우, 진리는 단지 선험적 주체의 논리적 추론에 의해 조작된 무역사적 실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이 진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 진리 자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면, 이제 선험적 주체의 무역사적 반성을 떠나야 한다. 선험적 주체에 이해 구성되어야할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상호 역동적으로 맞물려 있는 곳에서 진리 자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면, 진리사유의 지평을 역사적 맥락 속으로 확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진리가 주체와 객체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다면, 진리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유랑하는 유목민일 수밖에 없다. 단지 기호적 맥락에 갇힌 채 유랑하는 무역사적 진리이기를 원치 않는다면, 진리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와 객체가 허물어진 지향적 공간에서 새롭게 살아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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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 Husserl, E., Logische Untersuchungen, I , Max Niemeyer Verlag, T?bingen, 1968.
E. Husserl, E., Logische Untersuchungen, II - I , Max Niemeyer Verlag, T?bingen, 1968.
E. Husserl, E., Erfahrung und Urteil-Untersuchungen zur Genealogie der Logik,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72.
E. Husserl, E., Formal und Transzendentale Logik,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en Vernunft, 1974.
E. Husserl, E., Die Krisis der europ?ischen Wissenschaften die Transzendentale Ph?nomenologie, Haag:Martinus Nijhoff, 1976.
E. Husserl, Vorlesungen ?ber Bedeutungslehre Sommersemester 1908 Martinus Nijhoff, 1987.
K. Rosen, Evidenz in Husserls deskriptiver Transzendentalphilosophie, Verlag Anton Hain· Meisenheim am Glan, 1977.
E. Tugendhat, 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 Walter de Gruyter & Co., Berlin, 1970.
윤명노, 『현상학과 현대철학』, 문학과지성사 1987.
조주환, "후설의 존재론에 관한 연구", (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87.
조주환·김영필 옮김, 알빈 디머 지음, 『에드문드 후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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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이와 같은 입장에서 후설의 진리관을 연구한 대표적인 논문은 투겐하트의 다음 논문을 참조: Ernst Tugendhat, Der Waht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 Walter de Gruyter & Co., Berlin, 1970.
2) 물론 이 경우 ‘선험적 장으로 되돌아간다’는 표현을 진리를 연역적으로 추론하기 위한 공리인 칸트적 의미의 선험적 통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상학적 진리사유가 요청하는 ‘선험적인 장’은 형이상학적 가설에 의한 무모한 주-객분리가 일어나기에 앞서 진리 자체를 단적으로 붙들 수 있는 시원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주체에 의한 굴절이 일어나기에 앞서 진리-현상이 성취되어질 수 있는 절대공간을 일컫는다.
3) 후설과 마이농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후설의 존재론에 관한 연구”(영남대 박사학위 논문, 1987), 제1장 참조.
4) 후설은 그의 『논리연구』는 자기 스승인 브렌타노가 뿌려 놓은 싹을 꽃피운 것이라고 말한다 (Phaenomenologosche Psychologie, 33면).
5) 『위기』, 236면.
6) 『논리연구』, 제1권, 134면 참조.
7) 같은 책, 134면.
8) 『논리연구』, 제2권의 1, 371면 참조,
9) 윤명노, 『현상학과 현대철학』, 문학과지성사 1987, 59면.
10) E. Husserl, 『논리연구』, 제2권의 2, 122쪽 참조.
11) E. Husserl, 『논리연구』, 제1권, 193쪽.
12) 위의 책, 194쪽.
13) 『논리학』, 제15절 참조.
14) 『위기』, 55면 참조.
15) 같은 책, 같은 면 참조.
16) 같은 책, 75면 참조.
17) 같은 책, 70면 참조.
18) 같은 책, 82면.
19) 같은 책, 87면 참조.
20) 같은 책, 91면 참조.
21) 같은 책, 101면 참조.
22) 같은 책, 112면 참조.
23) 같은 책, 113면 참조.
24) 같은 책, 116면 참조.
25) 『제일철학』,제2권, 166면.
26) 『위기』, 119면 참조.
27) 같은 책, 126면 참조.
28) 같은 책, 127면 참조.
29) 같은 책, 129면 참조.
30) 같은 책, 139면 참조.
31) 『논리학』, 24면.
32) 『위기』, 369면.
33) 『위기』, 184면.
34) 같은 책, 379면.
35) 투겐하트, 위의 책, 24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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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조주환
(Cho, Ju-Hwan)
대구가톨릭대학교
관심분야 : 현상학(Ph?nomenolo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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