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사유와 상상.

[=] 포스트모던 시대의 詩作과 思惟 그리고 그 역할과 기능

온울에 2008. 5. 26. 04:04

목 차

1.들어가는 말 : 태초에 시작(詩作)이 있었다는데...
2.시의 위기는 곧 정신의 위기다.
3.정신의 위기는 상상력의 부재가 원인이다.
4.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철학적 상상력과 철학의 미래상
1)철학함(philosopher) : 無로부터의 창조
2)자유로운 사유 또는 철학함의 자유
3)'주어진 것'의 복원과 실재에로의 회귀
4)철학적 상상력의 개발은 '자연'이 모태이다
6.결론에 대신하여 : 상상력을 통한 인문학 위기의 극복,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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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학술지명 외국문학연구 
ISSN 1226-444X 
권 2001 
호 8 
출판일 2001. 2. 28.  

 

 

 

포스트모던 시대의 詩作과 思惟 그리고 그 역할과 기능
(-H. Bergson의 〈철학적 상상력〉개념을 중심으로)


박치완
홍익대학교 강사
2-417-0101-10

영문요약
The Role and the Runction of the Philosophy and the Poetry face a Postmodern Era : A New Key of the Philosophical Imaginatio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risis of the Philosophy and of the Poetry face a Postmodern Era. I shall argue that this Crisis is related closely to that of the Human being and the Nature. That is why the great number of contemporary philosophers have mentioned at least this Crisis derived from several causes.

But this Crisis could not be solved satisfactorily through the scientific solution. In the light of Bergson, Bachelard, Heidegger, Mallarm?, Rlike, I thy to find, by good luck, a philosophical and poetic solution that makes reference to the Imagination. That is what I try to do in this paper.

This proposition and Key-Word, the Imagination(philosophical-poetic) is, I think, the center for envisaging the Human being with the Nature(Tao), and vise versa. The philosophical-poetic Imagination is, at bottom, just the intermediate between the essence of Nature and the essence of Human being formed by it. Without this Intermediary Imagination, we have no facts and no world. Therfore, we must fallow this Imagination in order to return to such original Encounter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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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는 말 : 태초에 시작(詩作)이 있었다는데...
詩는 시장에서 '소비'되고, 그리고 나서, 쓰레기로 버려지기 위해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마치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philo-sophia)의 고유한 임무처럼, 인간 영혼의 진리와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가치와 그 중요성을 범인들에게 일깨우고 - 다소 도덕군자 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 이를 인간 삶의 거처요 텃밭이라 할 수도 있을 대지(大地), 즉 지상 위에서 꽃피우게 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길(道)을 도모하고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예비(豫備)된 것이었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詩와 철학, 사유와 시작은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1), 이 둘은 또한 동일한 임무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일한 임무란 인간을 본래 태어난 텃밭(la Terre)에서 자연상태(l'?tat naturel)로 살수 있게 배려하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본래 태어난 텃밭에서 인간은 현대와 같이 투쟁이 아닌 사랑을, 소유가 아닌 나눔을, 지식나부랭이(l,opinion ou la doxa)의 소유가 아닌 진리 자체(la v?rit?, la vraie science)의 공유를, 상식에 준한 독설(l'endoxa)로 편견을 길거리에 유포하고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열린 대화를 광장(l'Agora)에서 주고받는, 그리하여 종국에 인간은 이런 자연스런 질서(l'Ordre naturel) 속에서 자신의 삶을 향유(享有)하며 경영했을 것이다2). 그리고 이 때 모든 것은 적대나 차별이 아닌 창조요 창작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부언하자면, 이는 철학적으로는 경이(l'?tonnement)일 것이요, 시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comme chez Rimbaud, H?derlin, Rilke)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근대적 의미에서-계시체험과 같은 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가능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극단적 이기심으로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는 현대처럼 '과학적' 이성3), '경제적' 이성4)이 지배권력을 행사하기 전에는.

이처럼, 다소 거창하게 말해, 우주가 탄생하고 나서는 우주(자연)와 인간 사이에 전혀 간극이나 틈이 없어서 자연의 성스러움(le Sacr? de la Nature)에 대한 합일체험과 같은 것이 가능했을 것이며5),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데, 바로 그때 창조적 시작(詩作)이 시작(始作)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이 최초로 보고, 느끼고, 만진 것을 명명(名命)함, 즉 '이름 붙임'은 곧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들의 始作을 알리는 행위요, 소우주적 의미로는 詩가 탄생하는 순간, 즉 詩作에 비유될 만 하다. 바꿔 말하면, 詩를 지음(po?tiser)은 곧 존재(자)와의 최초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이미 존재ㆍ우주론적 만남이며, 하이데거의 해석에 따르면, 시인만이 이 비밀을 밝혀내고 밝힐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시인만이 존재하는 것에 본래적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6).

이처럼 경이(驚異)로 가득 찬 인간과 자연/세계의 관계, 장식이나 꾸밈이 비집고 들어 설 자리가 전혀 없는 만남이 충만한 세계, 이 모두는 오늘날의 우리가 잃고 사는, 이미 상실한지 오래된, 이상적 '낙원의'세계나 다름없다. 이 낙원의 세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꿈만 같은 얘기로 박제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인이 이렇게 잃어버린, 잃고 사는 신화와 전설시대를 기억으로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어떻게 하면 〈新-유토피아〉로 건설할 수 있을까7)? 詩를 통한 〈新-유토피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인가? 왜 굳이 시인만이 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글은 의식할 겨를도 없이 인간세계의 심부에 파고들어 와 있는 이상(以上)과 같은 세기적 위기의식 속에서(물론 필자가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름의 대안 및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다. 시의 위기는 단순히 시의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신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음 장에서 설명해 볼 것이다. 그리고 시와 정신의 위기는 곧 상상력의 부재에 원인이 있는 바, 이를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점을 제3장에서 살펴보겠다. 제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앙리 베르그손 H. Bergson에게 있어서 철학적 상상력과 철학함의 관계를 통해 이 글의 몸체라고도 할 수 있을 〈철학적 상상력〉 개념을 하나의 지표로 세워볼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시적ㆍ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소박한 믿음을 독자들과 더불어 공유해 볼까 한다.

2.시의 위기는 곧 정신의 위기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인은 과학, 기술 및 전자의 보호망에 갇혀 과거의 낙원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찢기고 파편화된 시간과 가상의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사이보그는 '고향', 즉 '근원'으로부터 멀어진 채, 즉 루크레티우스(Lucr?ce)나 루소(J.-J. Rousseau), 가깝게는 말라르메(S. Mallarm?)가 말한 자연, 자연상태, 본성 등으로부터 멀어진 채, 스스로가 짓고 꾸며낸 '기계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있다. 인간이 自然과 맺었던 관계인 감통(感通)의 교류는 그 흔적을 찾기가 이제 힘들어 졌다. 그리하여 自然이 인간에게 허락했던 경이는 온데 간데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8).

신화적 세계에 이성이 들어서고 나서 이성은 이 신화적 세계를 자신의 폐쇄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의 틀에 쉼 없이 가두려 했다. 그러자 이를 둘러싼 해석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난무했고 급기얀 데리다의 해체주의같은 것이 등장했을 것이다. 문제는 해체주의가 사유논리의 새로움에서보다는 말발(une rh?torique nouvelle)로 '포장된' 새로움일 뿐이라는데 있다. 엄밀히 말해 이는 신(新)논리가 아니라 논리에 대한 반(反)논리(l'anti-logique ou la logique illogique)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 특히 해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과연 '과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해체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9).

이렇게 현대인은 自然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고향을 떠남으로써, 자연상태를 거역함으로써 자신에게 고유한 거의 모든 것을 상실한 채 극으로 치닫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에게 "혹 詩를 감상할 일말의 여유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우문(愚問)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미 시심(詩心)을 잃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고유한 텃밭에 비본래적인 것들이 밀치고 들어선 게 그 원인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自然에 이르는 통로는 막히고 그 자리에 인위(人爲, 人僞)가 소통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 아닌가! 온갖 물질적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도(人道)를 번지르르하게 닦았을 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생래적(生來的)이자 성명적(性命的)이라 할 천도(天道)는 완전히 막힌 것이다10).

현대인의 원초적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본래의 터〉, 즉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자연스런 만남의 場이 투쟁의 場으로 바뀌고, 인간이 빵과 밥을 벌어야 간신히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詩作은 기호들의 유희로 오염되었다. 그리고 철학은 현란한 개념의 장식들로 탈바꿈해 버렸다.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자연이 사고 팔 수 있는 매매 수단쯤으로 둔갑해 버린 이 시대에 물질은 풍요로워졌을지 모를 일이나, 바로 그 자리를 "정신의 빈곤"이 정확하게 들어선 것이다11). 정신이 비인 그 자리에 물질이 차고 넘침,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는 곧 인간 정체성의 총체적 분열ㆍ붕괴를 의미하며, 푸코(M. Foucault)가 말한 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적 "주체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12).

결과적으로, 본래 있어야 할 것, 본래 구해야 할 것이 전자시대, 기술과학시대, 이성중심의 시대에 직면하여 재앙의 덩어리로 둔갑한 셈이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플라톤이 『정치가』 편에서 극화(劇畵)하고 있는 황금시대, 성경의「요한복음」에서 말한 낙원 시대 그리고 도가(道家)의 무릉도원(武陵桃源) 시대를, 유 평근 교수와 진 형준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삶에 결여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언제나 가능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고13) 믿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거역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변화를 어떻게 변화로 직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변화를 직시한다는 것과 변화를 거역한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주역』에서 말하듯 "생생함ㆍ새로워짐ㆍ삶ㆍ생명"의 온전한 의미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14). 후자는, 이에 반해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과 서양에서 변화를 따른다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동양에서 변화를 따른다는 것은 변화의 내적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요, 서양에서는 이 변화를 고정시켜 인간이 이에 적응해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적응론'은 자연을 황폐화시키는가 하면, 인간을 획일화시키고, 지구촌 전체를 일원화시키려는 등 다분히 부정적인 결과들만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현재의 삶에 결여된 것",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복원해야 할 것은 서양의 관점에서 추구해 온 변화에의 적응이 아니라 "생생함ㆍ새로워짐ㆍ삶ㆍ생명"을 복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말을 바꾸면, 버려야 할 것은 바로 "생생함ㆍ새로워짐ㆍ삶ㆍ생명"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 될 것이다. 때문에 서구인에게는 〈新-유토피아〉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 동양인에게는 결국 자연의 道를 따르는 것이 다시 요구된다 하겠다.

그렇다면 왜 〈新-유토피아〉가 필요하고 자연의 道(自然之道)가 현대인에게 필요한가? 그것은 하버마스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바, "과학에 의해 식민화된 (우리의 생활) 세계를"15) 복원시키기 위해서 이다. 과학화된 이성(또는 경제적 이성)이 우리에게 미끼로 던져주는 것은 물질적 풍요나 생활의 편의일 수는 있겠으나, 살진 고기를 먹으며 다투는 것보다 나물을 먹으며 행복할 수 있는 묘법(妙法)을 인간에게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月石花鳥와 더불어 행복했고 풍요로웠던 시절이 우리는 그리운지도 모른다. 감각을 자극하는 것, 계산할 수 있는 것, 분별, 경험으로 한정되는 것, 이런 것들의 이면에, 쉽게 보이고 만질 수는 없으나 무궁ㆍ무한한 내면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이를 우리에게 상기시켰던 위대한 시인이며 철학자가 그래서 그리운 것 아니겠는가! 릴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여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부에 공간을 만드시오. 그리고 이 세계와 내적인 세계가 만날 때까지 세계를 내재화시키시오. 그러면 시는 가장 깊은 실재 속에서 세계의 거울이 될 것입니다16)."

하이데거의 말대로,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내부ㆍ내면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사유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에 처해 있다17). 이는 임시방편으로서의 땜질이나 단순한 미봉책을 넘어선 "전면적인 사유의 전환, 행동의 전환"이어야 할 것이다. 정신적 내면세계를 되찾기 위해서. 변화를 변화로 익히고 닦아 "삶ㆍ생명"을 폐허화된 이 땅위에서 다시 구현하기 위해. 과학에 넋을 놓고 있는 자들에게 과학은 인간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환기시켜주기 위해. 도구적 목적을 위해 추구되는 앎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상하고 전쟁을 일삼는데 쓰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머나니 예술가여, 철학자여 어찌 더욱 분발하고 굳세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18)!" 철학자여, 예술가여 자연을 향해 눈을 돌려라! 자연을 향해 마음을 열라, 그리하면 자연도 그대들에게 은총과 사랑을 베풀지니19)! 이 기상 교수의 아래 지적은 그래서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학과) 기술만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연에 성스러움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자기의 편함을 위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는 기술인(homo technicus)내지는 공작인(homo faber)의 탐욕스러운 이기심에서 벗어나 시인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방법을, 예술가의 손길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2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는 지금 분명 추구해야 할 것과 추구해서는 안될 것이 제 멋대로 섞인 그런 혼돈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인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전면적인 사유의 전환"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자각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詩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이 글의 서두를 꺼냈던 것이고, 이를 넓게 보아 〈인간 정신의 위기〉와 동연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21). 그렇다면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인간의 영혼이 수학화되고 수량화될 수 있다는 과학적 믿음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22)? 디지털 문화, 양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취한다는 것은, 다시, 인간 이 정신을 차린다, 본연의 길을 찾는다는 뜻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영영 과학과 도구적 합리성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되찾자. 내면 세계를 복원하자. 서구의 논리를 버리자. 정신의 자리에 (이)물질이 들어섰고, 내면의 자연(自然)세계가 인공세계에 의해 위협ㆍ지배받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23)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제 길을 잃은 문명의 파행(跛行)이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제 정신차리지 못한데 그 일차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는 재차 강조하건대 〈인간 정신〉의 위기요, 〈삶의 질〉에 대한 위협이다.

가공스러운 이와 같은 정신의 위기 앞에, 자연의 "성스러움"이 상처 난 이 시대에24), 인간이 詩를 통해 향유해왔던 삶의 질, 정신적 풍요와 여유를 시각화되고 감각화된 문자ㆍ기호들의 유희에 내맡기고서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예전의 詩가 花,島月石과 더불어 누렸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다면, 단순한 시대착오적 발상에 그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자연(Physis, Natura)과 더불어 누렸던 서정(抒情) 그리고 시심(詩心)은 단지 지난 날의 향수정도로 폄하되어도 되는 것일까25)? (아니다)항간에 떠도는 말에 따르자면 문학이 밥을 벌기 위해 가상의 사이버 공간에 웬 '홈'을 마련하고 있다는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시와 문학(예술)은 과연 예술무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무용한 것일까?(아니다)

소비중심사회의 그물망에서 우리는 詩를 구해내야 한다. 인간을 구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인간과 자연이 소비의 지배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6). 詩의 창조자, 자연의 옹호자, 시인이여, 그대는 시대의 걸인이 아니라 구원자가 아니었던가! 이 시대의 "시인이 아무 것도 아닌 것"27)이라 평가받아서야 되겠는가! 삶을 향한 비전이 불투명한 이 시대, "신화가 사라진 (이) 사회"28)에서 자신이 소속된 사회로부터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시인이여!

3.정신의 위기는 상상력의 부재가 원인이다.
우리는 시인을 대지에서 추방시킨 공범들이다. 현대의 물질ㆍ소비의 신화에 일익을 담당한 것도 바로 우리들이다. 문제는 더더욱 이런 유래 없는 비인간화, 물질만능의 경향에 놀아나며 거꾸로 가는' 세계에 '적응하여' 살기를 교사하는 담론들이 너절하니 문제다29). 당면한 위기의 벼랑에서 함께 그 늪으로 뛰어 내리자고 권유하는 봉사님들이시여, 변화해야 할 것과 변화해서는 안 되는 것, 구해야 할 것과 버려야(비워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왜냐? 물질이 정신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물화된 기호가 시며 문학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되살리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데 우리의 고민을 집중시켜야지, 덩달아 세계가 수학화, 양화, 기호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위험하다.

다시 말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물질 중심의 사회이지 月石花烏와 더불어 살다간 철학자, 예술가가 아니다. 〈Re-former〉해야할 것은 점점 물화(物化)되고 기호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지 月石花烏가 아니다.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서 강조한 自然은 더더욱 아니다. 시와 문학을 통해 받았던 감동이 아니다. 성스러움이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이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몰가치적 '기계심'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흐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병들어 있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라고 재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30). 문제는 시와 시인을 버린 이 사회, 이 시대가 문제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술가, 철학자가 이처럼 광기를 앓도록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31). 그들이 대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초대하여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이들은 이미 '헛도는'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말라르메같은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

"가자, 저 멀리 가자! 새들은 미지의 파도와

하늘에 취해 있구나!

(...)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32)!"

이들이 지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이들을 붙들어야 한다. 아니, 이들에게 겸허히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것,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바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예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라르메를 인용하면 : "모든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멜로디이다33)."

그런데 시인이 거하는 이 세상(ce monde)은 불행히도 시인에게 이와 같은 영혼의 소리를 노래하고 알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라르메는 "이국의 자연"을 향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위 인용된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국"이 아니고 "자연"이다. 시인 말라르메는 자신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자연"을 갈구하고 있다. 바로 그가 사는 곳의 "자연"이,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낯선 자연이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그는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곳에서 찌든 자신의 영혼을 "되찾기(renouer) 위해"34), 역설적으로 "'이국의' 자연"을 향해 떠나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시인은 "자연"의 부름에 자신의 영혼이 응답35)할 수 있기를 원한다. 더 정확히는, "시인은 자연에 대답할 때 시인(하이데거)"36)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말한 대로 "道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37)." 道는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단지 인간이 이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되찾아야 한다고 동ㆍ서양의 시인, 철학자들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일종의' 진단을 통해 필자가 다다르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시인과 '

자연' 철학자들을 무턱대고 추대ㆍ추앙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이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시인이며 철학자는 직면한 정신의 위기 앞에 함묵(含默)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그저 홀로 '저' 세상으로 떠나려고만 해서는 안될 것이기에. 결국 이들도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에 적극 대처해야할 것이기에. 인문학적 상상력(좁게는 시적 상상력)은 과학ㆍ기술중심의 사회의 그늘에서 "제대로 피지 못했던 정신의 꽃을 다시 가꾸는 정신이며"38),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기술지배의 폐쇄회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줄 것이라 믿기에.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상상력〉엔 벽이 있을 수 없다. 상상력은 가두리를 늘 벗어난다.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는 힘을 인간에게 준다. '국경 없음'이 본디 상상력이란 개념이 갖는 본질적 의미다. 좀 거칠게 이야기해서, 상상력은 벽을 부수고 뚫는 강한 '정신적'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의 표현(exprimer)이 시이고 문학이며 철학이다. 때문에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상상력은 이런 몰가치적, 비인간적 전자-상황에 대항할 태세를 갖추어야 마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상력은 이런 위기를 치료할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갖는 "저항의 역할", 나아가 미래사회를 위한 "예견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39). 시장바닥의 경제논리에 내몰린 시인, 기술문명의 주위를 배회하는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한 계몽적 차원의 무기, 그것은 '필요 불가한' '정신적' 무기로써 과학ㆍ기술문명에 상처 입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라면, 철학자도 철학자지만, 특히 시인(le po?te, l'homme du po?me)의 상상력은 현대의 인문 정신의 위기를 施術하기 위해 충분히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시인의 언어는 인간 존재의 심층을 뒤흔든다. 그 이유는 바로 시인이 그곳(거기)에 접근해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40)."

시인의 상상력은 결단코 무용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시인은 깨어있으며(l'?tre ?veill?) 미래를 예견하는 者이다. 그래서 혹자가 믿는 바처럼, 시인이 노래한 세계가 "말 많으니, 수학화" 되어도 좋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또 그렇게 정신의 가치가 물화ㆍ양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변질되고 소실된, 파괴된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켜줄 것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한 바, 기술에 의해 가리고 은폐된, 망각된 존재를 되찾게 해줄 것이다41). 시인의 상상력은 이처럼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근원적 물음과 그 대답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이런 척도에서 볼 때, 21세기의 '디지털적 상황'에서도 시인은 존재해야 하고 시인에게는 막중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42). 인간의 깊고도 깊은 심오한 상상력의 수정체인 시, 언어의 꽃인 시, 영혼의 멜로디인 시, 인문학의 어머니이기도한 시, 시인은 바로 이 시적 언어를 되살림과43) 아울러 현대인이 망각해서는 안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까지도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4.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철학적 상상력과 철학의 미래상
우리는 이런 시대사적 상황, 기술문명의 폭력 앞에서 더 이상 기재(旣在)의 세계를 (기술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하기를 멈추고 세계를 보다 새롭게 창조하기를 꿈꾸어야 한다. 시인이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물질로 끼어 인간과 자연의 내밀한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문명의 휘장들을 걷어치우고 '인간심'을 그 근원에로 안내하는 것이 시적, 철학적, 인문학적 상상력의 목표여야 한다. 시인과 철학자는 상상력을 통해 이 이질적인 것을 깨부수고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만남에로 인간을 인도해야 한다. 이 때의 상상력은 분명 위기의 처방으로써의 상상력이고, 왜곡된 세계관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상상력일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에 우리가 거는 기대는 일시적 미봉책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새로운 인간학의 재구성을 위한, 그러한 근본적 기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의 경우도 그 상상력이 창조적일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기술ㆍ전자시대 앞에 무릎을 꿀수밖에 없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이와 같은 전자ㆍ기술이 지배적인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한 발 앞서, 우리에게 이에 저항하라고 경고했던 것이며 자신의 철학함을 無로부터의 창조(use cr?ation ex nihilo)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44). 그리고 이는 철학함이 근본적으로 그 어떤 이론, 그 어떤 체계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철학함(philosopher) : 無로부터의 창조
베르그손에 있어서 철학함은 無로부터 有의 창조이다. 이를 위해 그가 추구했던 세계는, 당연 고정불변의 것에 대한 해석ㆍ재해석이 아닌, 생성과 변화이다. 그에 따르면 생성과 변화에 닻을 내리고, 이를 해독해 내는 일이 철학의, 철학자의 본래 임무이다. 생성과 변화의 세계에 닻을 내리고 있음으로 해서 그의 철학은,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식을 권력으로 취하려 하는 과거의 철학들과는 구분되며, 미래를 위한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베르그손의 철학적 상상력은 논리/이성/기술/체계/시스템 등 사유의 자유(la libert? du penser)를 가로막는 모든 사변 철학의 습관적 폐쇄성에 대항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유자체도 변화를 꾀하는, 〈무르익어 가는 철학 une philosophie ?volutive〉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르익어 가는 철학〉이란 근본적으로 끝없이 스스로를 창조해 가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사유와 운동』에서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

"형성되고 있는 것에 파고들라, 유동하는 것을 추적하라, 제 사물의 활기인 생성을 취하라(entrer dans ce qui se fait, suivre le mouvant, adopter le devenir qui est la vie des choses)!" (Oeuv : 1362)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철학함은,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선배들의 철학함과 아주 색다르다. 베르그손은 선배들에 의해 전승된 과거의 철학을 과감히 無로 놓고 본인이 만들어 가는, 완성해 가는, 자신에게 고유한 철학을 지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textes)에 대한 재해석이 아니라 생성, 변화와 더불어 〈무르익어 가야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기존까지 있어 왔던 세계관으로서의 철학, 체계다듬기로서의 철학, 문명에 봉사하는 철학,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철학에 철저히 맞서고 있다. 때문에 베르그손의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황당무계한 이야기(le Grand-r?cit)"나 "무언가 거창한 것(le Grand-chose)" 등을 잣대로 들이대서는 안 된다. 이것들 자체가 베르그손에게는 하나의 철학적 환상이다45). 그래서 그는 감히 無로부터 有를 창조해내는 철학을 자신의 사유의 핵으로 기도했던 것이리라.

2)자유로운 사유 또는 철학함의 자유
베르그손에 따르면, 철학은 기존의 논리나 체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사유 그 자체가 또한 철학의 근본목표여야 한다. 자유로운 사유만이 변화와 생성을 참구(參究) 할 수 있을 것이며 "예측불가능한 새로움(l'impr?visible nouveaut?)"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바로 이러한 사유 '규칙'(굳이 이름 붙이자면)을 '새롭게' 세우는데 있다(Oeuv : 1344참고). 그렇다면 왜 베르그손이 창조로서의 철학함이라는 기치아래 자유로운 사유, 철학함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는 이를 「과학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실재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

"철학의 대상은 측정되지 않는다. 철학의 영역은 자유의 영역이며 창조의 영역이다. 이는 곧 정신의 영역이란 말과 같다. (...) 정신은 과학의 영역과 확연히 구분되며, 그 이유는 철학이 하나의 사유 대상을 취함에 있어 그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인 그 자체로 번성함과 그 대상에 담보된 모든 것을 구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상에 (현재)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이는 대상자체가 번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M?l : 887)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창조적 진화』에서 자신의 철학 여정을 한마디로 "난 그래서 끝없이 내 생각을 바꾼다"고 했을 것이다(Oeuv : 495). 여기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끝없이 자신을 창조한다"(Oeuv : 500)는 것과 같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이렇게 끝없이 창조하고 창조되는 과정이다. 철학자 스스로도 이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나가고 완성시켜 나간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베르그손에게서 취할 수 있는 "新철학(un rationalisme renaissante)"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왜 철학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지, 철학이 재구성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취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가 베르그손과 더불어 이제 우리의 물음이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생각을 인용해 보자:

"창조만이 철학함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넓혀갈 수 있을 유일한 대안이다. 이제 철학은 수선된 골동품이기를 거부하고 진정으로 창조된 작품이기를 꿈꾸어야 한다. 왜 인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일차적으로는 사유의 대상이 변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경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들이 〈끝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오기 때문이다."(M?l : 1203)

3)'주어진 것'의 복원과 실재에로의 회귀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르그손의 철학은 한마디로 철학적 상상력이 근본 축을 이룬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양성의 추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동질성의 형이상학, 동일성의 논리는 당연 자신이 추구하려는 '참된' 철학의 지표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정신의 위기도 바로 이 동질성의 형이상학과 동일성의 논리가 낳은 위기가 아니던가! 이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하려면, 그래서 철학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이질적이다"(Oeuv : 1369)는 점도 부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동질성의 형이상학과 동일성의 논리가 담보해 내지 못한 이질적인 것에의 접근은 비대상적 추상성을 추구하겠다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46). 베르그손이 말한 無로부터 有의 창조, 변화와 생성의 추구, 철학함의 자유는 철저하게 우리 앞에 주어진 것(le r?el, le donn? ou le concret)의 내부-연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주어진 것〉은 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주어진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주어진 것〉은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일시적, 감각적인 것도 아니오,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요, 실재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그 자체가 모든 사유의 기원이며 모태인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베르그손이 말한 〈주어진 것〉은 실재(la r?alit?)와 동명동의(同名同意)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바로 이 "실재의 벗이다. "(Oeuv : 1367) 그리고 진리의 구체성과 진리-내용이 바로 이 실재에서 구해진다.

이 실재에 대한 근원적 경험 및 체험, 고스란히 관념론적 철학사 속에서 간과되었거나 아직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바로 이것을 다시 사유함(repenser de l'impens?), 여기에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철학의 변별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왜 그가 철학이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바로 이 실재에 대한 고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철학적 '창조'는 바로 〈주어진 것의 복원〉과 〈실재에로의 회귀〉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베르그손이 말한 '창조'는 〈주어진 것〉과 〈실재〉를 위한 창조 행위이다. 도대체 철학사에서 이 〈주어진 것과 실재〉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여47) 우리는 결국 베르그손의 無로부터 有의 창조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유동하고 살아 있는, 그렇게만 늘 주어지는 것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을 〈운동으로서의 철학〉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48) 이렇게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철학은 사유의 끝 모를 운동이기도 하다. 운동으로서의 철학이란, 앞서 이미 언급한 〈무르익어 가는〉 〈생성ㆍ변화하는〉철학과 괘(卦)를 같이하며, 인간 정신의 고유한 활동에 충실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유대상의 문제가 사유주체에 관한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해, 유동하는 것(le vivant et le mouvant)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철학이 '창조되고',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이 이를 수용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철학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미래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철학적 상상력의 개발은 '자연'이 모태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인문학(문학, 철학)의 위기는 베르그손의 사유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베르그손의 지도대로 철학적 상상력의 개발에 혼신을 다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베르그손의 사유 내에서의 철학적 상상력은 예술가의 창작행위, 시인의 시작(詩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예술 일반이 美를 추구하고 철학이 眞理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둘이 구분될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베르그손에 있어서는 이 서로 목표점이 다른 행위가 부단히 '창조'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지향점이 같다고 할 수 있다49). 그리고 앞서 확인했지만 베르그손에게서 철학적 행위는 〈無로부터 有의 창조〉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는, 예술행위 자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창조에 반한(contre la cr?ation) 모든 '이론 또는 체계'는 이렇게 베르그손이 보기에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력을 가로막는 암적 요소였을 것이기에 말이다.

〈철학함이 곧 창조함〉이란 기준에서 볼 때 당시의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일변도의 철학이 베르그손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얼마나 철학을 이와 같은 위기 상황으로부터 구출하고자 노력했을지도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또 그가 얼마나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만남을 재건하려 했는지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제 철학은 되젊어져야 한다, 마치 삼라만물(森羅萬物)이 끝없이 나고 죽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되젊어지고 있듯이. 베르그손이 보기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는 철학자란 자들이 도대체 포기하기를 싫어하는 관념이거나 개념들이다. 즉 변화와 생명이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고정된 것들이 바로 관념이요 개념들이다. 이 점을 베르그손은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에 관한 시편De Rerum Natura』을 해석한 자리에서 (M?l : 265-310)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50).

베르그손이 왜 루크레티우스를 재해석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리 복잡한데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사에서 에피쿠로스와 더불어 원자론자요 감각주의자며 유물론자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베르그손이 보기에 루크레티우스의 시편들(철학적 글) 속에는 근대인들이 간과한 위대한 사상이 감추어져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어진 것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정신이며, 인식과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 정신이고, 생성ㆍ변화를 따르는 정신이다51). 다시 말해 루크레티우스는 근대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미분된 사유"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를 풀어보면, 그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자연은 인간을 호흡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영혼은 신체의 한 부분이며, 영혼도 물질처럼 나고 죽는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서 베르그손은 근대 이후의 철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자연-철학의 힘과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의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이러한 정신은 자연에 관한 교훈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두려움과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태양 광선도 아니오, 낮의 밝음도 아니며, 오직 자연과 자연의 법칙을 꿰뚫어 보는 것뿐이다. "(위의 책, 1권 746)

분명 루크레티우스는, 베르그손의 표현대로, "위험한 친구"(M?l : 268)였고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이교도적, 혁명적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는 (종교적) 규율보다는 (이 로부터의) 자유를, 운명에 종속되기보다는 이에 저항하여 싸우기를, 필연보다는 우연을, 모방보다는 창조를, 선택받기보다는 선택하기를, 죽은 뒤의 영생보다는 삶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런 자연이, "철학자요 시인이며 자연학자이기도 했던 루크레티우스"(M?l : 266)가 볼 때,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며 완전히 손상되어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신의 자비와 섭리"52)가 모든 사유의 규칙이자 근 거였다. 때문에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연과 자연의 법칙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베르그손과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도 "우주(세계)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끝없이 형성되어 간다. 세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새로운 세계의 첨가에 의해 확대될 것"(Oeuv : 700)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자면, 이성을 굳게 믿는 인간의 人爲(人僞)가 "형성되어 가는 것"으로써 자연을 따르기보다 지배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경고가 될 것이다. 즉 "형성되어 가는 것"으로써 자연을 거부하고 이에 조화가 깨지면서, 다시 말해, "서구적 사고방식의 산물인 기술과 과학이 지배하게되면서53)", '원래의' 자연, 즉 '자연의 자연'이 人僞的 자연에 의해 지배되면서 우리의 생활세계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부언하면 인간이 '자연'의 자리에 '인위'를 세움으로써 〈자연〉에 탈이 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위의' 자연은, 결국, 인간을 인간됨에서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이는 순전히 인간이 불러들인 위기이며, 이른바 테크노크라시의 탄생과 더불어 이 위기는 증폭되고 있는 실정인 것 같다. 기술의 바다, 정보의 그물망 속에서 인간은 마치 '부품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이미 자신의 본질(自然)을 망각하고 있다. 사유의 주체이기를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 물신시대의 인간은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교환가능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허구적(人僞的) 상황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해 바슐라르가 말한 地, 水, 火, 風과의 대화를 재기하는 것54), 하이데거가 강조한 人僞가 들어선 자리에서 다시 自然의 오묘함을 시인을 통해 회복시키는 일, 루크레티우스가 예시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을 꿰뚫어 보는 일, '정신없는'세계에 정신을 되찾게 해주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추구하지 않으면 안될 철학적 과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적 상상력의 역할은 더욱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하겠다.

6.결론에 대신하여 : 상상력을 통한 인문학 위기의 극복, 가능한가?
"상상력은 정신적 생산력 그 자체이다55)." 바로 이 상상력은 인간 모두가 "행복한 인간"이 되기 위한 모태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맺음방식에 드리워져 있는 장애물을 벗겨줄 사유의 새로운 원동력이다. 이 상상력은 물신시대의 인간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시인과 철학자는 바로 이러한 자연을 '따르고' '밝히는' 자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생각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月石花烏는 자연의 '것'이므로 이를 지배하려는 발상은 버려야 한다. 오죽했으면 베르그손은 "(인간의, 철학자의) 정신은 자연을 낳지 못한다"(M?l : 404)고 했을까! 그런데 만일 인간이 자연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쯤으로 착각한다면, 이 때 인간의 정신(나간 정신)은 마치 칸트나 헤겔에서와 같이 자연을 인위적 정신의 법칙들에 종속시키려 할 것이 뻔하다. 이를 단호히 거부한 베르그손은, 그리하여 "자연은 우리의 사유의 노리개가 아니며, 더더욱 우리의 사유는 자연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ibid.)고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자연을 인식의 수단이나 도구로 포획하려는 철학자들의 기존의 시도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며, 축소된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의 자연을 우리는 다시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철학적 상상력이 과학ㆍ기술만능주의가 몰고 온 철학,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 대안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를 심화시켜 보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위기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의 수단으로 생각함으로써 생긴 것이라면, 철학적 상상력이 비본래적인 것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순화하고(purifier) 승화시키는(sublimer)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은 고수하고 싶다. 필자는 바로 상상력이 인류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 보일 근원적인 힘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도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인간은 데카르트식으로 말해 〈분명한 것〉보다는 "다양한, 일시적 '인상들'을 갖고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인상들이 단지 허황된 것들(r?veries)이라고 매도해 버려도 되는 것일까? 매 순간 나는 사물들 주위에서 꿈꾸고(...) 상상한다. 꿈과 상상력의 현전(pr?sence)이 과연 어떤 문맥(contexte)과 비교가능한지? 왜냐하면 이것들이 세상의 것(au monde) 과 혼재하지 않고, 세상 이전의 것(avant du monde) 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상된 것(l'imaginaire)은 사유의 보고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56)!"

그런데 불행히도 철학, 인문학 전반의 위기를 진단함에 있어 철학적 상상력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글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본고에서 상상력이라는, 철학영역에서는 아직은 낯설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길을 택해 외적 미봉책으로써가 아니라 근본적 치유책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철학의 영원한 모태는 제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정신적인 것의 가치구현에 있을 것이다. 정신적인 것의 가치, 즉 철학이 바로 이 내면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꾸고 일군다면 그 어떤 외적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정신은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정신이며 비판하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상상력은 반성적, 비판적 의미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결코 뜬구름 잡자는 소리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할'이 기다려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지상을 떠난다면, 우리에겐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철학이 사라진 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더욱 위협적 상황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옛 선철들이 추구했던 '자연심'을 재음미할 때이다. 그들의 詩□에 우리의, 머리나 뇌가 아닌, 가슴을 내맡기어 자연과의 내면의, 비밀스런 대화를 추구할 때이다.

"시인은 (결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redire) 者가 아니다. 그에겐 과거가 없다. 그는 미래 속에(dans un monde nouveau) 존재하며, 과거와 이 지상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서 절대적 승화를 실현하고자 한다57)."

글을 마감하면서, 한 철학자가 쓴 시 한 편을 음미하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 :

"아! 이 세계는 얼마나 넓고, 비어 있고, 또 아름다운가!

폐허 속에서도, 각처에 산재한 아름다움이여!

(...)

오! 가련한 나의 우주여!

내가 그댈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댄 아는가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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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 Desanti, "La raison scientifique", in Philosopher t. 2, Fayard,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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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Mallarme′,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e`s, Gallimard coll. 《Poe′sie》, 1976.
M. Merleau-Ponty,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Gallimard, coll. 《Tel》, 1989.
J.-L. Nancy, L'oubli de la philosophie, Galile′e, 1986.
Cl. Rosset, Le re′el et son double. Essai sur l'illusion, Gallimard, 1984.
E. Le Roy, "Sur la logique de l'invention", in Revue de Me′taphysique et de Morale 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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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위기'에 처한 인문학(철학)의 부활을 위해 가스통 바슐라르(G. Bachelard)의 '시적 상상력' 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가 말한 시적 상상력은 단순히 문학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철학과 시, 과학과 문학을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과학'으로 요약할 수 있을 그의 사상은 이렇게 새로운 합리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새로운 과학 정신을 '창조적' 상상력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대한 국내의 참고문헌으로는, 『철학』제30집(1988 가을)에서 특집으로 다룬 바 있는 〈철학과 문학 사이〉가 있고, 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김병옥 교수의 정년퇴임기념논문집으로 엮어낸 『문학과 철학의 만남』(믿음사, 2000)이 있으며, 단독 출판으로는 박이문 교수가 2년간(1994-1995)에 걸쳐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글들을 한데 모아 출판한 『문학과 철학, 삶의 텍스트』(민음사, 1995)등이 있다.
2) 박희영, 「서양 고대 철학에서의 철학함과 우리의 철학함의 전형」, in 『철학과 철학사』, 한국철학회 편, 철학과 현실사, 1999 참고.
3) J.-T. Desanti, "La raison scientifique", in Philosopher t. 2, Fayard, 1980, pp. 71-82 참고.
4) '경제적 이성'(une raison ?conomique)이란 표현은 필자가 임의로 창안해본 것으로, 바로 이러한 '경제적 이성'이 오늘날과 같이 비인도적이고 비윤리적인 소비중심의 사회를 조장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5) 박희영, 「종교란 무엇인가?-고대 신화와 의식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in 『서양고전학 연구』, 한국서양고전학회 편, 1999 참고.
6) "시인은 신들에게 명명(nomination)하고 그것들이 있는 바대로 모든 사물들을 명명한다. 이 명명은 앞서 이미 알려진 것이 하나의 이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본질적인 말을 말함으로써 이것의 명명을 통해 존재자가 비로소 그것으로 있는 바로 명명되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으로써 알려진다. 시짓기는 말을 가지고 존재를 건립하는 것이다."(하이데거, 「횔더린의 시해석」, in 『전집』 제4권, p. 41(Vittorio Klostermann, 1981) - 위 문장의 선별과 독일어 번역은 하이데거를 전공한 김재철 박사의 도움을 받은 것임.
7) 유토피아(l'Utopie)에 대해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이의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요컨대 "객관적 현실로서의 유토피아는" "실현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에 결여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유토피아는 "언제나 가능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유평근ㆍ진형준, 『이미지』, 살림, 2001, pp. 41-42 및 p. 42의 주 11). 이런 의미로 재해석 된 시각에서 필자는 〈新-유토피아〉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8) 일찍이 말라르메같은 시인은 이에 대해 "La crise du vers"에서 지적한 바 있다(in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s, Gallimard, coll. 《Po?sie》, 1976, pp. 239-252. 말라르메의 시 세계 전반에 대해서는, 최석의 『말라르메. 시와 무(無)의 극한에서』(건국대학교출판부, 1997) 참고.
9) 이에 대해서는 졸고, 「철학적 글쓰기에 나타난 '문학성'에 대한 재고」, in 『미네르바』2000겨울호 참고.
10) 김충열의 「'性命 人間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면서」, in 『시와 생명』 제3호, 1999년 겨울호 참고. 저자는 이 글에서, "인문세계가 발달하면서" "인간과 자연 관계", "하늘과 만물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이렇게 인간은 天道와는 무관하게 人道만을 닦아온 것(같은 글, p.41)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1) 정주환,「21세기 한국문학의 위상 - 삶의 基地로서의 文學」, in 『비평문학』, 제14호, 한국 비평문학회 편, 2000, p. 324.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반영하는 삶의 거울이요 제2의 인간이다"(같은 글, p. 329). "문학이란 문자 행위는 인간 정신을 주제로 한 순수 정신의 틀이며 불꽃이다"(같은 글, p. 328). 이런 취지에서 그는 문학을 회복하는 것은 곧 삶을 회복하는 것, 인간을 회복하는 것, 인간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자 나아가서는 인간 삶의 거처인 지구를 되살리는 것이라고까지 자신의 문학관을 확대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 이에 대해서는 캉기옘(G. Canguilhem)의 "Mort de l'homme et ?puisement du Cogito", in Critique, n º 242, 1967 참고.
13) 필자의 주7) 참고.
14) 박정근,「중용(『中庸』) 연구(1) - 잔잔한 삶, 깊은 미소」, in『인문학연구』, 한국외국어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2000, p. 199.
15) 이기상, 「다문화 시대에 문화의 새틀 짜기 - 해석학, 화용론 그리고 사건학」, in 『문화와 사람』, 2000년 7월, 사계절출판사, p. 124에서 재인용.
16) Rilke, Les ?l?gies de Duino, Ⅶ - 박선자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살펴 본 시적 행위와 철학적 행위」, in 『철학』제28집, 1987 가을, p, 159에서 재인용.
17) 하이데거, 『기술과 전향』, 이기상 역, 서광사, 1993, 참고.
18) 이는 공자의 "士不可以不弘毅, 任重面道遠"을 김충열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여 필자가 약간의 해석을 덧붙인 것임(같은 글, p. 43)
19) 이기상,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철학과 현실사, 1999, p. 329 : "이러한 전향의 자세를 갖춘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해 자기의 의지만을 관철시키려 드는 정복자나 지배자로 행세하려 하지 않고, 자연의 은총에 힘입어 자연의 사랑 속에서 자연을 아끼며 살아가는〈존재의 목동이며 파수꾼〉이기를 선택할 것이다."
20) 이기상,「기술시대의 예술」, in『삶ㆍ윤리ㆍ예술』, 이문출판사, 1997, p. 72.
21) 이는 단순히 시의 위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며 문학 전반, 나아가서는 인문ㆍ사회과학 전 체가 위기상황에 처해있다는 진단과도 괘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세계의 문학』 2000 가을 특집호 : 〈문명의 히스테리와 공격성〉 및 『문학사상』 2000. 12 특집호: 〈위기론과 문학의 대응〉 참고.
22) "디지털(digital)이란 본디 손가락(digit)을 가리키는 말로 셈하는 것을 뜻한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셈을 하듯이, 디지털이란 일정한 양을 독립적으로 표현함을 말한다. 따라서 수(數)는 디지털을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 오늘날의 문명은 숫자로 이야기해 주길 바라고 있다."(정세근,「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 in 『21세기문학』, 2000ㆍ겨울호, p. 46, 47 -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23) 이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는 박동환의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 1987) : 같은 저자,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원, 1993 참고.
24) 이에 대해서는 이기상의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in『철학』 제65집, 2000 겨울 참고.
25)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강조한 '그리스적 의미'의 〈자연〉 개념에 대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스러움'을 본질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만나는, "사방 팔방으로 트인 마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모든 생성ㆍ소멸ㆍ변화가 일어나는 열린 장"이며 "존재의 법칙과 질서가 생기기 이전의 온갖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렇듯 근원적 의미의 자연에서 "우주적 생성사건, 물리화학적 전개사건, 생물학적 진화사건, 인식론적 존재사건 등이 벌어지고 있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인간에게 망각된 이런 자연을 노래하여 되살리는 임무를 떠맡고 있는 것이리라(이기상의 앞의 글(2000 겨울, pp. 222-223).
26)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1991 참고.
27) "소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는 사회에서는 삶과 우리 존재의 핵심은 바로 소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소유한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 다."(Erich Fromm, To Have or To Be?, New York, Harper & Row, 1976- 김영민의「탈식민성과 우리인문학의 근대성」, in『철학교육연구』 제14권 제27호, 1998, p. 59에서 재인용)
28) 안경환, 「인문학의 위기와 문학적 대응」, in『문학사상』 2000. 12, p. 41.
29) 일례로 필자는 정세근의 앞의 글(「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을 들고 싶다. 저자는 이 글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원본이고 어떤 것이 가본인지 판단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 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적 성격은 이처럼 기존의 존재론을 뛰어 넘는다. 플라톤이 제기한, 우중충한 현상계와 밝고 맑은 예지계의 구별"은 그 위상을 상실 했으며"(같은 글, p. 52), "〈말로서 말 많으니, 말을 기호화하면 어떨까〉(라이프니츠)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말을 수리화, 기호화, 그리고 공식화하여 진리에 좀 더 다가서자"는 것이 이 논문의 근본취지이며(같은 글, p. 53) "가상현실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성을 갖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되어"(같은 글, p. 59)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에 따르자면 결국 모든 것은 기호화, 수학화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며, 이 때 우리가 더욱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확신이다. 시며 문학과 같이 말로 된 모든 것은 100100 또는 0101001 등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시며 문학에 대한 이보다 더 한 모독이 있을 수 있을까?
30) A. Artaud, Van Gogh, le Suicid? de la soci?t?, ?d. K, p.10, 13 참고.
31) '광기'는 시대에 따라 달리 규정된다. 중세의 기독교사회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광인으로 취급했고, 계몽의 시대인 17-18세기에는 이성의 결여를 광기로 규정했으며, 19세기에는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자를 광인이라 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치료가 요구되는 환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광기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재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한 정상성(normalit?)이란 테두리 밖에 소속된 자들이 언제나 광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소비중심의 사회에서는 분명 이 소비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광인일 수 있다(P. Jacerme, La folie, Bordas, 1985 참고).
32) 말라르메의 「바다의 미풍」- 최석의 번역을 따른 것임(앞의 책, p. 37).
33) S. Mallarm?, 앞의 책, p. 244.
34) 같은 책, 같은 페이지.
35) 이기상의 앞의 글(2000 겨울), p. 219 이하 참고.
36) 이기상의 같은 글, p. 219에서 재인용.
37) 박정근의 앞의 논문, p. 202에서 재인용.
38) 김영민의 앞의 글, p. 58.
39) "변화하는 세상에서 문학은 세상의 변화를 예견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며, 부자연스런 변화에 저항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안경환의 앞의 글, p. 45)
40) G. Bachelard, La po?tique de l'espace, 7e ?d., P.U.F., 1972, p. 31.
41)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횔더린의 시해석」 외에도 「예술작품의 근원」(1978)과 F.-W. 폰 헤르만의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이기상ㆍ강태성 옮김, 문예출판사, 1997 참고.
42) 최동호,「디지털 시대로의 환경 변화와 문학 - 새로운 세기에도 시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in『문학사상』 2000.12 참고.
43) G. Bachelard, Fragments d'une po?tique du feu, Texte ?tabli par S. Bachelard, P.U.F., 1988, p. 27 : "나는 내가 타성적으로 과학적 개념들을 연구했듯이 이미지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으로 연구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 그래서 난 나의 독서를 넓혀가면서 시적 언어의 인간학(une science humaine de la parde po?tique)에 대한 조감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적 언어가 (나에게) 글쓰기의 의욕(la volont? d'?crire)을 고양시켜 (주었다)."
44) 베르그손에 관한 인용은 Oeuvres(P.U.F., 1970년 판 - 본문에서는 Oeuv로 표기) 와 M?langes(P.U.F.,1972- 본문에서는 M?l로 표기)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베르그손에 있 어서 철학함의 전반적 의미에 대해서는, 졸고 :「베르그송의 문제제기론으로서의 '철학함'의 네 가지 특징」, in『철학비평』 2000년 제5호 참고.
45) 낭시(J.-L. Nancy)는 이와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 "무언가 거창한 것"만을 추구해왔던 서구 철학의 역사를 진리개념과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무언가 거창한 것〉을 추구하는 진리는 절대적으로 제 진리들(toutes les autres v?rit?s)을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무언가 거창한 것〉을 추구하는 이러한 단순진리가 없었더라면 바로 이 〈제 진리들〉의 중요성이 더 이상 가치를 평가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서 이 단순진리는 (예전처럼) 〈무언가 거창한 것〉을 '말하기'를 결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즉 현대(notre ?poque)는 우리가 이 〈무언가 거창한 것〉을 (어떻게 하면 다시) 사유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L'oublic de la philosophie, Galil?e, 1986, p. 84)
46) 현대의 기술시대, 부품의 시대를 이기상은 "대상이 사라져 버린 시대"로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현대의 철학이며 예술이 구체성을 잃고 지나치게 추상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다(앞의 글(1997), p. 88 이하 참고).
47) 서양철학사에서 보면 〈주어진 것〉은 늘 〈가지적인 이상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직접적 실재(le r?el imm?diat)는 오직 그것이 아닌 다른 실재의 표현(l'expression d'un autre r?el)을 위해서만 인정되고 이해되었다. 바로 이 다른 실재가 (역설적으로) 직접적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재성을 허락한다."(Cl. Rosset, Le r?el et son double. Essai sur l'illusion, Gallimard, 1984, p. 56, 55)
48) "우리의 사유의 운동(le mouverment de notre pens?e)은 무한히 제 관점의 추가(l'addition)와 (모든 사물들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流體(le mobile)의 실제적 이고 분할되지 않는 운동을 추구해야 한다."(Oeuv : 1414) 이런 측면에서 만일 우리가 베르그손의 독서를 통해 베르그손주의를 세우려 한다면 이는 베르그손의 의도를 완전히 위반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해 다비G. Davy가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듯이, 그래서 베르그손의 철학은 이미 "이해하기 용이한 철학(la philosophie de la facilit?)"의 범주밖에 속해 있는 것일 수도 있다("Henri Bergson", in Revue Universitaire, nº 4-5, 1941, p. 250). 왜냐하면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이 고정된 어떤 것으로 체계 속에 갇히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49) 이러한 베르그손의 생각을 르 루와(E. Le Roy)는 "Sur la logique de l'invention"(in Revue de M?taphysique et de Morale 13, 1905)에서 잘 밝혀주고 있다.
50) 베르그손의 원래 논문제목은 "Extraits de Lucr?ce avec commentaire, ?tudes et notes"로 되어 있으며, 1883년에 발표한 것이다.
51) 간단한 예로, 루크레티우스가 속한 에피루로스학파에 대해 근대의 관념론자들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한 철학사가의 언급을 인용해 보면 그 정도가 충분히 증명되고 남을 것 같다 : "모든 감각적인 지각에서 인정되는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진리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심리적인 현실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서양철학사』, 상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1983, pp. 335-336)
52) 힐스베르거의 앞의 책, p. 340.
53) 이기상의 앞의 글(1977), p. 61. "이 기술과 과학의 도움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장악해서 인간의 지배의지에 예속시키려는 시도가 지구, 아니 우주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 (...) 자연 내지는 우주에 대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탄, 경이를 느껴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한 총체적 지배 앞에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의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서양 형이상학이 놓여 있다."(같은 글, pp.61-62. 굵은 글씨체는 저자 강조)
54)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상상의 즐거움 la joie d'imaginer〉은 地, 水, 火, 風 즉 4원소와의 접촉을 통해 가능하다. 이는 그의 사상이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관계 맺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때 4원소는, 주지하다시피, 자연의 근본 기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 4원소를 통칭한 것이 自然일 것이고 이 자연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간을 기능인이 아닌 자연인이 되게 하는 모태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4원소와의 교통의 재개는 그리하여 단순히 시적 상상력(l'imagination po?tique)에 국한되지 않고 생태적 상상력(l'imagination ?cologique)이나 윤리적 상상력(l'imagination ?thique)의 차원에로까지 확대 해석이 가능하며, 질베르 뒤랑(G. Durand)이 말한 인류학적 상상력(l'imagiantion anthropologique)에 관통하고 있다 - 뒤랑에 대해서는 최근 진형준이 번역한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문학과 지성사, 1992 참고.
55) G. Bachelard, La psychanalyse du feu, Gallimard, 1949, p. 190.
56) M. Merleau-Ponty, Ph?nom?nologie de la perception, Gallimard, coll. 《Tel》, 1989, p. v.
57) G. Bachelard, La po?tique de l'espace, op. cit., p. 157.
58) J. Wahl, Po?mes(?d. Arbre-Montr?al) - 박선자의 앞의 논문에서 인용 - 마지막 행은 박선자가 "나는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를 필자가 임으로 바꿔 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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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박치완
홍익대학교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