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사유와 상상.

[=] 뉴만의 숭고 개념

온울에 2008. 5. 26. 04:05

목 차

1. 뉴만 회화의 특징
2. 리오타르의 뉴만 읽기
3. 리오타르의 숭고 개념
4.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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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중앙대학교부설 중앙철학연구소 
학술지명 철학탐구 
ISSN  
권 13 
호  
출판일 2001.  

 

 

 

뉴만의 숭고 개념
(리오타르의 뉴만 읽기를 중심으로)


최욱미
2-210-0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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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트 뉴만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기에 걸쳐 '색면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미국 화단에서 거대한 화쪽과 강렬한 색채로써 경험세계를 초월한 절대적 존재의 예술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가 먼저 포기해야할 것은 유럽 미술을 지배해온 '미(아름다움)'의 개념이었다. 대신 뉴만은 버크와 칸트에 의해서 정의되고 논구된 숭고의 개념을 미의 개념과 대등한 차원으로 끌어올려 추상회화를 전개함으로써 숭고의 미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뉴만의 회화세계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미술이 추구해온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열망과 초월적 세계의 무한성을 표현하려고 하 였다. 그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정감적이고 촉각적인 양식에서 벗어나서 색채가 지닌 정신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숭고'한 예술을 위해 회화를 단순히 미적 향수라는 차원을 넘어서 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지고한 실체로 간주하였다. 뉴만은 관람 자에게 숭고감을 야기하여 인간 내부에 있는 무한성을 불러내기 위해서 가시적인 재현을 부정하였고, 이를 통해서 절대성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세계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뉴만에게서 숭고 미학의 원리가 구현되었다고 보았고, 더 이상 현시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현시하는 데 모든 기법을 할애하였던 예술을 현대 예술(특히 회화와 관련지어서)로 정의하였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현대 회화의 핵심 주제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보여질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현시하는 데 있으며, 이것을 위해 회화는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형상화나 재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현대 회화는 감상자로 하여금 오히려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볼 수 있게 하며, 고통을 불러일으킴으로써만 기쁨을 주기 때문에 현대 회화는 숭고의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현대 회화가 추구해야할 숭고의 미학이 바로 뉴만에게서 그대로 실행되었다고 보면서 그를 포스트모던 회화의 증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본 글은 리오타르의 회화관이 뉴만을 통해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피고, 또한 리오타르의 한계점도 나오는 말에서 간단히 밝힐 것이다.

1. 뉴만 회화의 특징
그러면 뉴만 그림의 특징은 어떠한가? 뉴만의 <숭고한 영웅>(Vir Heroicus sublimis)은 가로 5m, 세로 2.5m 가 넘을 정도의 마치 벽화처럼 그려진 대형 그림이다. 캔버스는 온통 전면에 걸쳐 붉은 원색만이 칠해 져 있고 양쪽에 Zip 이라고 하는 폭 10cm 정도의 수직의 띠가 위아래를 가르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다른 그림 <권자>(Cathedra)도 역시 강한 녹색이 화면 전부를 이루며 단지 가운데 회색의 띠가 수직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것이 전부이다. 또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1)라는 제목의 그림도 빨강, 파랑, 노랑의 삼색이 수직선에 의해 삼등분하여 그려져 있고, 그 외에 그림의 내용을 암시하는 어떠한 구상적인 형상도 캔버스에 재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뉴만은 이런 그림으로 어떠한 효과를 노렸을까? 철학과 종교 문제에 정통한 지식인이었던 뉴만은 신비적인 세계의 표현을 위해서 혁신적인표현들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고, 바로 위에서 말한 강렬한 색채와 거대한 화폭, 그리고 캔버스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띠를 통해서 관람자에게 빛으로 강화된 승화된 감정 및 카오스 앞에 셨을 때의 무아지경을 전달하려 하였다. 즉 그의 그림은 관람자에게 숭고감을 유발시키고자 한 것이다.

뉴만은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 The Sublime is Now」라는 3쪽 분량의 짤막한 에세이를 1948년 『호랑이의 눈, Tiger's Eye』이라는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고대 그리스의 이상인 완전한 형태, 중세기에 파괴된 그리스 예술,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의 부활 및 현대 예술사와 관련된 사항뿐만 아니라, 롱기누스, 칸트, 헤겔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대 미술은 더 이상 고대 그리스의 미의 이상, 즉 "완전한 형상"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의 관계"2)를 표출해야 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즉 뉴만은 이 때 이미 자신의 그림이 절대성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세계를 표현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대 예술은 미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 유럽 미술가는 이럼 점에서 숭고를 표현하는데 실패하였고, 이제는 유럽 문화의 무게에서 해방된 미국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3)고 주장하였다. 뉴만은 이 글에서 숭고는 기억, 연상, 전설, 신화 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고, 또한 숭고는 종래에 있어온 '미'에 대한 전통적인 이념과도 상반된다고 하였다. 즉 그는 과거의 전통적인 미에 대한 관념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숭고의 미학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서구미술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던 '완전한 형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형식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4) 가운데 성립한 고딕과 바로크가 숭고를 실현하였다고 본다. 그는 이 두 양식에 형식을 파괴하려는 충동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 있는 것에 주목하였고, 따라서 거기에서는 무형식성이 오히려 표현 양식임을 강조하면서 이와 같은 방법이 정신적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한 예술에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뉴만은 인간에게는 절대적 감정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재차 확언하는 바는, 인간은 고양된 감정, 즉 절대적 감정과 소통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열망을 갖고 있다"5). 이런 열망은 예컨대 콜롬부스 이전의 원시 조각에서 발견되는데, 이 조각가는 삶의 기본적인 신비와 제례적인 대상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삶의 "형이상학적"6) 특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의 숭고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이렇듯 조형세계에서 삶과 세계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이렇게 이해된 숭고를 표현한 그림은 어떠하였을까?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뉴만의 회화는 그 자체가 숭고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즉 거대한 캔버스와 강렬한 색채가 갖는 상징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회화에 내재한 개념은 '추상적 숭고'(abstract sublime)인 것이다. 따라서 뉴만은 자연계에 내재해 있다고 여겨지는 기본적인 관계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대신 순수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완전한 형태의 미를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한 몬드리안의 신조형주를 거부하는 해도로 나타났으며, 이렇게 하여 그는 인간 존재의 신비와 비극적 조건에 접근하는 "순수이념"의 미술을 제안하여 "숭고"의 의미를 부각시켰다.7)

뉴만이 추구한 새로운 회화는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과거 및 현재의 미술에 나타나는 진부한 이미지를 회피하였다. 특히 뉴만은 자연 풍경이 주는 압도감이나 공포 그 자체를 숭고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숭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으로부터의 거리감, 다시 말해 관조의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도치는 대양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회상(관조)이 숭고한 감정을 일으키듯이, 뉴만의 <숭고한 영웅, Vir Heroicus Sublimis 1950-51>과 같은 작품은 거대한 붉은 색면이 주는 경외감뿐만 아니라 붉은 색조의 뉘앙스에 의해 감상자를 관조의 세계로 이끄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회화는 숭고 개념에 밀착해 있다. 뉴만의 회화가 숭고의 미학인 것은 화면이 공포에 의해서 압도되는 강제력만을 지닌 것이 아니고 감상자로 하여금 그 위력 그 자체를 초월하는 관조의 차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초인간적 절대성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정신성을 자극하기 위해 숭고의 미에 집중되어 있으며, 숭고가 곧 그의 회화적 세계관을 형성한 것이다.

2. 리오타르의 뉴만 읽기
뉴만의 초기 조각 작품에는 <여기 I>(Here I), <여기 Ⅱ>(Here Ⅱ), <여기 Ⅲ>(Here Ⅲ)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으며, 다른 회화 작품에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Not there ? here), <지금>(Now), <존재>(B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리고 뉴만은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글에서 1940년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뉴만의 그림과 그의 에세이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에서 ‘숭고’, '여기', '지금'이라는 단어들의 얽힘을 발견하고 이와 관련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뉴만 작품의 의미에 접근하려 한다. 그는 "숭고의 경험 대상이 '여기와 지금'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8)라는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리오타르는 현대 회화와 관련된 숭고미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리오타르는 뉴만의 작품과 논문을 언급하면서 뉴만의 작품에는 공간의 조작이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감각에 바탕을 두고 작품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 즉 뉴만은 회화를 통해서 미래 및 과거와 연계되지 않는 현재의 순간, 곧 지간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시간성'에 근거해서 발생하는 숭고한 감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표현 불가능한 것은 저편의 다른 세계에 혹은 다른 어떤 때가 아닌 '무언가가 일어나는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 회화 예술에서 '그것이 일어난다'라는 비규정적인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즉 회화 자체이다. 사건으로서의 그림 그리기, 회화는 표현 불가능한 것이며, 회화가 증언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사건 혹은 사건 자체이다. "9)

다시 말해서 현대 회화는 표현 불가능한 저편의 다른 세계를 재현해야하는데, 표현되어야 할 그 세계는 일상적인 언어사용법에 따르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회화가 증언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성에 근거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리오타르가 의미하는 '사건'이란 무엇인가?

우선 구체적인 어떤 사건의 일어남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구체적 사건이 종결되어 나타나기 이전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사건(event)'이라는 용어로 의미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완결되어 확인 가능한 그 무엇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고 있다는 것,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의미한 바의 '사건'이 선행하고 나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처럼 '그것이 일어난다라는 것이 비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먼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존재해야 우리의 의식은 비로소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활동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현대 회화는 이렇게 의식에 의해 잡히기 이전의 '사건'을 표현해야하며, 뉴만의 회화야말로 이런 재현 불가능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은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우연한 '사건'으로써 이러한 사건은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리오타르에 의하면 '사건'은 의식에 알려질 수 없으며 또 의식에 의해 구성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은 일반적인 사고로는 접근 불가능하고, 오히려 사고의 '박탈'을 통해서만 단지 접근 가능할 뿐이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보다 선행한다. 왜냐하면 사건에 대한 질문 이전에 사건은 이미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우리의 의식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dass etwas geschieht)는 것, 더 간단히 말해서 "일어나고 있다"(dass es geschieht)는 것, 즉 "발생"(occurrence) 그 자체를 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0) 의식 작용에 선행하는 '사건'은 단지 '발생' 혹은 '일어남'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뉴만의 '지금'은 바로 이 순수한 '발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뉴만에 있어 지금'은 미래와 과거에 의해서 흡수되는 현재의 순간이 아니며, 시간의 연속적 계기들 가운에 있는 현재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당연히 현시 불가능한 것이고 표현 불가능한 것이다. 리오타르는 뉴만의 작품 세계가 아직 규정되지 많은 순수한 발생으로서의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대 회화의 본질은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데" 있으며, 리오타르가 보기에 뉴만은 '지금, 여기'에서 "표현될 수 없는 일어나고 있음,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음의 존재"를 순전히 색채가 곧 그림인 회화를 통해서 증언하고 있다고 보며, 그런 회화는 곧 숭고의 회화라는 것이다.11) 이런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뉴만의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를 "지금, 이것은 숭고한 것이다" (Nun, das ist das Erhabene)로 해독하며, 그래서 숭고한 것은 "다른 어떤 곳, 저기 혹은 거기, 이전 혹은 이후 또는 다른 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 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재현한 "그림" 자체라는 것이다.12)

뉴만은 '지금, 여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거의 단일한 색으로 거대한 화폭을 채우고 있기에 어떠한 시각적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회화는 이것 자체가 곧 현시할 수 없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의 증인이다. 뉴만은 여기 지금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 즉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 그림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리오타르가 뉴만을 통해 이해한 회화는 의식에 포착되기 이전의 일어남을 그리는 것, 곧 '사건'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렇듯 형이상학적 시각에 의해 포착된 세계는 사 건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세계를 그리는 그림은 전통적 회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방가르드는 이렇게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할 때 성립 한다.13)

아방가르드 예술은 전통예술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회화의 규칙과 구성요소들을 의문시한다. 또 아방가르드 작업은 표현될 수 없는 '지금'을 표현되어야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아방가르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리오타르는 아방가르드 미학이 진정한 숭고의 미학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무엇', 즉 내용을 재현하고 이것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태('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리오타르는 이와 같이 미규정 상태, 즉 아직까지 규정되지 않은 것이 그려져야만 마음에 숭고, 즉 "동요"(agitation)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14)

리오타르가 보기에 시간적 관계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아무런 말도, 색도, 형태도, 소리도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15)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에 마주한 화가는 불안감에 빠진다. 이러한 불안감은 텅 빈 화폭을 대했을 때, 즉 작업의 시작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 중에 매순간 "무언가가 그 다음에 오기만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그 무언가로 인해 '그리고 이제는 무엇이?'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마다 떠오르는 느낌"16)인 것이다. 그러나 이 불안감은 역설적이게도 쾌감을 수 반할 수 있다. 그것은 미결정 상태에서 오는 긴장감이며, 혹은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쾌감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의문부호"17)로서의 미지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이 곧 숭고라고 정의한다.

숭고 미학이고자 하는 예술은 이제 아름다운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효과를 추구하고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결합을 시도해야한다. 그러므로 천재로서의 예술가는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숭고는 "이미 증명되었거나 입증된 어떤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이 놀라움은 독자를 사로잡아 충격을 주고 느끼도록 만든다."18)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함과 미적 취향의 왜곡은 물론 추함까지도 충격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래서 숭고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이 세계에서 괴이한 것과 무정형의 것 들은 숭고한 것으로서 존재할 권리를 갖는다.

3. 리오타르의 숭고 개념
뉴만의 그림처럼 현대 회화는 의미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의미의 전면적 부정의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리오타르에 의하면 현대 예술은 '재현의 부정'으로 인해서 미적 구성물 자체가 이해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 그러면 현대 회화는 왜 시각적 재현을 극소화하여 이해를 차단하는 것일까? 현대 회화를 가능케 하는 구성 원리는 무엇일까? 뉴만의 그림이 이해를 차단하여 당혹감과 불안감을 일으키고, 이어서 경외감을 주는 것처럼, 리오타르는 현대 회화를 이루는 원리는 숭고라고 본다. 이것은 마치 칸트의 숭고 미학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자연의 거대한 크기와 위력 앞에서 구상력의 좌절이 결 국 숭고의 희열로 전환되는 체험과 유사하다. 현대 회화를 떠받치는 숭고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에서는 리오타르에 의해서 칸트 및 버크의 숭고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미는 대상의 형식에 관계하는 반면, 숭고는 '몰형식적' 대상에 관계한다. 미는 생을 촉진하고 사랑의 감정과 생명감을 유발시키지만, 숭고의 감정은 오직 생명력이 일순간 저지되었다가 뒤이어 한층 강력하게 나타나는 감정이기에 간접적으로만 일어나는 쾌감인 것이다. 그래서 숭고는 적극적인 쾌감이라기보다는 감탄이나 경외를 포함하는 소극적인 쾌감인 것이다.20)

그러나 리오타르가 칸트에 주목한 미와 숭고의 본질적인 차이는, 자연미는 형식상 일종의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합목적성에 의해 대상이 판단력에 알맞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숭고의 감정을 야기하는 대상은 판단력에 대해서 '반목적적'(zweckwidrig)이고, 현시능력인 구상력에 대해서는 '부적합'하고 '난폭하게'보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 숭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숭고는 감성적 형식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이념'들에만 관계하는 것이며, 비록 이념에 적합한 현시가 불가능할지라도 바로 이 부적합성이 감성적으로 현시됨으로써 이성의 이념이 환기되고 소환되는 것이다.21)

특히 리오타르가 칸트의 텍스트 가운데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연의 미에 관한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 심의는 평정한 관조에 잠겨 있으나, 자연의 숭고의 표상에 있어서는 동요됨을 느낀다 (‥‥) 미의 판정에 있어서는 구상력과 오성이 양자의 합치에 의해 심의력들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산출하듯이, 숭고의 판정에 있어서는 구상력과 이성은 그들 간의 충돌(Widerstreit)에 의해 심의력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산출한다."22) 즉, 예술 혹은 자연을 보고 생긴 미의 감정은 이미지의 능력과 개념의 능력간의 자유로운 합치에서 나오는 기쁨임에 반해서, 숭고의 감정은 고통과 결합된 기쁨으로서 소극적이다. 오직 이성의 이념으로 생각될 수 있는 숭고의 대상은 현시능력인 구상력이 이념에 적합한 표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구상력의 재현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주체 속에서 이성이 파악하는 것과 현시하는 것 사이에 분열, 즉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미지의 빈약함에서 오는 고통은 이념의 광대한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기쁨이 된다. 리오타르는 숭고의 감정은 칸트가 소극적 현시의 좋은 예로써 들고 있는 유대인의 형상금지법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보는데, 거의 무로 환원되어진 시각적 기쁨은 무한한 것에 대해 생각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23) 리오타르는 '형상 금지의 원칙'처럼 시각적 쾌락이 거의 무의 상태에 가까워졌을 때 이것은 오히려 무한성에 대한 무한한 관조를 진작시키기 때문에 숭고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 미학을 이처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나, 그의 주체철학적인 입장을 비판한다. 우리의 일상적으로 ‘대양은 숭고하다’ 또는 '깎아지른 절벽은 숭고하다'라고 표현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숭고 감정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이성이념이 우리의 내부 및 외부에 있는 자연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발생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감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내부 의식의 우월함을 의식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거대한 자연대상에서 오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여전히 숨고 체험의 전제로서 이념을 생각하는 주관의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리오타르에 의해 "주체의 전통(tradition of the subject)"24), 즉 주체의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 미학이 '시간성'을 도외시하고 단지 네 가지 범주(양,질, 관계, 양상)에 따라서 숭고 예술의 계기들을 정태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의 문제가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25) 그래서 리오타르는 칸트가 경험적이고 생리학적이라고 비판한 버크의 입장을 오히려 선호한다. 왜냐하면 리오라르가 보기에 칸트는 버크의 논문26)에서 핵심적인 논점, 즉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에서 숭고가 촉발된다"27)는 논의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버크에 따르면, 미는 적극적인 쾌락을 준다. 그러나 미적 만족보다 더 강력한 열정과 결합되어 있는 또 다른 쾌락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고통과 결부된 것이다. 예컨대 빛의 박탈은 암흑의 공포이고, 타자의 박탈은 고독의 공포이며, 생명의 박탈은 죽음의 공포이다. 공포감을 주는 것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일어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를 통해 숭고한 감정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또한 공포를 야기하는 위협이 지연되어야 한다. 이런 긴장, 이런 위협이나 위험의 감소는 적극적인 만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심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미가 긍정적인 쾌락에서 나오는 반면에 숭고를 이루는 환희(delight)는 박탈, 즉 위협의 지연에서 발생한다.28) 따라서 버크에게 있어 숭고는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긴장 강화(intensification)를 목적으로 한다.29)

지금까지의 숭고에 대한 버크의 작업과 칸트의 분석이 보여주듯이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들의 작업은 낭만주의 초기에 예술적 실험을 가능하도록 하였고, 이후 아방가르드가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칸트나 버크의 숭고 미학은 예술적 조건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들 전체가 변화되어서 예술의 행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탈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변화가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의 심미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들은 예술을 통해 단순한 쾌락을 경험하거나 어떤 윤리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들은 오히려 감정적 수용력이 강화되고, 상충되는 감정이 병존하는 경험을 얻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감정이입적인 예술작품 속에서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는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자신을 인지한다.30)

이렇게 리오타르는 비가시적인 것 혹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의 핵심이라고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현대 예술은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상황, 즉 리오타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고 표현한 무의 공포를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이것을 떨쳐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오타르의 현대 예술에 대한 이런 심미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벨머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아래에서는 벨머에 의해 제기된 리오타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31)

리오타르는 절대적인 것의 암호로서의 예술은 무의 공포를 일으키고 또한 이것을 떨쳐버려 삶의 상승에 기여해야한다고 본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본 예술의 목적은 영향을 통한 인식이 아니라 감성적 영향, 즉 숭고감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리오타르에게 있어서 예술의 목적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숭고 감정을 일으키는 데 있다. 예술의 '의미'와 '영향'이라는, 예술의 목적을 떠받들고 있는 커다란 두 축 가운데 리오타르는 바로 영향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 있는 예술의 의미를 도외시하는 결과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예술은 - 벨머에 의하면 -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서 정서적 반응(리오타르에게서는 숭고)을 목표로 할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선 의미의 연관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후자에서 말하는 의미연관의 이해는 예컨대 전통예술에서 보자면, 어휘나 형식 및 표현관습에 대한 미적 이해를 뜻한다. 그런데 모던에 오면서 현대 예술이 의미의 전면적 부정의 태도를 취하면서 미적 생산의 의미 요소들을 해체시켜 버린 이후에 예술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의심스럽게 되어버렸다. 이렇듯 현대 예술이 취하는 재현의 부정은 결국 리오타르로 하여금 예술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중요치 않다는 결론을 추론하게 하였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보기에 현대의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에는 이해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이것의 증인이 뉴만이라고 본 것이다

4. 나오면서
뉴만은 시각적인 이해를 위해 어떠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 관념적인 회화세계를 이룩하였다. 색면추상화가로 불리어진 뉴만은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성찰을 통해서 도달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혁신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절대성을 표출하고자하는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추상이 아닌 순수한 이념으로서의 상적 숭고'를 표현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숭고는 그림이 어떤 숭고한 내용을 표현하기에 감상자로 하여금 숭고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숭고한 실체로 되기를 원했다. 그의 회화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형상성도 거부하기 때문에 그림을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들도 자연히 배제되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 '색면'이다. 색채의 위압적인 효과는 감상자로 하여금 외경에 가까운 숭고를 체험하게 한다. 강렬한 색면과 거대한 화폭으로 뉴만은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그림 자체가 숭고를 실현하는 실체가 되기를 원하였다. 뉴만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는 종교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현대 회화에서 정신의 우월성을 회화 적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리오타르는 현대 예술, 즉 포스트모던 예술을 규정하기 위해서 칸트의 숭고 개념을 끌어들였다. 칸트의 숭고론은 이성의 능력에 집중하여 자연의 합목적성 및 질서를 파악하는 정서를 숭고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칸트의 숭고는 현상적으론 쾌와 불쾌의 충돌에서 숭고가 발생하지만, 그는 숭고 개념으로써 근원적으로 자연에 대한 통일적인 관점 및 그것의 재현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리오타르에게 숭고는 경험세계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경험적인 형태, 곧 예술로도 파악할 수 없고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숭고의 감정은 절대적인 무한성의 이념과 그것을 재현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메울 수 없는 간극 속에서 체험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숭고에 대한 리오타르의 이러한 입장은 이미 칸트의 숭고 감정에서 보여지는 몰형식성과 상상력에 의한 재현의 좌절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리오타르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칸트의 숭고 개념을 정리한다면 아래와 같다. 숭고의 감정은 쾌와 불쾌로 이루어진 모순된 혼합된 감정이다. 따라서 숭고를 야기하는 대상은 재현 능력으로서의 상상력과 연계될 때 그 대상에 대한 개념 형성을 저해한다. 또 숭고한 대상은 그것의 몰형식성으로 인해서 현시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숭고한 대상은 재현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오타르가 자의적으로 칸트를 끌어들인 부분이 있다. 이것은 곧 칸트와 리오타르의 차이점이 된다. 우선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 개념을 자의적으로 수정 변형해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의 숭고는 무엇보다도 자연 대상에서 체험되는 감정이다. 그것은 자연 대상 앞에서 우리의 상상력의 무능에서 체험되는 부정적인 요소와 감성적 제한을 뛰어 넘는 이성의 우위성에서 발생하였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숭고의 개념을 예술과, 특히 예술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숭고는 체험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형성되었다. 즉 크기와 위력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자연 대상이 이성 이념과 연계되어 이해되고, 또 그러한 한에서 숭고는 이성 이념의 우월성을 감정의 차원에서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생산자, 즉 예술적 작업 과정에 숭고의 재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리오타르가 뉴만을 끌어들여 현대 예술의 재현불가능성을 설명하는 것도 뉴만의 색면추상이 설명적 이해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또 벨머에 의지해 이미 지적한 바대로, 회화의 이해를 위한 최소한의 실마리조차 차단한 뉴만의 극단적 추상에는 리오타르에게 가해지는 것과 유사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즉 뉴만이나 리오타르 모두 예술작품이 지닌 두 기능 - 예술의 '의미성'과 '영향'32) - 가운데 의미성을 포기하고 그 영향만을 현대 회화의 본질적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리오타르는 이 점을보이기 위해서「숭고와 아방가르드」도입부에서 뉴만을 언급하면서 그의 회화는 '보여질 수 없는 것, 혹은 재현될 수 없는 것'을 통해 숭고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예술의 '영향'과 '이해'라는 두 계기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둘을 연관지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벨머는 칸트의 성찰에서 보여지는 '미적 즐거움'이라는 개념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즉 칸트는 인식적, 감성적 능력의 확장은 미적 이해의 효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옮기자면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낄 수 있으며, 역으로 느끼는 것만큼 알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이해와 느낌은 분리되어 있거나 또는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맞물려 있다. 예술 작품은 숭고든 아니면 아름다움을 통해서이든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틀을 파괴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감성적인 '충격'(예컨대 숭고감에 의한)을 주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에게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심미적인 영향과 심미적인 이해는 맞물려 있기에 한 쪽은 다른 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리오타르에게서처럼 예술의 영향만이 그 본질은 아니며, 현대 예술에 있어서 의미의 전면적 부정이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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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Barnett Newman, "The Sublime is Now", in: Barnett Newman ? Selected Writings and Interviews, edited by John P. O'Neil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Irving Sandier, The Triumph of American Painting,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0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in: The Lyotard Reader, edited by Andrew Benjamin, Blackwell 1989
Lyotard, "Answering the Question: What is the Postmodernism", translated by Durand, in: The Postmodern Condi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Hamburg, 1974.
A. 벨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 이주동/안성찬 역, 녹진, 1993
배철영,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예술론」, 『미술평단』 , 200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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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은 두려워하랴>라는 작품은 3가지가 있다. 1966년, 1967년, 1966/67년도의 작품이 그것이며 3번째 작품이 가장 크다.
2 Barnett Newman, "The Sublime is Now", in: Barnett Newman ? Selected Writing and Interviews, edited by John P. O'Neil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171쪽
3 Newman, 같은 책, 172-173쪽.
4 Newman, 같은 책, 171쪽
5 Newman, 같은 책, 173쪽
6 Newman, 같은 책, 173쪽
7 Irving Sandier, The Triumph of American Painting, New Yerk: Harper & Row Publishers 1970, 149쪽
8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in: The Lyotard Reader, edited by Andrew Benjamin Blackwell 1989, 196쪽 .
9 Lyotard, 같은 책, 208쪽
10 Lyotard, 같은 책, 197쪽.
11 Lyotard, 같은 책, 199쪽.
12 Lyotard, 같은 책, 199쪽.
13 배철영,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예술론] , 「미술평단] , 2000여름, 67쪽
14 Lyotard, 같은 책, 197쪽.
15 Lyotard, 같은 책, 198쪽.
16 Lyotard, 같은 책, 207쪽.
17 Lyotard, 같은 책, 198쪽.
18 Lyotard, 같은 책, 202쪽.
19 A. 벨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 이주동/안성찬 역, 녹진, 1993, 94쪽 이하 참조 리오타르에게서 예술 작품은 단지 사유될 수는 있으나 묘사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암시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작품은 숭고의 대상을 표출하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설명 불가능한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리오타르에 있어서 예술의 목적은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술이 가리키는 바에 의해서 숭고한 감정을 환기하는 데 있다. 그러나 벨머는 리오타르가 현대 예술의 의미성을 부정한 것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예술 작품은 의미 - 이야기 될 수 있는 것과 묘사될 수 있는 것 - 의 한계를 확장함으로써 세계의 한계와 주체의 한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예술에 있어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파괴로 인해 예술 작품은 그와 같이 의미 및 주체의 한계를 확장하는 잠재력이 되고 있다"(같은 책, 98쪽)는 것이다.
20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Hamburg, 1974, 75쪽 (관례에 따라 KU로 표시하고 쪽번호는 재판의 번호임)
21 Kant KU, 23
22 Kant KU, 27
23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204쪽
24 Lyotard, "Answering the Question: What is the Postrnodemism", in: The Postmdern Condition, translated by Dur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77쪽
25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204쪽
26 Burke,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i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7)
27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204쪽
28 Lyotard, 앞의 책, 204쪽.
29 Lyotard, 앞의 책, 204쪽.
30 Lyotard, 앞의 책, 206쪽.
31 A. 벨머, 앞의 책, 94쪽 이하 참조
32 주 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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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최욱미
경기대 상업교육권 현대미술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