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바둑..!/놀이 이론들~

[=] 어린이 놀이문화와 우리의 할 일

온울에 2008. 6. 7. 14:12

 

 

1. 우리 사회의 놀이 현실

 

  놀이는 사회성을 가진다. 사회의 변화를 놀이가 반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놀이를 살펴보는 것은 역으로 우리사회의 문화현상을 되집어 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갖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먹고 노래방을 찾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TV나 VTR을 시청하거나 프로스포츠 관람하거나 당구를 치거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그들의 잠재되어 있는 놀이의 욕구가 시원스럽게 해소되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뭔가 재미있고 신나고 화끈하게 놀아 이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없을까?

  누구나 느끼는 이런 답답증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놀이현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 고스톱과 노래방이 갖는 의미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스트레스를 가장 효과적으로 푸는 방법으로 ‘놀이’가 있다.

  이는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된 하나의 문화양식이고 인간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욕구이다.

  자연(自然)에서보다 도시에서의 살게 되면 더욱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된다. 자동차 체증과 소음, 빡빡한 일정과 되풀이 되는 하루하루 등 자연에서의 넉넉함보다 도시에서의 각박함을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캉스철이되면 너나없이 도시를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농촌에서도 스트레스를 안받는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산다는 것이 곧 스트레스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필요도 더욱 많이 생기는 것이다.

옛날에는 놀이마당에서 제반 스트레스를 해소했는데 오늘날에는 디스코장, 얼마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낚시터, 그리고 최근에 노래방의 성업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를 반증한다. 오죽했으면 그렇게라도 해소하려고 할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또한 각 병원마다 정신질환(우울증, 대인공포증, 계속되는 두통 등)을 호소하는 사람이 급증하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한다.

  이런 가운데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고스톱’과 ‘포커’를 빼놓을 수 없다. 어느 곳이든 3~4명만 모이면 판을 벌일 수 있는 간편성과 돈이 오가는 데 따른 긴장감, 판에 몰두함으로써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일탈성 등이 결합되어 누구나 즐기는 놀이로 정착되었다. 문제는 그 놀이가 좋은가 나쁜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거액의 돈이 오가고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놀음놀이도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현대 산업 사회가 주는 여러가지 스트레스를 고려한다면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마땅한 방법과 공간의 확보의 제시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방의 성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반 스트레스를 효과적이고 간편하게 해소하기 위해 노래방을 찾는다. 또한 기존에 메스컴에 의해 누적된 열등의식(가수들의 잘부르는 노래를 듣고만 있음으로써 생긴 피해의식의 일종)의 해소 욕구가 가세해 자기가 가수가 된 양 착각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책은 건강하지 못하다. 각자가 가진 제반 갈등의 적극적인 해소가 아닌 일시적인 일탈은 오히려 거기에 종속되게 하는 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고스톱이나 노래방이 갖는 맹점은 결코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도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계속되는 제반 갈등의 마땅한 출구가 없고 임시 방편의 출구가 바로 상업성과 결부되어 서민의 주머니를 긁어 내고 결국 제반 갈등의 소극적인 해소에 그치기 때문이다.

  고스톱의 만연과 노래방의 성업은 진정한 민중문화의 부재가 낳은 기형적인 문화현상의 일예라고 보여진다.


  나. 메스컴과 놀이


  텔레비젼과 VTR의 광범위한 보급은 우리 사회의 생활과 문화 심지어 사고까지 바꾸어 놓았다. 유명한 탈렌트는 국민 모두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정치판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런 문명의 이기가 우리 사회에 끼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중에 놀이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문명의 이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에 일기 시작한 프로 스포츠의 열풍은 어른에게 뿐아니라 어린이의 일상생활에 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야구선수의 이름을 외우는 것에서 부터 유니폼을 입고 다니고 선수의 사진을 모으는 것까지 과히 열풍이라 이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를 메스컴에서 중계하고 스포츠 스타가 등장하면서 우리나라는 졸지에 스포츠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스포츠의 열풍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다분히 의도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0년 광주 항쟁과 그에 이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당시의 혼미한 정국은 스포츠 열풍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 올림픽 유치와 스포츠 강국으로 온 국민이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을 때 국민의 의식은 조작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VTR과 TV는 또한 놀이판을 마당에서 무대로 바꾸어 놓았다. 옛날에는 누가 놀아주고 나머지는 구경만 하는 형태의 무대놀이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로 탈춤판이나 광대들의 놀이를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였다. 그때에는 그래도 ‘추임새’라는 형식이 있어 ‘얼쑤 잘한다.’, ‘아이구 어쩌나’, ‘그럼 그렇지’라며 여희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가수가 노래하는데 노인들이 흥에 겨워 어깨춤이라도 출라치면 마치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이상하게 보고 있다. 놀이의 주인이 누구이고 무엇때문에 놀이가 존재하는지를 망각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다.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고 놀이는 대개 마당에서 스스로 주인 되어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VTR과 TV는 놀이에서 참여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때문에 오늘날의 놀이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해 간다.

  놀이의 수동화는 그간 침체되어 회생되지 못한 우리의 문화전통을 더욱 눌러놓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제반 대동놀이를 놀이탄압하는 양식으로 압살하였는데 메스컴의 확대는 놀이를 준비하고 참여하는 즐거움 대신 보는 것으로 대체시켜 놓은 셈이다.

  놀이란 주체적으로 행하면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눌린 심성을 제자리로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TV 앞에 들러리로 앉아 기성화된 제반 프로그램에 매이다 보면 더이상 놀이를 준비하고 행할 의욕이 없어지고 이에 길들여 지므로써 절름발이 놀이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잘 포장된 드라마는 중독성까지 보여 마치 자기의 삶을 대신 표현하고 해결해 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TV에 의해 웃고 울고 하는 동안 스스로의 삶의 고달픔의 이유조차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텔레비젼은 계획적이고 목적이 분명하기에 아이들을 현실적으로 만들어 간다. 전국의 5백 82명을 대상으로 청주대 박정규 교수의 논문인 「TV가 어린이의 가치관 형성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서 ‘TV를 많이 보는 어린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 건강, 자유, 의식주 등 보편적이고 실질적인 항목들인데 비해 시청시간이 적은 아이들은 부모, 사랑, 우정 등 가족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꼽아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요즘 인심이 각박해 진다고 하는 데 이와 같은 현상과 TV의 보급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그밖에 VTR과 TV의 내용이 아이들의 놀이방법에 많은 영향을 준다. 지난 80년대 초 프로 야구를 비롯하여 프로스포츠가 연일 방송되면서 아이들의 놀이에 많은 부분이 공놀이로 대체 되었다. 공놀이는 놀이의 요소도 있지만 스포츠의 논리가 강하게 부각되어 각각이 갖는 고유의 법칙(경기 규칙)이 있어 아이들이 놀이를 나름 대로 변형하거나 창조하지 못하고 놀이규칙에 매이게 된다. 이는 놀이의 주인이 아이들이 아니라 경기 규칙이고 형식이 놀이의 주인이 되어 놀이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절음발이 놀이가 될 뿐이다. 뿐만아니라 VTR과 TV에서 방송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우수꽝스러운 장면을 선호함으로써 놀이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롤 변해가는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ꡔ그랜다이저ꡕ, ꡔ썬다Aꡕ, ꡔ컴바트라ꡕ, ꡔ지옥의 무적권ꡕ 등 대개 초능력자와 로보트가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죽이고 때리고 부수는 내용일색이다. 이는 아이들의 정서에 생명경시와 즉흥적인 사고를 유발하고 놀이에도 이를 반영하는 파괴적인 놀이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말을 서툴게 하는 4살박이 여자아이가 놀면서 ‘죽인다’, ‘죽여버려’, ‘처치하자’란 이야기를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에 그 아이의 부모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말이 바로 집에서 보여준 VTR을 보고 배운 사실을 알았다.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난폭해지는 것은 어려서부터 VTR을 통해 폭력적인 장면과 언어를 자주 들어온 데도 이유가 있다. YMCA의 ꡔ건전 비디오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ꡕ에서 한 조사에 의하면 국내에서 제작한 어린이용 비디오 테이프의  69%가 폭력물이라고 한다.

  TV와 VTR은 이제 우리문화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주는 이런 매체에 대해 바른 인식과 지도 그리고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놀이시간의 박탈도 마찬가지 측면에서 놀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놀이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는 시간이다. 메스컴의 확대는 남는 시간을 모두 앗아갔고 메스컴에 종속시켜 놓았다. 일예로 어린이들의 놀이 종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밖에서 노는 시간이 현저히 감소하는 것과 메스컴의 보급은 비례하고 있다.

  놀이의 건강성은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 또한 집단 생활의 정서를 표현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심에 서 있을 때 그 놀이의 건강성은 유지 되는 것이다.

  메스컴의 확대는 이런 건강성과 놀이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대신 우민화시켰고 스스로 이를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 기여한 셈이다.

 

  다. 놀이공간의 의미


  87년 서울시내 어린이 6천명당 놀이터가 1개꼴이라는 신문기사와 함께 놀이터에 방치된 전깃줄에 목이 걸려 죽은 사건이 함께 보도되면서 놀이 공간에 대한 문제가 사회에서 거론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관심도 없다.

  최근 구의동 현대아파트단지에 가본 적이 있다. 땅값이 비싸서인지 고층(27층)아파트에 숱하게 많은 아이들이 살 터인데 놀이터는 불과 세개 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놀이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입주자들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몇개인지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사고 중에 어린이 안전사고가 굉장히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1992년 3월1일 조선일보를 보면 91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모두 6백89명이고 이 중 40명이 숨지고 2백94명이 전치 3주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사고 원인으로 상대방 운전자 과실이 5백84명(85%)로 가장 많은 것은 바로 놀이공간의 터무니없는 부족으로 아이들이 길거리로 나와 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놀이공간을 적당하게 마련해 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음이 자동차 사고에서 어린이의 사고율이 증가하는 것과 놀이가 점차 소극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관계됨을 알 수 있다. 서양의 경우 아파트나 주택가를 조성할 때 반드시 놀이터의 면적과 놀이기구의 설치에 대해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놀이공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나타내는 예로써 우리나라와 비교된다.

  게다가 놀이터의 놀이감도 문제이다. 현재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은 놀이에 대한 다양한 학설 중에 이제는 고전설이 된 ‘잉여에너지설’(인간의 남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놀이이다라는 설)에 근거해서 설치되었다. 능목, 철봉, 구름사다리, 뺑뺑이, 모래사장, 미끄럼틀 등 아이들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의 놀이는 잉여에너지를 발산하는 것보다 다양한 요구들이 충족되는 놀이기구를 원하고 있다. 가장 좋은 놀이기구는 자연이지만 자연의 조건을 마련할 수 없는 오늘날에서는 터널도 만들어주고 미로도 만들어주고 공작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도 마련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덴마아크에서는 이미 1931년 「소렌손」교수가 고안해서 ‘런던’시내에 모험놀이터를 70여개 설치했고 그밖의 유럽 여러나라에서도 일반화되어 있다. 즉 자연스러운 야산중턱에 무너진 집이며 망그러진 자동차를 준비해놓고 놀러오는 아이들에게 톱이며 망치 등도 빌려주고 흙을 만질 수 있는 그런 놀이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 영등포에 어린이 모험 놀이터를 4곳 만들었었다. 못쓰게 된 나무토막, 연통조각, 타이어, 부서진 의자, 스펀지조각 등 잡동사니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어린이들이 망치로 두들기고 톱집을 할 수 있는 그런 놀이터이다. 그러나 이후 관리소홀로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다. 어린이대공원이라든지 어린이 관련 위락시설을 설치한 곳에 아이들이 몰리는 것은 각 동네나 학교 운동장에 설치되어있는 놀이기구들에 불만이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전문적인 놀이기구 설계사를 정부가 고용해서 연구하는 서양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라. 장난감


  놀이감은 아이들의 놀이를 촉진시키고 다양한 사고를 돕는 유용한 교육재료임에는 틀림없다. 서양의 놀이감으로 대표적인 것이 프뢰벨의 장난감인데, 대체로 정교한 교육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아이들에게 교육과 놀이에 적합하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의 정서에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문화상황은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교육보다 포괄적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예를들면 정교하게 깍은 나무 조각에 구멍을 뚫고 굵은 실로 꿰게 한다든지 굴곡지게 깍아 여려가지 모양을 만들게 하는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작품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위와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칠교놀이로 대표되는 이와 같은 유형의 장난감이 있긴 하지만 주종을 이루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어린아이의 장난감은 딱히 장난감이랄 것이 없다. 부모님이 쓰시던 실패라든지 실, 그릇조가리, 흔히 굴러 다니는 나무막대 등이 장난감의 전부였다. 어쩌면 무슨 장난감이냐고 반문할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난감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대상에 자기의 생각을 마음껏 집어 넣을 수 있는 그래서 고무신이 비행기도 되고 공도 되고 배도 되고 심지어 동물도 되는 그런 유형의 장난감이였다. 실패를 가지고 ‘이게 돼지다’하면서 ‘꿀꿀’하며 아이 앞에서 움직여 보자. 아이는 금방 ‘꿀꿀꿀’하면서 실패를 돼지로 인식하고 돼지의 행동을 나타낼 것이며 데구르르 굴리면서 공이라하면 아이들은 공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와같은 현상을 보고 그 아이가 멍청하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 아이가 돼지라는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보고 꿀꿀꿀하는 것이며 공으로 인식하고 있음으로 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요즘에는 전지와 전기의 발달로 움직이는 유형의 장난감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예쁘게 만든 움직이는 장난감과 실물과 거의 같은 자동차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장난감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난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갖게할 뿐 아니라 아이의 상상력을 앗아가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더구나 아이들이 움직이는 장난감에 맛들이면 나머지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시시해져 더욱 움직이는 장난감에 매이게 된다. 시중에 많은 것들이 움직이는 장난감으로 채워지고 있는데 이는 장난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의 결과이다. 장난감에서 얻어야 할 창의성, 상상력, 모방성 등의 여려가지 요소들을 장난감이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장난감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까. 집에서 흔히 쓰는 물건들을 잘 다듬고 닦아서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싼 돈을 준 ‘마론인형 모둠’보다 주위에서 주워온 병뚜껑, 종이인형, 요구르트 자른 것, 약병 등으로 만든 장난감 모둠이 훨씬 아이들에게 교육적이고 바람직하다. 마론인형모둠은 아이들에게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수고를 덜어주는 대신에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앗아가고 실물과 같은 모양은 아이들의 놀이를 실감나게 하는 대신에 변화의 폭을 없애는 잘못을 하고 있다.


  마. 전자오락의 해독


  전자오락은 이제 우리 놀이문화의 한 부분이다. 87년부터 급격히 보급돼 불과 5~6년의 짦은 기간에 수천년간 이어오던 우리의 놀이가 밀려난 셈이다. 학교 앞이나 동네에서 오락실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또한 집안에 컴퓨터프로그램에 의한 게임이나 텔레비젼에 연결하는 게임기(팩)은 그 전파속도가 가공할 만하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한층 심화되고 있는데 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은 이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 나름대로 지도방안이나 대처방안이 없어 그냥 방치하거나 철저히 못하게 막는 소극적 대응을 하고 있다. 이에 오늘날 어린이문화나 정서, 신체발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전자오락에 이제는 현실로 받아들여 어떤 해악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전자오락이 사람들의 욕구불만의 해소를 목적으로 하기에 부수고 죽이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자오락실에 가본적이 있다. 한 아이가 자기 비행기가 폭탄에 맞아 죽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주먹으로 오락기를 두둘기고 있었다. 오락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부분을 대수롭지 않도록 길들여 놓았다. 대부분의 내용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잠재적인 의식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락실의 환경이나 돈의 문제도 심각하다. 하고는 싶은데 하지 못하니 약한 아이를 괴롭혀 돈을 빼앗고 도둑질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락실 주변은 언제나 여러가지 비교육적인 행태가 속출하는 것이다. 또한 어두운 조명과 좁은 공간, 빠르게 변화하는 화면 등은 아이들의 눈을 망가뜨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부정적인 영향은 바로 ‘중독증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5학년인 한 어린이에게 오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니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재미있어요. 한번 하면 자꾸 하고 싶어 끊을 수가 없어요.”

  아직 스스로를 제어할 능력이 모자라는 아이에게 전자오락은 어른들의 ‘마약중독’이나 ‘알콜중독’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 매달리므로써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나쁜 영향(성적이 떨어진다든지 오락만 하려고 한다든지의 현상)을 주게 된다. 부모들이 오락으로 걱정하는 많은 부분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내용이 주로 서구나 일본에서 들어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외래문화에 익숙하게 하는 작용도 하고 심지어 ‘성(性)’을 상품화한 것들이 범람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중독성이 있는 놀이는 그밖에 위락시설에 의한 놀이들이다. 일정한 돈을 내면 움직이는 이러한 기계적인 놀이는 색다른 재미를 주는 대신 그 놀이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위락시설에 빠져 들다보면 돈이 없어서 놀지 못하지 재미없어서 놀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강한 자극을 주고 그 자극은 곧 중독으로 나타나게 된다.

  나이가 어릴수록 이런 증세를 보이는 데 그들은 그만큼 사리분별이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태워주지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한번하면 그 재미를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위락시설 앞에서 아이가 울면서 계속하겠다고 하는 광경은 그 놀이가 얼마나 심각한 중독증상을 일으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 유행가와 동요

 

   ‘난 알아요- 난 알아요……’ 3살박이 꼬마아이가 동작과 함께 계속 난 알아요를 부르자 부모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동작과 함께 엉성하게나마 부르는 모습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가보다.

  요즘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유행가와 텔레비젼 광고에 나오는 경쾌하고 빠른 가락의 CM송, 만화영화의 주제곡 등이다. 이는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서 놀이노래를 가르쳐 주지 못한 결과이다.

  모래로 집을 지으며 부르던 노래인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다오”와 잠자리를 쫒아 다니며 부르던 “짱아 짱아 예쁜 짱아 앉으면 살고 서면 죽고……” 그리고 술래잡기를 하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인다……”라는 노래를 했었다. 또한 여럿이 긴줄 넘기를 하면서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와 목청을 돋구어 우르르 몰려다니며 “우리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를 불렀었다.

  놀이와 함께 자연스레 나오는 노래로 위와 같은 노래는 20대 후반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고 그 노래에 맞추어 놀았을 것이다.

  놀이와 노래의 어원이 놀라는 것을 보면 조상들은 놀이와 노래가 하나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놀면서 노래가 자연스레 나왔고 일하면서도 힘든 것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과 동떨어진 노래 가락과 가사는 노래의 의미를 왜곡하고 건강한 노래의 통로를 차단한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노래문화일진데 아무 뜻도 모르고 단지 모방만 하는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놀이를 제대로 전수하지 못함으로써 건강한 노래(동요)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고 ‘학교종’, ‘송아지’, ‘개나리’ 등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동요에도 문제가 있다. 물론 각 방송국에서 ‘창작동요제’를 열어 좋은 노래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와 정서를 제대로 대변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들의 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 절실하다. 즉 놀이는 가르쳐 주지 못할 지언정 간단하게 노래는 가르쳐 줄 수 있고 또 아이들이 배우기 쉽기에 전수가 빠를 것이다.

  아버지는 앞서가고 아버지의 허리춤을 잡고 뒤에 따라오는 6살 정도의 남자 아이가 눈을 감은 채 간다. 가면서 아이가 “어디까지 왔니”하니까 아버지가 “당당 멀었다”한다. 계속 되풀이되는데 아이는 무척 즐거워 한다. 조금있다 아이가 앞서고 덩치가 큰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바꿔서 한다.

  놀이와 노래, 노래와 생활이 어울어질 때 아이에게 맞는 노래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것이고 그런 노래 속에서 자랄 때만이 팝송이나 귀가 찢어 질 듯한 음악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노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올바른 놀이관 정립

 

  누구든 자기 아이가 남에게 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남들보다 더 잘나고 똑똑해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식을 둔 부모라면 한결같은 바램이다. 또한 학교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서도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부추키고 있다. ‘친구와 잘 어울리는 아이’, ‘자기의 생각을 바르게 표현하는 아이’보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1등하는 아이’가 더 훌륭한 아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아이들은 노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고 점차 놀이에서 이방인이 된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1등은 결코 두명일 수 없고 나아가 국민학교의 경우 한 반의 40명 중 대학에 가는 아이가 고작 2~3명 정도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놀이관이 만연하는 가운데 건강한 놀이문화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삶을 알차고 풍부하게하며 일이나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써 놀이를 이해하는 데에서 올바른 놀이문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필요하다.

  “잘 노는 사람이 무엇이든 잘한다.”

  “저 아이는 얼마나 잘노는지 몰라”

  “우리 함께 놀아볼래요”

  위에서 ‘놀이’는 긍정적인 의미의 놀이이다. 그런데도 왠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만큼 우리의 그간 놀이관이 잘못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올바른 놀이문화를 만들고 가꾸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놀이관을 갖는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3. 생활 속의 놀이


  옛날에는 농경을 주로 했기에 우리나라의 놀이는 농경에 기초한 것이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공업이 주를 이루면서 농경과 관계되는 여러가지 놀이뿐 아니라 제반 문화의 단절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놀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위의 생활 조건에서 다양한 놀이를 만들고 놀이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조건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실패전차를 만들어 본다든지, 비누방울 놀이를 함께 한다든지, 연을 만들어 띄우는 데에서부터 가족이 쉽게 할 수 있는 칠교놀이, 실뜨기, 칠교놀이 등을 한다면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의 정서순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여행을 할 경우에도 아이들의 장난감을 함께 챙겨 가지고 간다든지 산과 들이라면 풀피리, 풀씨름, 보싸움놀이 등을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놀이를 생활화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원칙들을 생각해 둔다면 어디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놀이가 이루어질 수 있다.


①노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틈만 나면 아이들은 놀려고 한다. 이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놀면서도 무엇인가 그릇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기에 놀이에 몰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먼저 함께 놀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생활과 놀이가 접목되기 위해 긍정적인 놀이관이 가장 급선무이다.


②주위의 모든 것들을 장난감으로 이용한다.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돌을 가지고 비석치기, 사방치기, 쫄기접시, 석전 등의 놀이가 만들어졌다. 이는 주위의 사물을 이용하여 놀이로 만든 선조들의 지혜이다. 마찬가지로 다 먹은 빈 요구르트병도 가운데를 자르면 그릇이 되고 쥬스병도 모았다가 볼링의 핀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모아둔 신문지를 이용하여 모자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길게 찢어 누가 긴가 경쟁할 수 있다. 성냥개비는 산가지놀이를 할 수 있고 검정콩은 반으로 쪼개면 콩윷이 될 수 있다. 사실 관심을 갖고 조금만 생각하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바로 놀이감사물이 놀이감이다. 이를 이용한다면 비싼 장난감을 살 필요가 없어 이중의 득을 본다.


③어른들이 과거에 했던 놀이를 아이들과 함께 한다.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제기차기, 말타기 등 옛날에 했던 모든 놀이를 아이들은 하지 못한다. 이유는 놀이를 전수할 고참아동이 모두 공부, 학원 등에 쫒겨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여 대가 끊겨 버린 이유가 가장 큰 이유이다. 옛날에 놀이마당에 가면 아주 어린 아이부터 15~16세 아이까지 골고루 섞여 놀았었다. 어린아이들은 형들이나 언니가 노는 것을 눈으로 보고 해보면서 자연스레 놀이를 배워나갔다. 그런데 오늘날에 중간전달자인 고참아동이 사라져 놀이의 맥이 끊겨 버렸다. 이를 이어줄 사람들이 바로 어른들 특히 부모들이다.


④새로운 놀이를 제안한다.

  “엄마- 우리 쎄쎄쎄 하자”, “너 혼자해”, “어떻게 해~ ” 아이가 제안한 놀이가 서너번만 묵살되면 아이는 더이상 놀자고 하지 않는다.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편한가? 어쩌면 하나를 얻고 열을 잃은 셈이다. 놀면서 자연스레 서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서로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뿐더러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제안한 놀이를 묵살하기 보다 먼저 놀이를 제안함으로써 놀이동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⑤또래와 함께 놀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요즘은 외아들, 외딸이 많아 아이들의 놀이 친구가 점차 혼자 아니면 인형이나 장난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놀이의 참맛은 서로 놀이를 하는 가운데 감정이 오가고 서로의 미묘한 입장차이 등으로 매번 해도 매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제삿날에 모인 또래에게 전자오락기를 안기는 일은 정말 생각해 볼 일이다. 부모들이 바쁘다고 오락기를 안기거나 VTR 테입을 빌려 주는 것은 제사의 의미를 망각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함께 어울리면서 친족이 살아가는 모습, 걱정거리를 나눌 때 비로소 제사는 제 값을 하는 것이다.

  또래가 부족하다면 자기 집으로 불러 들이는 노력까지도 고려해 볼 일이다.


⑥놀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아이가 어리다면 아이들의 손에 닿으면 안되는 물건을 손 안닿는 데 치우고 올라갈 수 있는 걸상, 마음껏 놀 수 있는 장난감을 제공해 주는 데서부터 쉬는 날 가까운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까지 아이들의 놀이공간 확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어린이날을 맞아 한국갤럽에서 설문한 결과 가장 큰 걱정은 공부이고 가장 큰 불만은 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학교, 주위 공간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조건은 사람들이 땅을 딛고 살 듯이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필수적이고 시급한 것이다.


⑦TV와 VTR에서 아이를 떼어 놓는다.

  놀이 수집을 다니다 보니 TV가 없거나 전기가 시간제한을 두고 들어오는 산간벽지, 낙도 등에 많은 놀이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사하는 것이 바로 놀이를 앗아가는 주범이 바로 TV와 VTR이라는 사실이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멍청이가 되기 보다 과감하게 끄고 함께 놀아 본다면 아이들의 놀이는 어렵지 않게 살아날 것이다. 


4. 좋은 놀이 선별을 위한 제언


  얼마전 동아일보(92.8.26) 사회면에 카드를 이용한 놀이가 그릇되다는 점을 들어 크게 보도된 일이 있다. 「억만장자게임」의 경우 2명이상이 말판과 주사위를 이용, 1천만원의 기본금을 1억원 이상으로 맨 먼저 증식시킬 경우 승자가 된다. 이 게임에서는 돈을 늘리는 방법으로 금광발견이나 카지노 도박, 땅투기 등이 제시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놀이로 「카지노게임」, 「기업왕게임」, 「재벌2세 억만장자」, 「아이쇼핑」, 미니인생 럭키게임」 등이 있는 데 어떤 문방구에서는 하루에 50여개를 판다고도 한다. 해마다 한두번씩 이런 종류의 기사가 나오는 데 날이 갈수록 점점 양상은 그릇된 방향으로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수록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기가 쉽지않다. 예를 들어 요즘 본드를 가지고 작은 풍선을 만들어 부는 놀이가 유행하는 데 이 놀이에 대해 본드를 어려서 맡기에 건강에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 하는 데 한 두번 쯤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따라서 놀이에 대한 관심이 광범위해져가는 상황에서 올바른 놀이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은 그릇된 놀이의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를 지적함으로써 놀이선별의 몇가지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사행성을 조장하는 놀이

  값비싼 소꿉장난감(마론인형, 예쁜 지우개 모으기, 움직이는 작은 차 수집 등)은 은연중에 호화롭고 귀족같은 삶을 동경하게 만들어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게 하고 사치성 조장하게 만든다. 반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턱없이 비싸 사줄 수도 안사줄 수도 없고 이런 것을 여럿이 가지고 놀게 될 경우 계층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②몸에 해독을 주는 놀이

  본드방울놀이는 본드냄새로 인하여 환각작용을 일으켜 뇌에 손상을 입히고 드라큐라 이빨은 여러 아이들이 서로 돌려 가며 사용하기에 병이 옮길 수 있어 비위생적이다. 또한 구멍가게에서 파는 병원놀이 소꿉장난 중 국민학생이 배를 주사기에 찔려 중태를 입은 일이 있었다. 이 놀이도 좀 더 신중히 고려해서 가지고 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가면종류(고양이 가면을 쓰고 길을 건너다 바람에 시야가 가려 차에 치여 사망)도 여러가지 면에서 해독을 주는 등 위생적인 면에서나 신체적으로 몸에 해로운 놀이는 지양되어야 한다.


③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놀이

  수갑, 괴기인형 등 혐오감주는 놀이감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큰 소리내서 놀라게 하는 폭음탄 놀이, 총알이 실제 나가는 총놀이 등은 그릇된 놀이라 여겨진다. 특히 실물과 거의 흡사하고 총알에 눈이 맞아 실명한 사건이 있기도 했다.


④중독성이 있는 놀이

  전자오락을 40분 이상하면 심신이 불안해지고 결과적으로 파괴, 경쟁일변도의 패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해독을 주고 있다. 또한 배터리카, 동물모형의 움직이는 동물 등 기계식 놀이기구는 동전 몇백원어치만큼 반복적인 즐거움만을 몸에 익히게 해 어린이들 창의성과 사회적응력을 떨어 뜨리고 더 놀고 싶은데 돈이 없을 경우 심한 욕구좌절을 경험하게 되므로 건강하지 못하다.(자꾸 사자고, 돈을 달라고하는 경우가 발생)


⑤전쟁을 모방하거나 인명을 경시한 놀이

  대량살살용 미사일을 가지고 눈만뜨면 ‘쾅쾅’, ‘피융피융’ 전쟁모방 놀이를 하는 아이들, 어린이장난감의 80%가 변신로보트 조립, 변신용 로보트로 「슈퍼마리오」, 「스페이스 간담브이」 등 텔레비젼에서 보여지는 만화를 주제로 주먹과 어깨 등이 미사일로 변해 튀어 나오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가치가 미화되는 것 등의 우주 전쟁놀이는 은영 중에 전쟁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경향을 심어 줄 수 있다. 또한 살아있는 병아리를 옥상에서 날리는 놀이 등 인명경시놀이는 그릇된 놀이의 표본. 그밖에 장난감 흉기로 도둑놈잡기놀이(수갑, 권총, 장총, 단검 등 흉기)도 그릇된 놀이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어떤 놀이가 건강하고 올바른 놀이일까?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한 삶을 느끼게 해주는 놀이

긍정적인 사고를 도와주는 놀이

신체발달을 도와주는 놀이

건강한 상상력을 키워주는 놀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놀이

 

등으로 우리가 그간 해오던 대부분의 놀이가 이에 해당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는 오로지 장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높은 중요성과 의의를 가집니다. 따라서 어머니여, 어린이의 놀이를 키우십시오. 아버지여, 어린이의 놀이를 보호하십시오. 인간의 장래의 전 생활은 이 시기에 어떤 놀이를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프뢰뵐의 인간교육 중에서  



5. 오늘날 우리놀이의 현실


  요즈음의 대표적인 놀이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고스돕」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어린이에게 묻는다면 「전자오락」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놀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놀이문화가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럼 우리의 놀이문화가 왜 이이렇게 건강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게 되었을까?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저들은 우리의 건강한 놀이전통을 압살하엿다.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단결된 힘을 없애기 위해 마을 곳곳에서 행해지던 대동놀이를 금지시켰다. 그래도 중단되지 않으니까 총.칼로 막지 못하고 대포를 쏘아 해산시키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최상수씨의 「한국민속놀이의 연구」에서)

이때 중단된 많은 놀이들이 해방 후에 되살아 나지 못하고 박제화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놀이전통(문화전통)을 회복하는 것이 민족적 정서를 되살리고 식민지의 상처를 아물게하는데 최선의 정책이였는데 당시 위정자들은 저들의 집권욕에만 눈이 어두워 관심이 없었다.

  일제에 의해 망가진 우리 놀이 문화는 미군정과 함께 들어온 서구의 저속한 놀이문화에 의해 심하게 왜곡의 길을 걷는다.

  뜻도 내용도 모르고 빠른 템포에 맞게 몸을 뒤트는 디스코, 에어로빅이 만연하게 되었고 텔레비젼에서는 이를 조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고유명절이나 세시퐁속은 자취를 감추고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등이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도 곂코 웃어 넘길 수 없는 현실이다.

저속한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우리놀이문화를 그릇되게 한 것으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형성된 대중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수있다. 옛날과 같이 양반 상놈은 없어졌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하게 우리사회를 옥죄고 있다. 즉 사용자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피고용자의 놀이기회를 강제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예년과 다르게 명절의 휴무기간이 짧아진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한 상품의 소비를 위해 소비적인 놀이가 제공되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적인 요인과 더불어 위정자들의 놀이조작도 우리의 놀이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다. 놀이조작의 가장 대표적이 것이 프로스포츠이 범람이다. 정치나 올바른 사상에의 고민을 없애고 말초적이고 상업적인 프로스포트에 빠져 들게 만든다.

놀이가 서구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위정자들에 의해 조작되며 가진자들에 의해 상업주의화되는 상황에서 진정한 놀이문화는 자리잡을 수 없다.   


  이에 우리의 놀이현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젖어 들어 있는 질곡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 식민지화 되어 있는 놀이현실의 인식이다.

  일본풍의 노래에 맞추어 젓가락을 두드리거나 가라오케에서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하는 따위는 일본식의 놀이문화이다. 또한 캬바레나 디스코텍에서의 쌍쌍춤이나 고고 등은 서구놀이의 그릇된 모방이다. 즉 우리의 놀이판은 마당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지 개인적인 해소의 의미가 아니다. 마침 풍물이 있으면 더욱 함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놀이현실이다.

  상업주의의 놀이는 놀이의 「프로화」로 대변된다. 놀이는 실제 참여하는데 그 뜻이 있다. 선수들이 놀아주고 나머지는 보고만 있는 놀이는 알맹이 없는 찐빵과 같다. 또한 초크렛을 팔기 위한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등도 분명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한탕주의가 만연한 놀이현실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카드놀이, 복권놀이, 재벌놀이를 하고 있다.(실제 2-300원이면 문방구에서 구입할 수 있다)

  어른들은 빠찡고, 고스톱, 수박게임, 복권 등으로 정당한 노력없이 커다란 수확을 얻으려는 비도덕적인 놀이현실을 극복해야한다. 5백원짜리 즉석복권을 사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은 곧 우리의 놀이 현실을 웅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개별화와 관광화한 놀이 현실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전자오락으로, 값비싼 무선 장난감인형 등으로 개별화시켰으며 어른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다.

  또한 가족과 동네를 뒤로 하고 나가 노는 것이 크게 늘어났다. 옛날에는 없었던 바캉스를 생각해보자. 또한 단 체나 친지들끼리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놀러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스스로의 환경에서 놀 근거를 찾지 못하고 바깥에서 찾으려는 그릇된 성향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의 주머니만 얇게 하고 퇴폐적이며 공연히 들뜨게 한다.

다섯째 소수의 건강한 놀이판도 있다.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몇몇 깨어있는 이들에 의해 건강한 문화운동의 방편으로 놀이판이 열렸다. 주로 대학을 근거로 파급되었는데 대표적인것이 탈춤, 풍물, 마당극의형태이다.

  그러나 아직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시기이기에 지속적이고 실천적인 연구와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6. 올바른 놀이문화 정착을 위한 제언 


  우리는 위에서 제시한 놀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놀이현실을 바탕으로 올바른 놀이문화가 이땅에 자리잡을 수 있기위한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전래놀이 중에 오늘날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복원하여 상설화(생활화)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의 연변 등지에서는 이미 고유의 놀이를 민족놀이로 정하고 상설화 했다고 한다. 즉 언제나 널뛰기, 그네뛰기, 씨름 등을 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마련해 놓고 우리의 명절에는 각 종목에 대회를 개최하여 시상한다고 한다. 심지어 연변에서는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장사에게 아직도 황소를 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래놀이 중 오늘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선정하여 넓은 공터에 마련해 놓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마을단위에서 또한 대학에서는 이러한 시설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너른 공터에 널뛰기 터를 몇개 만들어 놓아 누구든지 어울려 널을 뛰게 하고(사실 널뛰기가 쉽지 않고 널을 뛰어 보지 않은 어른이 많다) 큰 나무에는 그네를 달아 오며 가며 한번씩 타보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상설화 해놓았다가 마을이나 학교에서 커다란 놀이판(보통 마을축제나 대학축제)이 벌어지면 대회를 열고 시상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놀이를 오늘날의 정서에 맞게 발전 시킨 것이다.


  둘째 재미있고 건강한 놀이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지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이들에게 전자오락이나 그 밖에 좋지 않은 놀이를 하지 말라고 하기 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놀이를 소개하고 함께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걱정만 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절대로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릇된 상업주의 문화와 사대주의 놀이가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히 요구된다.


  셋째 잠재되어 있는 놀이욕구를 표면화 시키는 창작놀이가 생활화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여러가지 전래놀이(고무줄놀이,제기차기,사방치기,실뜨기 등)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놀이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행해진다. 이런 놀이가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즉 고무줄(일제 강점기에 들어옴)이 처음 놀이감으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무줄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 수 없을까?’라는 생각들이 모아져 시작되었고 점차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놀이가 만들어 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래놀이는 주위의 모든 사물 즉 돌,나무,풀,실 등을 이용하여 ‘이것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모아져 놀이로 발전한 것이다. 길가에 흔한 돌이 사방치기,땅재먹기,쫄기접시,비석치기 등으로 나무는 자치기,죽마놀이,칼쌈의 칼 등의 놀이로 발전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주위의 모든 사물이나 조건들 속에서 창작놀이를 만들어 내고 생활화 한다면 놀이의 빈곤은 사라질 것이다.


  넷째 우리의 세시풍속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세시풍속의 소멸은 비단 산업화에 따른 농업의 피폐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업주의문화와 서구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도 큰 원인이다. 세시풍속의 소멸은 곧 놀이의 소멸과 우리의 정신적인 기둥들을 모두 소멸시켰다. 그렇다고 옛날의 세시풍속을 그대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날에 맞게 재구성하여 접목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세시풍속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올바르게 접목 시키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것은 칠월칠석에 편지보내는 식으로 한다면 어떨까?


  다섯째 심성놀이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모색해야 될 것이다. 심성놀이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프로그램의 놀이화이다. 청소년기에 올바른 문화를 접하기 힘든 상태에서 인간을 위해 공부하는지 공부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지 주객이 전도되어 소외가 가중되었었다. 이런 상태에서 일그러진 심성을 회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삶을 도와주는 심성놀이는 놀이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그 의미가 있다.


  끝으로 놀이는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바로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조금만 생각을 기울인다면 찾을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생활에 윤기가 나고 풍요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http://www.nol2i.com/m_sub43.htm

'퍼온~바둑..! > 놀이 이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행렬 게임  (0) 2008.06.07
[=] 놀이에 대한 10가지 입장  (0) 2008.06.07
[=] 놀이문화의 현실과 놀이연구의 필요성  (0) 2008.06.07
[=] 놀이와 교육  (0) 2008.06.07
[=] 어린이와 놀이  (0) 2008.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