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사유와 상상.

[=] 억압된 금기적 욕망과 쌍생아적 상상력

온울에 2008. 5. 26. 04:06

목 차

1. 녹색광선과 글쓰기
2. 거세불안과 위축된 음화(陰畵)
3. 동성애와 자기기만적 수사학
4. 구속된 상상력과 텍스트의 근친상간
5. 발상의 커밍아웃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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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中央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학술지명 人文學硏究 
ISSN  
권 34 
호  
출판일 2002.  

 

 

 

억압된 금기적 욕망과 쌍생아적 상상력
( 신경숙론)


Suppressed Desire, Taboo, and Liberating Imagination in Keang-Sook, Sin


최강민
(Choi, kang-Min)
2-046-0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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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녹색광선과 글쓰기
당신은 석양이 빚어내는 '녹색광선'의 장관을 본 적이 있는가. 태양의 적광(赤光)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무렵,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에 푸르스름한 광선의 띠가 잠시 연출하는 아름다운 광경. 만일 사랑하는 연인들이 함께 손잡고 그 장관을 볼 수 있다면, 불연속적 존재의 경계선을 허물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에릭 로메르가 감독한 「녹색광선」(1986)에서 델핀은 영화 내내 녹색광선을 함께 볼 존재를 찾아 헤매다가 간신히 만난다. 해변에서 서로 기댄 두 남녀. 점점 어두워져 가는 화면과 함께 녹색광선은 섬광처럼 빛나며 소멸하는데 델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 행복한 순간에 왜 델핀은 울음을 그칠 수 없었을까.

신경숙의 소설을 읽으면 바로 이 '델핀'이란 여성이 매번 겹쳐져 연상된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델핀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신경숙의 작중인물들은 홀로 그 녹색광선을 보며 서럽게 운다는 점이다. 어둠이 속삭이는 유한한 존재의 소멸 앞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가는 울음. 이처럼 그녀의 글에서 연상되는 깊은 슬픔의 숨결은 삶과 죽음의,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서 흔히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신경숙은 연민의 시선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의 흔적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녀의 손길에 의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부활의 몸짓을 퍼득인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의 소설에서 점점 짙은 피로감을 느낀다. 거대서사에 의해 억압된 미시서사의 속살을 호출하여 독자의 무딘 신경을 치료했던 신경숙의 마력 그것이 생명력을 다한 것일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녀의 상상력이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동어반복을 거듭한 결과이다. 그녀의 물빛 문체는 어떤 이야기가 주어지더라도 맛갈스러운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힘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서 작가 신경숙이 당면한 문학적 위기를 은폐할 수는 없다. 신경숙의 글쓰기는 보다 근본적인 지점에서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한 조만간 암초에 부딪쳐 좌초할지도 모른다.

신경숙의 소설이 지닌 상상력의 원천은 앞에서 말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선의 체험이다. 문제는 그 체험이 새롭게 재해석되어 도약의 발판대로 이용되기보다 점차 화석화된 틀로 신경숙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존재론적 불안은 그녀의 글쓰기를 촉발시킨 원동력이었지만 그 불안이 타성화되면서 낯익은 풍경의 연출로 이어진다. 불안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금기적 욕망들도 무의식의 창고에 감금되면서 신경숙의 문학적 상상력은 성장을 멈춘다. 이 글은 금기적 욕망의 억압과 한계점에 도달한 상상력을 함께 연관시켜 작가 신경숙이 지닌 문제점을 점검하고자 한다. 특히 동성애적 욕망을 중심으로 그녀의 문학을 조명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궁극적으로 작가 신경숙의 새로운 비상을 열망하는 몸짓이다.

2. 거세불안과 위축된 음화(陰畵)
인간에게 최초의 고향은 아마도 어머니의 자궁일 것이다. 그 속에서 경험한 연속성의 체험은 출산과 함께 파괴되지만 그 충만한 느낌은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다. 우리들이 꿈꾼 유토피아의 청사진은 바로 이러한 자궁의 이미지에서 발원되어 형성된 것이다. 현실의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인간들은 바로 자신들의 발원점인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신경숙의 작중인물들은 불안의 자각 속에 자궁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이슬어지'(『깊은 슬픔』), '아름다운 호수'(「그가 모르는 장소」), '미나리 군락지'(『바이올렛』) 등의 공간은 바로 이 자궁의 이미지가 스며든 정겨운 고향이다. 하지만 그 고향들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 삶의 주변부로 내몰려 소멸한다. 이제 고향은 기억의 저편에서만 숨쉬고 있을 뿐이다. 자식들의 영원한 안식처의 상징인 어머니도 고향이나 집에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슬픔』에서 은서의 어머니, 『바이올렛』에서 산이 어머니는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다. 더 이상 어머니의 자궁은 불안을 막아줄 안전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숙의 작중인물들은 부모 부재의 고아의식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간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자식이 어머니의 자궁과 합일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정전(正典)이다. 기존 지배질서인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포된 근친상간의 금지. 자식은 계속 어머니의 자궁을 향한 욕망을 표출하다가는 아버지에 의해 어느 날 자신의 상징적 성기인 팰러스(phallus)가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라캉이 언급한 팰러스는 남성의 물질적 성기라기보다 남성이 지닌 권위와 권력을 표상하는 상징적 기호이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아버지에 의한 거세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 변용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팰러스를 소유한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팰러스의 소유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족적 충만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자궁도 결점이라는 사실. 안정된 시공간을 열망하는 신경숙의 작중인물들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생산하는 질서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내면화한 신경숙의 여성인물은 팰러스를 소유한 남성에 대해 두려움을 간직한다. 남성들이 언제 팰러스를 휘둘러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신경숙의 작중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세상과 관계맺기의 두려움'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소름 끼치게 흉한 몰꼴로 원회를 겁탈하는 곰배발이'(「지붕과 고양이」), 출세를 위해 은서를 버리는 '완'(『깊은 슬픔』), 희재언니에게 낙태를 권유한 양장점 남자(『외딴방』), 오산이를 강간하는 최(『바이올렛』) 등의 모습은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가진 두려움의 반영물이다. 새디즘적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에 의해 여성의 삶은 불행의 색채로 온통 물들여진다. 순정만화에 등장할 듯 싶은 가녀린 여성인물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남성의 손에 맡겨버린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순응성은 남성의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수용함으로써 거세불안에서 도망치려는 소극적 전술의 산물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남성이 발산하는 거세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필연적으로 다시 남성의 폭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신경숙은 공지영의 전투적 페미니즘은 아닐지라도 다른 출구를 모색해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신경숙이 생각해낸 비장의 무기는 전통적 가족주의와 낭만적 이성애이다. 동생을 걱정하는 자상한 오빠와 가슴 설레게 하는 이성적 남성은 불안을 초래하기보다 오히려 험한 바깥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든든히 보호해줄 보디가드로 자리매김된다. 여기서 가부장제는 여성을 구속하는 억압적 제도가 아니라 약자인 여성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보호막으로 인식된다. 보호의 대가로 신경숙의 여성인물은 착한 여자나 지고지순한 순애보적 사랑을 하는 여성이 된다. 남근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기보다 신경숙은 고분고분 순종하는 전통적 여인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제 이성애적 사랑은 초월적 기표로 자리하면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원이 된다. 남녀간의 사랑이 절대화 된 세계에서 이성애적 사랑을 하지 못한 존재들은 소외감을 경험한다. 사랑의 신화 속에 생산되는 상대적 박탈감.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신화에 도달하기 위해 사랑에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공격적 남성상과 수비적 여성상이 만나 이루어지는 한편의 아름다운 사랑의 로맨스. 이때 남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신경숙의 여주인공들은 삶의 결핍을 확인하며 대개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깊은 슬픔』에서 은서, 『외딴 방』에서 희재 언니, 『바이올렛』에서 산이 등의 작중인물들은 사랑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여 스스로 가부장제의 신전에 바치는 화려한 제물이 된다.

그렇다면 신경숙은 당대 사회의 지배담론이 요구하는 욕망의 풍경만을 전적으로 노출하는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순종하는 욕망의 순종성이 양화(陽畵)라면, 길들여지지 않은 불온한 욕망의 꿈틀거림은 음화(陰畵)이다. 신경숙의 문학이 지닌 미학적 낯설음은 바로 이 음화가 주변부에처 중심부인 양화를 촉촉하게 감싸안음으로써 배태된다. 독자들은 장편 『깊은 슬픔』(1994)을 방송스크립터인 은서, 미술교사인 세, 회사원인 완이 그려내는 운명적 사랑의 이야기로 읽었을 것이다. 여자는 한 남자만을 사랑해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일부일처제의 논리, 이러한 이유로 두 남자를 사랑했던 은서는 죽음으로서 단죄된다. 이러한 양화적 시각이 아니라 음화적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이 소설에 잠시 등장하는 화연은 화재로 인해 부모를 잃고 이모집에서 살다가, 남자 사촌과 눈이 맞아 사생아를 출생시킨 현대판 오이디푸스이다.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화연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이모집에서 쫓겨난다. 금기파괴의 사랑에 대해 가부장제 사회의 철저한 응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남성으로 인해 불행해졌던 은서와 화연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따스한 평화의 안식을 경험한다. 그것은 남성의 팰러스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하는 충만의 느낌이다. 이것은 이성애 중심주의로 무장한 가부장제에 또 다른 위협이다. 남근중심주의는 또 한번 개입해 작중인물을 파멸로 인도한다. 화연의 자살은 지배질서에서 이탈한 금기적 욕망에 대한 마지막 응징인 것이다. 이러한 서사의 전개는 작가 신경숙이 금기적 욕망과 지배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결과이다. 음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은서의 자살도 남성과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인식의 산물이다. 따라서 은서의 죽음은 남녀간의 사랑이 빚어낸 비극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산출된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음화는 양화의 언저리에서 잠깐 욕망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독자들은 억압된 욕망의 그림자를 언뜻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때 그 음화를 통해 드러난 금기 파괴의 욕망들은 과거의 영역에 속하기에 현재를 결코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미래보다 과거에 고착된 '뒤돌아보기'이자 '어제 캐내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온한 욕망의 몸짓이 한때의 불장난이었고 현재의 자신은 그렇지 않다라는 고백성사인 것이다. 또한 과거 회상조의 서사는 복고풍주의를 양산하며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한다. 여기에 작가나 독자의 비판적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양화에 가려진 음화에서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물론 그 가능성은 신경숙에게 아직 활짝 열려 있지 못하다.

신경숙은 거대서사에 억압된 미시서사를 복원해 독자에게 새로운 미학적 울림을 전달했다. "변화로서의 문학보다는 정서적 환기력으로서의 문학"을 지향한 그녀의 섬세한 현미경적 문체. 그것은 남성작가들이 포착하기 힘들었던 미묘한 시선의 드러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욕망의 억압 속에 상상력의 제약이 뒤따르면서 그녀가 지닌 섬세함이 확대되지 못한 채 제 자리를 맴돈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매번 질겁해 도망치는 여성인물들. 그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과도한 감성의 눈물과 신파조의 과장된 행동이 연출하는 비극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전망부재의 서사는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틀 안에서 상상력을 작동시킨 데에서 비롯한다.

3. 동성애와 자기기만적 수사학
2001년 8월 1일. 많은 사람들이 이 날짜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 동안 어둠 속에서 웅크리며 신음하고 있던 동성애자들은 이 날짜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 날은 독일에서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시킨 법령이 발효되면서 적어도 그 나라에서 동성애는 더 이상 법의 사각지대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별 때문에 호모나 레즈비언으로 불리우며 음지에서 살아야 했던 연인들은 부부라는 합법적 성곽에서 밝은 미래를 설계할 기초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비록 유럽의 한 국가에서 동성애의 합법적 결혼이 허용되었지만 이것은 동성애 문제에 있어 희망적 징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의 대다수는 여전히 가부장제에 기초한 이성애 중심주의를 신봉하며 동성애를 타자화한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연애자=에이즈=비정상=악'이라는 등식의 성립 속에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탄압했던 것이다.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의 편견과 탄압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고역의 길이다. 우리와 성적 코드가 다른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동성애자들은 멸시와 천대 속에 주변부로 내쫓겨야 했던 것이다.

신경숙은 폭력적 남성보다 여리고 순수한 동성(同性)에게 호의적 시선을 보낸다. 그래서 작가는 「멀리, 끝없는 길위에」에서 '나'와 '이숙', 『깊은 슬픔』에서 은서와 화연, 『외딴방』에서 '나'와 '희재 언니', 「딸기밭」에서 '처녀와 유', 『바이올렛』에서 '오산이와 수애' 등에서 보듯 양자적 동성 관계를 흔히 등장시켜 폭력적 불안과 대처한다. 남성으로 대변되는 세계의 폭력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동성간의 결합력도 그만큼 비례하여 일정 부분 상승한다. 물론 이 둘의 관계에서 동성애적 성향은 극도로 억압되어 있다. 불안을 극복하고자 한 결합이 오히려 거세불안의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이것 때문에 신경숙의 텍스트는 의식에서 이성애를, 무의식에서 동성애를 보여주는 양면성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 그 불안한 만남이 유발하는 긴장과 낯설은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미학을 발생시킨다.

억압된 신경숙의 동성애적 욕망은 단편 「딸기밭」(1999)에 와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얼굴을 잠시 내민다. 이 소설은 23살의 주인공 처녀를 중심으로 유와 그 남자와의 사이에 펼쳐진 삼각관계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홀어머니 품에서 성장했던 처녀는 팰러스의 부재 속에 불행을 경험한다. 처녀가 성장해서 '유와 그 남자'에게 보낸 뜨거운 욕망의 싹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결핍의 체험에서 잉태된다. '처녀'가 '그 남자'와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도 아버지와의 유사성 때문이다. 양자의 닮은꼴 관계가 성립하면서 처녀는 '그 남자'와 성 관계를 가짐으로써 아버지의 팰러스를 간접적으로 소유한다. 이런 점에서 처녀의 욕망은 외디푸스콤플렉스의 자연스러운 극복 과정이다. 다만 그것이 혼전정사였다는 점에서 금기 일탈이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처녀가 유와 벌였던 동성애는 가부장제 사회에 더욱 파괴적으로 다가온다. 남녀의 성적 결합을 통한 재생산에서 가부장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보았을 때, 동성애는 바로 이러한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와 그 남자의 사랑은 '유'가 본격적으로 처녀의 마음에 끼어들면서부터 균열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미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그리움 못지 않게 불신의 뿌리가 그녀의 마음에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제가 그 남자가 아버지처럼 자신을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에 비해 어머니로 상징되는 여성은 늘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을 해온 따스한 존재이다. "어렸을 적부터 자해들을 동경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처녀는 동성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동성애는 금기시되었기에 처녀의 욕망은 '유'를 만나기 전까지 의식의 표층으로 발산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유'는 삶의 비애도, 고통도, 결핍도, 불가능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처녀는 그 반대편에 초라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변별적 차이는 처녀가 순수성의 아름다움을 내뿜는 유를 욕망하도록 자극한다. 그것은 그 남자의 팰러스를 소유하면서도 채울 수 없었던 욕망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다. 처녀는 자신을 기다리는 그 남자에게 가지 않고 '딸기밭'에 유와 함께 감으로써 이성애 대신 동성애를 선택한다. 금기적 욕망의 심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래서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살의 속에 유의 목을 조른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재한 모든 것을 소유한 대상에 대한 질투심이자 동시에 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끌림에 대한 저항 현상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살의는 오히려 동성애적 욕망을 더욱 부추기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 작품에서 '빨간 딸기'는 주인공의 무의식에 자리한 금기적 욕망인 동성애를 상징한다. 따라서 유와 처녀가 서로 상대방에게 딸기를 문질러 묻히며 애무하는 모습에서 감금되었던 욕망의 폭발을 감지할 수 있다.

유의 살빛은 투명하다. 발육은 조화롭다. 비틀리지 않았다. 억압받지 않는다. 처녀는 유의 밝은 귓볼에 혀를 갖다 댄다. 유의 흰 목덜미에 처녀의 손자국이 빨긋하다. 처녀는 유의 목에 나 있는 자신의 손자국을 따라 유를 애무한다. 유의 천진함. 처녀가 유의 약간 벌어 진 입 속에 혀를 밀어넣을 때까지도 유는 저항하지 않는다. 나직하다. 평화롭다. 적의가 없다. 처녀가 유의 목구멍 깊숙이 혀를 집어 넣었을 때다. (「딸기밭」, 82쪽)

그런데 처녀는 딸기밭에서 돌아온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코 금지된 것들 근처에 가지 않는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는 동성애적 욕망을 단죄하는 가부장적 거세위협이 발생했음을 뜻한다. 처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어오는 거세위협에 굴복해 과거와 단절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그 남자에 대한 죄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그 후 '처녀'에게 남은 것은 잠시 금기를 위반했던 추억과 독신의 삶이다. 처녀는 금기를 생의 불가능성이라 간주하고 스스로를 망각의 늪에 유폐시켰던 것이다. 처녀와 동성애적 사랑을 벌인 '유'도 겨우 27세의 나이에 낯선 이국 땅의 개울에서 미끄러져 받은 충격으로 물에 빠져 숨진다. 결국 금기 위반의 사랑을 했던 자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 결말은 다소 작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기시된 사랑을 가까이 하면 불행이고, 그것과 멀어지면 행복이라는 이분법적 결론은 이성애자의 논리를 그대로 재생산한 것에 불과하다. 신경숙이 편협한 이성애주의와 한판 붙어볼 전투적 의지가 있었다면 갑작스러운 처녀의 욕망 금지나 '유'의 어이없는 죽음이 발생하도록 서사를 전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견고한 지배질서에 저항하기에 작가 신경숙은 너무 여리다. 그녀는 욕망을 해방시키면서 파생되는 거세위협을 견뎌낼 어떠한 의지나 신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작가가 텍스트에서 '서술하는 나'와 '경험하는 나'를 분리시켜 과거 회상조의 소설을 즐겨쓰는 것도 혹시라도 들이닥칠지 모르는 거세위협에서 안정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녀가 금기적 욕망인 동성애를 서둘러 다시 지하에 봉인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상상력 지평도 닫혀버린다. 이런 점에서 비록 그녀의 소설에서 음화의, 과거의 형태로 등장했던 욕망 해방성은 또 다른 억압을 자행하기 위한 자기기만적 수사학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4. 구속된 상상력과 텍스트의 근친상간
한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지점을 향해 텍스트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비록 작가들이 다른 제목의 작품을 생산하더라도 그것은 동일한 관심사의 변형에 불과하다. 아마도 위대한 작가란 같은 내용을 '다르게' 꾸며내는 능숙한 거짓말쟁이인지 모른다. 모리스 블랑쇼는 작가가 비슷한 얘기를 끊임없이 다르게 생산하는 현상을 '무의식적 반복작용'이라 지칭한다. 이 현상은 작가의 개성 구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의식적 반복작용 속에 그 작가만이 가진 체취인 '아우라(aura)'가 독자에게 물씬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경숙도 이 무의식적 반복작용의 정도가 유달리 강한 편이다. 그녀는 불안에 노출된 가녀린 여성의 심리 상황을 소재와 제목은 다르지만 지속적으로 펼쳐보인다. 게다가 그녀는 이숙이 등장하는 단편 『밤길』과 『멀리, 끝없는 길 위에』, 희재 언니가 출현하는 단편 『외딴방』과 장편 『외딴방』, 꽃집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배드민턴 치는 여자」와 장편 『바이올렛』 등에서 보듯 동일한 소재를 좀더 보강하여 단편이나 장편 형식으로 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외에도 제목은 다르지만 「모여 있는 불빛」,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어떤 여자」, 장편 『외딴 방』 등에 출현하는 소설가는 어딘가 닮아 있다. 이러한 유사성의 반복은 작가가 앞에 한 이야기가 미진한 까닭에 좀더 충실히 재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이때 전제조건은 그것이 앞서의 작품과 다른 질적 차이의 확보이다.

신경숙의 무의식적 반복작용이 가장 성공적으로 나타난 것은 단편 「외딴방」과 장편 『외딴 방』(1995)에서이다. 단편 「외딴방」은 10대 후반 주인공인 '내'가 서울에 상경해 희재 언니와 만나면서 겪었던 아픈 기억의 회상이다.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산업체 야간 특별학급에 다녔던 나와 희재 언니 둘이 드러누우면 차렷자세로 자야 했던 희재 언니의 작은 외딴 방. 소박한 꿈을 향해 나름대로 열심히 버둥거렸던 희재 언니는 재단사와 얽힌 사랑의 굴레 속에 자살하고 만다. 이러한 그녀의 죽음은 독자에게 개인사적 비극으로 읽혀진다. 이에 비해 장편 『외딴 방』은 희재 언니의 자살이라는 중심 골격에 새로운 살과 뼈가 붙으면서 단편 「외딴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작품이 된다. 특히 70년대의 산업화와 유신상황이 맞물려 전개되면서 희재 언니의 죽음은 개인적 사건에서 확대되어 생생한 시대의 아픔으로 읽혀진다. 장편 『외딴 방』은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작품은 대개 앞선 작품의 질을 뛰어넘지 못한 채 단순한 에피소드 추가에 머문다. 작가 신경숙의 무의식적 반복작용은 상상력의 빈곤과 소재의 한계가 맞물리면서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단편 『배드민턴 치는여자』를 확대한 최신작인 장편 『바이올렛』(2001)은 작가가 처한 현재적 상황을 잘 대변한다. 이 소설에 전면 배치된 것은 사진기자란 남자를 그리워하는 꽃집여자의 순애보적 사랑이다. 그 밑바탕에는 산이와 남애로 대표되는 동성애적 욕망이 숨어 있다. 『바이올렛』에서 주인공 '산이'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홀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결손 가정의 자녀이다. 어린 시절,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남애'도

어머니를 일찍 여위었다는 점에서 결핍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여자애는 고향 마을의 냇가에서 목욕하며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는 동성애적 희열을 경험한다.

하지만 황홀한 순간 이후, '남애'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산이'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바이올렛』은 「딸기밭」과 사촌지간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산이에 비해 아버지가 존재하는 남애는 동성애를 배척하는 가부장제의 금기를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남애의 배신은 산이에게 동성애적 욕망의 금지와 이성애적 사랑의 허용이라는 기호를 각인시킨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는 새로운 남성의 팰러스를 찾아 매번 떠나고, 언제나 집에 혼자 남아야 했던 산이. 그녀도 성장하여 어머니처럼 우연히 만난 사진기자의 팰러스를 욕망한다. 이때 욕망의 대상인 사진기자의 모습은 산이에 의해 부풀려지거나 어머니의 욕망을 모방해 만들어낼 환상의 남성상이다. 산이의 욕망은 혀구적이기에 대상과 합일하지 못한채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자크 데리다가 언급한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에서 발생하는 차연(差延)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산이에게 다른 비상구가 없다. 꽃집 종업원인 산이가 동료 수애와 형성한 친밀한 관계는 앞서 겪었던 남애와의 사건처럼 파탄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가능성의 부재 속에 절망하는 산이의 모습은 팰러스의 부재가 곧 불행이라는 가부장적 가치에 대한 찬미가이다. 이제 이성애적 사랑의 성취는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는 신화가 탄생한다.

신경숙은 작가 후기에서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여주인공이 빚어지지 못한채 자신의 마음 속에 십여년 동안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거세불안을 의식한 작가가 동성애라는 금기적 욕망을 다루는 데에 상당히 힘들어 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십여년 후에 나온 『바이올렛』은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 비해 좀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 주었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경숙이 보여준 욕망의 해방성은 오히려 「딸기밭」보다 후퇴한다.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확장되기보다 답보상태거나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안과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신경숙의 소설에서 불온한 탈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의 탈선은 곧 복귀할 지배질서의 공고성을 예고하는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의식적 반복작용'은 작가의 일관된 미학을 보여주기보다 벽에 갇혀버린 상상력의 비명으로 변질된다. 금기적 욕망의 작위적 억압은 서사를 음화의 위축과 양화의 확장이란 고정된 패턴을 양산하도록 만든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작가도 이러한 상태를 명확히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래서 환상이나 여행 등의 낯선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상상력의 부활을 시도하기도 한다.

내가 답답한 건 내가 쓰는 글이다. 나는 내 이름을 가려도 내가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 가보지 않은 곳에 발을 디뎌보는 것 같은 새로움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써 놓고 보면 늘 어디서 본 듯했다.(『깊은 숨을 쉴 때마다』, 266쪽.)

그러나 신경숙의 무의식적 반복작용이 독자에게 주로 보여주었던 부분은 능숙한 문체에 의해 단편을 언제든지 장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단편과 장편은 단지 분량의 많고 적음으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의 단면을 드러내는 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적 감성을 노출시켜 서사를 전개할 수 있다. 하지만 장편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면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성만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숙은 『바이올렛』을 시종일관 감성과잉 상태로 끌고간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미 『깊은 슬픔』에서 지겹도록 보지 않았던가. 특히 사랑에 실패한 산이가 공사장 포크레인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쓰는 마지막 장면은 소설의 개연성보다 작위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중병에 걸린 상상력의 문제점을 신파적 통속성과 감상성이라는 그녀의 전매특허로 은폐하려고 했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신경숙의 글쓰기는 말할 수 없는 것들, 소멸해버린 기억들을 다시 부활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외딴 방』)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질겁하면서도 불안이라는 대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불안과의 만남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불안의 체험 속에 삶이 더욱 생생한 빛깔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은 약자인 여성이 삶을 살아가면서 느낀 불안의 결을 사적 고백체의 문장으로 그려내는 데에서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신경숙은 그 불안을 정형화, 규격화시킨다. 불안은 더 이상 불안이 아닌 익숙한 풍경으로 추락하면서 텍스트의 근친상간성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할 때 신경속의 글쓰기가 지닌 성장가능성은 사망신고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녀가 현재 당면한 위기의 극복은 존재의 불안을 다시 야생의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것은 불안을 유발하는 금기적 욕망의 해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욕망의 해방이 반드시 동성애적 욕망이나 근친상간 등과 같은 금기 파괴적 탈주일 필요는 없다. 신경숙이 장정일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열망하는 것은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안주하지 않는 상상력의 비상이기 때문이다.

5. 발상의 커밍아웃을 기대하며
신경숙의 글은 투명하다 못해 창백하다. 그 투명함에 비치는 소스라치는 여성인물의 떨림.그 떨림은 죽음이 환기하는 불안과의 만남이자 회피이다. 존재론적 불안은 사회의 거세불안으로 변용되면서 신경숙의 반사회적 일탈 욕망은 억압된다. 『외딴 방』에 등장했던 현실의 음영은 얼마 못가 사라지고 개인간의 갈등과 긴장이 전면을 가득메운다. 텍스트의 주변에 위치한 억압된 욕망인 음화가 촉촉한 물기로 중심에 자리잡은 지배질서인 양화를 감싸안으며 소멸해버린 것들의 개인적 목소리가 소생한다. 이것은 글쓰기를 통해 죽음이 유발한 불안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지연하려는 에로스적 욕망의 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의 마침표는 서사의 죽음이자 불안과의 대면이기에, 신경숙은 환유적 자리바꿈으로 대상을 교체해 네버엔딩스토리를 계속 만들어낸다. 그녀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글쓰기에 대한 자각증은 이러한 심리의 반응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죽음을, 불안을 연기하려는 작가의 '무의식적 반복작용'이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결국 신경숙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왕에게 천일야화를 들려준 현대판 세헤라자드인 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죽음이, 불안이 낯익어지면서 신경숙의 글은 새로운 상상력의 결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일란성 쌍생아적 글쓰기를 선보인다. 전통적 가족주의, 사적 고백체의 문장, 약자인 여성과 강자인 남성, 소녀취향성, 이성애적 사랑의 이데올로기, 과잉된 감성의 노출, 회상조의 복고풍주의, 현실과 유리된 환상, 자기연민에서 발생한 신파조의 눈물 등의 단골 메뉴는 신경숙의 무의식적 반복작용이 낳은 현상이지만 동시에 한계에 달한 상상력의 왜소증인 것이다. 녹색광선의 아름다움은 사라진 채 질적 변화가 담보되지 못한 비슷한 내용의 대량생산은 아우라의 죽음이자 매너리즘의 탄생이다. 신경숙은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로 대표되는 금기적 욕망을 끌어와 상상력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동성애를 그린 「딸기밭」은 작가의 새로운 문학적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잔잔하게 스며 있다.

그러나 신경숙의 시도는 『바이올렛』에서 보듯 제대로 꽃피지도 못한 채 움츠려든다. 사회의 거세위협 속에 자기 검열기제가 작동하면서 작가는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갇혀버린다. 그녀에게 아직까지 반오이디푸스의 깃발은 낯선 이방인인 것이다. 금기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상황과 조건이 만들어낸 규칙일 뿐이다. 따라서 '금기 파괴자=악'이라는 이항대립체계는 자명한 불변의 진리일 수 없다. 우리가 신경숙에게 바라는 것은 금기적 욕망의 형상화보다 작가 스스로 설정한 금기의 영역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이것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은 발상의 커밍아웃(coming out)이다.

신경숙의 텍스트는 짧은 미니스커트보다 긴 플레어스커트를 애용한다. 감춤이 드러냄보다 더욱 미덕인 그녀의 문학세계. 문제는 그것이 상상력의 빈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신경숙의 한계점도 감추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마력적인 그녀의 문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작가의 한계점을 감추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문제의 해결일 수는 없다. 라인홀트 메스너란 산악인이 두려움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산에 오르는 것처럼 신경숙도 익숙한 대상과 결별하고 좀더 높은 곳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보다 현재나 미래에 상상력의 시선을 던질 때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 못할 때 문화적 권력으로까지 표현될 정도로 일반 독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경숙의 위치는 허상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글에서 짧은 미니 스커트를 볼 수 있게될 날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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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최강민
(Choi, kang-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