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사유..!/사유와 상상.

[=] 문화 소비 주체의 괴물적 상상력

온울에 2008. 5. 26. 04:06

목 차

1. 서 론
2. 분절 가능한 신체, 분절 가능한 관계
3. 배제의 시선과 길들이는 권력
4. 권태속을 유영하는 놀이의 공간
5.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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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崇實語文學會 
학술지명 崇實語文 
ISSN  
권 18 
호  
출판일 2002. . .  

 

 

 

문화 소비 주체의 괴물적 상상력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1)> 연구)


이용군
1-108-0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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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금 현대인의 얼굴은 어떠한가? 세기말의 우울과 혼돈을 넘어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로 열병을 앓았던 지난 시대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새삼스레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현대인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이 더 열악해진 현실에서 기인한다.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이라는 사람들의 소망은 점점 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새로운 세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견디고 있으며, 현실은 여전히 허위와 기만으로 들끓고 있다.

소망과 현실의 분리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요구에서 이탈하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또한 현대는 이러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다양한 기호와 문화들을 생산한다. 현대의 문화는 현실 재현적 가치를 넘어서 재현되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현실이 더 이상 의미 생산의 장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비루한 삶의 공간으로만 인식될 때, 현대인은 현실과는 다른 문화적 코드에 열광한다. 이제 더 이상 문화는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이룩해 놓은 직조된 삶 전체의 모습을 지칭하지 않는다.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생산해낸 인류는 이제, 인류가 상상해낼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해내기 시작했다"(<캘리포니아 나무개>)는 소설 속의 말처럼 문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초과해 새로운 문화적 코드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이 초과의 과정 속에서 현실은 인간 사고의 준거로써의 기능현실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기호의 생산이 사물의 생산을 대체하고 기호와 코드가 지배하는 의미작용의 양식이 생산 양식보다 우월해졌다고 이야기한다.2)

현실의 재현이 아닌 현실을 초과한 문화적 코드들이 삶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면서, 현대인들의 삶은 분열적인 징후 속에 빠져든다. 현실의 삶이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새디스트적 형태를 취하게 될 때, 그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새로운 새디스트가 된다. 사도-매저키즘3)의 상황은 현대인의 병적 징후를 나타내는 기표로써 작용한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그들은 자극적인 문화적 코드들에 자신들의 삶을 내맡긴다. 여기에는 제어장치가 없다. 아니 그들은 제어장치가 없는 완전한 엑스타시의 상태를 희구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인은 아드르노가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고 묘사했던 '오디세우스'의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아드르노는 근대 시민의 자기 부정을 시민적 개인의 원형인 '오디세우스'에게서 발견한다.4) 그는 '오디세우스'의 자기 유지는 자기 부정과 희생, 체념(Entsagungs)으로 가능한 것임을 밝힌다. 근대적 개인의 원형인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의 귀향을 위해 감내한 수많은 자기 부정과 체념의 형식은 지금 새로운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라는 궁극적인 의미의 공간에 나아가기 위해 배 위의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고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 있어 '싸이렌'의 노랫소리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지만, 그 악마적 유혹도 귀향이라는 절대 명제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인은 현실의 고통을 상쇄할 의미의 지향점도, 자신의 몸을 지탱해줄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는다. 그들은 홍수처럼 타전되는 메시지와 기표들과 이미지 속에서 부유할 뿐이다. 그 흘러넘침 속에 그들의 얼굴은 지워진다.

현실의 초월, 문화적 코드들의 범람, 자극적인 것에의 몰입, 유희로서의 예술이라는 단어들은 백민석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마련한다.5) 흔히 컬러 티브이 세대라고 지칭되는 그에게 현실은 이미지로써만 부유할 뿐이다. 그에게 문화적 코드들은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현실로써 작용한다. 그는 수많은 문화적 이미지들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에게 새로운 문화적 코드들은 떨칠 수 없는 '싸이렌'의 유혹이다. 그는 이 유혹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이 유혹 속에서 유영(遊泳)하면서 또 다른 '새 것'을 찾아 나선다.

그의 새로운 문화적 기호에 대한 경사는, 이미지 세대가 겪는 자아 정체성의 혼란에서 시작하여, 난교에 가까운 섹스의 향연속에 버무려진 문화적 코드의 결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근작 『목화밭 엽기전』에서는 현대사회를 비웃기나 하듯 '엽기적 상상력'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폭력'과 '기율'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조망한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과 '기율'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한다. 그 '새로움'은 게임 케릭터들의 서사과정 침입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현대의 징후와 대면하고 있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2. 분절 가능한 신체, 분절 가능한 관계
미디어의 발달은 인간의 경험치를 무한대로 확대한다. 그 속에서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양한 정보들이 인간의 오감 속으로 침투한다. 또한 미디어는 현실을 단순히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미디어에 의한 정보의 재조립은 새로운 공간을 현실화시키며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존재를 창조한다. 현실의 재현으로써 존재하던 미디어가 현실을 재창조하는 기능을 부여받게 될 때,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흐려진다. 이러한 미디어의 세례를 받고 자란 인간들은 현실을 경험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들은 현실의 경험을 무화(無和) 시킴으로써 이미지의 세계에 동화된다. 하지만 이미지 속의 세상은 이미 조작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현실을 넘어서는 탈주의 욕망을 꿈꾼다. 그리고 그 탈주의 욕망은 극단적인 현실부정이라는 코드를 통해 진행된다.

미디어 속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질서의 무화, 그리고 분절과 분할이 가장 극명하게 작동되는 곳은 인간의 신체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신체는 정신의 담는 그릇으로 인식되어 왔다. 인간의 신체가 온 우주를 상징한다는 전통적 사고관은 인간 신체의 완결성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를 통과하면서도 여전히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가상현실 속에서 인간의 신체는 전통적인 의미로 인식되지 않는다. 수많은 엽기물들이 보여주는 인간 신체에 대한 모독과 분절은 인간의 신체가 성형가능한 하나의 조립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6) 이러한 인간의 성형가능성은 일찍이 기든스가 보여주었던 현대사회의 분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기든스는 인간의 신체는 재생산의 필연적 연결고리에서 벗어남으로써 성형 가능한 '플라스틱 섹슈얼리티'(plastic sexuality)가 되었음을 주장한다.7) 하지만 엽기적 상상력은 이러한 성형 가능성을 인간 육체의 분절 가능성으로 치환한다. 여기서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미적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고 다만 하나의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신체의 분절성은 <목화밭 엽기전>의 중심 테마이다. 『목화밭 엽기전』에서는 신체에 대한 모독과 분절 가능성이라는 ‘엽기적 상상력'이 소설속으로 응축된다. 인간의 신체는 '삽으로 짓이겨'지거나, 헤머에 의해 '뇌수와 뇌 조각'으로 분할되기도 하고, 소각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리 꺾고 저리 꺾어서, 반절 크기로' 나누어진다. '뼈는 가루 내어지고 고기는 사냥견의 먹이로 제공'되는 이 현실의 충격은 그것이 가상의 공간 속에서만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해내는 소설적 공간 속에서 버젓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미 가상의 공간에서 낯익은 풍경이 되어버린 신체에 대한 모독을 서사라는 낯익은 풍경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 충격은 새로운 개념의 낯설게 하기와 연결된다. 물론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신체의 분할은 <목화밭 엽기전>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전후 소설에 등장하는 신체의 분할 - 사지 절단, 단지- 은 한 시대의 불구성을 드러내어 주는 뚜렷한 징표로써 등장한다. 반면, 이 소설에 나타나는 신체의 분할은 그 자체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컴퓨터나 만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과도한 폭력과 그 폭력으로 인한 신체의 분할은 작품 속에서 '여자 아이들이, 바비 인형의 팔다리를 뽑고 머리카락을 태우고 엄마 립스틱으로 흉한 낙서를 해놓고선, 목을 빼서 장롱 밑에 처박길 즐기'는 것처럼 하나의 유희 대상에 불과하다.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인간의 신체라는 개념은 수많은 엽기물의 공통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엽기의 대상이 인간의 신체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는 점은 또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심한 혐오와 불신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목화밭 엽기전>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이 부정된다. 한창림은 '호암 아트홀 풍의 진부한 휴먼 드라마'로 지칭되는 것에 조롱을 보내며, 박태자는 '누군가의 평생을 망쳐버리는' 것에 흥분을 느낀다. 인간적인 가치의 부정은 자연스럽게 관계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철저한 단독자의 모습을 띈다. 이점에서 『목화밭 엽기전』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미화하는 모든 휴머니즘 담론에 대항하여 그 담론을 억압하고자 하는 일종의 트라우마적(traumatic) 아이러니를 잔인하게 작동시킨다. 그것은 '뷰티풀 피플'이 실은 야수가 군림하는 종족이라는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다.8)

한창림과 박태자는 부부이지만 제 3자를 끓여들여 '스너프 무비'를 찍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 이것은 '뷰터풀 피플' 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창림과 관계하는 '펫숍 삼촌'의 관계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서른이 넘은 결혼한 아들에게 왜 아직 아이를 만들지 않느냐고 한 번도 물어온 적이 없는' 아비를 가진 한창림과 오랜만에 만나 아버지를 '어쩌다 가스 검침원이나 신문 배달 총각을 마주쳤을 때와 같은' 눈길로 바라보는 박태자의 모습에서 관계에 대한 불신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것은 계약이다.

그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아이템을 주고받는 가상의 인물들처럼 철저한 계약으로 묶여 있다. '스너프 필름'을 제공하고 안전과 약간의 돈을 받는 한창림과 펫숍 삼촌의 관계와 약을 사고파는 박태자와 뷰티풀 피플 언니의 관계도 계약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계약의 관계는 그 계약 시점이 만료되면 자동적으로 '파산 세일' 된다는 점에서 관계의 지속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뷰티풀 피플' 언니의 남편이 '파산 세일'을 외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아내에게 '파산 세일'을 요구하며 구타를 가하는 남편의 모습은 결국 그들이 지금까지 가져왔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그가 했던 사업체의 파산처럼, 산산조각 났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본에 의한 인간성의 파산이든, 아니면 자체의 결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이룩해 놓은 수많은 관념의 파산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적 가치들이 조작되어지고 성형되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몸처럼 언제든지 분할되고 성형되어 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3. 배제의 시선과 길들이는 권력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폭력과 인간의 신체분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조롱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주체는 여전히 남성이라는 점에 있어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수컷'들의 세상이 이루어내는 '냄새나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버젓이 윤간을 자행하는 어린 수컷 윤수영, '세일'을 외치며 아내를 구타하는 '뷰터풀 피플' 언니의 남편, 거의 무장 해제에 이른 박태자를 윤간하는 '펫숍'의 직원들의 형상은 '얼굴 길이의 사분의 삼이나 차지하는 코'를 가진 '만드릴 원숭이'의 모습을 닮아 있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얼굴의 모습을 지워버리는 '만드릴 원숭이', 거리를 무시한 암컷을 잡아먹고 육식으로 식성이 변해버린 만드릴 원숭이의 비유는 여전히 자행되는 가부장적인 폭력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목화밭 엽기전>속에 등장하는 이 과도한 폭력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띄며 전개된다. 그것은 근대적 가치 체계의 이면에 숨겨진 분열의 징후속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한창림으로 대표되는 수컷의 세계는 동물성과 근대성의 분열 속에 있다. 주인공이 행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문명화되기 이전의 자연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는 또한 문명화된 세계 속에 자신만의 안식처를 가지며 살고 싶어한다. 그가 '윤수영'을 폭행하면서도, 그 결과를 대면하기 싫어하는 것이라든지, 삼촌 앞에서 심한 두려움에 뜨는 행위는 이러한 분열증의 징후를 보여준다. 이러한 주인공의 분열적인 행위를 조장하는 것은 근대적 규율체계이다. 따라서 한창림의 행동이 근대적 규율체계 안에서 행해지며, 그것을 감시하는 것 또한 근대적 규율체계임은 자명하다. 근대성의 이면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기율의 체계는 끊임없는 시선으로 사람들을 감시한다. 한창림이 벌이는 엽기적 행위는 그를 길들이는 기율 권력의 시선 속에서만 인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율 권력은 인간의 신체를 길들인다.

주인공 한창림이 펫숍으로 불리는 삼촌을 만나게 된 계기는 펫숍의 동물들을 모두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속의 동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기'위해 '새장부터 개 우리까지, 우리의 문을 따' 버린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펫숍의 삼촌에게 불려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인간을 길들이는 거대한 조직과 대면한다. 펫숍으로 불리는 조직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며,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고 겪게 하고 싶은 것만을 겪게'하며, '질문이 허락하지 않는 수수께끼'이고, '접근 불가능한 안전문'으로 채워진 곳이다. 그곳은 축어적 의미 그대로 'pet shop'이다. 그곳은 야성의 상태인 동물들을 안전하게 길들이는 곳이다. 길들여짐이 익숙한 동물들은 자연에서 살 수 없다. 자연적인 속성을 제거해 인간의 문화 안으로 그들을 포섭하는 곳이 바로 펫숍이다. 하지만 그 공간은 단순히 동물들만을 길들이는 공간은 아니다.

소설의 서두 부분에 펫숍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은 이곳이 동물만이 아닌 인간의 신체를 길들이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그곳은 '과천 정부종합청사' 맞은편에 있는 일상의 공간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실루엣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촌은 이 넓은 층 하나를 냉기와, 약간 어두운 조명과, 외부인을 겁먹게 하는 적막함으로 꽉꽉 채워놓았다. 이 낯선 분위기가 외부인의 눈을, 몇 분 동안 침침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때때로, 시멘트 마감재 질감이 그대로 방치된 기둥들과 사람들 모양을 구분하지 못하곤 했다. 당황하고, 조명이 나쁘고, 더욱이 지금의 그처럼 어두운 저녁에 방문할 경우엔 더했다. (20면)

그러한 펫숍의 공간 구조는 자연스레, 세 번째 너머의 공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네 번째 공간, 다섯 번째 공간, 여섯 번째 … 말이다. 갈수록 수수께끼의 안전문은 육중해지고, 접근 불가능해진다. 가능한 얘기였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바닥 없는 심연으로 사라지는 펫숍의, 암흑을 닮은 공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공포스런 광경이 아닐 수 없다. (123면)

펫숍은 철저히 타인들의 시선을 배제한 채, 타인들을 응시하는 곳이다. 또한 그곳의 지배자인 삼촌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는 그런 사람이며, 그 사람 앞에서 지킬 수 있는 비밀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응시만이 있고, 교환되는 시선이 없이 타자를 분할하고 배제하는 펫숍의 이미지는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화의 원리를 통해 자신의 내적토대를 마련했던 근대적 기율의 체계와 교차된다. 이러한 공간과 접촉하는 한창림은 그가 가졌던 '우리 속의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포기하고, 펫숍의 공간으로 편입한다. 이 공간에 편입함으로써 한창림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동물성의 욕구를 펫숍의 시선 아래 수행한다. 하지만 펫숍과 한창림의 관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공생하는 관계에 있지만, 이 관계는 또한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계약'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계약의 파기는 한창림의 행위가 펫숍의 시선에서 벗어날 때, 발생한다.

한창림은 회계사의 일과 오장근 형사의 일을 펫숍에 보고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둘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응시의 부재가 남기는 이 균열은 한창림의 근원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 '펫숍'이라는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만 존재하던 한창림이 그 상징계의 질서를 뚫고 자신의 욕망대로 일을 처리하는 순간 이 균열은 발생한다. 이것은 박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스너프 필름'을 찍기 위해 준비하던 중 발동한 '모성본능'은 그녀에겐 '꼬리뼈처럼 태생부터 퇴화되어 있었다시피' 한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모성본능은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본능은 상징계의 질서에 구멍을 낸다. 이 구멍은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주이상스'이다. 하지만 '주이상스'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다.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욕망으로서의 '주이상스'는 이 소설의 인물들이 단순한 괴물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 바깥의 존재' 이면서도 권력의 자장안에 포섭된 인물들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모습은 새로운 세기의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바깥의 존재인 괴물들을 포섭하는 권력, 그리고 그들과 권력과의 계약 관계가 파기될 때, 새로운 세기의 괴물들은 일반적인 사회 체제 속에서 평가되는 괴물로 환원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괴물성의 정의 자체도 내재적인 어떤 존재에 기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구성하는 사회적 체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나 사회적 권력은 '펫숍'의 구조가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에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내의 죽음으로 분노에 떠는 한창림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단연하다. 그는 단순히 아내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지, 응시의 시선이 어떻게 '부재'를 극복하고 새롭게 조직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색하지 않는다.

그와 아내는, 그래서 비극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지랄을 쳐도 자기가 태어난 이 사회에 한뼘 손톱 자국조차, 한 뼘 이빨 자국조차 낼 수 없는 무력한, 비극적인 존재였다.…… 그래도 그는, 사색할 줄 모르는 왕수컷이었기에 이러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른 채, 그저 영문 몰라하며 잔뜩 핏대만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운명의 뻔한 비밀을 깨닫지 못한 채, 모든 걸 오장근 형사의 책임으로만 돌렸다. 회계사의 탓으로, 펫숍 삼촌의 탓으로, 그에게 귀를 뜯긴 얼간이 덩치의 탓으로, 심지어는 지하 작업실의 가련한 거름의 탓으로만 돌렸다. (262면)

이미 신체에 내면화된 응시의 체계는 그 체계와 공생 관계에 있었던 한창림에게 너무도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창림 자신은 자신의 파멸이 주는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알지도 못한 채, 파멸적인 운명과의 조우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오이디푸스와 만나게 된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 절대의 권력은 그의 아비에게 내려진 신탁이었다. 이 신탁은 그의 아비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이 신탁을 알지도 못한 채, 진실을 찾기 위해 한발짝씩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 근원적인 주이상스는 '진실'이었던 셈이다. 반면 한창림은 ‘이빨 자국조차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응시에서 벗어난 욕망으로 인해 파멸을 맞이한다. 이 무지 속에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한창림의 모습은 그가 행했던 많은 엽기적 행위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4. 권태속을 유영하는 놀이의 공간
욕망과 그 욕망을 길들이기 위한 권력의 문제는 현대 문화의 한 단면을 특징짓는 기호라는 점에서 백민석 소설에만 독창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드와 푸코의 문제제기 이래, 인간의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과 사드-마조히즘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병리를 나타내는 문화적 코드의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백민석의 소설이 욕망, 폭력의 문제를 수많은 문화적 이미지들을 통해 재구성해 낸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독특함은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의 이면을 가로지르는 현대 사회의 불안은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띄며 진행된다.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진행되던 이러한 불안의 원인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바로 권태이다. 초기 소설부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선은 한없이 권태롭다. 그것은 마치 죽은 거름의 눈처럼 초점이 흐려져 있으며, 새로운 자극 아래에서만 동공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권태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느끼는 권태가 초과와 과잉의 세계에서 경험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권태는 현실의 변화 없음에서 느껴지는 심리 상태이다. 그래서 흔히 권태는 현실의 따분함과 연결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수많은 기호와 이미지들을 동원해 그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초과와 과잉마저 일상성의 영역으로 진입해 버린 현실에 있어 그것은 또 하나의 권태를 제공해 줄 따름이다.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권태로 느낀 백민석의 적자들은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이미지들 속의 이미지에게도 권태를 느낀다.

박태자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켜 놓는 T.V는 이미 <헤이 우리 소풍간다>의 어린 주인공들의 눈을 사로잡던 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T.V는 이미 우리의 일상적 경험 속으로 진입했다. 일상적 경험으로 진입했기에 그것이 없으면 불안함을 느끼게 될 정도의 친숙함으로 우리의 신체에 각인된다.

그렇다면 이 일상화된 권태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지와 현실을 무화시켜 이미지 속의 주인공처럼 현실을 재편하는 방법이다. 현실을 재편하는 방법은 이미지 속의 현실을 실제 현실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목화밭 엽기전>의 인물들은 시뮬레이션 공간의 인물들과 닮아 있다.

<목화밭 엽기전>에서 보여지고 있는 인물들의 관계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그 계약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구입하고, 타인을 제거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목화밭 엽기전>의 표면적 세계는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간의 분할이 아무 거리낌없이 행해지고, 계약을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임속의 세상은 이 소설의 표충적 층위를 이룬다. 또한 이 게임 속의 세상은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이유나 목적이 없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는 페르시안 왕자의 이야기는 이미 게임의 세계에서는 고전에 속한다. 현대의 게임에서는 승패의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지 그 이외에 다른 여지는 개입하지 않는다. 무목적적인 유희의 세상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곳은 바라봄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응시의 시선은 또한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절대화된 응시를 통해 이룩되는 사회, 그 응시의 감시를 벗어날 때, 언제든지 폐기되는 인간과 캐릭터의 신체는 이 소설의 출발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캐릭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시뮬레이션 전략처럼 분할한다. 사실 이 작품은 교묘한 공간분할을 통해 작품을 진행시키는데, 세 거점은 각기 독특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한창림의 집의 특징은 고립성이다. 이 세계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이 고립 속에서 수행되는 '스너프 필름'의 제작은 '펫숍'이라는 또 다른 공간의 응시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펫숍'과 한창림의 집은 연결 선상에 있다. 하지만 '펫숍'은 철저한 계약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계약의 파기와 더불어 그 공간의 의미는 소멸된다.

이 때, 주인공이 선택한 마지막 공간은 '서울랜드'이다. '서울랜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덩어리이다. 자본주의의 총아를 결집한 '서울랜드'의 공간은 인간의 상상을 현실화시킨 이미지의 공간이면서, 현실의 한켠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실재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한창림이 벌이는 마지막 행위는 그 자체가 게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압박하는 수많은 적들, 저항은 있지만 결국은 패배하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외치는 현대인들의 권태에 대한 변형된 욕망의 산물이다. 권태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을 현실 속에 실현하는 것, 그 일탈에의 욕망은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권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5. 결 론
<목화밭 엽기전>을 통해 백민석은 '소설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수많은 디지털을 통해 경험하는 원초적 상상력을 그는 작품의 인물들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는 교묘한 공간 설정을 통해 그 인물들을 조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키치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키치에 대한 종래의 일반적 설명은 예술적 아우라를 절도하는 위조품 · 싸구려 · 조야함 · 유사 · 사이비 등의 함의에 기초하고 있다.9) 하지만 백민석의 소설을 단순히 키치라고 하기엔 그의 작품은 너무나 진지하다. 그것은 그가 키치적 발상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적 징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의 독특한 서사전략이기도 하다.

시뮬레이션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현실의 병적 징후에 칼날을 들이대는 글쓰기 방식은 분명 그만의 독특한 소설 작법이다. 그는 이러한 서사전략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이면을 들춘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서사 전략을 통해 보여주는 현대성의 병리적 징후는 낯익은 풍경이다.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들과, 왜곡된 남성적 질서, 그 질서를 변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층위들이 이 낯설음의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비틀어진 현실은 뒤틀림의 형상을 통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목화밭 엽기전』의 세계는 우리 소설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형식과의 접속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적 상상력이 현대의 병리적 징후를 새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가 추구하는 새로움의 형식은 현대 사회의 징후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폭넓은 성찰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새로운 문화적 코드에 대한 과도한 탐식으로 인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사이에서 위태롭게 부유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소설이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상을 통한 현실의 인식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기괴함으로 점철된다면, 그 가상과 현실의 좁은 통로에서 소설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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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문학동네, 2000.
전경갑, 『욕망의 통제와 탈주』, 한길사, 1999.
이거룡 외, 『몸또는 욕망의 사다리』, 한길사, 1999.
질르 들뢰즈, 이강훈 역, 『매저키즘』, 인간사랑, 1996.
미셀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1996.
앤소니 기든스, 배은경, 황정미 역, 새물결, 1996.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역, 『시뮬라시옹』, 민음사, 1999.
김용규, 『영화관 옆 철학카페』, 이론과 실천, 2002.
김유동, 『아도르노 思想』, 문예출판사, 1992.
정과리, 「백민석에 관한 두 장의 하이퍼카드」, 문학과 사회, 1997년 가을.
신수정, 「텔레비전 키드의 유희」, 문학과 사회, 1997년 가을.
신수정, 「미궁속의 산책」, 창작과 비평, 2000년 여름.
이성욱, 「문학과 키치」, 문학과 사회, 1997년 겨울.
백지연, 「소설을 욕망하는 소설」, 동서문학, 2000년 여름.
손정수, 「종말에의 상상력이 불러낸 가상 현실의 세계」,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김동식, 「코믹하면서도 비극적인 괴물의 발생학」, 문학동네, 2000년 봄.
김예림, 「악(惡), 악한 자, 악한 세계」, 문학동네, 2000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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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텍스트로는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문학동네, 2000년 판을 사용하였다.
2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물라시옹』, 민음사, 1992, 26면.
3 G. 프로이드는 그의 후기 사상에서 새디즘은 성애(Eros)와 죽음의 본능(Thanatos)의 혼합이 자신의 외부로 향해진 것으로 파악하고, 매저키즘은 그것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E. 프롬은 새디즘의 본성을 "동물이거나, 어린아이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무한의 지배를 미치게 하려는 정열"이라고 규정하고, 매저키즘을 절대적인 무한의 지배를 받으려는 정열로 파악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이 둘은 한 인간 안에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매저키스트적으로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새디스트적으로 행하는 사도매저키즘이 된다.(김용규, 『영화관 옆 철학카페』, 이론과 실천, 2002, 174면) 특히 새디즘의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내면적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프롬은 그의 저서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새디스트들은 자기 스스로 기력도, 생명력도, 힘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결함을 메워가기 위해 다른 사람 위에서 힘을 휘둘러 자기가 자신을 구더기 같다고 느끼고 있는 상태로부터 전능한 신으로 변모하려고 한다"라고 새디즘의 본성을 간파했다.
4 김유동, 『아도르노 思想』, 문예출판사, 1992, 55면.
5 최근의 많은 평론들이 백민석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김영하의 소설과 더불어 현대의 병적 징후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백민석의 작품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들로는 다음의 평문들이 있다.
정과리, 「백민석에 관한 두 장의 하이퍼카드」, 문학과 사회, 1997년 가을.
신수정, 「텔레비전 키드의 유희」, 문학과 사회, 1997년 가을.
신수정, 「미궁속의 산책」, 창작과 비평, 2000년 여름.
이성욱, 「문학과 키치」, 문학과 사회, 1997년 겨울.
백지연, 「소설을 욕망하는 소설」, 동서문학, 2000년 여름.
손정수, 「종말에의 상상력이 불러낸 가상 현실의 세계」,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김동식, 「코믹하면서도 비극적인 괴물의 발생학」, 문학동네, 2000년 봄.
김예림, 「악(惡), 악한 자, 악한 세계」, 문학동네, 2000년 여름.
6 몇 년 전부터 '몸'에 대한 담론이 부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일상의 견고함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일상 속에서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는 여성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우리의 영혼을 길들이고 점령하기 위해 우리 몸에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규율권력과 생체권력(Bio-Macht)의 은밀하고 익명적인 위력에 대한 푸코의 폭로, 매일매일 텔레비전과 여타 광고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육체와 성의 상품화 담론들에 대한 미학적 반성, 컴퓨터와 사이버스페이스로 상징되는 정보화 사회의 초실재적(hyper-real) 가상현실이 초래하는 일상의 과잉상징화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물/자연의 진정성에 대한 본원적 지향 등등은 이러한 몸에 대한 다양한 담론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몸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로는 이거룡 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한길사, 1999, 미셀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1994 등이 있다.
7 A, Giddens, 황정미, 배은경 역,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새물결, 1995. 66면.
8 황종연, 「소설의 악몽」, <목화밭 엽기전>, 문학동네, 2000, 294면.
9 이성욱, 「문학과 키치」, 『문학과 사회』, 1998년 겨울, 1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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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사항

이용군
숭실대 강사